'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 - 198. 몽골은 러시아에 무슨 도움을 요청했나?
▶쇠퇴기에 들어서 청조
[사진 = 서태후]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청조의 쇠퇴는 뚜렷해졌다.
안팎에서 가해지는 압력으로 기로에 선 것이다.
밖에서는 열강의 침략이 이어지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한족(漢族)들의 도전이 거세지고 있었다.
당시 청나라의 실권을 잡고 있었던 인물은 숱한 일화를 남긴 서태후(西太后)였다.
[사지 = 손문]
28살에 어린 아들의 섭정 자리에 올라 갖은 술수로 황제까지 갈아치우며 무려 40년 이상 청나라의 실권을 장악했던 여걸이었다.
20세기 들어서면서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정권은 때늦은 개혁 정치를 추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3민주의(三民主義: 民族,民權,民生)를 내세운 손문(孫文)을 중심으로 한 혁명 세력이
청나라의 근본 바탕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던 시기였다.
▶몽골에 튄 관제개혁 불똥
1,906년 청나라는 생존을 건 정치와 행정 개혁으로 관제(官制)개혁을 들고 나왔다.
그러한 시도의 불똥은 몽골에도 튀었다.
몽골에 대한 근본적인 정책 변경이 시작된 것이다.
이 때 청은 몽골에게 다방면에 걸친 새 정책을 요구했다.
[사진 = 숙친왕 선기]
행정기구와 제도의 개혁, 신제도의 도입, 신식군대의 준비, 학교 등에 보건 위생사설 설치 등이 그 것이었다.
그래도 청조는 새로운 정책 시행에 대해 몽골 왕공들의 의견을 사전에 들어보는 절차를 거쳤다.
청나라의 몽골 책임자였던 숙친왕(肅親王) 선기(善耆)가 내몽골 각 지역을 돌며 의견을 물었을 때
내몽골 지역의 왕공과 영주들의 대부분은 지지를 나타냈다.
이는 이 지역의 몽골 왕공들은 이미 봉건 영주로 바뀌어 청나라의 운명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보여준다.
▶새 정책에 반발한 외몽골
하지만 외몽골의 경우는 달랐다. 청조의 새로운 정책에 대해 커다란 우려와 함께 반발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한 반발은 당시 외몽골의 지도층이었던 왕공과 티베트 불교계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무엇보다 19세기 말부터 외몽골에서 몽골 민족주의 의식이 확산되고 있는 시점에서
청나라가 이러한 카드를 내밀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사진 = 내몽골 주도 후흐호트]
이들은 만일 청나라의 새 정책이 시행된다면 몽골은 결국 중국의 한 성(省)으로 바뀌어
영원히 그 존재가 사라질 수도 있을 것으로 봤다.
특히 외몽골의 인사들은 그러한 위험한 조짐이 이미 내몽골에서는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내몽골은 이미 한인들의 대거 이주가 진행된 상황이어서 자신들의 운명과 청조의 운명이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여기서 몽골인들이 걱정한 것은 청나라 정권이 한인 관료들에게 장악되면서 그들에 의해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몽골이 청나라의 지배 아래 들어간 것은 몽골 대칸의 옥새를 지닌 청나라 황제와의 주종 관계 때문이라는 의식을 가진
몽골인들이었다. 이들에게 중국의 한인들이나 중국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한인들이 청의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 기본 관계 설정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할하의 왕공들은 새 정책의 시행을 막기 위해 청조와 여러 갈래로 교섭을 시도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새 정책 싸고 대립구도 형성
1,908년 새로 후레의 판사대신(辦事大臣)으로 임명된 산도(三多)가 몽골 측의 반발을 무시하고 새 정책의 시행을 밀고 나갔다.
이때는 청조도 그 운명이 다해가던 때였다.
오래 동안 실권을 잡고 청나라를 뒤흔들던 서태후가 이 해 사망했다.
당시의 황제였던 광서제(光緖帝)도 서태후 보다 하루 앞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사진 = 영화 ‘마지막 황제’ 포스터]
이에 따라 두 살 난 부의(溥儀)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중국 역사상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다.
[사진 = 순친왕과 부의(영화 장면)]
청나라는 부의의 부친인 순친왕이 실권을 잡고 개혁의 물꼬를 다시 보수적인 방향으로 되돌리려 하고 있었지만
몽골에 대한 새 정책의 시행은 그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북경에서 나온 청조의 관리와 몽골 현지의 반발 세력 사이에는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에 밀사 파견
[사진 = 한드도르지(복드칸 정권 초대 외무장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뾰족한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던 몽골 측은 결국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사태를 해결하기로 방향을 정했다.
그래서 1,911년 여름 몽골의 승려와 왕공들은 후레(지금의 울란바토르)에서 열린 법회를 이용해 모임을 갖고
러시아에 비밀리에 대표단을 보내기로 했다.
밀사로 나선 사람은 한드도르지와 체렌치메드 그리고 하이산이었다.
이들은 모두 투철한 반청(反淸)주의자로 몽골 독립을 추구한 사람들이었다. 한드도르지는 유력한 왕공 출신이었다.
체렌치메드는 활불로서 몽골에서 존경받는 고승이자 쳅춘담바 8세의 측근 승려였다.
또 하이산은 내몽골의 독립 운동가였다.
밀사에 내몽골 출신을 포함시킨 것은 내몽골에도 외몽골의 뜻에 공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젭춘담바 쿠툭투와 할하 49부의 수장이 연명한 밀서를 휴대하고 러시아로 떠났다.
▶붕괴 한 달 전 몽골 새 정책 철회
[사진 = 몽골 방문단 맞은 레닌]
러시아로 간 밀사들의 첫 번째 요구는 아무래도 청나라가 밀어붙이고 있는 신정책이 중지되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을 것이다.
근년에 와서 공개된 러시아의 외교문서에도 이들이 지닌 밀서에는 청조가 시행하려는 새 정책의 문제점을 열거하고
러시아의 개입을 추상적으로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러시아를 개입시켜 신정책을 중지하도록 만들자는 데는 의견이 일치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몽골의 미래를 어떻게 그려나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들을 맞은 러시아 정부는 곤혼스러워했던 것 같다. 러시아 측은 몽골의 독립은 어렵다는 입장을 보였다.
[사진 = 복드칸 겨울 궁전]
하지만 새 정책의 중지와 관련해서는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러시아는 북경주재 러시아 공사를 통해 몽골에서 새 정책을 중지해줄 것을 청나라에 요청했다.
그 결과 청조는 몽골에서 새 정책의 시행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그 때가 1,919년 9월로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기 한 달 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