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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의 소슬함 더하는, 그곳에 잠든 왕비들의 파란만장한 이야기
2024년 9월 서울학교는 <서오릉의 사연들>
초가을, 9월의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103강은 새로 개척한 답사코스로, 봉산 봉수대와 특히,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왕비들이 잠들고 있는 서오릉을 둘러보고 능침 사찰로 창건하여 왕실의 원찰로서 그 사세를 키워온 수국사를 다녀올 예정입니다. 더위를 피해 8월은 휴강하고 9월에 제103강으로 개강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가을바람 소슬한 서오릉 길. 동구릉 다음으로 규모가 큰 조선 왕실의 왕릉군으로, 오릉(五陵) 외에 이원(二園), 일묘(一墓)로 조성되어 있다.Ⓒ고양시
서울학교 제6기 12강좌는 예고한 대로 지난번 제102강으로 끝낼 예정이었으나 교장선생님이 새롭게 준비하신 <봉산에서 서오릉까지>와 <수원화성>의 두 답사코스를 추가로 더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이후 회원님들의 성원과 요청에 따라 제7기 12강좌를 서울학교의 <마지막 강의>로 진행하고 대미를 찍을 예정입니다.
서울학교 제103강은 2024년 9월 8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까지, 서울 서북향의 교외, 서오릉 매표소 옆에 모입니다.
*주소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서오릉 대표전화 02-359-0090)
*길 안내
<대중교통>
•3호선 홍제역 2번출구 중앙버스정류장, 녹번역 4번출구 은평구청 방향 : 702A, 702B, 707번 버스 이용
•3호선 원당역 3번출구, 6호선 역촌역 2번출구, 구산역 1번출구 : 707번 버스 이용
(버스정류장 명칭 : 서오릉입구)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오릉(명릉/재실/순창원/경릉/대빈묘/홍릉/창릉/익릉/수경원)-점심식사겸뒤풀이-수국사-봉산능선-봉산정상(봉산정/봉수대)-봉산전망대-편백나무치유의숲-숭실고등학교-새절역
*현지 사정에 따라 코스가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9월의 서울학교 답사도Ⓒ서울학교
*코로나19 등 감염병 관련,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항상 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9월 <서오릉의 사연들> 답사에 대해 들어봅니다.
비봉에서 뻗은 산줄기가 앵봉산, 봉산, 증산을 이루고 마침내 한강으로 숨어듭니다.
앵봉산((鶯峰山 235.7m)은 서울 은평구와 경기 고양시와 경계를 이루며 북한산 비봉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온 산줄기가 박석고개를 넘어 힘껏 솟구쳐 한 봉우리를 이루는데 이 봉우리가 앵봉산입니다. <대동여지도>에는 효경봉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서오릉의 주산입니다. 이 산줄기가 다시 남쪽으로 뻗어나가 벌고개를 지나 봉산과 증산을 일구고 난지도에 이르러 그 산줄기의 뻗음을 마감하고 한강으로 숨어듭니다. 이 산줄기에 서오릉, 수국사, 숭실고등학교, 편백나무치유의숲이 기대고 있습니다.
유교에서는 인간이 혼(魂)과 백(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봅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육신을 거느리는 백(魄)과 정신을 다스리는 혼(魂)이 사람의 몸에 함께 있다는 뜻이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혼은 하늘로 돌아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기에 유교의 제례 의식은 혼을 모시는 사당과 백을 모시는 무덤 두 곳에서 치러집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과 왕비가 죽으면 정신인 혼은 종묘(宗廟)에 배향되고 육신인 백은 왕릉(王陵)에 묻히게 됩니다.
조선의 임금은 살아있을 때는 이름이 없이 전하(殿下)로만 불리다가 죽고 나서야 두 개의 이름을 갖게 되는데, 하나는 종묘에 배향될 때 얻게 되는 혼의 이름인 묘호(廟號)이고 다른 하나는 왕릉에 안장될 때 얻게 되는 백의 이름인 능호(陵號)입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태조, 세종, 성종은 묘호이고 건원릉, 영릉, 선릉은 능호입니다.
▲서오릉 배치도Ⓒ궁능유적본부
조선 왕실의 무덤은 그 위계에 따라 능(陵), 원(園), 묘(墓)로 나뉩니다.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세자, 세자빈, 세손 그리고 왕을 낳은 후궁과 대원군 부부의 무덤을 원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비의 아들과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후궁인 빈, 귀인, 숙의 등의 무덤을 묘라고 부릅니다.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은 묘호를 받지 못해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는 복권이 되지 않아서 능이라 부르지 않고 묘라고 부릅니다.
조선은 1392년 건국한 이래 1910년 일본에 강제 합병될 때까지 519년 동안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왕비 그리고 폐위된 두 왕의 묘를 합하여 44기의 무덤이 모두 보존되어 있으며 이들 왕릉은 대부분 서울 근교에 있는데, 그 연유는 조선 시대 왕릉은 한양도성에서 10리 거리인 성저십리(城底十里)에서 100리 거리인 교(郊) 사이에 마련되도록 <국조오례의>에 명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규정에 예외인 경우로는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에 죽은 본처인 신의왕후의 능인 제릉(齊陵)과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을 겪고 개경으로 환도한 정종의 능인 후릉(厚陵)이 개성에, 유배지에서 죽은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이 영월에, 세종과 소헌왕후의 합장릉(合葬陵)인 영릉(英陵)과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이 여주에 있습니다. 영릉(英陵)은 원래 대모산 기슭에 있던 것을 예종 때 무덤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여주로 옮겼습니다.
조선의 왕릉은 그 형태에 따라 6종류로 나누어집니다.
단릉(單陵)은 왕이나 왕비가 홀로 모셔져 있는 능이고, 합장릉(合葬陵)은 왕과 왕비 두 분 또는 왕과 왕비 그리고 계비의 세 분이 같은 봉분에 모셔진 능이며, 쌍릉(雙陵)은 왕과 왕비의 재궁(梓宮)과 봉분이 따로 마련되어 외형으로 보아 좌우로 나란히 붙어 조성된 능으로 우양좌음(右陽左陰)의 원칙에 따라, 오른편이 왕이고 왼편이 왕비 봉분입니다.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은 혈이 좁아 좌우로 벌려 놓을 수 없어 위아래로 조성한 능으로 상왕하비(上王下妃)의 원칙에 따라 위쪽이 왕, 아래쪽이 왕비 봉분이며,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은 넓은 영역에 하나의 정자각 뒤로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 봉분을 배치하고, 삼연릉(三連陵)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 그리고 계비 봉분을 나란히 조성하고 곡장을 두른 형태로 죽은 사람의 위계는 전통적으로 서쪽을 상으로 하는 서상제(西上制)를 채택하게 되는데 종묘와 왕릉에 모두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
왕릉에는 다양한 시설물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왕릉에 조성된 시설물들을 입구에서부터 살펴보면 왕을 비롯한 모든 헌관이 말에서 내리라는 표시인 하마비(下馬碑)가 제일 먼저 나타나는데 왕은 이곳부터 말에서 내려서 가마[輦]로 갈아탑니다.
다음으로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인 재실(齋室)은 향과 축문을 두는 향대청(香臺廳),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제사음식을 마련하는 전사청(典祀廳), 제관이 머무는 재실(齋室)로 이루어져 있으며 재실은 평소에는 왕릉을 지키는 능참봉이 거주합니다.
금천교(禁川橋)는 능 입구에 놓여 있는 다리로서 속세에서 신성한 공간으로 건너는 상징물로서 궁궐에도 입구에 금천교가 놓여 있습니다.
홍살문(紅箭門)은 제향 공간의 입구에 세워진 문으로 화살 모양의 붉은 문이라는 뜻으로 죽은 사람의 영역인 사당과 묘역 입구에 설치합니다.
홍살문에 들어서면 오른쪽 옆에 전(塼)돌로 조성한 한 평 정도의 정방형 판석을 배위(拜位) 또는 판위(版位)라 부르며 임금이 선왕에게 제향을 모시기 위해 왔다고 알리는 알릉례(謁陵禮)와 제향을 마치고 돌아간다고 알리는 사릉례(辭陵禮)를 올리는 곳으로 어배석, 망릉위라고도 부릅니다.
참도(參道)는 왼쪽이 높고 오른쪽이 낮은 두 개의 길인데 왼쪽 길은 왕릉에 묻힌 왕과 왕비가 다니는 신도(神道)이고 오른쪽 길은 현재의 왕이 다니는 어도(御道)로서 이 길은 정자각까지 박석으로 깔려 있습니다.
정자각(丁字閣)은 제향 공간의 중심 건물로 모양이 정(丁)이라는 글자와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제향을 모시는 정전(正殿)과 수행한 헌관들이 배열하는 배위청(拜位廳)으로 나뉩니다.
수복방(守僕房)은 정자각의 동쪽에 위치하고 능을 지키는 수복이 머무는 공간이며 수라간(水刺間)은 정자각의 서쪽, 수복방 건너편에 있으며 제향 음식을 준비하는 부엌 역할을 하는 곳이며 근처에 제례 때 사용할 물을 긷는 제정(祭井)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자각 오른편에는 비각(碑閣)이 서 있는데 비문의 내용에 따라 묘표, 묘갈, 신도비로 구분합니다.
묘표(墓表)는 왕실과 사대부를 비롯하여 중인이나 서민들까지도 세울 수 있으며 양식은 비부(碑趺)를 귀부(龜趺)가 아닌 방부(方趺)를 사용하였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묘갈(墓碣)은 사대부가 주로 세웠지만, 공주와 후궁 등 왕실에서도 사용하였고, 서민층에서도 세운 기록이 보이며 양식은 묘표와 거의 같다고 보면 됩니다.
신도비(神道碑)는 태조의 건원릉 신도비, 태종의 헌릉 신도비, 세종의 영릉 신도비 등, 초기 왕릉에만 있습니다. 이후 문종 때부터 국왕의 사적은 실록에 기록된다는 주장에 따라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으며 반면에 사대부들은 신도비를 세웠는데 실제 관직이나 사후에 추증된 관직으로 2품 이상인 경우에만 세울 수 있으며 양식은 귀부와 이수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고 이수에는 제액도 새겼습니다.
비문의 내용이 망자의 일대기만 간략하게 기록된 것을 서(序)라 하고, 살아 있을 때의 업적을 칭송한 장황한 기록을 명(銘)이라 하는데 묘표는 서만 있고 묘갈과 신도비는 서와 명이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도비를 묘의 동남쪽에 세우게 된 것은 풍수지리상 묘의 동남쪽을 귀신이 다니는 길, 즉 신도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정자각의 북서쪽 뒤편에는 축문을 태우는 소전대(燒錢臺)와 폐백을 묻는 정방형의 석물로 둘러쳐진 예감(瘞坎)이 있는데 태조의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에만 두 가지가 모두 있고 세종 때부터는 예감 하나만 설치되었습니다.
예감과 마주 보는 동쪽에는 장방형의 판석이 놓여 있는데 능침이 위치한 산신에게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산신석(山神石)이라고도 하고, 달리 환인, 환웅, 환검의 삼신에게 제물을 올리는 곳이라는 뜻의 삼신석(三神石)이라고도 합니다.
능침(陵寢)은 정자각 뒤에 있는 비탈진 사초지에서 봉분까지의 언덕을 말하고 능침을 둘러친 담장을 곡장(曲墻)이라고 합니다.
능침 주위에는 여러 종류의 석물들이 나름의 의미를 갖고 배치되어 있습니다. 능침 앞은 삼 계단으로 나뉘어 있는데 아래로부터 하계, 중계, 상계라 하고 하계에는 한 쌍의 무인석(武人石)과 석마(石馬)가, 중계에는 한 쌍의 문인석(文人石)과 석마가 임금의 명만 떨어지면 어디라도 달려갈 듯이 서 있고, 중간에는 능침에 모셔진 분의 장생 발복을 기원하는 뜻으로 장명등(長明燈)이 서 있습니다. 상계에는 양옆에 육신에서 분리된 혼이 백을 찾아올 때 봉분을 잘 찾을 수 있도록 표지 구실을 하는 망주석(望柱石)이 서 있고 중간에는 혼유석(魂遊石)이 놓여 있으며 혼유석은 북 모양의 고석(鼓石)이 받쳐 주고 있습니다. 또한 봉분 주위에는 두 쌍씩의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이 능침을 수호하기 위해 봉분 밖을 향해 서 있습니다.
석물도 시대에 따라 변하여 상계, 중계, 하계로 이루어진 삼 계단은 영조 때부터는 중계와 하계가 합쳐져 상계, 하계의 2단으로 구성되어 하계에는 문인석, 무인석, 석마가 함께 배치되는 양식으로 변했으며, 초기에는 축문을 태우는 소전대와 폐백을 묻는 예감이 함께 있었으나 세종 때부터 예감 하나만 설치하였고 신도비는 태조, 태종, 세종의 것만 남아 있고, 문종 때부터 신도비 대신에 묘표로 바뀌게 됩니다.
서오릉에는 오릉(五陵), 이원(二園), 일묘(一墓)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서오릉(西五陵)은 동구릉 다음으로 규모가 큰 조선 왕실의 왕릉군으로, 오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457년(세조 3)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의 묘를 처음으로 만든 이후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면서 경릉이라고 개명하고, 덕종비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가 훗날 경릉에 같이 안장됩니다. 이후 1470년(성종 1)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창릉, 1681년(숙종 7) 19대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의 익릉, 1721년(경종 1)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명릉, 1757년(영조 33) 21대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의 홍릉이 차례로 조영되었습니다.
오릉 이외에도 조선왕조 최초의 ‘원(園)’인 명종의 맏아들 순회세자와 공회 빈 윤씨의 순창원(順昌園), 21대 영조의 후궁으로 사도세자(장조)의 어머니인 영빈이씨의 수경원(綏慶園)이 옛 연희궁 자리(현재의 연세대학교)에서 1970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졌고 19대 숙종의 후궁이자 20대 경종의 어머니인 희빈 장씨의 대빈묘(大嬪墓)가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에서 1969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졌습니다.
초가을의 소슬함 더하는, 그곳에 잠든 왕비들의 파란만장한 이야기
2024년 9월 서울학교는 <서오릉의 사연들>
초가을, 9월의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103강은 새로 개척한 답사코스로, 봉산 봉수대와 특히,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왕비들이 잠들고 있는 서오릉을 둘러보고 능침 사찰로 창건하여 왕실의 원찰로서 그 사세를 키워온 수국사를 다녀올 예정입니다. 더위를 피해 8월은 휴강하고 9월에 제103강으로 개강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가을바람 소슬한 서오릉 길. 동구릉 다음으로 규모가 큰 조선 왕실의 왕릉군으로, 오릉(五陵) 외에 이원(二園), 일묘(一墓)로 조성되어 있다.Ⓒ고양시
서울학교 제6기 12강좌는 예고한 대로 지난번 제102강으로 끝낼 예정이었으나 교장선생님이 새롭게 준비하신 <봉산에서 서오릉까지>와 <수원화성>의 두 답사코스를 추가로 더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이후 회원님들의 성원과 요청에 따라 제7기 12강좌를 서울학교의 <마지막 강의>로 진행하고 대미를 찍을 예정입니다.
서울학교 제103강은 2024년 9월 8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까지, 서울 서북향의 교외, 서오릉 매표소 옆에 모입니다.
*주소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서오릉 대표전화 02-359-0090)
*길 안내
<대중교통>
•3호선 홍제역 2번출구 중앙버스정류장, 녹번역 4번출구 은평구청 방향 : 702A, 702B, 707번 버스 이용
•3호선 원당역 3번출구, 6호선 역촌역 2번출구, 구산역 1번출구 : 707번 버스 이용
(버스정류장 명칭 : 서오릉입구)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오릉(명릉/재실/순창원/경릉/대빈묘/홍릉/창릉/익릉/수경원)-점심식사겸뒤풀이-수국사-봉산능선-봉산정상(봉산정/봉수대)-봉산전망대-편백나무치유의숲-숭실고등학교-새절역
*현지 사정에 따라 코스가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9월의 서울학교 답사도Ⓒ서울학교
*코로나19 등 감염병 관련,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항상 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9월 <서오릉의 사연들> 답사에 대해 들어봅니다.
비봉에서 뻗은 산줄기가 앵봉산, 봉산, 증산을 이루고 마침내 한강으로 숨어듭니다.
앵봉산((鶯峰山 235.7m)은 서울 은평구와 경기 고양시와 경계를 이루며 북한산 비봉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온 산줄기가 박석고개를 넘어 힘껏 솟구쳐 한 봉우리를 이루는데 이 봉우리가 앵봉산입니다. <대동여지도>에는 효경봉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서오릉의 주산입니다. 이 산줄기가 다시 남쪽으로 뻗어나가 벌고개를 지나 봉산과 증산을 일구고 난지도에 이르러 그 산줄기의 뻗음을 마감하고 한강으로 숨어듭니다. 이 산줄기에 서오릉, 수국사, 숭실고등학교, 편백나무치유의숲이 기대고 있습니다.
유교에서는 인간이 혼(魂)과 백(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봅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육신을 거느리는 백(魄)과 정신을 다스리는 혼(魂)이 사람의 몸에 함께 있다는 뜻이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혼은 하늘로 돌아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기에 유교의 제례 의식은 혼을 모시는 사당과 백을 모시는 무덤 두 곳에서 치러집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과 왕비가 죽으면 정신인 혼은 종묘(宗廟)에 배향되고 육신인 백은 왕릉(王陵)에 묻히게 됩니다.
조선의 임금은 살아있을 때는 이름이 없이 전하(殿下)로만 불리다가 죽고 나서야 두 개의 이름을 갖게 되는데, 하나는 종묘에 배향될 때 얻게 되는 혼의 이름인 묘호(廟號)이고 다른 하나는 왕릉에 안장될 때 얻게 되는 백의 이름인 능호(陵號)입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태조, 세종, 성종은 묘호이고 건원릉, 영릉, 선릉은 능호입니다.
▲서오릉 배치도Ⓒ궁능유적본부
조선 왕실의 무덤은 그 위계에 따라 능(陵), 원(園), 묘(墓)로 나뉩니다.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세자, 세자빈, 세손 그리고 왕을 낳은 후궁과 대원군 부부의 무덤을 원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비의 아들과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후궁인 빈, 귀인, 숙의 등의 무덤을 묘라고 부릅니다.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은 묘호를 받지 못해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는 복권이 되지 않아서 능이라 부르지 않고 묘라고 부릅니다.
조선은 1392년 건국한 이래 1910년 일본에 강제 합병될 때까지 519년 동안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왕비 그리고 폐위된 두 왕의 묘를 합하여 44기의 무덤이 모두 보존되어 있으며 이들 왕릉은 대부분 서울 근교에 있는데, 그 연유는 조선 시대 왕릉은 한양도성에서 10리 거리인 성저십리(城底十里)에서 100리 거리인 교(郊) 사이에 마련되도록 <국조오례의>에 명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규정에 예외인 경우로는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에 죽은 본처인 신의왕후의 능인 제릉(齊陵)과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을 겪고 개경으로 환도한 정종의 능인 후릉(厚陵)이 개성에, 유배지에서 죽은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이 영월에, 세종과 소헌왕후의 합장릉(合葬陵)인 영릉(英陵)과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이 여주에 있습니다. 영릉(英陵)은 원래 대모산 기슭에 있던 것을 예종 때 무덤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여주로 옮겼습니다.
조선의 왕릉은 그 형태에 따라 6종류로 나누어집니다.
단릉(單陵)은 왕이나 왕비가 홀로 모셔져 있는 능이고, 합장릉(合葬陵)은 왕과 왕비 두 분 또는 왕과 왕비 그리고 계비의 세 분이 같은 봉분에 모셔진 능이며, 쌍릉(雙陵)은 왕과 왕비의 재궁(梓宮)과 봉분이 따로 마련되어 외형으로 보아 좌우로 나란히 붙어 조성된 능으로 우양좌음(右陽左陰)의 원칙에 따라, 오른편이 왕이고 왼편이 왕비 봉분입니다.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은 혈이 좁아 좌우로 벌려 놓을 수 없어 위아래로 조성한 능으로 상왕하비(上王下妃)의 원칙에 따라 위쪽이 왕, 아래쪽이 왕비 봉분이며,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은 넓은 영역에 하나의 정자각 뒤로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 봉분을 배치하고, 삼연릉(三連陵)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 그리고 계비 봉분을 나란히 조성하고 곡장을 두른 형태로 죽은 사람의 위계는 전통적으로 서쪽을 상으로 하는 서상제(西上制)를 채택하게 되는데 종묘와 왕릉에 모두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
왕릉에는 다양한 시설물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왕릉에 조성된 시설물들을 입구에서부터 살펴보면 왕을 비롯한 모든 헌관이 말에서 내리라는 표시인 하마비(下馬碑)가 제일 먼저 나타나는데 왕은 이곳부터 말에서 내려서 가마[輦]로 갈아탑니다.
다음으로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인 재실(齋室)은 향과 축문을 두는 향대청(香臺廳),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제사음식을 마련하는 전사청(典祀廳), 제관이 머무는 재실(齋室)로 이루어져 있으며 재실은 평소에는 왕릉을 지키는 능참봉이 거주합니다.
금천교(禁川橋)는 능 입구에 놓여 있는 다리로서 속세에서 신성한 공간으로 건너는 상징물로서 궁궐에도 입구에 금천교가 놓여 있습니다.
홍살문(紅箭門)은 제향 공간의 입구에 세워진 문으로 화살 모양의 붉은 문이라는 뜻으로 죽은 사람의 영역인 사당과 묘역 입구에 설치합니다.
홍살문에 들어서면 오른쪽 옆에 전(塼)돌로 조성한 한 평 정도의 정방형 판석을 배위(拜位) 또는 판위(版位)라 부르며 임금이 선왕에게 제향을 모시기 위해 왔다고 알리는 알릉례(謁陵禮)와 제향을 마치고 돌아간다고 알리는 사릉례(辭陵禮)를 올리는 곳으로 어배석, 망릉위라고도 부릅니다.
참도(參道)는 왼쪽이 높고 오른쪽이 낮은 두 개의 길인데 왼쪽 길은 왕릉에 묻힌 왕과 왕비가 다니는 신도(神道)이고 오른쪽 길은 현재의 왕이 다니는 어도(御道)로서 이 길은 정자각까지 박석으로 깔려 있습니다.
정자각(丁字閣)은 제향 공간의 중심 건물로 모양이 정(丁)이라는 글자와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제향을 모시는 정전(正殿)과 수행한 헌관들이 배열하는 배위청(拜位廳)으로 나뉩니다.
수복방(守僕房)은 정자각의 동쪽에 위치하고 능을 지키는 수복이 머무는 공간이며 수라간(水刺間)은 정자각의 서쪽, 수복방 건너편에 있으며 제향 음식을 준비하는 부엌 역할을 하는 곳이며 근처에 제례 때 사용할 물을 긷는 제정(祭井)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자각 오른편에는 비각(碑閣)이 서 있는데 비문의 내용에 따라 묘표, 묘갈, 신도비로 구분합니다.
묘표(墓表)는 왕실과 사대부를 비롯하여 중인이나 서민들까지도 세울 수 있으며 양식은 비부(碑趺)를 귀부(龜趺)가 아닌 방부(方趺)를 사용하였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묘갈(墓碣)은 사대부가 주로 세웠지만, 공주와 후궁 등 왕실에서도 사용하였고, 서민층에서도 세운 기록이 보이며 양식은 묘표와 거의 같다고 보면 됩니다.
신도비(神道碑)는 태조의 건원릉 신도비, 태종의 헌릉 신도비, 세종의 영릉 신도비 등, 초기 왕릉에만 있습니다. 이후 문종 때부터 국왕의 사적은 실록에 기록된다는 주장에 따라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으며 반면에 사대부들은 신도비를 세웠는데 실제 관직이나 사후에 추증된 관직으로 2품 이상인 경우에만 세울 수 있으며 양식은 귀부와 이수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고 이수에는 제액도 새겼습니다.
비문의 내용이 망자의 일대기만 간략하게 기록된 것을 서(序)라 하고, 살아 있을 때의 업적을 칭송한 장황한 기록을 명(銘)이라 하는데 묘표는 서만 있고 묘갈과 신도비는 서와 명이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도비를 묘의 동남쪽에 세우게 된 것은 풍수지리상 묘의 동남쪽을 귀신이 다니는 길, 즉 신도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정자각의 북서쪽 뒤편에는 축문을 태우는 소전대(燒錢臺)와 폐백을 묻는 정방형의 석물로 둘러쳐진 예감(瘞坎)이 있는데 태조의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에만 두 가지가 모두 있고 세종 때부터는 예감 하나만 설치되었습니다.
예감과 마주 보는 동쪽에는 장방형의 판석이 놓여 있는데 능침이 위치한 산신에게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산신석(山神石)이라고도 하고, 달리 환인, 환웅, 환검의 삼신에게 제물을 올리는 곳이라는 뜻의 삼신석(三神石)이라고도 합니다.
능침(陵寢)은 정자각 뒤에 있는 비탈진 사초지에서 봉분까지의 언덕을 말하고 능침을 둘러친 담장을 곡장(曲墻)이라고 합니다.
능침 주위에는 여러 종류의 석물들이 나름의 의미를 갖고 배치되어 있습니다. 능침 앞은 삼 계단으로 나뉘어 있는데 아래로부터 하계, 중계, 상계라 하고 하계에는 한 쌍의 무인석(武人石)과 석마(石馬)가, 중계에는 한 쌍의 문인석(文人石)과 석마가 임금의 명만 떨어지면 어디라도 달려갈 듯이 서 있고, 중간에는 능침에 모셔진 분의 장생 발복을 기원하는 뜻으로 장명등(長明燈)이 서 있습니다. 상계에는 양옆에 육신에서 분리된 혼이 백을 찾아올 때 봉분을 잘 찾을 수 있도록 표지 구실을 하는 망주석(望柱石)이 서 있고 중간에는 혼유석(魂遊石)이 놓여 있으며 혼유석은 북 모양의 고석(鼓石)이 받쳐 주고 있습니다. 또한 봉분 주위에는 두 쌍씩의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이 능침을 수호하기 위해 봉분 밖을 향해 서 있습니다.
석물도 시대에 따라 변하여 상계, 중계, 하계로 이루어진 삼 계단은 영조 때부터는 중계와 하계가 합쳐져 상계, 하계의 2단으로 구성되어 하계에는 문인석, 무인석, 석마가 함께 배치되는 양식으로 변했으며, 초기에는 축문을 태우는 소전대와 폐백을 묻는 예감이 함께 있었으나 세종 때부터 예감 하나만 설치하였고 신도비는 태조, 태종, 세종의 것만 남아 있고, 문종 때부터 신도비 대신에 묘표로 바뀌게 됩니다.
서오릉에는 오릉(五陵), 이원(二園), 일묘(一墓)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서오릉(西五陵)은 동구릉 다음으로 규모가 큰 조선 왕실의 왕릉군으로, 오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457년(세조 3)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의 묘를 처음으로 만든 이후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면서 경릉이라고 개명하고, 덕종비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가 훗날 경릉에 같이 안장됩니다. 이후 1470년(성종 1)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창릉, 1681년(숙종 7) 19대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의 익릉, 1721년(경종 1)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명릉, 1757년(영조 33) 21대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의 홍릉이 차례로 조영되었습니다.
오릉 이외에도 조선왕조 최초의 ‘원(園)’인 명종의 맏아들 순회세자와 공회 빈 윤씨의 순창원(順昌園), 21대 영조의 후궁으로 사도세자(장조)의 어머니인 영빈이씨의 수경원(綏慶園)이 옛 연희궁 자리(현재의 연세대학교)에서 1970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졌고 19대 숙종의 후궁이자 20대 경종의 어머니인 희빈 장씨의 대빈묘(大嬪墓)가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에서 1969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졌습니다.
초가을의 소슬함 더하는, 그곳에 잠든 왕비들의 파란만장한 이야기
2024년 9월 서울학교는 <서오릉의 사연들>
초가을, 9월의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103강은 새로 개척한 답사코스로, 봉산 봉수대와 특히,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왕비들이 잠들고 있는 서오릉을 둘러보고 능침 사찰로 창건하여 왕실의 원찰로서 그 사세를 키워온 수국사를 다녀올 예정입니다. 더위를 피해 8월은 휴강하고 9월에 제103강으로 개강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가을바람 소슬한 서오릉 길. 동구릉 다음으로 규모가 큰 조선 왕실의 왕릉군으로, 오릉(五陵) 외에 이원(二園), 일묘(一墓)로 조성되어 있다.Ⓒ고양시
서울학교 제6기 12강좌는 예고한 대로 지난번 제102강으로 끝낼 예정이었으나 교장선생님이 새롭게 준비하신 <봉산에서 서오릉까지>와 <수원화성>의 두 답사코스를 추가로 더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이후 회원님들의 성원과 요청에 따라 제7기 12강좌를 서울학교의 <마지막 강의>로 진행하고 대미를 찍을 예정입니다.
서울학교 제103강은 2024년 9월 8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까지, 서울 서북향의 교외, 서오릉 매표소 옆에 모입니다.
*주소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서오릉 대표전화 02-359-0090)
*길 안내
<대중교통>
•3호선 홍제역 2번출구 중앙버스정류장, 녹번역 4번출구 은평구청 방향 : 702A, 702B, 707번 버스 이용
•3호선 원당역 3번출구, 6호선 역촌역 2번출구, 구산역 1번출구 : 707번 버스 이용
(버스정류장 명칭 : 서오릉입구)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오릉(명릉/재실/순창원/경릉/대빈묘/홍릉/창릉/익릉/수경원)-점심식사겸뒤풀이-수국사-봉산능선-봉산정상(봉산정/봉수대)-봉산전망대-편백나무치유의숲-숭실고등학교-새절역
*현지 사정에 따라 코스가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9월의 서울학교 답사도Ⓒ서울학교
*코로나19 등 감염병 관련,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항상 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9월 <서오릉의 사연들> 답사에 대해 들어봅니다.
비봉에서 뻗은 산줄기가 앵봉산, 봉산, 증산을 이루고 마침내 한강으로 숨어듭니다.
앵봉산((鶯峰山 235.7m)은 서울 은평구와 경기 고양시와 경계를 이루며 북한산 비봉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온 산줄기가 박석고개를 넘어 힘껏 솟구쳐 한 봉우리를 이루는데 이 봉우리가 앵봉산입니다. <대동여지도>에는 효경봉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서오릉의 주산입니다. 이 산줄기가 다시 남쪽으로 뻗어나가 벌고개를 지나 봉산과 증산을 일구고 난지도에 이르러 그 산줄기의 뻗음을 마감하고 한강으로 숨어듭니다. 이 산줄기에 서오릉, 수국사, 숭실고등학교, 편백나무치유의숲이 기대고 있습니다.
유교에서는 인간이 혼(魂)과 백(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봅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육신을 거느리는 백(魄)과 정신을 다스리는 혼(魂)이 사람의 몸에 함께 있다는 뜻이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혼은 하늘로 돌아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기에 유교의 제례 의식은 혼을 모시는 사당과 백을 모시는 무덤 두 곳에서 치러집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과 왕비가 죽으면 정신인 혼은 종묘(宗廟)에 배향되고 육신인 백은 왕릉(王陵)에 묻히게 됩니다.
조선의 임금은 살아있을 때는 이름이 없이 전하(殿下)로만 불리다가 죽고 나서야 두 개의 이름을 갖게 되는데, 하나는 종묘에 배향될 때 얻게 되는 혼의 이름인 묘호(廟號)이고 다른 하나는 왕릉에 안장될 때 얻게 되는 백의 이름인 능호(陵號)입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태조, 세종, 성종은 묘호이고 건원릉, 영릉, 선릉은 능호입니다.
▲서오릉 배치도Ⓒ궁능유적본부
조선 왕실의 무덤은 그 위계에 따라 능(陵), 원(園), 묘(墓)로 나뉩니다.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세자, 세자빈, 세손 그리고 왕을 낳은 후궁과 대원군 부부의 무덤을 원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비의 아들과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후궁인 빈, 귀인, 숙의 등의 무덤을 묘라고 부릅니다.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은 묘호를 받지 못해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는 복권이 되지 않아서 능이라 부르지 않고 묘라고 부릅니다.
조선은 1392년 건국한 이래 1910년 일본에 강제 합병될 때까지 519년 동안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왕비 그리고 폐위된 두 왕의 묘를 합하여 44기의 무덤이 모두 보존되어 있으며 이들 왕릉은 대부분 서울 근교에 있는데, 그 연유는 조선 시대 왕릉은 한양도성에서 10리 거리인 성저십리(城底十里)에서 100리 거리인 교(郊) 사이에 마련되도록 <국조오례의>에 명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규정에 예외인 경우로는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에 죽은 본처인 신의왕후의 능인 제릉(齊陵)과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을 겪고 개경으로 환도한 정종의 능인 후릉(厚陵)이 개성에, 유배지에서 죽은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이 영월에, 세종과 소헌왕후의 합장릉(合葬陵)인 영릉(英陵)과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이 여주에 있습니다. 영릉(英陵)은 원래 대모산 기슭에 있던 것을 예종 때 무덤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여주로 옮겼습니다.
조선의 왕릉은 그 형태에 따라 6종류로 나누어집니다.
단릉(單陵)은 왕이나 왕비가 홀로 모셔져 있는 능이고, 합장릉(合葬陵)은 왕과 왕비 두 분 또는 왕과 왕비 그리고 계비의 세 분이 같은 봉분에 모셔진 능이며, 쌍릉(雙陵)은 왕과 왕비의 재궁(梓宮)과 봉분이 따로 마련되어 외형으로 보아 좌우로 나란히 붙어 조성된 능으로 우양좌음(右陽左陰)의 원칙에 따라, 오른편이 왕이고 왼편이 왕비 봉분입니다.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은 혈이 좁아 좌우로 벌려 놓을 수 없어 위아래로 조성한 능으로 상왕하비(上王下妃)의 원칙에 따라 위쪽이 왕, 아래쪽이 왕비 봉분이며,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은 넓은 영역에 하나의 정자각 뒤로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 봉분을 배치하고, 삼연릉(三連陵)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 그리고 계비 봉분을 나란히 조성하고 곡장을 두른 형태로 죽은 사람의 위계는 전통적으로 서쪽을 상으로 하는 서상제(西上制)를 채택하게 되는데 종묘와 왕릉에 모두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
왕릉에는 다양한 시설물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왕릉에 조성된 시설물들을 입구에서부터 살펴보면 왕을 비롯한 모든 헌관이 말에서 내리라는 표시인 하마비(下馬碑)가 제일 먼저 나타나는데 왕은 이곳부터 말에서 내려서 가마[輦]로 갈아탑니다.
다음으로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인 재실(齋室)은 향과 축문을 두는 향대청(香臺廳),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제사음식을 마련하는 전사청(典祀廳), 제관이 머무는 재실(齋室)로 이루어져 있으며 재실은 평소에는 왕릉을 지키는 능참봉이 거주합니다.
금천교(禁川橋)는 능 입구에 놓여 있는 다리로서 속세에서 신성한 공간으로 건너는 상징물로서 궁궐에도 입구에 금천교가 놓여 있습니다.
홍살문(紅箭門)은 제향 공간의 입구에 세워진 문으로 화살 모양의 붉은 문이라는 뜻으로 죽은 사람의 영역인 사당과 묘역 입구에 설치합니다.
홍살문에 들어서면 오른쪽 옆에 전(塼)돌로 조성한 한 평 정도의 정방형 판석을 배위(拜位) 또는 판위(版位)라 부르며 임금이 선왕에게 제향을 모시기 위해 왔다고 알리는 알릉례(謁陵禮)와 제향을 마치고 돌아간다고 알리는 사릉례(辭陵禮)를 올리는 곳으로 어배석, 망릉위라고도 부릅니다.
참도(參道)는 왼쪽이 높고 오른쪽이 낮은 두 개의 길인데 왼쪽 길은 왕릉에 묻힌 왕과 왕비가 다니는 신도(神道)이고 오른쪽 길은 현재의 왕이 다니는 어도(御道)로서 이 길은 정자각까지 박석으로 깔려 있습니다.
정자각(丁字閣)은 제향 공간의 중심 건물로 모양이 정(丁)이라는 글자와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제향을 모시는 정전(正殿)과 수행한 헌관들이 배열하는 배위청(拜位廳)으로 나뉩니다.
수복방(守僕房)은 정자각의 동쪽에 위치하고 능을 지키는 수복이 머무는 공간이며 수라간(水刺間)은 정자각의 서쪽, 수복방 건너편에 있으며 제향 음식을 준비하는 부엌 역할을 하는 곳이며 근처에 제례 때 사용할 물을 긷는 제정(祭井)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자각 오른편에는 비각(碑閣)이 서 있는데 비문의 내용에 따라 묘표, 묘갈, 신도비로 구분합니다.
묘표(墓表)는 왕실과 사대부를 비롯하여 중인이나 서민들까지도 세울 수 있으며 양식은 비부(碑趺)를 귀부(龜趺)가 아닌 방부(方趺)를 사용하였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묘갈(墓碣)은 사대부가 주로 세웠지만, 공주와 후궁 등 왕실에서도 사용하였고, 서민층에서도 세운 기록이 보이며 양식은 묘표와 거의 같다고 보면 됩니다.
신도비(神道碑)는 태조의 건원릉 신도비, 태종의 헌릉 신도비, 세종의 영릉 신도비 등, 초기 왕릉에만 있습니다. 이후 문종 때부터 국왕의 사적은 실록에 기록된다는 주장에 따라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으며 반면에 사대부들은 신도비를 세웠는데 실제 관직이나 사후에 추증된 관직으로 2품 이상인 경우에만 세울 수 있으며 양식은 귀부와 이수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고 이수에는 제액도 새겼습니다.
비문의 내용이 망자의 일대기만 간략하게 기록된 것을 서(序)라 하고, 살아 있을 때의 업적을 칭송한 장황한 기록을 명(銘)이라 하는데 묘표는 서만 있고 묘갈과 신도비는 서와 명이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도비를 묘의 동남쪽에 세우게 된 것은 풍수지리상 묘의 동남쪽을 귀신이 다니는 길, 즉 신도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정자각의 북서쪽 뒤편에는 축문을 태우는 소전대(燒錢臺)와 폐백을 묻는 정방형의 석물로 둘러쳐진 예감(瘞坎)이 있는데 태조의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에만 두 가지가 모두 있고 세종 때부터는 예감 하나만 설치되었습니다.
예감과 마주 보는 동쪽에는 장방형의 판석이 놓여 있는데 능침이 위치한 산신에게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산신석(山神石)이라고도 하고, 달리 환인, 환웅, 환검의 삼신에게 제물을 올리는 곳이라는 뜻의 삼신석(三神石)이라고도 합니다.
능침(陵寢)은 정자각 뒤에 있는 비탈진 사초지에서 봉분까지의 언덕을 말하고 능침을 둘러친 담장을 곡장(曲墻)이라고 합니다.
능침 주위에는 여러 종류의 석물들이 나름의 의미를 갖고 배치되어 있습니다. 능침 앞은 삼 계단으로 나뉘어 있는데 아래로부터 하계, 중계, 상계라 하고 하계에는 한 쌍의 무인석(武人石)과 석마(石馬)가, 중계에는 한 쌍의 문인석(文人石)과 석마가 임금의 명만 떨어지면 어디라도 달려갈 듯이 서 있고, 중간에는 능침에 모셔진 분의 장생 발복을 기원하는 뜻으로 장명등(長明燈)이 서 있습니다. 상계에는 양옆에 육신에서 분리된 혼이 백을 찾아올 때 봉분을 잘 찾을 수 있도록 표지 구실을 하는 망주석(望柱石)이 서 있고 중간에는 혼유석(魂遊石)이 놓여 있으며 혼유석은 북 모양의 고석(鼓石)이 받쳐 주고 있습니다. 또한 봉분 주위에는 두 쌍씩의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이 능침을 수호하기 위해 봉분 밖을 향해 서 있습니다.
석물도 시대에 따라 변하여 상계, 중계, 하계로 이루어진 삼 계단은 영조 때부터는 중계와 하계가 합쳐져 상계, 하계의 2단으로 구성되어 하계에는 문인석, 무인석, 석마가 함께 배치되는 양식으로 변했으며, 초기에는 축문을 태우는 소전대와 폐백을 묻는 예감이 함께 있었으나 세종 때부터 예감 하나만 설치하였고 신도비는 태조, 태종, 세종의 것만 남아 있고, 문종 때부터 신도비 대신에 묘표로 바뀌게 됩니다.
서오릉에는 오릉(五陵), 이원(二園), 일묘(一墓)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서오릉(西五陵)은 동구릉 다음으로 규모가 큰 조선 왕실의 왕릉군으로, 오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457년(세조 3)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의 묘를 처음으로 만든 이후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면서 경릉이라고 개명하고, 덕종비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가 훗날 경릉에 같이 안장됩니다. 이후 1470년(성종 1)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창릉, 1681년(숙종 7) 19대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의 익릉, 1721년(경종 1)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명릉, 1757년(영조 33) 21대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의 홍릉이 차례로 조영되었습니다.
오릉 이외에도 조선왕조 최초의 ‘원(園)’인 명종의 맏아들 순회세자와 공회 빈 윤씨의 순창원(順昌園), 21대 영조의 후궁으로 사도세자(장조)의 어머니인 영빈이씨의 수경원(綏慶園)이 옛 연희궁 자리(현재의 연세대학교)에서 1970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졌고 19대 숙종의 후궁이자 20대 경종의 어머니인 희빈 장씨의 대빈묘(大嬪墓)가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에서 1969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