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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산아동문학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문홍
사랑과 죽음에 대한 동양적 관조(觀照)의 미학
- 허진호의〈 8월의 크리스마스 >
동양적 여백의 롱테이크 화면
허진호는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영화 수업을 받았다. 수료 작품인 두어 편의 단편 영화를 통해 영화적 감각을 익힌 그는 1998년에 장편 극영화〈8월의 크리스마스〉로 영화계에 선을 보였다. 이 영화는 그런대로 일상적 내러티브와 멜로적 감성을 부여하여 4, 50만의 관객 동원을 하기도 했다. 한때 일본영화 <러브레터>의 표절시비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같은 시기에 개봉한 이정국의〈편지〉가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한 최루성 멜로물이었다면, 이 영화는 한 남자의 죽음을 담담하게 수용하는 과정을 통해 1998년 제51회 칸느 영화제 비평가 주간에������죽음에 대한 동양적 관조의 미학������을 보여주었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한 찬사의 근거로 그는 일본 영화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와 대만의 작가주의 영화감독 허우 샤오시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는데, 이는〈동경 이야기〉로 대표되는 오즈 야스지로의 일상에 대한 통찰과 관조의 시각, 허우 샤오시엔이〈비정성시〉와〈사랑할 때와 죽을 때〉(동년왕사) 등 일련의 작품에서 시도한 롱 테이크의 영화적 기법에 의한 장면과 전후 비토리오 데시카의 <자전거 도둑>을 시발점으로 한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 영화들이 시도했던 인물의 동시 배치에 의한 장면의 분위기와 대상을 통한 인물의 상징적 감정 표현 등을 이르는 말일 것이다.
롱테이크 촬영 기법은 헐리웃 상업영화들이 보여주는 커트의 분할에 의한 편집의 화면 구성보다는, 카메라를 고정시켜 놓은 채 장면의 전체를 오랜 시간 동안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이러한 화면 구성은 배우들이 화면 속에 들어와 연기를 해야 하는 연극적 표현의 방법이다. 임권택 감독도 <서편제>에서 유명한 롱테이크 화면을 과감하게 시도한 바가 있다. 임권택 감독은 한 커트의 길이가 4. 5 분가량이나 되는 이 장면을 구성함에 있어 처음에는 무척 망설였다고 한다. 헐리웃 상엉영화의 10초 이내의 짧은 커트에 길들여진 우리 관객들이 4, 5 분가량의 롱테이크 화면을 지루해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볼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돌담 길 양 옆으로 펼쳐진 푸른 보리밭, 그 사이의 돌담길을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딸이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걸어오는 유명한 장면이 이 영화에서의 바로 그 유명한 롱테이크 화면이다. 다행이도 그 장면은 우리 한국인의 정서와 감정에 맞아 떨어지는 토속적 내용이어서 관객들은 별로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동양적 관조의 시각을 통한 화면 구성
좋은 구도는 없다. 그러나 나쁜 구도는 있다. 나쁜 구도란 작위적인 것이다.
위 인용문은 유영길 촬영 감독의 말이다. 부산시네마테크 로비에 붙어 있는 핸드 프린팅 밑에 새겨진 그의 말이다. 그는 그만큼 촬영할 때 작위적인 화면 구성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명 역시 인공조명에 의한 작위적인 것보다는 자연 현상에 의한 빛을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아깝게 타계한 카메라의 시인이었다.
이 영화는 카메라에 의한 영화적 사유의 미학을 보여준 유영길 촬영감독의 유작이기도 한데, 단편적인 컷의 편집에 의한 이미지의 단절보다는 흔들림이 없는 롱 테이크의 촬영 기법으로 일상에 대한 관조의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이 시도한 한 화면 속에서의 인물과 배경의 동시 배치에 의한 장면의 분위기 창출이 이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시도되고 있다. 초반부의 정원(한석규 분)의 잠자는 신에서 비스듬히 누워 잠자는 얼굴과 머리맡의 베개와 안경, 문턱 너머에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은 인물과 배경의 안정된 조화를 통해 상징적 의미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불치의 병에 의해 생을 잠식당하는 처지에 있으면서도 그러한 죽음을 담담하게 수용하는 듯한 정원의 평화로운 얼굴, 문턱 너머에서 들어오는 찬란한 햇빛이 상징하는 삶의 찬란한 환희가 어우러진 장면이기도 하다. 정원이 친구 부친의 부음을 받고 화장장 바깥에서 기다리는 장면도 역시 그러하다. 유가족의 권유에 의해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화면 밖으로 빠져나가는 조문객들의 일상적인 몸짓과, 빠져나간 공간을 메우며 들어오는 조무래기 어린아이들의 생의 환희에 가득한 몸놀림은 죽음 곁에서 짐짓 태연해 하는 정원의 안쓰러운 심리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마루에 앉아 발톱을 깎고 있는 정원의 무료한 행위 너머로 전개되는 장독대와 빨래의 일상적 풍경, 마루에 드러눕는 정원의 피곤한 생과, 뒤이어 인서트 되는 학교 풍경이 상징하는 젊음의 대비, 할머니와 어느 가족의 가족 사진 촬영 장면에서 제삿상에 놓일 영정을 위해 독사진을 찍을 것을 권유하는 아들과, 그 할머니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조무래기의 대비를 통한 생과 사의 엇갈림과 연속성, 점점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흐느끼는 정원과 침묵으로 절규하는 아버지(신구 분)의 실루엣, 사진관 유리창 너머로 바깥을 살피는 정원의 시야에 들어오는 할머니와 손녀의 풍경이 상징하는 삶과 죽음의 연속성과 엇갈림 등이 이 작품의 촬영이 보여주는 관조의 세계이다. 특히 엔딩 신은 롱 테이크 미학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눈을 배경으로 정원이 떠나고 없는 허름한������초원������사진관. 사진관 문을 열고 나오는 정원의 아버지, 스쿠터를 타고 출장 촬영을 나가는 무심한 아버지, 화면 속으로 걸어 들어와 진열대에 전시된 자신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성숙한 다림(심은하 분)의 표정에 일렁이는 생의 환희, 화면 밖에서������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에게 고마움을 드립니다.������라는 정원의 나레이션, 롱 쇼트로 보여주는 사진관의 전경과 그 앞을 스쳐 지나가는 살아있는 자들의 무심한 일상적 생의 풍경 위로 떠오르는 엔딩 타이틀은 지금까지의 모든 신들을 압축하여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또 하나의 미덕은 동양적 사유의 산물인 절제의 미학이다. 생의 영역을 잠식하는 죽음을 자연의 섭리로 인정하고 이를 담담하게 수용하는 낙관적 자세이다. 죽음 앞에서 이를 몸부림치며 거부하는 멜로 드라마의 관습을 거부하고 동양적 관조의 시각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는 감독의 죽음에 대한 친화적 시각이 오히려 더 죽음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병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원이 어린아이 환자와 주고받는 침묵의 미소, 도마 위에서 난도질당하는 생선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정원과 그런 아들을 무표정한 안쓰러움으로 응시하는 아버지, 여동생(오지혜 분)이 치우려는 밥상을 빼앗다시피 해서 그릇을 말끔하게 비우는 왕성한 식욕을 통한 정원의 생에 대한 의지, 거울에 비친 초췌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다 영정에 놓일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빈 의자에 앉는 정원, 죽음 앞에서의 천연색의 미소와 흑백 영정의 오버랩 화면, 뒤이어 인서트 되는 눈 내리는 학교 운동장, 파출소 안에서������내가 왜 조용히 해야 하느냐.������며 실랑이를 벌이다 오열을 삼키는 정원의 생에 대한 애착 등의 신은 동양적 사유의 미덕인 절제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함께 가져가기 위해 자신의 생을 풍요롭게 가꾸어 주었던 동네 골목길의 정겨운 풍경을 마음속에 담고, 친구를 만나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기도 하고, 자신의 안타까운 생의 마감을 아무도 안타까워하지 않는 무관심에 불쑥 화를 내기도 한다. 주차 단속원인 다림에 대한 사랑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동양적 절제된 미학으로서의 내밀한 사랑의 시각
정원과 다림의 서로에 대한 애정관의 표현 역시 동양적 절제의 미학에 따르고 있어, 기존의 멜로 영화들이 보여주던 상업적 애정 코드를 이 영화는 거부하고 있다. 과장과 허세로 치장한 인스턴트식의 멜로 영화의 관습적 애정이 아니라, 따스한 눈빛과 상대에 대한 세심한 배려에 의한 사랑이기에 두 사람의 이별은 더욱 관객의 심금을 울리는 여운을 주고 있다.
주차 단속의 반복적 무료함에 지쳐 있는 다림에게 빙과를 건네는 정원, 사진관 의자에서 잠을 청하는 다림에게 선풍기의 조작으로 바람을 건네는 정원, 목욕탕 앞에서 밀감 하나를 내미는 정원의 단순함에 어이없어 하며 노점상 가게에서 한 봉지를 사는 다림, 사진관 문틈으로 편지를 밀어 넣었다가 다시 돌아와 이를 꺼내려 하는 다림의 복합적 감정, 정원의 오랜 부재에 사진관 유리창을 깨트리는 다림의 격한 심리, 이승에서의 마지막 사랑을 확인하려는 듯이 정성스레 만년필을 손질하는 정원의 겸허한 자세 등의 신은 절제와 감춤의 미학을 통한 동양적 애정관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에서 그리고 있는 사랑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정원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채 가족들에게 베푸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정원의 다림에 대한 육친의 정으로서의 사랑이다. 그의 가족에 대한 사랑은 아버지(신구 분)에게 기계 조작법을 가르쳐 주는 것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는 비디오 레코더 조작법을 아버지에게 하나하나 차례대로 가르쳐 주려고 하지만 아버지는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또한 자신이 죽고 나서 사진관을 경영해야할 아버지에게 필름 현상하는 기계 조작법을 가르치려 하지만 아버지는 역시 기계 조작에는 젬병이다. 그래서 그는 기계 조작법을 순서대로 종이에 써서 그것이 마치 가족에 대한 자신의 사랑인 양 유품처럼 그 옆에 붙여 놓는다. 다림에 대한 사랑도 육체적 교접으로서의 현실적 사랑이 아니라 영혼과 영혼의 교감에 의한 무채색의 투명한 사랑으로 일관한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그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도 한 번 잡아보지 못하는 기이한(?)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다림을 바라보는 은근한 그의 시선과 보슬비처럼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는 그의 해맑은 음성에서 우리는 다림에 대한 그의 강렬한 사랑을 느낄 수가 있다. 요즈음의 사랑의 풍속도는 다분히 말초적이고 감성적이다. 반드시 육체적 교접을 통해서만 이러한 사랑을 느끼고 확인하려고만 한다. 현상적인 가시적 사랑의 모습이 판을 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만 보아도 감정이 고조되고, 그 사람의 귀에 익은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이고, 사랑하는 사람의 자취만 느껴도 뜬 눈으로 밤을 세울 수밖에 없는 그런 영적인 교감으로서의 플라토닉 러브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길이 없다. 허리띠 푸는 것만큼이나 일회용 휴지를 버리는 것만큼이나 사랑을 쉽게, 그리고 가볍게 여기는 요즈음의 젊은이들에게 이 영화는 유년의 포근한 기억 같은 정겨움을 줄 것이다. 봄날 아지랑이가 감도는 산모롱이를 보는 것 같은 은근한 그리움과 향수를 이 영화는 무채색 동양화에서 느낄 수 있는 여백의 미학으로 보여주고 있다. 감성적이고 말초적이고 단세포적인 건조한 사랑에 넌덜머리를 느끼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하나의 좋은 자극제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일상적 화면을 통한 예술적 사유
이 영화에서 감독은 이러한 절제의 미학을 치밀한 구도의 미장센 기법으로 처리하고 있는데, 빙과, 선풍기, 우산, 커피, 화장품, 손수건, 캔 맥주와 음료, 밀감, 만년필 등의 자질구레한 일상적이고 미시적인 소도구들을 이용하여 두 남녀의 애정 심리의 미묘함과 복합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소도구를 이용한 미장센의 기법은 우리들의 평범한 일상적 공간에서는 그 의미를 드러내지 못하고 그저 물리적인 기능의 차원에서 머무르지만, 이 영화에서는 동양적 관조의 세계를 창출한 독창적 카메라 워크와 소도구들의 미학적 배치에 힘입어 인물과 대상의 심리적 교류와 표현이라는 의미망의 극대화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감독의 연출력이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허진호의〈8월의 크리스마스〉는 영화의 본질이며 속성인 상업적 대중성과 감독의 예술적 사유가 절묘하게 결합한 예증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은근과 감춤의 미학을 통한 두 남녀의 애정의 교류라는 보편적인 화두가 상업적 멜로의 감성에 기초한 내러티브가 관객들의 보편적 감성에 맞아떨어진 것은 상업적 대중성이라고 할 수 있으며, 동양적 눈 높이에 의한 대상과 인물에 대한 관조적 시각, 그리고 롱 테이크의 독창적 카메라 워크와 일상적 소도구에 의한 미학적 구도의 미장센,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한 동양적 사유와 관조의 미학을 난해하지 않은 일상적 화면으로 보여준 것은 감독의 예술적 사유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