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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3. 묵상글 (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 자극을 받고, 보고 배우라고. 등 )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아직 / 19:55 추가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아직 / 04:42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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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3.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2.13 02:35
- 자극을 받고, 보고 배우라고.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복음을 읽을 때마다 이 말씀을 주님께서 하신 것이 맞을까?
맞는다면 주님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맞을지라도 복음사가들이 이 복음은 빼고
전해주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 복음을 그대로 전해준 뜻은 뭘까?
실제로 이방인을 상대로 쓴 루카 복음은 이 얘기를 빼고 전해주지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신 뜻은 무슨 뜻일까요?
오늘 저는 ‘먼저’라는 말에 처음으로 눈길이 갔습니다.
지금까지 이 복음을 정말로 여러 차례 읽었지만 실로
처음으로 ‘먼저’라는 말이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방인들을 먹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유대인들을 먼저 먹이시겠다는 뜻이고,
그런 다음 이방인들도 먹이시겠다는 뜻입니다.
저희 식당을 예로 들면 봉사자들이 손님보다 먼저 식사합니다.
그것은 먼저 먹고 봉사하라는 뜻이고
먼저 먹고 힘을 내어 봉사하라는 뜻이지요.
그러니 주님께서도 유대인을 편애한 것이 아니고,
이방인을 홀대한 것이 틀림없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강아지 운운한 것은 너무 모욕적인 것이 아닐까요?
이것도 모욕주신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고 그렇게 믿어야 할까요?
그리 믿어야겠지요.
주님의 깊은 뜻이 있다고 믿어야겠지요.
어떤 깊은 뜻이?
그것은 여인의 참 겸손과 큰 믿음을 꿰뚫어 보신 주님께서
그의 참 겸손과 큰 믿음을 드러내시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당시 이교도 여인이 유대 남자를 지나가다가 만난 것이 아니라
찾아와서 만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지요.
그러므로 그녀의 겸손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각오했던 것이고
주님의 모욕도 감수하게 하였던 것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하는데,
소문만 듣고도 예수님을 외간 남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믿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사랑을 믿었을 겁니다.
자기의 청을 지나치시지 않을 분이라고 말입니다.
아무튼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강아지라고 하는 이교도 여인의 이런 겸손과 믿음을
하느님의 선민으로 자처하는 유대인들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으셨을 것이고
누구보다도 제자들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사가도 후대의 우리에게도
여인의 이런 겸손과 믿음을 드러내 보이고 싶었을 겁니다.
자극을 받으라고.
보고서 배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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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3.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2.13 06:23
초등학교 3학년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서울에서 천안까지 100km라 생각했을 때, 시속 20km로 날아가는 비둘기는 서울에서 천안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답은 어떻게 될까요? 그러자 철수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6시간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에 선생님께서는 한숨을 내쉬며 “틀렸지. 100을 20으로 나누니 5시간이 정답이지. 이렇게 쉬운 것도 틀리면 어떻게 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철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비둘기도 서울에서 천안까지 날아가려면 중간에 한 시간 정도는 쉬어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선생님 5시간이 정답일까요? 아니면 아이의 6시간이 정답일까요? 아이의 상상력이 더한 대답이 더 정답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의 대답을 보면서, 눈에 보이는 것만 바라보는 세상의 지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귀로 듣는 것만 진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는 인간의 눈과 귀를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만 하느님의 지혜 안에 머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을 예수님 소문을 듣고 찾아옵니다. 어떤 사람도 외면하지 않으셨고, 또 사랑을 강조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부인을 외면합니다. 단순히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수치심을 일으킬 수 있는 말도 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어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
이 부인은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교도로 무시하고, 개로 비유하며 멸시하던 민족 출신의 여인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했던 대로 예수님도 그대로 하신 것입니다. 아마 이 부인 역시 이런 무시와 냉대를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곧바로 이렇게 대답하지요.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예수님의 숨은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부인의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간절히 주님께 매달릴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만약 사랑이 없다면 주님께 굳이 매달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체면만을 생각했다면 모욕적인 수치심에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사랑이 믿음을 만들어 하느님 안에 머물게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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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도전은 인생을 흥미롭게 만들며, 도전의 극복이 인생을 의미있게 한다(조슈아 J.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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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3.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겐네사렛 지방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정결법’에 대한 시비와 논쟁이 있은 뒤에, 그곳을 떠나 티로라는 이방인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이방인 시리아페니키아의 한 어머니를 만나게 됩니다. 이 이방인 어머니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자녀들을 배줄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고 박절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자녀를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리는 어머니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참으로 매정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는 그냥 거절한 것이 아니라, ‘개’로 취급되는 지독한 모욕과 경멸감을 느끼게까지 합니다.
참으로 당혹스럽고 난감한 순간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간청이 단순히 거절당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멸시와 모욕을 당하고 배신감마저 들면, 말할 수 없는 큰 상처와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이 흔들리고 좌절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뢰와 믿음을 깊은 곳으로 이끌어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순간, 이 어머니는 더 간절한 마음으로 간청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박절한 냉대와 무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간절하게 청하는 이 어머니의 ‘겸손’과 ‘끈기’와 ‘믿음’은 참으로 속이 저미어 옵니다. 이 어머니는 자신을 “개”로 취급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진정으로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개” 취급을 받는 이방인이지만, 그래서 메시아가 베푸는 구원과 생명의 식탁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주님의 무한한 자비의 부스러기를 입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한층 더 간절한 마음으로 자비를 간청합니다. 마치 백인대장이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마태 8,8)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믿음으로 겸손하게 자비를 청합니다. 그것은 마땅한 권리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구원의 손길이 이방인에게로 번져갑니다.
사실, 이는 어마어마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유대인들이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개’로 여기던 선민사상을 파괴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가히 혁명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두고, 20세기를 빛낸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하느님의 진정한 뜻이 드러난 계시사건”이라 말합니다. 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감히 하느님의 백성을 죄인과 의인으로 나눈 것에 대한 일침을 가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주님!
거절당할 때, 꼬인 문제가 더 꼬여갈 때, 원망하지 않게 하소서.
무시당했다고 여겨질 때, 배신감이 들 때, 실망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 냉대와 무시에도 겸손과 끈기와 믿음으로 오히려 간절하게 하소서.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자비를 믿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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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3.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
어떤 생선 장수가 마을에 가게를 내고 간판을 달았습니다. “이곳에서 신선한 생선을 팝니다.” 한 사람이 들어와서 말했습니다. “‘신선한’은 빼시오. 다 신선한 생선 아니오?” “그렇군요.” 그래서 “신선한”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이곳에서”는 빼도 되지 않을까요? 다 알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그래서 그 글자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팝니다.’라는 말도 빼야지요. 거저 주는 것이 아니니까요.” 듣고 보니 그래서 그 글자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생선’이라는 글자도 필요 없습니다. 근처에 오기만 해도 생선 냄새가 나니까요.” 그래서 간판 없는 생선가게가 되었답니다. 결국 고객들은 그 사람이 생선 장사를 하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것이 옳은 것 같고, 저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 그 사람의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지는 않되 흔들리지 않는 주관과 소신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이교도 부인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7,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7,28).하고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아이에게서 마귀는 떠나갔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선적인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은총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헛배가 불러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억지로 음식을 권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결국, 믿음을 가진 이교도에게도 구원의 혜택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구원의 혜택은 유다인 또는 이교도라는 외적인 관계보다 철저한 믿음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이교도 여인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강아지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여인이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청하며 기대하는 자세는 예수님에 관한 그녀의 신뢰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미천하고 부정한 사람임을 인정한 여인의 마음을 믿음으로 받아주셨습니다. 당신의 일차적인 사명은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을 다시 불러 모으는 데에 두셨지만, 감동적인 믿음 앞에서는 당신의 원칙을 고집하지 않으십니다(손희송).
그리하여 마침내 딸에게서 더러운 영이 떠나갔습니다. 믿음은 바로 하느님께서 나를 외면하고 감추어 계신 분처럼 보일 때 더 큰 신뢰로 자신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주님의 능력은 드러납니다. “그분은 우리 앞에 있는 험한 산을 치워주지는 않으시지만, 그 산을 넘을 힘과 용기를 주는 분”이십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5,6). 바리사이들의 경건과 신앙이 ‘표면적’ 믿음이었다면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 이교도의 믿음은 ‘속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헛배가 부른 신앙인이 아니라 떨어뜨린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으려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믿음, 그리고 그 안에 주님의 능력이 역사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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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3.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헌법재판소에서 비상계엄이 관련된 심문이 있었습니다. 명령을 받았던 군인들은 대통령이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총을 쏴서라도 문을 열고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는 경찰청장, 특전사 사령관, 방첩사 사령관의 일치된 증언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은 그런 지시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군인들은 자신들이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지 못한 점을 부끄러워하였습니다.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대통령은 포고령의 내용도 몰랐다고 합니다. 단순히 겁주기 위해서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 결의가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탄핵과 권한 대행 체제로 정부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대통령 탄핵을 찬성하는 사람들의 시위가 있었고,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시위도 있습니다. 법원에 난입해서 집기를 부수고, 경찰을 폭행하고, 판사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공정과 정의, 법과 원칙을 떠나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부끄러움은 동물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동물들은 본능에 따라서 생존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부끄러움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는 ‘숨’을 넣어 주셨고 그 숨은 인간의 양심이기 때문입니다.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옳지 않은 일을 부끄러워하는 마음, 즉 불의를 거부하는 양심을 뜻합니다. 이는 유교에서 인간의 본성 중 하나로 간주하지만, 사실 성경과 신앙의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죄를 범한 후, 벌거벗었음을 깨닫고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이는 인간이 죄를 지을 때 본능적으로 느끼는 수치심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이 수치심은 단순히 부끄러움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여는 초대장이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숨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찾으시며, 죄 안에서도 사랑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느님께 진심으로 회개하며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 그의 회개는 수오지심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가 다시 하느님께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수오지심은 죄를 깨닫고 회개로 나아가는 출발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후, 예수님의 시선을 마주하고 밖에 나가 통곡했습니다. 그의 눈물은 수오지심에서 나온 것이었고, 이는 그가 진정한 제자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회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많은 경우 수오지심을 잃어버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6장 15절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혐오스러운 짓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얼굴을 붉히지도 않는다.” 우리는 종종 잘못을 저지르고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거나, 죄를 합리화하려는 태도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수오지심은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입니다. 예를 들어, 환경 파괴, 사회적 불의, 그리고 인간의 탐욕은 모두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들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께서는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서 인간이 환경을 파괴한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며, 회개하고 창조 세계를 돌보아야 한다고 강력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이러한 세상 속에서 도덕적 나침반을 잃지 않고 수오지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수오지심은 단순한 도덕적 감정에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수오지심은 십자가의 신비 안에서 구체화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수치를 대신 짊어지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성찬례에서도 우리는 수오지심을 고백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는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느끼는 겸손한 수오지심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하며 용서와 회복을 청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부끄러움을 희망으로 바꿔 주십니다. 수오지심은 회개와 변화로 이어질 때 진정한 의미를 갖습니다. 매일 자신을 돌아보며 양심 성찰을 통해 하느님께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사회적 불의와 잘못된 구조를 부끄러워하며, 하느님의 정의를 이루는 데 앞장서면 좋겠습니다.
수오지심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며, 성화로 나아가는 초대입니다. 우리의 부끄러움은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통로가 됩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겸손과 순결을 본받아, 우리의 수오지심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살아갑시다. “보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렇듯 복을 받으리라. 주님은 시온에서 너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너는 한평생 모든 날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리라.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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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3.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의 주제를 붙여보라고 한다면 저는 이렇게 붙여보고 싶습니다. “믿음의 힘”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유명한 내용입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자녀를 위해 청하는 이방인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말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이 우리에게 매몰차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님의 말씀에 여인은 겸손과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이 여인의 겸손과 믿음은 주님의 기적과 은총을 만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렇게 믿음의 고백만으로 여인의 딸은 구원되고 해방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주님의 은총을 만나게 할 것입니다. 흔들리지 말고 항구한 믿음을 고백하십시오. 주님께서 그대 앞에 계십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주님께 청하며 살아갑니다. 오늘의 여인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믿음 위에 봉헌된 우리의 청원을 주님께서는 늘 듣고 계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겸손과 믿음의 옷을 입고 하늘로 봉헌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주님께서 우리가 청하는 바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오늘이라는 행복을 누리며 살려면….
이미 지난 일에 슬퍼하지 마세요.
이미 지난 일에 마음 두지 마세요.
오지 않은 일에 애태우지 마세요.
오지 않은 일에 걱정하지 마세요.
지난 일은 털어내고
오지 않은 일은 없는 것임을 늘 기억하세요.
오늘이라는 행복을 누리며 잘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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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3.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02.13 04:29
주님의 참 좋은 파트너가 됩시다
“겸손한 믿음과 사랑으로”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드 사람!”(시편128,1)
반가운 소식의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새벽 일어나 무심코 휴대폰을 열었을 때, 한눈에 들어온 고무적인 뉴스였습니다. 포보스가 최근 2025년 “리더십, 경제적 영향력, 정치적 힘, 국제 동맹 군사력 종합 고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10개 나라”를 발표했습니다.
“1위 미국, 2위 중국, 3위 러시아, 4위 영국, 5위 독일, 6위 한국, 7위 프랑스, 8위 일본, 9위 사우디아라비아, 10위 이스라엘” 순서였습니다. 밖에서 평가하는 객관적 대한민국의 위상입니다. 전화위복입니다. 대한민국의 저력은 늘 함께 하는, 천운(天運)과 더불어 작금의 위기와 혼란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다시 민주공화국으로, 문화강국으로, 선도국가로 우뚝 설 것을 믿습니다.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다신 한번 외쳐 보는 만세 기도입니다. 교황님의 어제 베드로 광장에서의 일반 알현 강론을 요약한, “교황은 가톨릭신자들에게 날마다 평화를 위해 기도할 것을 요청하다”란 말마디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정말 평화보다 절박한 요구도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부각된 말마디는 ‘파트너(partner)’였습니다. 창세기에서는 협력자로 되었는데 원래 영어인 파트너가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애당초 혼자서는 사람이 못되고 구원도 없습니다. 더불어의 사람이고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이미 사람 ‘인(人)’자 안에 더불어의 인간 존재임이 밝혀집니다. 예전 섬에서 살았던 세 은수자들의 삶을 표현한 짧은 영어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They loved and supported each other(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떠받치며 살았다)”
더불어 버팀목의 파트너들이 된 한몸 공동체 삶에 대한 간략한 묘사입니다. 바로 파트너의 절대적 필요성입니다. 파트너는 이미 우리 말로도 많이 쓰입니다. 인터넷 사전을 찾아 봤더니, ‘짝을 이루는 상대를 이루는 영어단어로 애인, 연인, 부인 등 다양한 동반자를 포괄한다’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협력자, 동반자, 반려자 역시 파트너를 설명하기엔 미흡합니다. 한겨레 신문 일면도 ‘관세 폭탄 막을 트럼프와 담판, 한국엔 파트너가 없다’라는 제하의 기사였습니다.
오늘 창세기에서 사람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지만 자기에게 알맞은 파트너를 찾지 못합니다. 모든 생물을 식별하고 지배할 수 있는 책임적 존재가 되었지만 정말 필요한 파트너 짝이 없었던 것입니다. 협력자. 동반자, 반려자보다는 ‘짝’이 적절하다 싶습니다. 한짝이 없어 무용지물이 된 하나이면서 둘인 양말, 장갑, 신발을 보면 즉각 이해됩니다.
아무리 애완동물, 반려동물, 반려식물이라 애지중지하지만 서로 소통하고 일치하는 파트너가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파트너를, 자기의 짝을 만났을 때, 사람에게서 저절로 터져나오는 환호입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그러므로 남자는 아내인 여자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둘은 알몸이면서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니 그대로 에덴동산에서의 순수한 부부일치의 모범입니다. 성경의 시편들은 일상적으로 하느님을 이스라엘 계약의 파트너로 부릅니다. 그러니 오늘 남자의 파트너가 된 여자는 존엄한 평등 관계의 상징도 됩니다. 결코 일방적인 주종관계가 아니라 상호존중과 상호섬김의 대등한 파트너가 된 아내입니다.
오늘 복음은 참으로 영예롭고 자랑스럽게도 예수님의 파트너가 된 이교도 여자 시리아 피니키아 출신의 여자를 만납니다. 도저히 예수님의 파트너가 될 수 없는 처지인데 이방 여자의 참으로 놀라운 탄력좋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항복을 받아냄으로 격상되어 주님의 파트너가 된 것입니다. 이 여자의 마귀들린 딸에 대한 모성애의 사랑은 간절한 믿음의 기도로 표현됩니다. 이교도인 여자는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간청합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교도 여자의 유우머 감각과 재치는 그대로 절실하고 원숙한, 겸손한 믿음의 절정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위축되거나 밀리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님을 압도하여 말문을 막아버립니다. 정말 탄력좋은, 겸손한 믿음에 감동한 예수님의 기분좋은 항복선언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예수님의 파트너가 된 겸손한 믿음의 여자는 참으로 우리 수도자는 물론 신자들의 빛나는 모범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수님의 탄력 좋은, 겸손한 믿음의 파트너가 되게 하시고, 파트너 예수님은 물론 동료 파트너들 간에도 우정을 날로 깊게 하십니다. 참으로 주님이 영원한 파트너가 됐을 때 다음 제 소원을 노래한 시중 “당신”같은 정주의 삶도 가능하겠습니다.
“산이
산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늘 깊은 산이예요
강이
강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늘 맑게 흐르는 강이예요
바다가
바다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늘 깊고 넓은 바다예요
하늘이
하늘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늘 높고 푸른 하늘이예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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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3.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 가는 쪽>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하느님께서
기꺼이 사람이
되어 오시고
아픈 딸 고치고픈 부인이
한갓 강아지라도
되고자 하니
사랑은
아래를 향한다
사람을 오롯이
하느님 닮게
올리시고
더러운 영 쫓겨난 딸
품은 어머니로
새로 나니
희망은
위를 향한다
낮추시는 하느님과
낮추는 사람이
서로에게서
올리시는 사람과
오르는 사람이
서로에게서
서로를 애틋이 보고
서로를 오롯이 느끼고
서로를 따뜻하게 품으니
믿음은
서로를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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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3.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마르 7,24)
영적 해석
접경 지역에 사는 다른 민족 사람들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죄를 지을 때면 우리도 티로와 시돈 파라오와 이집트 땅의 접경에서 살아가는 셈입니다. 그런 자들은 하느님의 상속재산을 받지 못한 이들의 접경 지역에 있습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5
철저한 버림은 참으로 그대로 두는 행위다
그대로 둠이야말로 만물을 존경하고, 만물을 있는 모습 그대로 허락하는 태도다. 버림과 그대로 둠의 길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억누르는 길이 아닌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버림과 그대로 둠의 길은 사건들과 사물들을 존경하는 길이자 그물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길이기도 하다. 이러한 존경이야말로 온화한 방임이다. “여러분의 앞길로 들어오는 모든 것을 참된 겸손과 사심 없는 마음으로 온화하게 대하라." 그러한 존경과 그대로 둠의 태도는 사물에게서 달아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그들에게로 되돌아가서 그들을 새롭게 볼 것을 요구한다. 카푸토는 이렇게 말한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버릴 줄 아는 사람을 다음과 같은 식으로 이해한다:
버릴 줄 아는 사람은 모든 자기 사랑을 여윈 사람일 뿐만 아니라, 마르타처럼 사물의 세계에 익숙한 사람, 피조물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사람, 피조물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그대로 두는 사람이기도 하다.(331)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성체의 예수님과 함께 희생이 되다
마지막 날의 사연들
앞서 본 바 있는 리스본의 부유한 가정은 히야친따의 체류를 약속했는데 그녀의 병세를 보고 너무 놀랐는지 받아들이기를 꺼렸다. 어머니 올린삐아는 할 수 없이 마리아 고딘호 수녀가 경영하는 고아원 “기적의 성모원”의 문을 두드렸다. 그곳 사람들은 히야친따를 친절히 맞아들였다.
히야친따가 여기에 입원하자 즉시 한 부인이 찾아와서 기도를 부탁하고 동시에 입원비로 50에스큐도를 지불해 주었다.
고딘호 수녀는 그 당시 25명의 여자 아이들을 맡고 있었는데 그 중 몇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무료였다. 고아들은 원장을 “대모님”이라 불렀다. 히야친따도 “대모님”이라는 이름으로 원장과 친근해졌고, 고아원을 “파티마의 성모의 집”이라고 불렀다.
히야친따는 여기에 두 주간만 있었는데 그 친절함, 신앙심, 인내, 겸손, 그리고 은인들에게 냐타낸 측은할 정도의 감사의 정은 원내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실상 새 입원자의 덕행은 이웃들에게 훌륭한 영향을 끼쳤다. 히야친따는 스스럼 없이 ‘천국에 가고 싶으면’ 순종하고 용감하며 정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모두를 격려했다.
여기에 공식 심문에서 그 원장이 진술한 증언을 기록하겠다.
히야친따는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적게 먹으며 자신의 불편을 탄식하지도 않았고 날마나 로사리오를 드렸다. 그녀는 절대로 거짓말을 용납하지 않는 성격이어서 그녀 앞에서 사실을 왜곡되게 말하는 자가 있을 때면 가차없이 그 점을 나무라고 바로잡았다.
그녀의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은 성당에 가는 것이었다. 성당에서 떠드는 아이가 있을 때 곧 조용히 하라는 충고를 하기 때문에 퍽 많은 항의를 받았으나 히야친따는 그것을 주님께 바치는 꽃다발로 말없이 참았다.(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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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3.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더러운 영에 걸려 하는 신앙생활이라면 하루빨리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강만연 [fisherpeter] 250213. 03:52 ㅣNo.180019
어젠 제6대 마산교구장님으로 새로 취임하신 리노 주교님의 착좌식을 유튜브로 봤습니다. 사실 저는 날짜를 착오해 지난주 수요일에 착좌식 장소에 갔었습니다. 어젠 사정이 있어서 다녀올 수 없었습니다. 창원 컨벤션센터 앞은 많이 지나친 적이 있었지만 실제 그곳에 갈 일이 없어서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는데 지난 수요일에는 홀만 봤지 내부는 보질 못했습니다. 이번에 영상만으로만 봤는데 규모에 놀라웠습니다. 아무튼 근 3년간 교구장님 자리가 공석이었는데 타교구에서 오셨지만 마산교구에 이제는 새로운 주교님이 오셔서 그간 공석으로 인해 가졌던 어려움이 말끔히 해결됐으면 하는 맘입니다.
마산 교구장님으로 선출되셨을 때 보니 출생지역은 가까운 진주였습니다. 저와 이점은 비슷했습니다. 출생만 진주이시고 실제 성장은 다른 곳이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는 보질 못했습니다. 중간 중간 스킵해서 봤습니다. 사정이 있어서 가질 못했지만 영상을 보면서 실제로 생각지도 못했던 주교님도 눈에 들어와 실제 먼 곳에서라도 뵙고 싶었던 분이 나오셔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간간이 비춘 영상에는 전전 본당 신부님이 보이셨고 마지막에는 앞전 글에서 언급을 했던 올리베따노 수도원 원장님이신 아빠스님도 영상에서나마 뵐 수 있었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주교님은 아니시지만 아마도 마치 의전서열처럼 주교님과 같은 위치에 있지 않으실까 생각합니다. 아마도요. 왜냐하면 제가 용어를 잘 모릅니다만 주교님만 사용하시는 모자 같은 것을 실제 수도원 행사 영상에서 아빠스님이 쓰시는 것을 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추측입니다.
영상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면 그 영상을 본 시간보다도 행사에 관한 것이지만 신앙과 관련해 많은 묵상을 했던 것입니다. 그 내용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엔 조심스럽습니다. 그냥 이런저런 모습을 스케치만 해 보고 싶습니다. 뒷모습만 보였는데 합창단 지휘자로 나오는 지휘자는 개인적으로는 고등학교 선배님이신데 교구 합창이라든지 교구에 큰 행사에서 지휘자로 활동하십니다. 전 본당에서 오랫동안 했는데 이유는 잘 모르지만 타 본당으로 옮겨서 하십니다. 그리고 제가 영상을 확대해서 봤습니다. 간혹 이런 행사에 잘 나오시는 전 본당에 계시는 자매님이었는데 이번 행사에 나오셨더군요.
제가 그분 자매님에 관해 신앙수기를 올렸던 자매님이십니다.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남을 위해 묵주기도 3000단을 봉헌한 유일한 자매님이었습니다. 굿뉴스에서도 제가 제목으로 ‘사랑하는 누나를 위해’라는 제목으로 올렸을 겁니다. 다른 두 분도 계신데 며칠 전에도 문자로 소식을 주고받았습니다만 전 본당 지휘자님과 또 한 분 자매님이 계신데 그분 자매님도 나오셨습니다. 그분 자매님은 지금까지 목례만 했지 실제 이야기를 나눈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인데 그분 자매님 모친이 저랑 영세 동기인 자매님이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지금은 생각지도 못한 시련 아닌 시련이 있어서 제가 원래 영세 받은 본당을 갈 수가 없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 2년 정도 지나면 돌아갈 생각입니다. 아마 그때 새로운 신부님만 오시면 갈 생각입니다. 앞으로 2년 정도는 마치 떠돌이 신자처럼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부분과 관련해서 또 대전에서 일어난 하늘이 양 사건을 통해서 묵상한 내용이 있는데 그 내용을 한번 언급하고 싶지만 내용이 무거운 내용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또 오늘 복음과도 관련된 내용입니다. 원래는 오늘 복음 묵상을 올리려고 하다가 그만 선회를 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신앙 공동체이든지 아니든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은 몇몇 사람들 때문에 공동체에 분란을 일으키는 암적인 존재가 있습니다. 세상 정치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하늘이 양 사건처럼 극히 일부이지만 어떤 집단이든지 그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곳 굿뉴스에도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그렇다고 쳐도 이와 같은 곳에서도 마음 심보를 고약한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면서 좋은 일은 하며 살아도 짧은 세상인데 왜 아주 특별한 내용으로 이상한 글을 올리지 않는 이상 어떤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을 공격하는 행동을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단순히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어떤 사람에게 쪽지를 통해 사람을 음해하거나 마치 정치판에서 일어나는 일과 같은 이런 단어는 사용하고 싶지 않지만 공작을 하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저는 하느님이 두려워서도 그런 일은 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앙은 어쩌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처럼 이 더러운 영 같은 게 있다면 그 영이 나가도록 힘써 애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바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지고 있는 악습 같은 것입니다. 이 악습을 제거하려고 노력을 해도 모지랄 판에 악습을 계속해서 가지며 그걸 끊어버리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의 영혼의 마지막은 어디로 가게 될 것인지 또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인지는 불을 보듯 뻔할 것입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간혹 한 번씩 글을 올릴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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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3.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믿음으로 인내하면 주어지는 은총이 /
박윤식 [big-llight] 250212. 19:10 ㅣNo.1800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북쪽과 경계가 맞닿은 지역인 티로에 가셨는데, 그곳 주민은 혼합 민족으로 주로 이방 종교를 믿고 있었다. 그때에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부인이 예수님의 소문에 와서 엎드렸다. 그녀는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 이교도로,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시길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자녀를 배불리 먹여야지, 그들 빵을 강아지들께 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이르셨다. 그러자 그녀는 “주님, 그러나 상 아래의 강아지들도 그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응답하였다. 이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딸에게서 나갔다.” 그녀가 집에 가니, 아이는 침상에 있었고, 마귀는 떠나가고 없었다.
동물 중에 우리와 가까운 게 개일 게다. 애완견을 키우는 가정에서는 개를 마치 사람과 다를 바 없는 가족의 일원이라고 여긴다. 그러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개는 우리에게 가장 사랑받는 동물이지만, 사람에게 개 취급을 하거나 개로 비유하면 굉장히 큰 실례가 되는 욕이다. 유다인들은 식사가 끝나면 빵 부스러기로 손을 비벼 닦는 습관이 있었다. 그때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는 가끔 식탁 아래의 강아지 차지였다나. ‘자녀들에게 줄 빵을 강아지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아!’ 마귀 들린 딸을 구해 주십사는 이 여인의 호소에,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을 개로 비유하시다니! 어쩜 이건 예수님답지 않은 것 같다. 상대에겐 뼈아픈 말일 수 있는 느낌이기에.
시리아 페니키아 지방은 갈릴래아에 인접한 지중해의 해안 지대에 있다. 옛날에는 가나안 지방이라고도 불렸단다. 이스라엘인들은 이 사람들을 적대시하며 그들을 개라고 부를 정도로 멸시하였다나.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예수님께서는 페니키아 출신의 여인에게 강아지 취급을 하듯 말씀을 하신다.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신 분께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청하는 그녀에게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사실 이방인을 강아지로 표현한 것 자체가 유다인들의 오만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숨은 의도는 여인이 지닌 믿음을 드러나게 하시려는 뜻도. 이에 여인의 믿음은 예수님을 감동시킨다. 그녀의 그 믿음은 재치가 아닌, 평소 답변으로 즉석에서 나왔다.
이교도를 믿는 여인이 이방인 남자인 예수님을 소문으로 찾아왔다는 것만으로도 그 믿음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예수님을 사로잡은 건 여인의 믿음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말투에서 당신에 대한 믿음을 확인했을 수도. ‘제발 제 딸만 구해 주세요. 개가 아니라 쥐라고 부른들 상관없어요!’ 모성애는 위대하다. 믿음은 어떤 처지이든 간에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의 확증이다. 믿음으로 굳세어지면, 그 어떤 상처와 모욕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게다. 그 여인이 예수님께서 노렸던 시험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예수님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기에. 이처럼 믿음이 확고한 이는 이 세상 것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단다. 믿음이 깊은 이는 세상에서 받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받기에.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단체에 가입했지만, 오히려 상처를 받는다면 이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두고두고 묵상해야만 하리라. 분명한 것은 그만둔다고 해서, 이미 받은 그 상처가 당장 해결되지는 않을 테니까. 때로는 마음을 다잡아 그 어려움을 스스로 헤쳐가야만 한다. 기분 나쁜 소리는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크든 작든 상처 따위는 도처에 늘려있다. 성당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번잡한 세상에서 뜻하지 않는 상처라도, 신앙과 연관되었다면야 기도와 묵상으로 참아야만 한다. 그러다보면 티로의 그 이교도 여인마냥, 성령으로 주어질 보답마냥 은총을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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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3.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오늘 창조 이야기는 며칠 전 들은 사제계 전승의 창조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와 전개 방식을 보입니다.
야훼계 전승에 따른 이 창조 이야기에서는 인간 창조, 특히 여자의 창조 이야기가 두드러집니다.
먼저 여자가 창조된 동기와 그 과정을 눈여겨봅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세 2,18)라고 말씀하시며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고자 하십니다.
알맞은 협력자는 종속된 자도 아니고 지배하는 자도 아닌 동등한 관계로서, 히브리 말로는 ‘말 없는 대화로도 가능한 직접적 관계’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흙으로 만든 온갖 짐승과 새들은 사람에게 알맞은 협력자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서 그와 동등한 존재를 만들어 그에게 데려다주십니다.
결국 동등한 남자 사람의 뼈로 지어진 여자는 흙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존재인 셈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가정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만드신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015년 필라델피아 세계 가정 대회).
이는 인간이 혼자서는 온전한 피조물이 아니고 다른 인간과 맺는 협력 관계 안에서, 곧 친교 안에서만 온전한 인간일 수 있음을 뜻합니다.
‘인간’(人間)의 한자 말이 이를 잘 보여 줍니다. 서로 기대고 있는 두 사람의 관계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말의 깊은 의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상호 관계 안에서만 참으로 인간이 되는 친교의 신비가 성삼위의 친교를 닮았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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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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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3.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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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3.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 28)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없습니다.
소중함이
있을 뿐입니다.
부스러기같은
작은 것들이
만들어가는
소중한
세상입니다.
단지
부스러기의
마음을
받아들였을
뿐인데
먹고사는 일이
거룩한
성체성사처럼
거룩하게
다가옵니다.
이방인
한 여인의
간절한 믿음이
딸아이를
온전하게
되돌려놓습니다.
겸손한
부스러기의
믿음은
과장되지
않습니다.
셀 수 없는
부스러기의
믿음으로
우리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믿음의 역사는
부스러기의
역사입니다.
큰 것에만
길들여진
우리를
부스러기의
겸손함이
계속해서
믿음으로
우리를
초대하며
참된 믿음을
일깨워줍니다.
부스러기는
예수님으로부터
가까이 있습니다.
부스러기조차
버리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시각의 변화이며
부스러기의
일상이 모여
따뜻한 사랑의
일상이 됩니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안 보려 하기에
못 보는 것입니다.
부스러기까지
다 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에게는
부스러기까지
다 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은총의
부스러기와
함께 주님의
겸손과
사랑을 배우는
은총의 오늘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부스러기의
믿음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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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3.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위대한 모성을 지닌 이방인 어머니!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의 치유를 위해 자신은 강아지가 되어도 좋다며 예수님 발치 앞에 엎드린
이방인 여인의 모습을 묵상하며, 이제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어린 시절 죽을병에 들린 어떻게든 한번 살려보겠노라며, 당신 등에 업고 이 병원 저 병원 뛰어다니면서 의사 선생님들께 사정사정하셨던 어머니였습니다.
차라리 나를 데려가라시며 병원 성당에서 밤을 지새우며 울부짖으셨습니다.
어머니 영정 사진을 바라보며 언제나 송구스러운 마음과 함께 ‘어머니를 봐서라도 더 잘 살아야 하는데...’하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혹시라도 너무나 절박해서 밤새워 기도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때로 너무 간절해서 누군가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간청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결코 만만치 않은 이 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부족한 우리 인간 존재인지라 별의별 상황 앞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너무 기가 차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주님 앞에 부르짖기도 합니다.
‘주님,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제가 뭐 그리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차라리 저한테 그러시지 왜 저 어린것에게, 저 딱한 사람에게 저런 끔찍한 고통과 시련을 주십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이교도 어머니가 그랬습니다.
그녀의 어린 딸이 그만 더러운 영에 들렸습니다.
어머니는 차라리 딸 대신 자신이 악령에 들렸으면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딸은 살고 자신이 대신 죽었으면 했습니다.
위대한 모성을 지닌 이방인 어머니가 주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딸만 살릴 수만 있다면, 자신은 죽어도 좋다, 한 점 먼지가 되어도 좋다, 한 마리 개가 되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딸의 치유를 청했습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 살짝 뜸을 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상관없었습니다.
딸만 낫게 된다면 그 어떤 수모도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아래 있는 강아지들도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런 놀라운 모성 앞에 예수님께서도 두손 두발 다 드신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혹시라도 지금 눈앞에 닥친 불행이 너무 커서 할 말을 잃고 계신가요?
혹시라도 지금 너무나 큰 시련 앞에 일어설 힘조차 없으십니까?
그렇다 할지라도 아직 끝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아직도 마지막 카드가 한 장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딸을 대신해서 기꺼이 한 마리 강아지라도 되겠다는 그 간절한 마음, 딸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대신 죽겠다는 그 각오로, 주님께 간절히 한번 매달려 봐야 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공생활 시기, 그리고 사도들의 활발한 복음선포 기간을 끝으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기적과 치유의 시기는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기적의 시대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직 아닙니다.
우리가 보다 겸손한 자세로 주님 앞에 엎드리고 머리를 조아린다면, 우리가 보다 간절하게 부르짖는다면, 온몸과 마음, 영혼과 정신을 다 바쳐, 성심성의껏 기도드린다면, 자비하신 주님께서 결코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반드시 움직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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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3.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7,24-30: 강아지도 빵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티로 지방으로 가신다. 예수님은 마귀 들린 어린 딸을 둔 시리아 페니키아의 한 어머니를 만나 그 간청을 들으신다. 마귀 들려 고생하는 자기의 딸을 고쳐달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27절). 당시 희랍인들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여인을 개라고 불렀고,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을 경멸하는 말로 개라는 표현을 하였다. 예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말을 사용하셨던 것 같다. 이것은 그 여인의 믿음을 보려고 하셨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여인의 대답은 어떠했는가? 그런 말씀에 하나도 섭섭함이 없이 오히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8절) 한다. 얼마나 여유 있고 부드러운 마음의 태도인가? 마치 유다인이 다른 민족들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 같이 말하고 있다.
그 여자는 은총을 얻기 위하여 강아지라는 칭호마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어머니로서 딸을 위하여서는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는 자세로 예수님께 간청하고 있다. 이것이 또한 어머니의 사랑이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태도를 칭찬하셨고 딸을 치유해 주신다.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감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29절) 하셨다. 이 여인의 자세, 이것이 우리가 주님 앞에, 우리의 이웃 앞에 갖추어야 할 기도의 자세이며, 신앙인의 자세다. 우리 자신이 이제는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른 종교의 신자들을 업신여긴다든지, 무시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는 귀중한 사람들이며, 그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주님을 믿고 따르며 참으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사는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로 주님께 나아가며, 주님을 이웃에게 전해줄 수 있는 우리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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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3.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변화는 희망을 품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좋은 청을 곧바로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에 대해 묵상하려 합니다.
마르코 복음 7장 24-30절에서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은 악령에 사로잡힌 딸을 위해 예수님께 간청하지만, 처음에는 거절당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고, 예수님께서는 결국 그 딸을 치유해 주십니다.
이러한 일들은 단순히 시간이 걸리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자라도록 하는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희망을 지속하게 하시는 이유는 결국 ‘하고 싶다’가 ‘할 수 있다’로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믿음이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성장하면, 개인을 넘어 공동체와 세상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희망은 믿음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다.
우리는 그것 없이는 결코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희망이 지속될 때, 그것이 점점 더 깊은 믿음으로 자라나며, 결국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사랑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경험합니다.
사울 왕의 이야기는 믿음과 희망이 부족할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울은 하느님의 명령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여 왕위를 잃게 됩니다.
반면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은 거절당하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간청했고, 결국 믿음이 드러나면서 딸이 치유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희망이 결국 믿음을 키우고, 믿음이 행동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은 처음에는 단순히 감옥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희망을 놓지 않고 준비하며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변화합니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감옥에서 책을 읽고 공부하며 작은 도서관을 확장시킵니다.
도서관을 키우기 위해 교도소장에게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내며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국 교도소장은 이를 허락하게 되고, 죄수들에게 지식을 나눌 기회가 생깁니다.
앤디는 또한 한 죄수의 고등학교 졸업 시험을 도와줌으로써, 희망이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이후 그는 감옥의 방송 시스템을 해킹하여 전 교도소에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틀어주며, 감옥 안의 모든 죄수들에게 자유와 희망의 순간을 선물합니다.
앤디는 말합니다.
“희망은 좋은 것이고, 아마도 가장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좋은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이는 희망이 단순히 개인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변까지 밝히는 힘이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마더 데레사 또한 처음에는 한 명의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싶다는 작은 희망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녀는 거리에서 굶주린 이들을 보며 돕고 싶었고, 이 작은 희망이 그녀의 믿음으로 이어졌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를 가난한 이들로 가득 채우고 싶다.”라는 희망으로 출발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한 사람에게 밖에 사랑을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할 수는 없지만, 작은 일을 위대한 사랑으로 할 수 있습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와 함께하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수도회를 세우게 되었고, 그녀의 봉사는 전 세계로 확산하였습니다.
그녀의 희망이 믿음으로 변화되었고, 그 믿음은 결국 사랑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사명에 동참하며 함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헬렌 켈러의 이야기는 작은 희망이 어떻게 믿음이 되고, 믿음이 결국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녀는 어릴 적 시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작은 희망을 품었습니다.
설리번 선생님의 끊임없는 노력과 그녀의 불굴의 의지는 결국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변화하였고, 헬렌 켈러는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위대한 교육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희망을 품는 순간 우리는 이미 변화를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개인적인 극복을 넘어서 장애인을 위한 교육과 인권운동을 펼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는 희망이 믿음이 되고, 믿음이 행동으로 이어져 사랑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는 성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믿음, 희망,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사랑입니다.”(1코린토 13,13)
베드로 사도는 희망했습니다.
물 위를 걷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잘 안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믿음을 성장시켰습니다. 결과적으로 이것을 본 다른 사도들을 변화시키는
선한 영향을 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끝까지 희망하기를 바라시며, 그 이유는 믿음을 성장시켜 결국 세상을 더 밝히는 사랑으로 나아가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희망이 믿음이 되고, 믿음이 사랑으로 성장하여 세상을 밝히는 존재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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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3.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미신과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은 마귀 편에 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마르 7,24-30).”
1) 이 이야기는, 어떤 우상 숭배자를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시켜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티로 지역, 이교도,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
강아지들”이라는 말들은, 이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가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이방인’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신다는 소문일 것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은총을 우상 숭배자들에게 줄 수는 없다.” 라는 뜻입니다.
‘자녀들’은 ‘하느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고,
‘강아지들’은 ‘우상 숭배자들’입니다.
<이 말씀은, “너는 지금 우상을 숭배하고 있으니 하느님께 은총을 청할 자격이 없다.” 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산상 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이 말씀에서, ‘개들, 돼지들’은 우상 숭배자들을 뜻합니다.
‘거룩한 것, 진주’는 하느님의 은총, 예수님의 복음,
성사 등을 뜻합니다.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라는 말씀은, 우상 숭배자들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우상 숭배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하는 ‘개들’은 떠돌아다니는 ‘들개’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강아지’는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입니다.
여자를 배려하기 위해서 표현을 조금 바꾸신 것 같습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먼저 자녀가 되어라.”로 해석됩니다.
<“자녀들의 빵을 먹고 싶다면 먼저 자녀가 되어라.
강아지인 채로는 그 빵을 먹을 수 없다.”입니다.
즉 “하느님께 은총을 청하려면 먼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라.”입니다.
우상 숭배를 버리지 않은 상태에서 하느님께 은총을 청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2) 여자 입장에서는 예수님 말씀이 ‘거절’로 들릴 수도 있었고, 자존심이 상하는 말씀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절박한 심정’ 때문에 물러서지 않고 끈질기게 간청했습니다.
<자존심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라는 말은,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 라고 간청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자신이 ‘강아지’ 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제부터는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강아지’ 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여자를 변화시키기 위한 충격 요법과 같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상 숭배가 얼마나 헛되고 어리석은 일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한 충격 요법.
예수님과 여자 사이에 더 많은 대화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어떻든 여자는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잘 따라와서 변화되었고, 올바른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간청한 은총도 주셨고,
청하지 않았던 은총도 주셨습니다.
여자가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된 일은, 여자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고, 청하지 않았던 은총인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낸 것보다 더 큰 은총입니다.>
3) ‘우상 숭배’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이 무엇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우상이 무엇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사람들이 바치는 제물은 하느님이 아니라 마귀들에게 바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마귀들과 상종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잔도 마시고 마귀들의 잔도 마실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식탁에도 참여하고 마귀들의 식탁에도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1코린 10,19ㄴ-21).”
우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지만, 우상 숭배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니라, 마귀들을 섬기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등지고 마귀들을 따라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게 소원을 빌고, 앞일을 물어보는 것은 주님을 배반하는 ‘큰 죄’를 짓는 일이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미신과 우상 숭배로 규정하는 일들에 대해서, ‘미신이 아니라 과학적인 통계다. 학문이다.’ 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렇게 주장하는 것 자체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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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3.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7,24-30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접경지역 ‘티로’ 지방으로 가십니다. 당신이 그곳에 계시다는 걸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으시고 외딴 곳에서 홀로 조용히 쉬고자 하신 것인데, 그분이 오신 것을 어찌 알았는지 한 이방인 여인이 찾아와 그분 앞에 납작 엎드립니다. 그리고는 자기 딸에게 들린 더러운 영을 좀 쫓아주시기를 간절히 청하지요. 자기 딸을 괴롭히는 악령을 쫓아내기 위해 백방을 찾아다니며 갖은 노력을 다해봤지만 허사였고, 그녀에게는 예수님이 ‘최후의 보루’였기에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그분 앞에 납작 엎드렸던 겁니다. 그런 그녀의 처지가 딱하긴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직 유다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야 할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셨기에, 아직 이방인들에게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줄 ‘때’가 되지 않았기에, 냉정하고 단호한 어조로 거부의사를 분명히 하시지요.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만약 내가 예수님으로부터 그런 말씀을 듣는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나의 간절한 청원이 단순히 거절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큰 멸시와 모욕까지 받았다고 느껴지면 마음에 큰 상처를 받고 절망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될 겁니다. 큰 분노와 배신감에 사로잡혀서는 내 청원을 들어주기 싫으시면 관두시라고, 나도 당신처럼 차갑고 무서운 분께 더 이상 매달리기 싫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겠지요. 하지만 나를 깊은 절망에 빠뜨리는 그 좌절의 순간이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을 향한 나의 믿음을 더 깊은 차원으로 이끄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으니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주님께 ‘올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속 여인이 그렇게 했지요.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녀는 자기 청원이 무시당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이 ‘강아지’로 취급되는 치욕스러운 상황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주인의 밥상만 쳐다보는 강아지처럼 구원의 식탁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비천한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아직 하느님에 대해 그리고 성경 말씀에 대해 잘 모르는 이방인이지만,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부스러기만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자신이 구원받는데에는 그것으로도 충분하다는 믿음으로 더 겸손하게 그러나 더 간절하게 주님께 매달린 겁니다. 다른 유다인들처럼 주님의 은총을 자기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처럼 요구하지 않고, 주님의 자비에 온전히 의탁하며 겸손하게 청하는 모습에 주님은 생각을 바꿔 그녀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지요. 믿음은 선택입니다. 그럴만한 근거가 있어서, 믿는 게 자신에게 이득이 되어서 믿는 게 아니라, 내가 믿고 의지할 분이 주님 뿐이기에, 그분 뜻을 따르는 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길임을 확신하기에 온갖 시련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믿고 따르기로 선택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그 선택에 반드시 큰 은총으로 보답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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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3.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사람에게는 자존심이라는 것이 인간이 인간답게 서 있을 수 있게 해 주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자존심 때문에 사람이 괴로워하고 울분에 못 이겨 폭력을 쓰는 경우를
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후회하면서 ‘자존심이 뭔지...’라는 말을 되 내이곤 합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성격도 강해서 잘못하다가는 주위 사람들과 좌충우돌하며
상처도 잘 받고 또 남에게 상처도 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직업이 여러 가지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지만, 대부분 남을 가르치는 사람,
명령을 일삼는 지휘관들은 쉽게 말해서 남들에게 상처를 쉽게 줍니다.
좀 더 성숙한 인격자이면 괜찮은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 지나친 자존심을 가진 사람은
자기중심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기 때문에 타인의 입장을 무시하는 사고와 행동을 저지릅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강한 성격, 자존심의 소유자는 '저 성질머리하곤..쯧쯧'이라는 소리를
하루에도 몇 차례 사람들에게 들을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롭게 지내기보다는 곧잘 다른 사람들과 마찰을 빚기 일쑤입니다.
‘자존심(自尊心 self-esteem)’이란 자기 자신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남에게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 능력, 적성 등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말하는 것이지요.
자존심에는 강한 것과 약한 것을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아예 자존심이
없어지면 자아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우울증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자존심이 낮은 경우에는 타인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지고 그러다 보면 자기비하,
열등감 등에 빠지기 쉽다고 하지요.
반대로 자존심이 강하면 자만과 강한 허영심에 빠지기 쉽다고 하고요.
그러니 자존심이 약해도 문제요 자존심이 강해도 문제네요.
그러면 원만한 자존심이란 어떻게 해야 생길 수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사랑이 있을 때에는 그 안에서 자존심은 조화를 이루지요.
오늘 이방인 여자의 경우에서 이 자존심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도시 티로 지역을 남의 눈에 드러나지 않게 들어가십니다.
그런데 페니키아 출신의 한 이교도 여인이 다가와 마귀 들린 자신의 딸을 고쳐 주십사하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이신지, 주님의 말투가 평소와는 다르게 그 여인의 자존심을
건드리게 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
당시 유대인들의 정서에서 자신들은 ‘하느님의 자녀’요 이방인은 ‘개’로 표현하는
정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여인은 오늘 복음 표현대로 ‘강아지’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여인은 인간적인 자존심에 머물지 않고 뜻밖에도 자신을 ‘강아지’로
전제하며 겸손한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8절)
예수님께서는 사랑이 많으시고 그 여인의 대답에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29절)
성경의 이야기에서 가정(假定)이라는 경우를 생각할 수 없지만 이방인 여자가 자신의
자존심이 상한다고 욱하는 마음이거나 화를 냈다면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고 치유의
기적과 연결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자신의 자존심 보다는 자신의 딸에 대한 사랑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이방인으로 유대인들이 갖는 신앙과는 다른 것이었겠지만 예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가 컸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머니의 딸에 대한 사랑이 자존심을 조화롭게 만들었고 그녀의 딸은
마귀로부터 자유를 얻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조건적일 수 있어서 내 입맛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어서 변함이 없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사랑으로 인간을 흙의 먼지로 빚어 사람을 만드십니다.
고대 근동지방의 신화에 대한 기록을 보면 하나같이 신들은 인간을 자신들의 노리개로 만듭니다.
자신들은 휴식을 취하고 인간들은 노동을 하도록 창조한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삭막한 사막에 오아시스처럼 샘이 있고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자라게 하시고는 그 가운데 사람을 데려다 놓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하느님의 최조 인간인 아담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을 사랑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저마다 제 성격을 갖고 삽니다.
그런데 그 성격을사랑에 담그며 갈고 닦으면 주님처럼 무한한 에너지가 나오게 됩니다.
겸손이라는 큰 그릇에 성격을 담그면 언제 어디서나 제 성깔대로 살지 않고 부드럽고
친절하며 타인에 대한 배려와 함께 멋진 시너지(synergy)를 낼 수가 있지요.
주님께서 페니키아 여인의 믿음과 사랑을 보시고 당신의 기적을 베풀어 주셨듯이
오늘 우리도 우리의 성격대로 사는 하루가 아니라 우리의 조화로운 자존심과 함께
주님께서 축복을 받도록 합시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가 주님을 따르며 이웃에게 기쁨과 평화를 전해 주는
뜻 깊은 날이 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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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3.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울타리 없는 믿음의 나라♣
폐쇄적인 본토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들어 이교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을뿐더러 이교도인 전도를 비판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개방적인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이교도인 전도를 활발히 전개했는데, 그것을 정당화할 근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드물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교도인을 고쳐 주신 기적들을 들어 이교도인 전도를 옹호했다.
시리아 페니키아는 티로와 시돈을 포함한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 유대인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이교도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로 이스라엘 땅에서 당신 백성을 상대로 활약하셨다. 외국으로 가신 때나 외국인을 상대하신 때가 있기는 하지만 매우 드물었다.
마르코 복음사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티로 지방에서 결코 낯선 인물이 아니었다(3,8).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한 부인이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7,25-26) 그것을 증명해 준다. 이 대목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예수님과 시리아 페니키아 부인의 대화 내용에 있다(7,27-29).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예수님께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청하였다(7,25-26).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어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7,27)하고 말씀하셨다. 이 비유의 핵심은 여인의 간청을 거절하는데 있지 않고, 예수님을 통해 주어지는 구원의 혜택이 우선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부인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7,28). 그 부인은 마치 예수님의 말씀에 토를 달지 않고 재치 있게 응답함으로써 그분께 대한 자신의 신뢰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부인의 확고한 믿음을 보고서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네 딸에게서 나갔다.”(7,29) 하고 말씀하신다. 결국 그녀가 예수님의 인격과 능력을 전적으로 믿음으로써 그 부인의 딸이 더러운 영으로부터 해방되었다(7,30). 이처럼 예수님을 통해 얻게 되는 구원은 유대인 또는 이교도인이라는 외적인 관계보다는 철저한 믿음의 관계가 우선임을 알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적인 잣대와 울타리를 허무시고, 오직 믿음만으로 이교도까지도 치유해주셨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내가 만든 기준, 나의 경험과 감정에 따라 형성된 틀을 들이대며 내가 원하는 관계만 맺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겠다.
영적인 성숙도는 나의 물리적, 심리적, 정서적, 영성적 울타리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가에 달려 있다. 살아가면서 건전한 ‘경계선 형성’이 분명 필요하지만, 창조의 낙원, 복음의 터는 누구나 드나들 수 있고 울타리 없이 모두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축제의 자리여야 할 것이다.
오늘 나에게 시리아 페니키아 부인이 예수님에 대해 지녔던 한결같은 믿음이 있는가? 또 진실하고 겸손하게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개방성과 의탁의 자세가 있는가? 그녀처럼 인간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서 예수님 말씀만 듣고 딸의 치유를 믿는 흔들림 없는 신앙과 수용의 자세가 있는가?
참된 믿음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들에 연연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모습을 감추신다 해도 결코 흔들림이 없이 내맡기고 의탁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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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3.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라반의 말씀사랑
여러분은 체면을 중하게 여기는 분이신가요? 자존심이 센 편인가요?
여러분은 어느 누군가를 위해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체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엇을 청해 본 적이 있나요?
사람은 누구나 얄팍한 자존심이 있어 그걸 상하는 것을 참으로 견디기 힘들어하지요. 내가 무시받고 있다고 느낄 때가 저는 가장 힘든 것 같아요. 여러분은 언제 가장 힘드신지요?
그런데 오늘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딸을 위해 "개같은 년(?)"이란 소리를 듣는 수모를, 그것도 만인이 존경하는 분으로부터 듣는 한이 있어도, 자존심보다는 딸에 대한 사랑을 택한 한 어머니의 믿음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아, 아직 난 멀었구나! 얄팍한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 용을 쓰기보다 사랑 때문에 스스로 비천하고 낮은 자가 되지 않고선 그분의 자비와 충만한 은총을 기대하지 못하겠구나!" 생각해 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대접받지 못해 아파만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작은 자 됨으로써 더 사랑하는 오늘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벗님은 오늘 누구를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낮은 자 되는 희생을 바치겠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신원과 사명에 대한 이해가 백성들에게 올바로 형성되기까지 섣부르게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시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유다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소문을 듣고 찾아오게 된 것을 보면 이미 예수님은 숨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셨던 겁니다.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마르 7,24) 그렇습니다.
빛은 아무리 감추려해도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덕행도 아무리 감추어도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성인은 스스로 자기를 드러내려 애쓰지 않습니다. 그의 성덕은 감출수록 더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ㅍ 예수님과 이방 여인 사이에 오간 대화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종종 후대의 우리에게 감정적인 논란거리를 주지만, 중요한 건 여인이 간절한 청원과 용기, 겸손으로 결국 원하는 바를 얻어냈다는 사실이지요.
예수님의 여러 기적 사화들에서 보듯 예수님께서는 청하는 이가 "믿는 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고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격려해 주시지요. 이 자리에서는 이방 여인에게 그의 말이 이루어질 것임을 확증해 주십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마르 7,29)
우리가 창조 설화에서 보았듯이, 하느님의 말씀은 발설과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또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이루고야 만다."(이사 55,11)고 하셨듯이, 하느님의 말씀은 꼭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놀랍게도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지음 받을 때 이 힘도 얼마간 나누어 받은 것 같습니다. "사람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창세 2,19)고 하니까요. 하느님께서는 온갖 짐승을 사람에게 데려가 이름을 지어주게 하시는데, 그가 각 생명체에게 말 한 내용, 곧 이름이 그의 정체성이 됩니다. 이 명명 작업의 위임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받은 말의 능력을 믿어주셨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네가 그렇게 말하니" 하시며, 여인의 진정 어린 고백에 어떤 토도 달지 않고 함께 원하고 동의하신다는 존중의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태초에 인간이 나누어 받은 말씀의 힘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이루어지지요.
비록 완전할 수는 없어도, 사람이 온 마음을 다해 믿고 고백하고 청할 때, 그 말은 이루어지는 힘이 있습니다. 이를 허락하신 분께서 함께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렇게 청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알렐루야를 노래하면서 이렇게 되새겼습니다. "너희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여라. 그 말씀에는 너희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다."(야고 1,21) 아멘.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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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3.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삶
<2025.2.13> 아침을 여는 묵상 (눅 2:41~52절)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삶❞
❚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균형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 세상적인 가치 판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41~47절).
예수님은 열두 살이 되던 해 유월절에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절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부모는 예수님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찾되...”(44절). ‘찾다’라는 의미 속에는 요셉과 마리아가 잃어버린 아이 예수를 찾기 위해 이 잡듯이 뒤졌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에서도 계속해서 아이 예수를 찾았습니다(45절). 사람들 사이를 헤집과 다니며 잃어버린 아들 예수를 찾았을 것입니다. 사흘 후에서야 성전에서 선생들 중에 앉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는...” 아이 예수를 만났습니다(46절).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아이 예수의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겼습니다.
‘당연히 동행하고 있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동행하고 있는 줄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당연히 예수님이 자신과 동행하고 계신 줄로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신앙의 연륜 그리고 신앙의 화려한 이력이나 직분이 결코 주님과의 동행을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 소경이 되어 있는 우리 자신이 다른 소경을 인도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상황입니다. 정작 주님은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길과는 전혀 다른 길에 서 계시는데, 우리가 인내하는 길이 진리의 길이라고 가르친다면 이는 거짓 교사와도 같은 꼴입니다. 당연하다고 하는 세상적인 가치 판단을 내려놓고, 늘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과 친밀함 속에 살아가야만 합니다(48~50절).
부모는 예수를 보고 놀랍니다. 어머니는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48절). 한 아이의 엄마로서 당연한 행동이라 할 수 있고, 이 말속에는 책망도 섞여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아이 예수는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49절). 마리아가 말한 ‘네 아버지’와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아버지’는 육신의 아버지와 하늘 아버지를 말합니다. 이는 곧 열두 살의 소년 예수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는 아이 예수가 했던 이 말을 깨닫지 못했습니다(50절).
요셉과 마리아는 12년 전에 예수님의 잉태가 생물학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된 일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의 증언과 시므온과 안나 선지자의 증언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특별한 아들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부모는 여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의 언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부족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나의 정체성과 가치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역시도 하나님과 친밀하고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내 아버지’라 부르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더욱 친밀한 관계 속에서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있을 때만이 우리 자신이 머물러야 할 곳이 주님의 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일생토록 신뢰하고 의지하며 살 수 있는 풍성한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위해 매일 매일 우리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여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균형 있는 신앙생활을 추구하여야 합니다(51~52절).
예루살렘에서 돌아온 예수님은 다시 갈릴리의 한 목수 소년으로서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하고 그들을 받들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이 모든 말 혹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해 두었습니다(51절). 그리고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더욱 자랐고,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52절).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를 존중하셨습니다. 하늘 아버지를 섬기되 육신의 아버지로서의 권위 앞에 순종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자신들의 신앙생활이 균형이 잡힌 생활이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헌신적으로 일하고, 다른 성도들에게 많은 사랑과 자비를 베풀면서 정작 가정에는 소홀하게 여기고, 심지어는 폭군으로 변하여 생활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하늘 아버지를 섬긴다는 명목으로 육신의 부모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도 등한시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지적으로, 육체적으로 계속 성장해 가셨던 것처럼 우리 자신 역시도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균형 있게 성장해 나아갈 때, 건강한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이라고 하는 두 개념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자신에게는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만 인정을 받는 것에만 치중하는 것은 건강한 신앙이 아닙니다. 물론 세상과 세대를 본받아서 그대로 따라 살아가면 안 되겠지만 그럼에도 우리 자신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선한 행실을 보이므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과의 온전한 동행은 균형 있는 신앙생활을 통해 이루어져 간다는 사실을 인식하여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쭙잖은 세상적인 가치 판단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말씀과 기도속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매 순간 유지하므로 균형 있는 신앙생활을 해 나아갈 수 있기를(눅 2:41~52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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