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리즈는 늘 그래왔다. 일찍이 X5의 토대가 되어주었던 E39도 그랬고, 크리스 뱅글의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갈아입었던 E60도 그랬다. 디자인으로 충격을 주었고, 한발 앞선 장비로 시장을 리드했다. 어떤 디자인이든, 짜릿한 손맛과 터프한 본성에는 변함이 없었다. 멋진 디자인과 근사한 장비는 무서운 성능을 감추는 투명망토일 뿐이었다.
글 김우성 편집주간
사진 신동빈, 서동현 기자
‘고양이 같은 세단이구나.’ 사흘 동안 300km 넘는 거리를 쏘다닌 끝에 불현 듯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이랬다. 가만히 웅크리고 있을 땐 “갸르르”하는 나지막한 울림이 분명히 들렸는데, 한 발짝 떼는 순간부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발 내딛는 소리조차 들이지 않는다. 스르르 움직이는가 싶더니, 갑자기 순간이동 하듯 유령처럼 달려 나간다.
5시리즈가 세상에 처음 등장한 때가 1972년, 벌써 50년이 다 됐다. 한국시장에 처음 들어왔던 3세대(E34)는 당시 ‘BMW 공학기술의 결정체’라는 찬사를 받으며 높은 인기를 누렸다. 그로부터 7년 뒤 나온 4세대(E39)는 5시리즈의 전성기를 열었다. E34의 상징과도 같았던 ‘앤젤 아이’ 주간 주행등은, 5시리즈의 앞날을 밝혀주는 사인과도 같았다.
대변신은 8년 뒤, 5세대(E60)에서 이뤄진다. 크리스 뱅글 디자인의 7시리즈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지 2년 뒤의 일. 7시리즈와 달리 ‘뱅글 버전’ 5시리즈는 시장에 스무스하게 스며들며 흥행 면에서도 대성공을 거뒀다. 이후 뱅글의 후계자 아드리안 반 후이동크가 6세대(F10)로 분위기를 차분히 정돈했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차는 그 뒤를 이은 7세대(G30)다.
변화에 맞춘 5시리즈, 선택은 마일드 하이브리드
신형 5시리즈는 2016년말 데뷔해 지난해 연말 페이스리프트를 거쳤다. 6세대와 전반적인 디자인 언어는 비슷하지만, 디테일에 힘이 많이 들어갔고 사이즈도 커졌다. 6세대 때 살짝 느슨해진 듯했던 텐션이 다시 한 번 바짝 조여진 느낌이다. 하나의 프레임으로 통합하며 면적을 넓힌 키드니 그릴과 세련된 앞뒤 램프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원하든 그렇지 않든, 지금 자동차업계의 핫이슈는 전동화다. 내연기관 시절을 마음껏 주무르던 브랜드일수록, 서서히 지나가고 있는 내연기관 시대와 자꾸만 다가오는 전동화 세상이 이래저래 달갑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 비단 브랜드만의 입장도 아니다. 그 브랜드를 사랑했던 마니아들의 입맛도 조금은 씁쓰레해질 수밖에 없다. 어쨌든, 세상은 바삐 변하고 있다.
페이스리프트를 거친 현재의 7세대도 이 같은 시대의 흐름에 보조를 맞춘다. 모든 4기통과 6기통 엔진에 48V 스타터 제너레이터를 활용한 마일드 하이브리드 테크놀로지를 더했다. 인체 안전 전압 상한선을 48V로 한 EU 규정은 결과적으로 ‘순수 내연기관 시절 한가락 했던’ 수많은 브랜드들에게 꽤 괜찮은 선물을 안겨주었다.
별도 안전장치 추가 없이 적용 가능한 48V 제너레이터는 부피가 작아 기존 내연기관에 적용하기에 무리가 없다. 용량이 크지 않아 전기효율이나 성능이 두드러지진 않지만, 마치 살짝 침침하던 방구석 책상 위에 조그만 스탠드 하나 딱 켠 것처럼 효과는 숫자 이상이다. 48V 제너레이터가 523d 럭셔리 M 스포츠 패키지(이하 523d M 패키지)에 보탠 출력은 11마력에 불과하나, 힘의 크기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 힘을 언제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가 관건이다.
단점은 덜어내고 장점만 남겨둔 디젤의 대반전
헤드램프와 키드니 그릴 디테일이 달라졌어도, 5시리즈 특유의 분위기는 여전하다. 오히려, 생각보다 크지 않은 변화의 폭이 조금은 당혹스러울 정도. 과거 ‘변화중독’ 같아 보이던 시절이 믿어지지 않는다. 재기발랄함이 가라앉은 자리에는, 차분한 집중력이 들어앉아있다.
핵심은 단연 파워트레인이다. 지극히 무난한 4기통 2.0L 터보 디젤 엔진과 8단 자동변속기에 48V 마일드 하이브리드를 추가한 523d M 패키지는 제원상 190마력의 출력과 40.8kg·m의 토크로 0→100km/h 가속 7.2초, 최고속도 235km/h의 성능을 낸다. 특별할 건 없는 성능인데, 이걸 해내는 느낌이 이전과 사뭇 다르다. 어느 정도냐면, “완전히 다른 차처럼 다르다.”
아이들링 때 살짝 디젤 엔진 특유의 사운드가 들릴 뿐, 움직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되는 48V 제너레이터의 지원은 마치 우렁각시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성심성의껏 이뤄진다. 출발가속이나 추월 때 11마력을 순간적으로 쏟아내 부스트 업 효과를 낸다. 덕분에 디젤 엔진 특유의 불쑥 떠미는 느낌 없이 매끈하게 속도를 올려간다.
스타트앤스톱 시스템이 켜지고 꺼질 때의 충격도 매끈하게 해결했고, 가속이나 주행 중에는 디젤 엔진이라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을 정도다. 이전까지 알고 있던 디젤 엔진의 특성은 사라지고, 그렇다고 해서 순수 하이브리드처럼 지극히 조심스럽지도 않다. 엔진이 돌아갈 때, 제너레이터가 작동하거나 시동이 꺼져있을 때 상황에 따라 라디에이터 그릴의 셔터가 여닫힌다. 공기역학과 연비를 감안한 디테일이다.
셔터가 열려있을 때(좌)와 닫혀있을 때(우)의 라디에이터 그릴
내리막 구간을 달릴 때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면 속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변속기는 중립으로 들어가 연료효율을 높여준다. 급제동이 아닐 경우, 속도가 15km/h 이하로 떨어지면 마일드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부지런히 개입해 엔진가동을 멈춘다. 과정은 부드럽고 혜택은 달콤하다. 523d M 패키지의 공인 복합연비는 1L당 15.6km에 이른다.
디젤 엔진은 고속 주행 중에는 매끈하게 돌아가는 반면, 출발가속이나 저회전 때의 소음과 진동을 해결하기 어려웠는데, 523d M 패키지는 이를 마일드 하이브리드로 극복하고 있다. 디젤과 마일드 하이브리드의 조합은 의외로 훌륭하다. 위축된 디젤 엔진의 숨통을 틔워준 셈이다.
잘 돌고 잘 달리는 솜씨는 그대로, 여유로움은 덤
마일드 하이브리드를 뺀 주행과 관련한 모든 부분은 5시리즈 특유의 느낌 그대로다. 꽉 막힌 정체 속에서 몇 시간을 가다 서다 반복해도 피로감이 크지 않은 탄탄한 서스펜션과 몸에 딱 맞는 시트, 과하지 않으면서도 예리하게 돌아가는 핸들링 성능은 타는 재미를 한껏 안겨준다.
게다가 이 차는 M 스포츠 패키지를 더한 버전. 두툼한 스티어링 휠과 변속기 주변, 프런트 브레이크 캘리퍼, 앞 펜더 등 곳곳에 자리잡은 M 로고는 발군의 코너링 솜씨를 짐작케 한다.
비단 스티어링 휠과 변속기뿐 아니라 모든 조작이 운전자를 향하고 있다. 운전 중 모든 조작과정이 수월하게 행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별할 것 없는 주행보조(Assisted Driving) 조작도 마찬가지. 스티어링 휠 왼쪽 아래 버튼만 누르면 현재 주행 중인 도로의 제한속도를 인식해 자동으로 맞추며 주행보조 모드로 들어간다.
차체가 이전보다 27mm 길어진 덕에 차체 높이마저 한결 낮아 보인다. 테일램프는 3D 타입으로 한껏 멋을 부렸는데, 상대적으로 헤드램프는 다소 허전하게 느껴진다. 실내에서는 시각적인 변화의 느낌은 찾아보기 어렵다. 센터페시아 디스플레이가 12.3인치로 커졌는데, 그마저도 두드러져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전체 분위기는 이전과 비슷하다.
다만, 무선 애플 카플레이와 안드로이드 오토 링크를 지원해 편의성이 좋아졌고 한껏 넓게 펼쳐 보이는 HUD 시인성도 무척 훌륭하다. 자체 개발한 맵에 티맵 실시간 정보를 반영한 내비게이션은 수입차들의 일반적인 내장형 내비게이션과 비교하면 꽤 훌륭한 편. 시원한 모니터에 비해 맵의 시인성이 다소 떨어지는 게 흠이다.
중대형에 가까운 사이즈의 정통세단인 만큼, 2열 시트도 꼼꼼히 챙겼다. 공간과 착좌감도 충분하고 열선시트와 전용 송풍구, C-타입 USB포트, 12V 소켓 등 구성도 좋다. 캐빈룸 공간에 비하면 트렁크 공간은 평범하다. 깊이는 충분하나, 좌우 폭은 넉넉하진 않다.
드러내지 않은 변화, 드러나 보이는 화려한 추억
523d M 패키지는 5시리즈를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새삼스러운 매력과 기분 좋은 반전을, 5시리즈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매끈하고 편한 운전감을 느끼게 해준다. 생각보다 큰 변화를 보닛 아래에 심어놓았지만, 그걸 눈에 띄게 펼쳐 보이지도 않는다.
과거 5시리즈는 그러지 않았다. 멋 부릴 때는 마음껏 드러냈고 앙칼진 성격도 애써 숨기지 않았다. 마일드 하이브리드와 손잡은 2.0L 디젤 엔진은 단점은 덮고 강점은 다독이며 오롯이 풍성한 주행질감에 집중한다. 5시리즈여서 낯설고, 5시리즈여서 더 여유롭다.
큰 변화는 없다. 그래서 시장에서 주목을 덜 받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새로운 파워트레인은 기대 이상이고, 철저히 운전에 초점을 맞춘 구성은 여전해서 더 반갑다. 시대의 흐름에 차분히 맞추면서도 5시리즈다움은 잃지 않고 있다.
내연기관 시절의 화려했던 기억은 523d M 패키지의 구석구석에 스며있다. 잘 다듬어낸 디젤 엔진과 마일드 하이브리드 조합에서, 전동화 시대로 넘어가는 변곡점에 서있는 엔진 마이스터의 착잡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장점
① 디젤의 단점을 상쇄한 마일드 하이브리드
② 매끈하면서도 폭발적인 가속성능
③ 충실한 운전 편의성
*단점
① 거의 달라지지 않은 이미지
② 우드그레인과 하이그로시의 어색한 공존
<제원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