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몇년간 멈췄던 가을 나들이룰 올해 재호랑 4년 만에 나섰다.
예전과 같이 먼저 경주 보성사에 들러 비구니 주지 보성스님을 뵙고 정국군파 누님 뻘 되는 공양보살이 채려주는
정갈한 점심 공양을 받았는데 보성스님은 6순이 훨 넘었는데도 외람되나마 훤출한 키에 아리따운 모습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내가 보성사와 인연이 된 것은 예전에 후배 법안스님이 거주하던 장유 대덕암에 다닐 때 한 노보살이
"제가 경주에서 났는데 어릴 때 엄마 치마끈을 잡고 따라 다니던 보성사란 절이 있었는데 찾아보니 없어 졌는데
혹시 어디로 갔는지 찾아봐 줄 수 없나요?"
그래서 탐색해 보았더니 경주 IC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보성사라고 있어 같이 갔는데 9순이 넘은 비구니 노스님을
뵙더니 맞다고 해서 찾아 준 적이 있는데 보좌하시던 보성스님을 내가 본 순간 아 하고 숨죽인 탄성이 나왔는데,
사연인즉슨 내가 30대인 40여년 전 부산 사상 시외 버스터미널에서 지나치던 젊은 비구니 스님을 뵌 적이 있는데
훤출한 키에 아리따운 모습에 넋을 잃고 만 적이 있었다. 어찌 저런 절세 미인이 출가하여 스님이 되셨을까 하는
안타깝고 안스러운 마음으로 뒷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던 기억이 그뒤에도 종종 되새겨 지곤 했었는데 보성스님을
뵙는 순간 아 바로 그때 그 비구니 스님이구나 하는 직감이 바로 밀려 왔던 것이다.
이 또한 인연의 굴레인가 싶기도 히다
어머님이 돌아 가시고 49제 막제를 멀리 경주 보성사까지 와서 치러 드린 것은 대웅전 법당이 너무나도 정갈했뎐
이유였다, 자그만 돌 부치님 한분만 모시고 회엄성중 탱회 히나만 걸려 있을 뿐이다, 대개의 젊은 사람들이 법당을
귀신집이라 할 정도로 복잡한데 이곳은 그렇지 않아서 선택한 것은 예수쟁이들이 많은 집안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게 하지 않게하기 위해서 였다. 절 경내 역시 절이라기 보다 어느 양반집 주택 같은 분위기 이기도 하고...
할멈도 딸 내외도 남동생 내외도 막내 여동생도 캐톨릭이고 여동생 하나는 교회 권사이고 돌아가신 누님 두분도
캐톨릭인데 내만 절을 찾아 다니는 것은 절이 좋아서 이기도 하지만 9대 종손으로 태어난 역사적 사명이기도 한
까닭이기도 하다.
장례식에도 스님을 부르지 않은 것은 수녀님들이 오시고 목사님도 오시고 찬송가를 부르는 마당에 스님이 와서
목탁을 두드리는 것은 어째 좀 우스울 것 같애서 였다. 그래도 49제는 내가 올려 드렸고...
청도 운문사는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는 대찰이고 울주 석남사는 비구니 천년고찰이니 나의 가을 나들이는 비구니
사찰 3사 순례인 셈이디
청도 운문사로 항하는 길에 장관이었던 감나무 가로수에는 감하나 달려 있지를 않아 올해 별시런 날싸를 탓할 수
밖에 없었고 영남에서 최고의 단풍 풍치를 보여주던 운문사에서 석남사 가는 계곡의 단풍도 예전 같지 않았다.
유자차에 곁들어 군고구마를 내 주던 계곡의 카페 여사장도
"올해 단풍은 영 아이라예."
돌아 오는 길에 밀앙에 들러 삼문동에 있는 밀양 돼지국밥 원조집을 골목을 몇바퀴 돌아 칮았다, 요새 돼지국밥이
퓨전화 되었다면 이 원조집 밀양돼지 국밥은 아직도 옛 시장통 돼지국밥의 토속적 향과 그리운 고향의 맛이라고
보면 된다,
"힐머니 오래 사셔서 이 맛을 찾아 오게 하시고요, 그래도 누군가에겐가 잘 전수하셔서 보존하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