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연구는 1988년에 해금된 재북시인(在北詩人) 백석(白石:1912∼1995)의 작품 연구사에 대한 총체적 점검과 수정에 관한 목표를 지니고 있다. 해방 이후 한국현대문학사의 내용과 체계는 분단체제의 고착과 더불어 사실의 축소, 왜곡, 변조 따위로 말미암아 해방 전의 문학사적 공간이 지나치게 소폭화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단계에서 1988년 해금조치는 비록 때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문학사의 공간성 회복과 확장을 위하여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게 하였다. 이 해금조치가 있기 1년 전에 본 연구자는 {백석시전집(白石詩全集)}(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여 문단과 학계의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로부터 17년 세월이 흐른 2004년 현재, 백석의 문학은 당당하게 복권되어 고등학교 문학교재에도 수록되고, 2004년 대입수능시험의 지문으로 출제되기까지 하였다. 이는 참으로 반갑고도 다행스런 일이다. 시전집의 발간 이후로 현재까지 백석의 시와 문학을 연구한 평론과 논문은 줄잡아 200여 편이 넘는다. 하지만 최근 3년 전부터 연구 테마로서의 백석 문학이 도리어 왜곡과 변조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현상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그로 말미암은 해독과 폐단을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본 연구는 주로 백석의 문학 연구 현황에 대한 총체적 점검을 시도하면서 동시에 사실의 왜곡과 변조 행태를 적출하고 그것을 비판함으로써 백석 문학 연구 풍토를 올바르게 교정해 가려는 목적을 지향하고자 한다.
이 연구 활동의 범위는 크게 두 가지 성격으로 대별된다. 그 첫 번째 범위는 백석 문학 연구 현황에 대한 총체적 점검이요, 두 번째 범위는 잘못된 사실에 대한 바로잡기의 활동이다. 이 연구의 원활한 수행을 위하여 잘못된 텍스트의 현황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는 <만선일보>에 '한얼생'이란 필명으로 발표된 문제의 네 작품에 대한 분석과정을 통하여 이 작품이 백석의 시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더불어 왜곡된 사실에 기초하여 백석의 시문학을 연구한 종래의 학자 비평가들의 평론과 논문을 지적하여 그 잘못을 비판하고자 한다. 이를 수행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실증주의적 방법, 문헌학적 고증의 방법, 해석학적 방법 등이 다양하게 동원될 것이다.
그 동안 백석의 시작품과 기타 산문 작품들은 연구자들의 각별한 사랑과 선호를 받아왔다. 현재 인터넷의 사이버 공간에는 백석의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의 홈페이지가 마련되어 다중의 애호가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그 애호 세대들은 10대 중반에서부터 회갑을 넘긴 노년층까지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그러나 백석에 대한 맹목적 사랑과 오도된 존경심 때문에 백석의 작품이 아닌 것이 분명한 몇몇 시작품을 백석의 시작품으로 버젓이 유통을 시키고 있음으로써 무수한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행태는 백석 문학의 위상에 오히려 교란과 상처를 주는 요소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본 연구의 모든 범위는 왜곡된 사실 바로잡기로 집중될 것이다.
이 연구를 통하여 기대하는 것은 우선 다음과 같은 확실하고도 분명한 효과이다. 그것은 첫째로 백석 시문학 텍스트의 분명한 확정이다. 둘째로는 왜곡된 문학사적 사실에 대한 수정과 그릇된 자료의 유통에 대한 혼란의 방지를 목표로 한다. 셋째로는 백석의 창작방법론에 대한 엄정한 해석의 틀을 확정하는 필요성에 대한 제기이다. 넷째로는 문학사 서술에 대한 충동적 글쓰기에 대한 경종이다. 다섯째로는 새로 발굴한 확실한 백석의 시작품을 소개하여 문학사 연구를 위한 중요자료로서 제시하고자 한다.
2. 시인 백석은 193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의 시인이다. 1912년 평북 정주에서 출생하였고, 오산학교를 재학할 당시 선배시인이었던 김소월(金素月)에 대한 무한한 흠모의 정을 지니고 시인으로서의 꿈을 꾸게 되었다.
그의 나이 18세 때 조선일보에서 후원하는 해외장학생 선발에 뽑혀 일본으로 유학하게 된다. 주로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서구 문학 풍토와 이론을 학습하는 한편 일본의 시문학에 대한 심도있는 공부의 경험을 갖게 된다. 일본 유학중에는 특히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작품에 대한 무한한 경외심을 갖고 깊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귀국 후에는 조선일보 출판부 기자로 취업하고 이후 시작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백석은 1935년 여름 시 [정주성(定州城)]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고, 이듬해에는 시집 {사슴}을 발간하여 문단의 주목을 집중시켰다. 시인은 이 시집을 통하여 붕괴되어 가는 농촌공동체의 복원을 시도하는 한편, 민족주체의식의 상실과 이질적 외래문화의 침윤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시하였다.
이후 교직생활, 언론인 생활 등을 전전하다가 홀연히 만주로 떠나가게 되고, 해방과 더불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조국은 이미 분단의 슬픈 그늘이 드리우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시인은 부모형제와 벗들이 있는 고향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북한의 현실은 백석이 지니고 있던 범세계주의적 물활론적 가치관과 화합을 이루지 못하고 갈등하게 된다. 1962년까지 북한의 대표적인 문예지인 <조선문학>에 작품을 발표한 뒤 완전 절필로 접어들게 되고, 숙청 당한 후 남과 북의 문학사에서 아주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근년에 접어들어 백석 시인이 1995년까지 북한의 양강도 지역 삼수군 관평리 협동농장에서 거주하다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일부 언론은 보도하고 있으나, 사실의 진위에 대한 확실한 검증을 할 수 없다. 단지 입수되었다고 하는 사진 자료에 의거하여 시인과의 유사성을 추정하고 있으나, 이도 신빙성을 갖기가 어렵고 불확실하다.
백석은 자신의 시작품에서 한반도의 북방 지역 방언을 적극적으로 구사하고 있다. 그것은 시인의 신념에 찬 하나의 창작방법론으로서 제기된 것이다. 조국의 주권이 침략자들에게 빼앗긴 시대에서 민족정서가 물씬 풍기는 방언효과를 시작품 창작에서 구사하고, 그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활동은 시인으로서의 결의에 찬 포부이자 행동이었다.
백석 시인이 주로 자신의 작품에서 완강하게 추구해간 방언효과는 평안북도 지역의 방언이다. 방언에는 그 지역주민 특유의 관습과 정서, 역사성, 기질 따위가 무르녹아 있는데, 이러한 특성들이 시작품 속에서 고스란히 되살아날 수 있었다. 백석은 평북을 중심으로 한 관서지역 방언을 주로 작품 창작에서 활용하되, 나아가서는 자신이 한때 교사 생활을 하던 함흥을 비롯한 관북지역의 방언효과까지도 창작공간 속으로 수용함으로써 방언의 특수성이 지나치게 한 쪽 지역으로만 편중되는 것을 차단하였다. 이런 사실은 통영, 고성 등의 영남 남부지역 방언, 나아가서는 만주지역의 풍물까지 수렴함으로써 시 창작에서의 방언효과가 폐쇄성으로 차단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도를 나타내었다.
백석 시인의 이러한 방언 구사에 대하여 임화, 김문집, 김소운, 오장환 등 여러 비평가들이 긍정적 시각에서 논평을 한 바 있거니와 특히 박용철은 일제의 문화혼혈정책에 대하여 민족언어로써 맞서 길항하려 했던 시인으로 백석을 평가하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방언 효과를 창작에서 적극적으로 구사했던 경우는 소월, 미당, 지용, 영랑, 목월 등을 우선적으로 들 수 있다. 소월의 경우 백석과 동일한 관서지역 방언을 즐겨 채택하였고, 미당과 영랑은 호남지역 방언 효과와 그 음영이 작품 공간에 짙게 깔려 있다. 지용의 경우도 충청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부내륙 지역 방언의 그림자가 은연중에 내포된 사실을 알아챌 수 있다. 이를 통해 보더라도 앞에 예를 든 시인들을 포함한 여러 시인들은 창작에서 방언효과가 지니는 중요성을 진작 간파하고, 방언의 적절한 구사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방법론적으로 응용하고 개발하였다.
일제강점기 전반을 통하여 1930년대가 지니는 시대사적 의미는 대단히 중요하다. 이른바 주권이 늑탈되고 국토와 민족경제의 모든 것이 약탈 유린되던 본격적 시점이 바로 이 시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민족의 주체성이 붕괴되고 조직적으로 망실되어 가던 시기도 1930년대이다. 문학에 있어서의 근대성은 식민지 체제를 배경으로 그 구조와 부합되거나 적절한 타협으로서만 확보되고 보장되던 제한적, 불구적 성격으로 형성 전개되어갔다. 혹자는 이 시기를 일컬어 '식민지 시대 한국문학의 본격적 르네상스'라 일컫기도 하지만 이는 문제의 본질을 인식하지 않은 매우 피상적인 견해에 지니지 않는다. 그리하여 일부의 논자들은 이 시기를 일컬어 무너진 시대, 혹은 붕괴의 시대, 님이 부재하던 시대로 일컫기도 한다.
백석 시인의 주요 활동 시기는 바로 이러한 공간과 맞물려 있다.
문제는 백석 시인이 1930년대의 시대적 특성을 얼마나 정확하게 읽어내고 자신의 작품 형성에 반영했느냐에 관한 부분이 중요 탐색의 대상이 된다. 첫 시집 {사슴}을 발간하던 당시 백석의 연령은 24세였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직후였으므로 이미 일정한 역사의식을 갖춘 나이로 보아야 한다. 물론 백석 시인의 가치관과 그 방향성은 좌파 문학인의 이념성과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르주아 민족주의 계열의 문학인들과도 그리 밀접한 관계를 갖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백석의 사상성을 단적으로 평가 규정하자면 이미지즘적 창작방법론에 공감을 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발표되는 작품의 스타일도 이미지즘적 성향이 농도 짙게 나타나고 있다. 말하자면 사상적으로는 온건중도파, 문학적으로는 이미지스트와 민족주의를 결합한 상태로 설명해낼 수 있을 것이다.
시 [여승]과 같은 계열에서 식민지시대 리얼리즘을 읽어내려는 관점도 있으나, 이를 단적으로 리얼리즘적 측면에서 이해하기란 곤란하다. 당시 백석은 여러 시작품들과 소설을 비롯한 산문작품에서 작고 못나고 가난한 존재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시정신을 지속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작품에서 동원된 언어들은 한결같이 따뜻하고, 다정하고, 자상스런 방언적 어투로써 은연중 시인의 창작방법론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백석 만큼 적극적으로 이러한 창작방법론을 다부지게 끌고 간 시인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흔히 정지용의 시 세계와 비교하기도 하나, 지용의 경우는 동양적 아취가 묻어나는 시풍이 어딘가 고답적이고, 귀족적 문사의 체취를 떨어낼 수 없다. 이 점에서 백석 시의 문체는 한결 민중적이며, 토착성과 밀착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 식민지 문단의 중심에 서 있다가 그 중심에 연연하지 않고 홀연 자리를 박차고 떠나서 방랑의 시간 속으로 이동해 간다. 우리는 시인의 이러한 모습에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의 정신적 결벽을 엿보게 된다.
필자는 수년 전 한 잡지사가 기획했던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대표적 문인 몇 분에 대한 논평을 할 기회가 있었다. 물론 이 논평도 백석 시인과 관련된 것이었다. 필자는 이 논평에서 백석의 시작품이 지니고 있는 현재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회복의 정신으로 규정하였다.
첫째는 해체된 고향의식의 회복과 생태주의적 시정신, 둘째는 잃어버린 인간성의 회복과 생명공동체의 부활, 셋째는 삶의 생기와 낙천성의 회복, 그리고 건강한 주체의 건설, 넷째는 생명력의 회복과 불확실한 시간 속에서의 살아남기, 다섯째는 대화엄(大華嚴) 세계의 시적 구상과 진정한 조화정신의 회복 등이다.
실제로 백석의 시작품을 통독해보면 이러한 회복의 정신이 지속적으로 작품의 저층(底層)에 살아서 약동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백석의 시가 오늘의 우리에게 보내오는 문학적 화두는 일관되게 상실된 것에 대한 회복의 독려이다. 위에서 정리한 바와 같이 현재 우리의 삶에서 가장 결핍된 것은 생태주의적 시정신이 아닌가 한다.
백석의 시작품을 다만 과거의 문화유산으로만 판단하고 해석하려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모든 과거 문화유산이 그러하듯 백석의 시작품도 오늘의 우리 문학이 직면하고 있는 제반 위기를 극복해 가는 데에 하나의 신선한 활력소로 작용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만 할 것이다.
또 하나 더 부가할 것은 백석의 문학이 지니고 있는 독특함 가운데 풍부한 북방정서와 그 활용을 들 수 있겠다. 이것은 분단시대의 한국문학이 드러내고 있는 가장 취약한 부분을 보강시켜 주는 중요한 요소로 응용될 수 있다. 잃어버린 국토의 반쪽이 지니고 있는 민족문화사적 자료와 자질은 분단의 고착화에 따라서 점차 엷어져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식민지시대 이후로 분단시대를 거쳐오면서 끊임없이 쪼개지고 갈라지면서 축소지향으로 일관해온 우리 문학의 정서적 부피가 백석을 비롯한 월북, 재북 문학인들의 작품 복원을 통하여 어느 정도 충족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