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12
10월16일[연중 제28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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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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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w3W3C6zgH5c
[박민재 미카엘 신부 (서울대교구 청소년국 대학교사목부 담당)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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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래전부터 유다인들이 목숨 걸고 준수해오던 정결예식, 사실 시대를 앞선 선구자적인 관습이었습니다. 팬데믹 시대를 거쳐오면서 감염병 예방을 위해 손을 잘 씻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었던 정결 예식은 얼마나 극단적 형식주의로 치달았던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정결 예식은 한마디로 몸을 씻는 것과 관련된 규칙입니다. 특히 자칭 거룩한 존재로 여겼던 바리사이들은 정결례에 관한 규칙을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보니 규칙이 또 규칙을 낳고, 또 규칙을 낳았습니다.
탈무드 제1부의 6권 전체가 씻는 규정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시장에 갔다가 귀가했을 때, 아주 엄한 정결례 규정이 적용되곤 했습니다.
시장을 다녀오면 죄인이나 이방인들과 접촉할 가능성이 있기에, 50리터 이상 들어갈 수 있는 물통에 팔꿈치까지를 넣어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아니면 흐르는 물에 팔을 씻어야 했습니다. 랍비들은 이런 규정을 실천하기 위해 4마일을 걸을지라도 고생으로 여기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바리사이들, 별것도 아닌 손 씻는 예식은 목숨 걸고 지켰지만, 정작 중요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가르침은 소홀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나 몰라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정통 유다 신앙인이라고 자처했습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죄 없다고, 깨끗하다며 어깨에 힘을 주며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그들은 집단 세심증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여겨집니다.
이런 유다인들의 모습 앞에 율법의 주인이자 자유로움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그냥 지나칠 리 만무합니다. 그들이 목숨처럼 소중이 여기던 정결례를 무시하는 정도를 넘어 파기하십니다. 보란 듯이 손도 안 씻고 그냥 음식을 드십니다. 절대로 접촉해서는 안 될 나병 환자의 손을 서슴없이 잡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정결은 내면의 정결, 마음의 정결, 눈의 정결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외적인 것보다는 내적인 것임을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매일 거행하는 미사 안에서도 작은 정결 예식의 순간이 있습니다. 입당 후 곧바로 이어지는 참회 예식의 순간, ‘제 탓이요.’를 세 번씩이나 외치는 그 순간이 어찌 보면 작은 정결 예식입니다.
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성찬의 전례가 시작되기 전, 사제는 복사가 가져다주는 물그릇에 손을 담그면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치며 작은 정결 예식을 행합니다. “주님,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
돌아보니 정말이지 아무 생각없이 습관적으로 손을 씻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손 씻는 예식에 담긴 상징적인 의미가 제 삶 안에서 의식화되고 성취되고 실현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손 씻을 때 마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마음으로, 새 삶을 살겠다는 마음으로 임해야겠습니다.
미사를 봉헌할 때 마다 이 미사 안에 재현되는 파스카 신비를 제 삶 안에서 구체화시키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미사 때마다 어제의 나를 죄와 종살이의 땅 이집트에 내려놓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홍해바다를 건너 약속의 땅이자 구원의 땅 새로운 이스라엘로 넘어와야겠습니다.
기도나 묵상, 로사기오 기도나 각종 전례 행위 등 영적 의무를 실천하는 기회 때마다 매일 회개하고 순간순간 새로워져야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새로운 사람으로 끝없이 거듭나야겠습니다. 이것이 그토록 예수님께서 질타하시는 위선과 형식주의, 율법주의를 극복하는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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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생(人生)은 무엇일까요? 고인이 되신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은 강의 중에 ‘하숙생’을 불렀습니다. 하숙생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 없이 흘러서 간다’ 노래의 가사에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나그네는 짐을 많이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나그네는 욕심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곧 떠나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는 헤어짐에 슬퍼할 필요도 없고, 의견이 다르다고 화낼 필요도 없습니다. 어차피 곧 떠나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는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피곤한 몸을 의탁할 쉼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그네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 수 있다면 마음을 비우고 겸손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도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대구로 가는 기차에서 이런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삶은 계란 있어요.’ 인생은 계란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란은 둥글게 생겼습니다. ‘둥글게 둥글게’라는 동요가 있듯이 인생은 둥글게 사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를 보기 전에 먼저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욱하는 성질 때문에 큰일을 망치는 경우를 봅니다. 조금만 참고, 조금만 기다리고, 조금만 양보하면 오해는 이해로 바뀌고, 원망은 용서로 바뀌기 마련입니다. 계란은 깨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소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 앞에 자유인도, 노예도,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모두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길가의 돌로도 아브라함에게 하신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생명을 귀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계란은 노른자가 있습니다. 인생에 노른자는 성공, 명예, 권력이 아닙니다. 인생의 노른자는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오늘 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시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다 계획이 있으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을 따르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로봇으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계획에 따르는 것도, 하느님의 계획을 따르지 않는 것도 우리의 선택에 맡겨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계획을 따르지 않고, 남도 따르지 못하게 막아버리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야단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들의 위선과 가식을 말씀하십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내면은 비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행동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다.”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사람은 본인도 진리를 보지 못하지만, 남들도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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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42절).
율법의 근본정신을 외면하며, 결과적으로 계명을 어기고 율법을 어기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 같은, 반드시 실천해야 할 중요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주님은 또 잔칫집에서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바리사이들의 교만과 허세를 꾸짖으신다.
그들을 “드러나지 않는 무덤”(44절)이라고 하신다.
그들은 겉꾸밈으로 자기를 감추고 그럴듯한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을 속인다.
입으로는 옳은 말을 늘어놓지만 속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마태 23,27참조).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남들에게만 그렇게 하라고 시키는 교사들이 많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시편 5,10)이라 한 것 같이 그들은 무덤이다.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자 율법 교사들이 이에 대해 분개한다.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45절)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들까지 책망하신다. 그들은 바리사이들과 한통속이었기 때문에
책망을 들어 마땅하였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자기들까지 모욕하는 것으로 들렸다면
그들도 바리사이들과 똑같은 사람들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나와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나와 만나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하느님의 뜻대로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성찰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분을 닮으려고 하는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이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그분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
이 삶을 살려고 하지 않을 때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44절)고 엄한 책망을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주의자 되지 않고 진정한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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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결코 제멋대로 사는 것이 아니며, 율법을 모두 지키는 것보다 결코 쉽지도 않다는 것이 오늘 제1독서를 보면 분명해집니다.
어제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유로워진 사람은 “자기 육[이나] 그 욕정과 욕망”(갈라 5,24)에도 매여 있지 말아야 합니다.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성령께서 보여 주시는 길로 거침없이 달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아직 해방되지 않았고 아직 자유로운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고 말하여야 할 것입니다.
불륜이나 방탕의 충동을 이기지 못한다면, 적개심이나 시기가 일어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이기심을 사랑으로 극복하지 못한다면, 율법에 매여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저 방종한 상태에 있을 뿐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할 수 없거나, 어떤 상황 때문에 기뻐할 수 없거나, 다른 무엇 때문에 평화를 잃는다면 아직도 지배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되려면 자기 육을 십자가에 못 박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도 더 어려워 보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답은 성령입니다.
여기에서 말한 모든 것은 “성령의 열매”(5,22)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자리하시면 이러한 열매들이 맺힐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화답송에서 말하듯이 이 길을 따라간다면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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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금이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살지만, 한때 이것에 민감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특히 학창 시절, 이성에 관한 관심이 생기면서 남들 하는 것을 나도 따라 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유행’입니다. 요즘에도 사람들은 유형을 따릅니다.
그런데 요즘의 유행은 예전과 아주 다르다고 합니다.
경제 잡지 ‘브랜드 아인스’는 소비 상품에 관한 기사를 다루면서 ‘거창하게 떠벌리는 것은
유행이 지났다.’ 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받으며 가치 있다고 간주되는 것은 ‘강제성이 없는 것’,
‘신뢰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소중한 것’이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브랜드의 로고도 거창하
지 않습니다. 눈에 띄지 않거나 아예 없는 것을 선호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물건이 전에는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것이었다면, 이제 눈에 띌 듯 말
듯한 소박하고 간결한 것으로 옮겨졌습니다. 이는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전에는 자기 PR이 중요하다면서 자기를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당연했지만, 이제는 나서지
않고 소박하고 겸손하게 행동하는 성실한 사람이 인기라고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겸손을 보여 주시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하신 것은
엄청나게 시대를 앞서간 행동이었습니다. 세상의 유행을 굳이 따르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이 겸손이라는 ‘유행’은 따라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모습이고,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윗자리에 앉아 인사받기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의 형식주의와 섬김보다 명예를
우선시하는 그들의 태도를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율법학자를 향해서는 다른 이들에게 견디
기 힘든 짐을 지울 줄만 알고 정작 자기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다면서 꾸짖습
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의 자리 자체에 대한 꾸짖음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
는 정말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산 것을 겉으로 보이기에 온 힘을 쏟았다는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자기 구원을 위한 ‘열심’이 아닌, 보이기 위한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겸손의 삶을 살지 못했기에 그들은 결국 주님께 꾸짖음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이들은 이런 말을 이제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교사 중 어떤 사람이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
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구원 범위는 이들 역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회개를 위해 그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겸손의 삶을 살고 있을까요?
보이기 위한 열심을 버리고, 진정으로 주님 마음에 드는
보이지 않는 열심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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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다행이란 목마른 이가 사막에서 우물을 발견한 것이고, 불행이란 너무 좋아 덤벙대다 그 우물에 빠져 죽는 것이랍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는 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꾸중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다행입니다. 아니 그 꾸중은 행복입니다. 그러나 듣지 않는 이에게는 불행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끼는 아들을 꾸짖듯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꾸짖으신다”(잠언3,12). “내 아들아, 너는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히브12,5).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묵시3,19).
복음의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루카11,42).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루카11,46) 라는 예수님의 꾸중은 그들의 회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트집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실천하는 일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높은 자리를 찾고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남에게는 이러저러한 것을 요구하면서도 자기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행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으니 더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들은 의인처럼 보인 죄인이었습니다. 오히려 죄인처럼 보인 의인이 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2,6). 그런데 정작 저 자신이 율법학자요, 바리사이인 것을 잊고 삽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 하신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바리사이들도 율법학자도 예수님의 꾸중을 들을 수 있었으니, 그의 사랑 안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거부하는 것은 주님도 어찌하지 못하셨습니다. 따라서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면 그것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육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무슨 견책이든지 그 당장에는 즐겁기보다는 오히려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책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은 마침내 평화의 열매를 맺어 올바르게 살아가게 됩니다)(히브12,11). 회개로 이끌기 위한 예수님의 표현을 잘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꾸중하거든 행복한 줄 아십시오.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제 길이 바르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잠언12,15). 예수님의 꾸중을 듣는다는 것은 밝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꾸중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달게 받아들이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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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앞 장면에서 정결법의 정신이 사랑에 있음을 밝혀주셨습니다. 이어서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에게 여섯 가지 ‘불행선언’을 통하여 신랄하게 질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 중에서 바리사이들에 대한 세 가지와 율법 교사들에 대한 한 가지를 들려줍니다.
<첫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십일조는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2)
이는 십일조의 율법준수를 부정하거나 율법준수를 질책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결여된 율법준수를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레위기(27,30-33)와 신명기(14,22-29)에 따르면, 주요 곡식과 가축의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이를 더 세분화하여 뗄 나무에까지 십일조를 적용할 만큼 율법준수에는 규정 이상으로 열성적이고 철저하고 엄격했지만, 율법의 정신인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을 행하는 일을 실천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열성은 좋지만, 그릇된 열성은 오히려 위험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본질 위에 서 있는 열성이어야 합니다. 곧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보다, 그 정신인 의로움과 사랑을 행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루카 11,43)
사람들이 그들에게 윗자리를 내어주고 먼저 인사하는 것은 존경의 표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맡은 바 종교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특권적 우월의식과 교만한 과시욕에 몰두했었나 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의 특권의식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사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윗자리가 아니라, 그 자리에 합당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존경받기보다 존경하고, 인사받기보다 인사하고, 섬기받기보다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드러나지 않은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으면서 무덤인 줄을 모른다.”(루카 11,44)
민수기(19,16)에 따르면, 무덤에 닿으면 칠 일간 부정하기 때문에 회칠하여 표시함으로써 사람들이 불결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마치 표시하지 않은 무덤처럼, 자신의 부패를 은폐시키고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사실, 악보다 더 추악한 것은 마치 선인 양 자신의 얼굴을 꾸미고 사람들을 속이는 거짓된 선일 것입니다.
<네 번째> 불행 선언은 율법 교사들에 대한 것입니다.
“너희 율법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루가 11,46)
율법 교사들의 언행의 불일치에 대한 질타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면서도 자신들은 율법을 실행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는 짐을 지웠던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보다도 조상들의 전통과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존중했고, 그것을 지나치게 세분화하여 모세의 율법 외에도 613개의 규범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결국, 백성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짐을 지워놓으면서도 자신들은 스스로 지키지는 못했던 것입니다(마태 23,3).
사실,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들은 그 당시의 종교적 길잡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은 자신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받은 많은 사람들까지도 파멸로 인도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 참된 신앙인이요, 신앙의 참된 길잡이로 살아가라는 강력한 경각심을 일깨워줍니다. 아멘.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2)
주님!
제가 행복하지 못한 것은
당신을 믿으면서도 의로움과 사랑을 행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불의와 부패 속에서 행복이 있을 수 없고,
무관심과 냉대 속에도 행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당신 뜻을 행함으로 진정한 행복을 얻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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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루카 11, 42)>
행복으로
초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작은 실천이
모여
사랑이 되고
행복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사랑이 없는
행복의 반대쪽
삶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이
하느님보다
더 커졌기
때문입니다.
욕심과
교만으로
우리는 행복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따라갑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행복의 원천인
하느님 사랑을
향합니다.
지혜도
행복과 함께
성장해야
합니다.
실천을
돌보지 않으면
행복은 금방
사그라듭니다.
그래서 욕심과
하느님 사랑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함께 가는 길이
사랑이며
행복입니다.
그의 생활이
그의 삶이며
그의
행복입니다.
우리의 행복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보고 만나는
은총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기도로
기억해야 할
하느님을
기억하며
감사와 사랑을
실천하는
가장 행복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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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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