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비무의 네가지 구(四句)로 구성되는 논리적 사고의 조합이다. 이 사구는 어디로부터 유래한 것일까? 학계에서는 이게 변증법이다, 아니다 등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지만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선 절대와 상대에 대한 논의가 우선 필요하다.
절대란 마주한 것이 끊어져 있는 것을 의미하며, 상대란 마주한 것이 서로 짝지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분별을 기본적 작동원리로 하는 우리의 인식은 상대하고 있는 것 중 어느 하나만을 실재한다고 받아들이는 구조를 취한다. 이것은 칸트의 이율배반에서 (1) 시초와 한계의 유무 (2) 단순과 복합, (3) 자유와 필연, (4) 신 존재 여부 등과 같이 경험을 초월하는 상반된 두 개의 명제가 서로를 전제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융화되지 않는 점을 볼 때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안다는 것은 절대를 분별한 상대의 일면만을 육진(색성향미촉법)으로 육근(안이비실신의)이 받아들여 육식(안이비설신의)으로 저장하는 과정을 통해 이뤄지는 인식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인식을 통해서는 절대를 결코 알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식은 절대의 구성요소인 상대성의 한 측면만을 대상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식할 수 없는 절대는 왜 필요한가?
절대는 상대를 낳은 본체이기 때문에 논리상으로도 상대성의 전제로 설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대승기신론에서 진여문(眞如門)이 체(體)가 되어 생멸문(生滅門)을 낳는 점과 칸트 철학에서 물자체가 본체가 되어 우리의 경험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현상계를 낳는 점 등으로부터 알 수 있다. 절대는 상대를 낳기 때문에 절대는 부모로, 상대는 자식으로 비유할 수 있고 이것은 주역에서 건곤의 부모괘와 자식괘로 형상화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인식은 상대성을 띨 수밖에 없으므로 절대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다만 절대는 깨달음 즉 수행을 통한 자각 또는 부처님과 같은 성현의 말씀에 대한 신앙을 믿음]을 통해 내면화하거나 체득하는 것이다. 결국, 인식 대상이 아닌 절대는 인식을 가능하게 하지만 인식으로는 이를 알 수 없으므로 인식 이전의 심적 요소인 자각이나 믿음을 통해 접근이 가능하다.
부처는 불교 사구 명제를 분별을 헛된 망상에서 비롯된 희론 내지는 형이상학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 하였고, 이는 십사무기https://naver.me/5GhwSUiu,https://naver.me/5jWsdNMn로 알려져 있다. 사구의 네 가지 형식은 분별된 상대성 요소들로부터 절대를 나타낼 수 있는 최소한의 경우의 수라고 할 수 있다.
즉 절대에 대한
1. 최초 인식인 유(有), 2.이에 대한 부정 인 무(無), 3.긍정과 부정을 합한 역유역무(亦有亦無) , 4. 다시 긍정과 부정의 합에 대한 부정인 비유비무(非有非無)
하나의 개념(A), 또는 서로 대립되는 두 개념을 기준으로 해서 모든 현상을 판별하는 네 가지 형식. 곧, 제1구 'A이다' 제2구 '비(非)A이다', 제3구 'A이면서 또한 비(非)A이다', 제4구 'A도 아니고 비(非)A도 아니다'. 예를 들어 유(有)와 무(無)를 기준으로 하면 유-무-역유역무-비유비무가 성립되고
일(-)과 이(異) 상(常)과 무상(無常), 자(自)와 타(他) 등의 경우에도 사구가 성립됨 불교의 진리는 모든 분별이 끊어진 상태이므로 사구백비(四句百非)라고 하는데 유와 무 등의 모든 개념 하나하나에 비를 붙여 그것을 부정하는 것을 말함 곧, 불교의 진리는 사구의 분별도 떠나고 백비의 부정도 끊어진 상태라는 뜻.
위 네 가지 조합이 산출되면 절대가 단계적으로 형상화되는 것이다. 네 단계를 거치면 절대를 나타낼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가 제시된다.
제4구는 인식에 의하여 제시된 제1구부터 제3구까지를 모두 부정한 것으로 인식의 한계를 초월하는 명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