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난징시 동부 Xiaohang언덕에 위치한 메이링궁(The Meiling Palace)은 하늘에서 보면 거대한 목걸이 모양을 띄고 있다.
중국 국민당이 난징을 수도로 삼았을때 사용했던 사무실 겸 장세스(장개석)와 송메이링 부부의 별장이었다.
장제스 주석이 대만으로 망명하기 전인 1949년까지 거주했던 집으로 1931~1934년 사이에 지어졌다.
이 궁전이 유명한 이유는 궁전으로 가는 주면 조경이 목걸이와 닮게 설계됐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보면 그 모습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 지역의 소문에 의하면, 장제스가 그의 아내 송메이링의 생일 선물로 부부간의 사랑의 상징으로 이렇게 설계됐다고 한다.
실제로 목걸이 형태는 별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세워진 노란잎 나무들로 구성되어 있어 가을철이면 노랗게 더욱 선명하다.
장제스가 타이완으로 망명한 후인 1950년 메이링궁은 Zhongshan Mountain국립공원으로 이양됐다.
2012년까지 도시 보건부와 대형 호텔 기업을 포함한 여러 행정부서가 사용해왔다. 빌라는 새롭게 리노베이션된 후 2013년 10월 일반인들에게 공개됐다.
현재 메이링궁은 이 지역 새로운 관광지로 탄생되었다.
지하1층과 지상3층으로 이루어진 빌라로 지붕은 녹색 청기와로 덮여있고, 처마는 천마리가 넘는 봉황이 새겨져 있다.
겉모습은 동양적인 색채를 띄고 있으면서 내부는 서양식으로 꾸며졌다.
쑹메이링 (宋美齢, 송미령)
1897년 3월 5일 생 - 2003년 10월 23일 사망
1897년(출생년도에 관해서는 1898년, 1901년 등 각 설이 있다)에 청나라 상하이에서 쑨원의 후원자였던 아버지 쑹자수의 3녀(3남 3녀 중 4번째)로 태어난 쑹메이링은 위로 쿵샹시의 아내가 된 쑹아이링, 쑨원의 아내가 된 쑹칭링과 함께 쑹가(宋家) 세 자매로 유명하다.
9살 때 언니인 쑹칭링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하여 조지아 주 메이콘의 교급주택가에서 생활한 그녀는 이 때 익힌 유창한 영어실력을 바탕으로 후에 정치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그다지 열심히 공부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학내행사에서는 학생을 대표하여 기수를 맡거나 치어리더로 활동했다.
조지아 주의 고교를 졸업한 후 메이콘의 웨즐리안 여자대학에서 1년간 재학하면서 메사추세츠 주의 명문 여자대학인 웰즐리 대학에 입학해 1917년에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 때 미국계 프리메이슨회의 관계로 <이스턴 스타>의 플래티넘 회원이 되었다고 알려져있는데 중국으로 귀국한 후 포교활동에 열심이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중국 국내에서 기독교 포교활동에 종사했다.
◆ 장제스와 결혼식을 올린 쑹메이링의 모습
1920년에 훗날 중화민국 국민당의 당수가 되는 지도자인 장제스(蒋介石)와 상하이 시내의 쑨원 자택에서 만난 후 약 7년간의 교제를 거쳐 1927년 12월 1일에 결혼식을 올린 쑹메이링은 당시 중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두 사람의 결혼소식은 뉴욕 타임즈의 1면을 장식했었는데 일부는 정략결혼으로 비유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일반적인 연애결혼이었다.
12월 1일에 거행된 결혼식은 쑹가의 저택에서 기독교 방식으로 열렸는데 장제스가 이혼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목사는 부르지 않고 중화크리스트교 청년회 전국협회 총회장을 대리인으로 세운 후 식을 거행했다.
한편 장제스는 망명지였던 일본에서 결혼식을 올린 쑨원을 모방하여 결혼식을 일본에서 거행하려고 생각했었지만 중일간 관계악화와 어머니의 반대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
피로연은 상하이의 공동조계에 있었는데 상하이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고급호텔이던 따후아 반점(大華飯店, 마제스틱 호텔)내의 가장 큰 연회장에서 열렸다. 여기엔 고인이 된 쑨원의 초상화와 중화민국의 국기, 당기가 장식되었으며 참례자는 일본과 독일, 미국 및 벨기에를 비롯한 각국의 총영사와 중화민국의 정재계 유력자 등 1,300명을 넘었다.
그 후 쑹메이링은 장제스와 함께 저장성(浙江省)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한편 장제스는 쑹메이링과의 결혼당시 양친에게 승낙을 받기 위하여 첫 아내와 많은 애인들과 헤어진 후 쑹메이링과 그 양친에게 같은 기독교로 개종하겠다는 약속을 하지는 않았지만 장제스는 결혼식 후인 1929년에 상하이의 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었다.
1943년에 미의회에서 연설중인 쑹메이링의 모습
정제스는 결혼 이듬 해인 1928년에 국민당군 총사령관의 위치로 돌아와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의 주석, 국민정부 주석이 되었는데 쑹메이링도 1930년과 1932년 사이에 장제스의 지원아래 중화민국 입법원의 위원이 되었으며 또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의 회원이 되어 국민당 내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936년 12월에 일어난 시안사변에서 장쉐량의 군에게 체포되어 감금당한 장제스의 해방을 위해 스스로 시안으로 날아가 장쉐량과 담판하여 장제스의 해방을 촉구함과 함께 국공합작으로 항일통일전선을 장제스에게 체결하게 하는 등 평생동안 장제스의 정치적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군사원조 획득을 목표로 국민당 항공위원회 비서장의 직함으로, 장제스의 통역으로서 중국주재 미국대사관 무관이던 조셉 스틸웰과 미육군항공대의 셰넌트 대령과의 협상에 동석하여 미국으로부터 유무형의 군사지원을 이끌어 내 중일전쟁부터 제 2차 세게대전의 초기에 걸쳐 일본군과 대치했던 플라잉 타이거즈의 설립과 중국공군의 현대화에 기여했다.
자매가 웰즐리 대학의 졸업생이었기에 <타임>과 <라이프>지의 발행자였던 헨리 루스는 중일전쟁 기간동안 반일 캠페인과 함께 대중 지원활동을 벌여 타임지의 1937년도판에 장제스를 소개하면서 미국시민들의 중국지원을 호소하는 등 쑹메이링에게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1949년, 장제스와 함께 대만에 도착한 쑹메이링의 모습.
쑹메이링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과 그의 아내인 엘레노어와의 관계를 구축하여 중일전쟁으로부터 제 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대일정책에도 큰 영향을 행사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11월부터 1943년 5월에 루즈벨트 대통령의 초빙으로 미국으로 건너 간 쑹메이링은 미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스스로 영어로 연설하며 항일전의 원조를 설파했다.
특히 1943년 2월 18일에는 워싱턴의 미연방의회에서 보석으로 만든 중화민국 공군의 뱃지를 부착한 차이나드레스 모습으로 항일전의 협력을 요구하는 연설을 하여 연방의원들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리고 항일전의 의연금 모금을 위해 캘리포니아 주 헐리우드에서 연설시엔 메리 픽포드, 험프리 보가트, 캐서린 헵번, 잉그리트 버그만 등의 유명배우들의 지원도 받았다.
또 항일전의 상징적 존재로서 장제스와 함께 타임지의 표지 등에도 실리면서 제 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중화민국의 퍼스트 레이디로, 그리고 영어를 하지 못하는 남편 장제스의 비서 겸 중화민국의 로비스트로 활동한 쑹메이링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에서 일본에 대한 세간의 여론을 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 쑹메이링과 루즈벨트
그리고 1943년 11월에 카이로에서 열린 장제스와 루즈벨트, 처칠과의 회담 시 전후 대일처리문제를 결정할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와 동석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장제스와 쑹메이링은 루즈벨트 대통령과 친교를 유지했는데 1945년 4월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후임인 트루먼이 취임하자 관계는 소원해졌다.
8월에 일본의 포츠담 선언 수락으로 중국 내의 일본군은 항복하여 순차적으로 철수했는데 얼마 후 소련의 지원을 받은 중국 공산당과 사이에서 국공내전이 발발했다. 장제스는 군사원조를 트루먼 대통령에게 의뢰했지만 소련의 스파이가 정권내부에 깊이 침투해있던 트루먼 정권은 장제스와 거리를 두기 시작해 역으로 군사원조를 삭감했다.
동북지역을 상실한 후 국민당군은 패주를 거듭하여 1949년에 장제스와 쑹메이링은 국민당 간부들과 함께 타이완 섬으로 후퇴하여 타이페이(台北)를 임시수도로 정했다. 중국대륙에서는 베이징(北京)을 수도로 하는 중국 공산당의 일당독재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 때 언니인 쑹칭링은 중화인민공화국에 협력하여 부주석이 되었기에 두 자매의 관계도 끊어지고 말았다.
* 쑹메이링과 관련한 에피소드
1. 미국유학시절, 쾌활했던 쑹메이링은 때때로 장난을 즐겨 이를 무마하기 위해 교모한 언변으로 자주 위기를 벗어났다고 한다.
친구와 싸워 교사에게 혼날 때에도 <아녜요 선생님, 전 끝을 봐야 즐겁답니다>라며 애교있게 대답했다고 한다.
2. 장제스의 해방을 위해 장쉐량이 그를 구금한 시안으로 날아갔을 때 비행기가 착륙함과 동시에 핸드백에서 권총을 꺼내 들고는 <만약 장쉐량이 나를 체포한다면 이 권총으로 그놈을 쏠테야>라고 말하면서 만약 장제스가 풀려나지 않고 자신도 구금될 경우 장제스와 자살할 각오였다고 밝혔었다.
3. 1938년 1월 5일에 미국의 지인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속엔 당시 난징에서 탈출한 쑹메이링에 의해 쓰여진 상하이 - 난징사이의 일본군 행태를 도살자라 묘사한 기술이 있다. 그리고 미국에 주문한 비행기가 오지 않는다면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4. 아시아의 맹령한 여성을 가르키는 <드래곤 레이디>는 1930년대에 영어로 정착했다. 이것은 마담 창카이섹(장제스의 광둥어 발음)으로 알려진 쑹메이링이 미국 및 유럽에서 활발히 활동한 시기로 이전에 드래곤 레이디를 칭할땐 청나라의 서태후를 지칭했었다.
같은 시기 미국에서 유행한 만화 <테리와 해적들>에서 주인공의 위기를 구하는 마녀 <드래곤 레이디>는 쑹메이링을 모델로 했다.
5. 1942년부터 1943년에 걸쳐 미국체재시 백악관이 수배한 경호원을 장사치로 이용하여 백악관의 면 시트를 하루에 4번 교환한 후 이를 타임지의 창업자 헨리 루스가 설립한 지원단체인 <유나이티드 차이나 릴리프>의 기부금으로 헌납했지만 모피와 보석 등을 구입하기도 하여 공사를 혼동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6.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시어도어 화이트는 쑹메이링을 가리켜 <냉담한 애인타입의 여성이었다>라고 밝혔는데, 루즈벨트 대통령의 차남인 엘리엇 루즈벨트는 <장제스 부인은 남자의 관심을 얻는 것에만 열중이어서 지금은 그것이 제 2의 성격으로 굳어져 있다.
원래 성격은 매우 무서운 자로 보는데 솔직히 말해 두렵다>라고 증언했다.
7. 만년에 쑹메이링은 중국화의 그림과 산보로 일과를 보냈으며, 교회의 예배는 거르지 않고 꼭 참석했다고 한다.
8. 쑹메이링이 미국에서 다시 대만으로 왔을 때 중화민국 정부는 쑹메이링의 전용차로서 캐딜락 리무진을 타이페이에 대기시켰다.
이 차는 현재 타이페이 교외에 있는 장제스와 쑹메이링의 사저인 사림관저(士林官邸)에서 관광객을 위해 공개되고 있다.
9. 현재 중국 난징시 교외에 있는 장제스와 쑹메이링이 주거했던 국민정부 주석공저, 일명 메이링궁(美齡宮)은 관광객을 위한 명소로 공개되고 있다.
10. 쑹메이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원활동으로 인하여 1966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았다.
◆ 메이링궁 내부 모습
남편들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쑹(宋)씨 세 자매의 운명도 엇갈렸다. 항일전쟁 발발 뒤 1942년 1월 전시수도 충칭(重慶)에서 함께한 쑹씨 세 자매. 왼쪽부터 메이링,아이링, 칭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