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와 샴왕
원제 : Anna and the King of Siam
1946년 미국영화
감독 : 존 크롬웰
원작 : 마가렛 랜든
출연 : 아이린 던, 렉스 해리슨, 리 J 콥
린다 다넬, 게일 손더가드
아카데미 2개부문 수상(미술, 촬영)
영화 '왕과 나'의 경우는 단지 마가렛 랜든의 소설 '안나와 샴왕'을 뮤지컬 버전으로 영화화 한 작품으로 알려졌습니다. 잘 만든 영화고 버라이어티한 재미와 데보라 커, 율 브리너 라는 명배우들의 공연이 시네마스코프 대형 칼라화면에 화려하게 펼쳐졌으며 쉘 위 댄스 라는 곡도 유명합니다.
사실 이 영화만 보았을때는 그다지 이 샴(현재의 태국)의 역사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하진 않습니다. 워낙 뮤지컬의 화려함과 대 배우들의 경연에 '역사'는 가리워져 있으니까요. 영화는 감동 보다는 오락을 택했고, 역사 보다는 화려함과 볼거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헐리웃 뮤지컬 영화가 얼마나 버라이어티한 힘을 갖고 있는지를 톡톡히 볼 수 있는 영화였고, 대머리 스타 율 브리너의 화려한 신고식이 된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왕이 죽고 끝나는 약간 슬픈 내용조차도 다소 코믹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왕이 죽는 장면에서 그다지 숙연함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내용도 미개하고 야만적인 아시아의 어느 나라에 영국같은 선진국이 가서 한 수 가르치는 느낌이 강하죠.
'왕과 나' 보다 10년 먼저 등장한 원조 영화가 있습니다. 원 소설의 제목 그대로 '안나와 샴왕' 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 역시 '왕과 나'보다 훨씬 먼저, 6.25 전쟁 이전인 1949년에 우리나라에 개봉되었습니다. 49년 1월에 '앤나와 섬라왕'이라는 제목으로 그리고 11월에 '안나와 샴왕'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개봉되었습니다. 뮤지컬 버전 보다 10년 먼저 만든 역사영화이며 음악이나 노래가 등장하지 않는 순수 드라마 장르입니다. 볼거리보다는 왕과 이방인 여성의 이야기와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서 더 발전을 꾀하는 샴의 긍정적인 역사를 제법 감동스럽게 다루고 있습니다.
샴에 입국한 안나와 그녀를 맞이한 왕의 충복 쵸쿤
주로 서부극이나 사회물에서 악역이미지가 있던 리 J ,콥이
이렇게 동양인으로 분장한 모습이 새롭다. 아마도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젊은 리 J 콥의 모습일듯.
익숙치 못한 나라에서 처음에 매우 당황하는 안나와 아들
몽꿋왕으로 등장한 렉스 해리슨
그래서인지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아마도 태국의 역사에 좀 더 관심을 갖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왕과 나' 리뷰에서도 제가 잠깐 언급했듯이 태국은 아프리카, 아시아를 향한 열강들의 침략 전쟁에서 절묘한 중재외교를 통하여 식민통치를 받지 않은 보기 드문 국가였습니다. 어찌 보면 그 배경이 슬쩍 나오는 것이 이 원작입니다. 그리고 이 '안나와 왕'의 이야기는 영화로서의 변형이 있었지만 실화를 어느 정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의 캐릭터가 되는 중요한 두 인물 왕과 안나는 실존인물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구체적으로 왕의 이름이 등장하지요. 바로 몽꿋왕으로 더 알려진 라마 4세 입니다. 라마 4세는 라마 1세의 손자이자 라마 2세의 아들인데 부왕이 죽은 후 왕위에 오르지 않고 후궁의 아들이 대신 왕위에 올라 라마 3세가 되고 몽꿋은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라틴어, 영어 등 서양 학문과 언어를 배웠다고 하지요. 놀랍게도 영화에서 이런 역사적 사실이 슬쩍 언급됩니다. 리 J 콥이 연기한 충신인 쵸쿤이 왕과의 대화에서 '승려로 그냥 살아가게 하지 않고 이곳에 데려와서 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이 몽꿋왕의 삶을 안다면 그 대사가 굉장히 역사적으로 의미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드디어 왕을 대면하는 안나
렉스 해리슨이 평소 이미지와 다르게
익살스러운 연기를 보여준다.
낯선 나라의 문화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는 안나
관능적이고 도도한 왕의 애첩 텁팀을 연기한 린다 다넬
그 몽꿋왕 재위 시절에 샴에 초청되어 가정교사를 지낸 안나 레오노웨스는 실제로 군인과 결혼했던 여인으로 남편과 사별하고 샴으로 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왕과 왕자들을 가르치고 샴의 선진교육에 헌신한 인물입니다. 영화에서처럼 실제로 왕 앞에서 떳떳이 진실을 이야기하고 큰 도움을 주었던 당찬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태국의 역사에서 꽤 존경받는 이방인 여성일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인이면서 우리나라에 헌신한 이방자 여사처럼 말이죠. 이렇게 외국 여성까지 데려와서 변화하는 근대의 문물과 서구문명을 받아들이고 왕자의 선진교육에 힘쓰며 외교와 발전에 힘을 쓴 몽꿋왕은 태국 역사에서 굉장히 위대한 왕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즉 유럽 열강들의 식민정책시절이라는 아시아로서는 매우 어려운 시절에 과감한 서구문화의 도입과 적극적 외교를 통해서 독립을 지켜낸 인물입니다. 그의 정책에 의하여 교육을 받은 왕자도 몽꿋왕 사후에 왕위를 물려받아 라마 5세가 되어 40년이 넘는 재위를 했으니 몽꿋왕은 자신과 후대왕까지를 통해서 태국의 역사를 굳건히 한 인물이 되는 셈입니다.
자 이런 태국 역사에서는 꽤 의미가 있는 왕인데 '왕과 나'에서는 굉장히 희화화 했으니 그 영화가 태국에서 배척당한 것도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왕과 나' 영화는 꽤 화려하게 잘 만든 볼거리가 풍부한 명작이었지만 태국 입장에서는 기분나쁜 작품일 수 있지요. 1946년 '안나와 샴왕'에서도 초반부에 왕에 대해서 다소 희화화된 연기를 렉스 해리슨이 하고 있긴 하지만 후반부로 가면 꽤 내용이 달라집니다. 46년 원작과 56년 뮤지컬 리메이크 작을 비교해 보면 앞의 절반은 아주 유사하고 뒤의 절반은 꽤 다릅니다. 56년 작품이 성공적인 외교 만찬을 끝내고 텁팀(리타 모레노)의 비극이 나온 후 후다닥 이야기가 끝났다면 46년 작품은 그 외교만찬 전후로 이야기가 많이 달라지고 있고 이후의 이야기의 비중도 꽤 높습니다. 후반부의 전개로 보면 아마도 태국에서는 이 46년 작품은 꽤 좋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왕의 여러 자녀들을 교육하는 안나
안나와 왕은 남녀의 차이, 문화의 차이로 늘
사사건건 부딫치는데....
중요한 외교사절을 맞이하게 되면서
안나에게 큰 도움을 받는 왕
왕의 무대포적 뚝심과 안나의 헌신이 결합되어
좋은 결과를 낳는다.
남편과 사별한 뒤 아직 어린 아들을 데리고 샴에 입국한 안나(아이린 던), 그녀를 맞이하러 온 대신인 쵸쿤(리 J 콥)의 상의를 벗은 복장에서 벌써 난감하고, 왕실에 도착한 그녀에게 살 집을 주겠다는 약속도 이행하지 않은 채 하염없이 며칠을 기다리게 하는 그 낯선 나라의 분위기에 안나는 매우 당혹해 합니다. 몽꿋왕(렉스 해리슨)을 겨우 만나게 된 그녀는 여성을 무시하는 매우 권위적인 왕과 힘겨루기를 시작하고 두 사람은 각자의 입장을 고집하면서 사사건건 대립합니다. 우여곡절끝에 왕의 아이들과 여러 왕비들을 교육하게 된 안나는 몇 차례 포기하고 돌아가려고도 하지만 충성스런 쵸쿤의 간청으로 남게 됩니다. 결국 어렵사리 왕실에서 교사로 자리잡게 되고 왕과 안나는 서로 까다롭고 상이한 부분때문에 종종 부딫치지만 왕은 안나만이 자기에게 올바른 진실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안나 역시 왕이 나름 열심히 배우고 노력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중요한 외교문제에 봉착하였을 때 왕은 안나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성공적으로 외교 만찬을 끝내게 되고 두 사람의 관계는 급격히 호전되는 듯 싶지만 왕의 애첩이던 텁팀의 비극적 사건이 발생하면서 왕실에 대한 안나의 마음은 다시 냉랭해집니다.
여기까지는 56년 작품 율 브리너의 '왕과 나'와 매우 흡사합니다. 노래와 춤이 빠지고 '왕과 나'에서 아주 길게 할애했던 연극 공연장면도 굉장히 축소되었습니다. 왕과 안나의 정신적 교감이 높아지는 것도 '왕과 나'에서는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을 통해서 표현했지만 46년 원전에서는 함께 같은 그릇의 밥을 나누어 먹는 장면으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그 외 세부적인 내용에서 모세 이야기와 만찬 장면 등 매우 비슷한 부분이 많습니다. 왕이 안나에게 머리를 더 아래로 하라는 이야기를 하는 부분도 비슷하고.
텁팀의 사건부분에서 두 영화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텁팀의 사건의 전개와 결말도 완전히 다르고 애초에 텁팀의 캐릭터도 도도하고 도발적인 여성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왕과 나'에서 텁팀의 착하고 지혜롭던 부분은 왕의 첫번째 왕비의 캐릭터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왕과 나'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안나의 큰 비극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왕의 죽음도 수년이 흘러서 안나가 샴에서 존경받을 만한 헌신과 변화를 이끈 이후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안나의 헌신, 그리고 왕이 죽어가면서 안나에게 전하는 대사가 굉장히 의미있고 감동적이며, 아들인 왕자가 왕위에 오르면서 보여지는 부분도 꽤 감동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에 등장하는 왕은 율 브리너 처럼 헐벗은 복장이 아니라 제대로 갖추어 입은 복장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실제로 라마 4세는 격식있는 복장을 입었다고 합니다.
'왕과 나' 에서의 장면과 아주 유사했던 외교만찬 장면
왕과 안나는 같은 그릇의 음식을 함께 먹으면서
드디어 깊은 신뢰관계에 이르게 된다.
모처럼 돈독한 신뢰를 구축하게 된 왕과 안나를 다시
멀어지게 만든 텁팀의 비극적 사건
이렇듯 텁팀 사건 이후에 영화는 위기를 맞는 내용도 있지만 결말은 꽤 감동적이고 잔잔하게 다루어지고 있고, 안나의 헌신에 대한 가치, 그리고 서구문물을 받아들이고 변화하려는 왕의 모습과 그의 정신을 계승하고 이어가려는 라마 5세의 밝은 미래까지 꽤 긍정적으로 태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56년 작품에 비해서는 좀 더 역사적인 가치 부분에서 비중을 두고 있는 셈입니다. 안나가 왕실에 적응하고 눌러 앉게 되는 부분도 훨씬 더 많은 우여곡절을 만들고 있고.
56년 영화만큼 유명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지만 드라마 장르가 강했던 40년대 헐리웃 스튜디오 전성기 시절 영화 답게 나름 깊이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후반부에 두 가지 비극이 발생하지만 그런 부분을 딛고 희망적인 샴의 미래를 보여주는 장면과 그 내면에 안나의 큰 헌신과 공헌이 있다는 부분까지를 감동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나름 괜찮은 영화입니다.
안나 역에는 '도버의 흰 절벽' '신혼 여행기' ''회상의 소야곡' 등으로 알려진 30-40년대의 주연 여배우 아이린 던이 맡았는데 이런 연기 전문 배우라고 할 수 있는 그리어 가슨이 맡았어도 매우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물론 아이린 던도 품위있는 모습으로 잘했지만. 그리고 중요한 샴 인물들은 모두 헐리웃 유명 배우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자왕 리처드' '클레오파트라' 등으로 알려진 영국 배우 렉스 해리슨이 몽꿋왕 역할이고 그의 충성스런 대신 쵸쿤 역에는 50년대 악역 연기로 많이 기억되는 리 J 콥이 등장하는데 제가 본 그 배우의 모습 중 가장 젊은 모습입니다. 왕의 애첩이면서 비극적인 사건의 주인공이 되는 텁팀 역에는 '혈과 사' '황야의 결투' '쾌걸 조로'의 린다 다넬이 등장합니다. 이들 유명 배우 외에 꽤 지혜롭고 인내심 있는 어진 왕비 역도 미국 배우인 게일 손더가드가 연기하고 있습니다. 뭐 이렇게 주요 배역을 서양권 배우들이 연기한 것은 당시의 상황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지금이야 동양권배우들이 많이 헐리웃 영화에 포진하고 있지만)
아주 현명하고 참을성 있는 어진 왕비를 연기한
게일 손더가드. 우리나라의 현모양처를 연상케 한다.
총명한 왕자와 안나의 교감
'왕과 나'보다 샴을 훨씬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죽을 때가 된 장면에서 제법 초췌한 모습으로 분장한
렉스 해리슨
매우 감동적이었던 후반부 장면
워낙 유명한 '왕과 나'에 가려서 많이 알려지지 않았고 저평가된 부분이 있지만 이 영화도 나름 아카데미 흑백촬영상과 흑백미술상 등을 받은 준수한 작품입니다. 우리나라에 개봉되었지만 방영된 기억이 없어서 많이 모르는 작품인데 놀랍게도 '애나 앤 더킹' 이라는 제목으로 꽤 오래전에 DVD 출시가 되어 있습니다. 나름 '왕과 나'와는 다른 면으로 재미를 전해주는 40년대 고전으로 1.37 : 1 비율의 흑백영화입니다. 아마도 고증면에서는 '왕과 나' 보다 더 사실적인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ps1 : 렉스 해리슨은 비교적 진지한 역할로 많이 기억되는 배우인데 여기서는 많이 코믹스런 연기를 합니다. 율 브리너 만큼은 아니지만 '기타등등'이라는 단어는 이 영화에서도 많이 쓰이더군요.
ps2 : '왕과 나'에서는 왕과 안나의 나이가 비슷했고, '안나와 샴왕'에서는 아이린 던의 실제 나이가 렉스 해리슨보다 훨씬 많았는데 실제 역사에서는 라마 4세가 그렇게 젊지 않았고 왕위에 오른 나이도 이미 47세였고, 1868년에 사망했을때의 나이가 64세나 되었습니다. '왕과 나'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더기 갑작스럽게 죽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지요.
ps3 : 이 영화의 실존 인물들에 대한 설명과 사진은 여기를 참조하세요.
https://blog.naver.com/lingxua/140048701024
[출처] 안나와 샴왕(Anna and the King of Siam 46년) 왕과 나의 오리지날 원전|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