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캐럴> <전당포> 그리고 퀸시 존스
<전당포>
머리가 굵어졌다고 어머님께서 애지중지 물려주신 모태신앙을 저버릴 무렵 내 눈에 기이하게 보이기 시작했던 것은 크리스마스의 풍경이었다. 인간들의 죄가 도무지 씻겨질 수 없을 만큼 흉악하고 더러워지자 신께서는 당신의 독생자를 산 제물로 바칠 수밖에 없었다면 과연 그날은 그토록 기쁜 날일까? 맨날 빤질빤질 놀기만 하는 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시골에 사는 아버지가 식구처럼 키우던 소를 팔았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숙연해지는 게 사람의 마음인데 신께서 인간의 죄악을 보다보다 못해 번제물로 바칠 계획으로 순결한 아들을 이 땅에 내려보냈다면 그날을 기리는 우리는 과연 기뻐할 수 있겠는가? 마치 어린애들처럼 ‘와~ 죄 사함 받았다!’라고 즐거워하며 선물 주고받고 애인 만나서 밤새 놀려고 하는 이 풍경은 그야말로 엽기적이지 않은가.
물론 크리스마스에 대한 나의 이런 삐딱한 시선은 나이가 들면서, 풍습이라는 것이 원래 그 기원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모습으로 고착화된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점점 무뎌져갔다. 세상일이라는 게 뭐 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청소년기에 느꼈던 크리스마스에 대한 불편한 기분을 대략 10년 전에 또 한번 마주했다. 바로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김영진 옮김, 비룡소 펴냄)을 읽으면서였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로, 만화로 재미있게 봐왔던 <크리스마스 캐럴>이 중년 남자의 눈에 뭔가 덜거덕거리며 걸렸던 것이다.
오로지 믿는 것은 돈
알다시피 이 이야기는 19세기 런던에서 사업(아마도 대부업?)을 하던 냉혹한 수전노 스크루지가 7년 전에 죽은 자신의 동업자 말리의 혼령과 과거, 현재, 미래의 유령을 크리스마스이브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연이어 만나면서 친절하고 온화하며 자비심이 넘치는 인물로 거듭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마지막 미래의 유령을 만나고 꿈에서 깨어났을 때 스크루지가 보인 태도였다. 꿈속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자신이 아직 살아 있고 자신에게 속죄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안 스크루지는 기뻐서 어린아이처럼 펄쩍펄쩍 뛰어다닌다. 그리고 전혀 딴사람이 된 것처럼 만나는 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푼다. 나는 이 부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지난밤의 꿈이 자신의 죄악을, 자신 때문에 생긴 이웃의 고통을 그리고 자신에 대한 이웃들의 냉소와 비웃음을 낱낱이 보여주었다면 꿈에서 깨어난 그는 분명히 우울해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보다는 내가 이렇게 악덕 인간이었는가를 침잠 속에 뉘우치는 것이 자연스런 모습이다.
더군다나 그 악행이 돈에 의해 벌어진 결과라면 그 죄인은 해결할 수 없는 우울에 빠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돈과 이윤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스크루지는 죄인이 아니다. 그는 그저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인간일 뿐이다. 시드니 루멧의 <전당포>(1964)에 등장하는 전당포 주인 솔 내저먼(로드 스타이거)은 말한다. 그는 신도, 철학도, 정치도, 예술도 전혀 믿지 않는다고. 오로지 믿는 것은 돈이라고. 아인슈타인 물리학에서 말하는 우주에서 절대적인 존재, 곧 빛의 속도에 버금가는 것은 오로지 돈이라고. 그러므로 이윤을 추구하던 자가 황당하게도 돈을 죄악시할 때 그에게 남는 것은 우울뿐이다. 그렇다. 스크루지는 선행을 통해 죄를 씻을 수 있다고 생각해 런던 거리를 기뻐서 뛰어다녔지만 불행하게도 돈의 죄악을 보게 된 솔은 우울에 빠져 할렘의 밤거리를 배회했다.
근본적으로 솔은 스크루지에 비해 자본주의에 맞지 않는 인간이다. 그는 독일에서 대학교수로 재직했지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아내와 아들, 친구가 죽어가는 것을 목격한, 브레히트가 말하는 ‘살아남은 자’였다. 그럼에도 그는 죽은 친구의 아내와 오랫동안 내연의 관계를 맺어왔고, 정신적 내상과 죄책감에 시달릴수록 오로지 돈으로 도피해 돈의 증식에만 집착했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무표정한 그가 하는 일은 할렘의 가난한 사람들이 그의 전당포로 들고 온 물건들을 1, 2달러로 가격을 후려쳐 저당잡는 일뿐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종업원 지저스 오티즈(제이미 산체스)에게 전당포 운영 방법에서부터 돈의 철학까지 모든 것을 가르친다.
어찌할 수 없는 돈의 죄악을 참회할 때
하지만 그의 이윤추구와 죄의식은 어느 지점에서 충돌하고 만다. 솔이 빈털터리로 할렘에 건너왔을 때 그에게 창업금을 지불해 현재까지 채권을 쥐고 있는 로드리게스(브록 피터스)가 매춘사업으로 모든 자금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솔은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수용소에서 독일군의 위안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아내를 보며 치를 떨었던 솔은 자신의 부와 안락이 자신이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죄악을 통해 형성되었다는 사실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밤거리를 배회한다. 이 장면에서 흐르는 퀸시 존스의 음악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불안하고도 쓸쓸한 솔의 내면의 풍경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사실 이 메인타이틀은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첫 장면에서부터 흘러나왔다. 마치 꿈속처럼 슬로모션으로 찍힌 이 장면에서 솔의 어린아이들은 나비를 잡으러 들판을 뛰어다니고 아름다운 아내는 나무 그늘 아래서 아이들과 솔에게 손을 흔든다. 목가적이며 평화로운 장면이다. 그럼에도 음악은 곧이어 벌어질 사건을 암시하듯 불안하기 그지없다. 장면과 음악은 불편한 부조화를 이룬다. 역시, 곧이어 유대인 가족을 체포하기 위해 독일군이 들이닥친다. 이 음악은 영화의 후반부, 밤거리를 천천히 걷는 솔의 모습 위로 다시 한번 흐른다. 조성과 무조성의 경계를 걷는 이 음악은 쇤베르크의 초기 작품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쇤베르크의 <정화된 밤>과 달리 솔의 밤은 좀처럼 정화되지 않는다.
결국 스크루지처럼 기쁘게 회개하는 일이란 없었다. 꿈을 통해 회개하는 일이란 소설의 이야기일 뿐이다. 갑자기 실명했다가 눈을 떠 사울이 바울로 개과천선하는 일은 결코 범상한 일이 될 수 없다. 대부분의 참회란 극도의 고통을 겪고 나서의 일이다. 오이디푸스가 전형적으로 보여주듯이 참회는 비극 안에서 탄생한다. 돈의 죄악을 안 솔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종업원 지저스 오티즈를 냉담하게 대한다. 솔의 언사에 마음을 다친 그는 친구들을 불러모아 전당포를 털 계획을 꾸민다. 단지 솔에게 절대 상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고 다짐을 받는다. 하지만 사태는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돌변했고 위기에 몰린 솔을 구하려다가 지저스 오티즈가 대신 총탄에 맞고 목숨을 잃는다. 그가 희생양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의 이름은 ‘지저스’다. 솔은 전당포 용지를 꽂는 커다란 대못에 자신의 손을 관통시키고는 피를 흘리며 비틀비틀 할렘의 거리를 정처 없이 걸어간다. 모든 참회는 고통스럽다. 하물며 어찌할 수 없는 돈의 죄악을 참회할 때는 어떻겠는가. 블루 크리스마스. 글 황덕호(재즈 칼럼니스트) 2015-12-15
자료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