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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성경 속의 헤롯 왕
신약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헤롯 왕들
신양 성서를 읽게 되면 “헤롯(Herod, Herode)”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왕들이 등장하는데, 이 왕이 그 왕인지….? 그 왕이 이 왕인지, 마치 미로에
빠져 있는 것과 같이 혼란스러워 할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유대 땅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이두메아(Idumea, Edom)는, 헬라가 유대 땅을 다스릴 때 헬라(그리스)를 대항하여서 독립 전쟁을 하여 이겼던
마카비(Maccabeus) 형제들이 세운 유대인 왕국, 하스모니아 왕조의 요한 히르카우스에 의해서 정복당하였을 때,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유대교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이두메아(Idumea 이두매, Edom 에돔)에서 유력하고 부유한 가문의 안티파트로스(Antipater I the Idumaean)는 지금의 요르단의
페트라 지역에 있었던 나바테아 왕국의 공주 키프러스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있었던 아들들 중에 둘째 아들이 신약 성경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헤롯 왕, 헤로데(Herod, Herode)입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헤롯 대왕 (Herod the Great)”라고 불리는 헤롯 대왕 (Herod the Great)입니다.
따라서 헤로데(헤롯 대왕)는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며, 에돔(이두매)에서 태어난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하여
유대 사람들은 헤로데를 유대인이 아닌 사람이 유대인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는 사실로 인하여 싫어하였던 것입니다.
헤로데(Herode, 헤롯 대왕)의 아버지 안티파트로스는 로마가 신흥제국으로 그 힘이 날로 커갔던 때에 나중에 로마의 황제가 되었던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과 카시우스(씨저)와 같은 유력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그러한 친밀한 관계을 유지하여 왔던 이유로 인하여
폼페이우스 장군이 유대 지방을 점령하였을 때, 유대 지방을 다스리는 “지방 행정관”으로 임명받게 되었는데, 그때에 25살 홍안의 젊은이
헤로데(Herode)를 갈릴리 지방의 총독으로 세웠던 것입니다. (BC 47년)
BC 43년, 헤로데의 아버지 안티파트로가 의문의 독살을 당하게 되자, 헤로데는 그의 아버지를 독살하였던 암살자를 색출하여 처형하고
유대 땅에 평온을 되찾았을 때, 당시 명목상으로만 유대인 왕국이었던 하스모니아 왕조의 공주 미리암의 청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헤로데는 그의 부인과 3살 된 아들을 버리고 명목상으로만 건재하고 있었던 하스모니아 왕조의 공주 미리암과 결혼을 함으로써
유대교의 전통적인 제사장 가문과 결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BC 40년 하스모니아 왕조의 실력자 파르티아와 안티고노스에 의해서
퇴출당하여 로마로 도망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로마로 도망을 갔었던 헤로데는 그의 아버지 때로부터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왔던 로마의 원로원으로부터 “유대의 왕”이라는 칭호를
부여 받으면서 BC 37년 유대 땅으로 다시 돌아와서 재집권하게 되었습니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에 있었던 로마의 내전 당시 헤로데는 안토니우스를 지원하였으나 나중에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게 되자
로도스(Rhodos) 섬에 있던 옥타비아누스를 찾아가 그를 만나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유대의 왕”의 지위를 다시 한 번 인정받게 되었으며
그가 죽을 때까지 유대 땅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내용에 의하여 헤로데(헤롯 대왕)은 성격이 잔인하고 포악하다고 생각되지만, 그는 유대 땅에 많은 도시를 건설하였으며
농업을 장려하여 유대의 경제적 기반을 탄탄하게 만들었던 왕이었습니다.
역사적인 기록에 의하면 BC 25년 유대 지방의 극심한 가뭄으로 인하여 기근이 들었을 때 이집트로부터 곡물을 들여와서 기근을 해소하였으며,
세금을 감면하여 주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의 수도시설을 정비하고 새롭게 왕궁을 건축하였으며, 국경지역에 마사다와 같은 요새를 건설하였으며, 당시에 배를 건조하는 데
꼭 필요했던 아스팔트 타르를 사해에서 추출하는데 성공하였고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로부터 키프로스 섬의 구리 광산을 임대하여 돈을
벌어들임으로 국고를 튼튼히 하였습니다.
또한 유대인이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추억하면서 유대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던 예루살렘 성전을 더 크고 화려하게 재건했는데 이 성전을
“헤롯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헤로데(헤롯 대왕)의 가정 역사는 끊임없는 의심, 모함과 그리고 처형하는 일들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는 그의 생애 동안에 여섯 번 결혼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부인 마리암까지도 의심과 모함으로 죽이게 되는 상황에 있기도 하였으며,
그녀(미리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마저도 죽이게 되는 불행함을 겪었습니다. 그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큰 고통 속에서 살았으며
정서적으로 늘 불안한 상태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후계자 문제를 두고 수차례 유언을 번복하기도 하다가 결국,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던 맏아들 안티파테르를 재판에 올려서 아우구스투스의
허락 아래에서 처형하게 되는 불행함도 겪었습니다.
신약 성서, 특히 마태복음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헤롯(Herod) 왕은, 일반적으로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으로 알려진 헤롯 왕입니다.
그는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가 로마 제국을 통치하고 있을 당시에 유대 지방을 다스리도록 세워진 분봉왕으로 임명을
받았던 헤롯 왕입니다. 그가 바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때 동방박사들이 왕궁으로 찾아가서 만났던 헤롯 왕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이 아니면서 유대인의 왕이 된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있던 예루살렘 성전을 확장하여 아름답게
건축하였던 헤롯 왕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의 평생 동안 자신을 해치려고 하는 압박감에 시달려서 마사다와 헤로디움과 같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도피처를 건설하고 그곳을 요새화하였습니다. 또 여름궁전을 여러 곳에 건축하였고 지중해 해변에 가이사랴 항구 도시를 건설하였던
헤롯 왕입니다.
두 살 아래의 모든 남자 아이를 죽이라고 하는 왕의 명령을 피하여 예수님의 가족이 이집트로 피난을 가 있을 동안 헤롯 대왕은 죽었는데
이때에 그는 그의 3 아들에게 이스라엘 땅을 나누어 주면서 그곳을 다스리도록 하였습니다.
AD 1세기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BC 4년 봄에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는 마지막 유언을 통해 자신이 다스리던 영토를 3명의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지만 그러나 이 마지막 유언은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허락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결국 세 아들 모두 로마로부터 “왕(King)”의 칭호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헤롯 대왕의 아들로서 이스라엘 땅을 나누어 다스렸던 헤롯 왕들 중에서 헤롯 필립(Phillipus 2)에게는 헤르몬 산 주변과 골란 지역,
그리고 베다니아 지방을 각각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을 죽게 하였던 “헤롯 아티파스”와 헤로디아의 딸이었던 “살로메”와
결혼하였던 헤롯 왕이었는데(그는 그의 조카와 결혼한 것임), 그가 헤르몬(Mount Hermon) 산기슭에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온천 휴양
도시를 건설하였던 헤롯 왕입니다. (누가복음 3:1)
헤롯 빌립보 2세(Herod Phillip 2)의 얼굴이 새겨진 로만 유대의 동전
또 헤롯 대왕의 아들로서 갈릴리 지방과 베뢰아 지방을 다스렸던 헤롯 왕이 있었는데, 그가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입니다.
헤롯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리 지방과 베뢰아 지방을 다스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배다른 형제 빌립 1세의 아내였던 헤로디아를
빼앗아 결혼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비난하였던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었으며 결국에는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요구에 따라 그를 처형하였던
헤롯 왕입니다. (마태복음 14:1~12) 뿐만 아니라 그는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하였던 헤롯 왕입니다. (누가복음 23장)
복음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헤롯 왕은, 예수님께서 사역하셨던 갈릴리 지역과 베뢰아 지역을 다스렸던 왕이 헤롯 안티파스였으므로
거의 다 “헤롯 안티파스”를 말하는 헤롯 왕입니다.
헤롯 대왕의 아들로서 헤롯 대왕이 죽은 후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을 다스리도록 그 땅을 물려받았던 헤롯 아켈라오는 그가 유대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 되던 첫 해에 그를 반대하는 반란 사건이 일어나자 헤롯 아켈라오는 그의 군대를 동원하여 유대인 반란군 3,000명을
무차별 학살을 감행하였습니다.
그외에도 반란군을 지지하였다는 구실로 유대의 대제사장을 파면하고 그는 향락과 사치를 일삼으면서 정치는 잔인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다스리던 유대 땅에서 민심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통치를 잘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곳에 살던 유대인들의 불평을 사다가 마침내
로마로부터 파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로마로부터 파면을 당하게 된 헤롯 아케라오 대신에 유대지방을 다스리게 하기 위하여 로마에서는 로마인 총독으로 하여금 그곳을
다스리도록 파견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곳에는 헤롯 왕들이 자신의 영토를 다스렸지만 유대 지방(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은 로마인
총독이 다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심문하였던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 땅을 다스렸던 여섯 번째 총독이었습니다.
원래 총독이 머물러 있었던 총독 관저는 지중해 해변이 있는 가이사랴의 헤롯 궁전에 있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을 당시에는
유월절을 맞이하면서 유대인들의 소요사태를 주시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 옆에 있었던 안토니오 요새에 와 있었던 때였습니다.
로마의 클라우디우스가 황제로 있을 때, 그는 유대 땅을 다스리는 총독을 철수시키고 헤롯 하그립바 1세로 하여금 유대 땅을 다스리도록
왕으로 세워주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또 다른 헤롯 왕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는 헤롯 대왕과 하스모니안의 공주 미리암
사이에서 태어난 아리스토 불루스의 아들이며 헤롯 대왕의 손자 헤롯 아그립바 1세인데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였던 헤롯 왕이며, 유대 사람들이 이일을 보고 좋아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아서 옥에 가두었었던 헤롯 왕,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그는 초대 교회의 기독교도들을 심하게 핍박하였던 헤롯 왕인데, 그의 포악함과 교만함으로 인하여 벌레에 먹혀 죽은 헤롯 왕입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얼굴이 세겨진 AD 1세기의 동전
헤롯 아그립바 2세의 얼굴이 새겨진 AD 1세기의 동전
헤롯 아그립바 1세는 AD 44년에 가이사랴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AD 1세기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며 기록하였는데 그의 기록은 누가복음의 기록과 거의 일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축제의 두 번째 날에, 아그립바 왕은 순은으로 짠 멋진 의복을 입고 새벽에 원형극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태양 광선이 찬란하게 비치자 그 은으로 장식된 옷은 신비한 빛을 반사하기 시작했고, 그 반짝임을 바라본 사람들은 기묘한 두려움과
경이를 느꼈습니다. 아그립바 왕의 옆에서 아첨을 하던 많은 사람들은 아그립바 왕을 신(god)이라고 소리쳐 부르면서 사방에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 때 왕은 갑자기 엄습한 강한 고통으로 인하여 복부를 움켜잡으며 쓰러졌습니다……. 왕 아그립바는
당시 54세, 즉위한지 7년이 되는 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xix 8.1)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죽자(AD 44년) 그의 아들 헤롯 아그립바 2세를 왕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그의 나이가 어린 탓에 왕으로 세우지
못하고 로마에서는 또 다시 총독을 파견하였는데,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만났었던 총독이 11번째의 유대 총독인 벨릭스
(Felix, AD 52~60년)이며, 또 12대 유대 총독인 베스도(Festus, AD 60~62 년)였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5장~26장)에서 등장하고 있는 헤롯 왕, 헤롯 아그립바 2세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로서 이제는 성년이 되어
유대 땅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가 점령하고 있었던 유대를 다스렸던 헤롯 가문의 마지막 왕이 되었습니다.
(헤롯 가문이 통치하였던 기간은 BC 55년-AD 93년까지입니다.) 그는 지중해의 해안 도시 가이사랴에서 사도 바울을 심문하였던
헤롯 왕, 헤롯 아그립바 2세입니다.
정말로 복잡한 가계도 입니다. 기록 정리하면서도 헷갈리는 부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신약 성서에 등장하고 있는 헤롯 왕들은 다 같은 인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당시에는 헤롯 대왕이 왕이었고,
그 후에 그의 아들 3명(아켈라오, 안티파스, 빌립)들과 그의 손자 1명(헤롯 아그립바 1세) 그리고 증손자 1명(헤롯 아그립바 2세)이
등장하여 다른 역할들을 수행하였던 것입니다.
아버지 헤롯의 유언에 의하여 그는 갈릴리와 페래아 지방의 분봉왕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영토가 요한과 예수께서 사역을 한 곳이기 때문에 복음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헤롯은 헤롯 안디바를 말한다(마14:1-7;막6:16-22; 눅3:1,19; 9:7,9; 13:31; 23:7-15). 그는 당시의 로마 황제 디베료(Tiberius)를 기리기 위하여 유명한 도시 디베랴를 건설하였다. 1. 안디바는 헤롯 대왕이 사마리아 여인 말다게에게서 낳은 아들이다. C.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 BC4-AD39) 3. 유대인들은 이제 헤롯 왕가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기들이 원하는 왕을 세우기를 원하였지만 로마는 아켈라오를 추방하고 그 자리에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을 두어 유대 지방을 다스렸다. 따라서 예수 당시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은 로마 총독이 다스리고 있었으며,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에는 제5대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 AD.26-36)가 다스리고 있었다.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Claudius)는 총독을 철수시키고 총독이 다스리던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도 헤롯 대왕의 손자인 아그립바 1세에게 주었다. 그래서 한동안 (AD44까지) 아그립바 1세는 할아버지 헤롯 대왕을 이어 전 이스라엘 지역을 통일하여 다스렸다. 아그립바가 죽자 로마는 다시 총독을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바울이 가이시랴 에서 만난 로마의 총독은 제 11대 총독 벨릭스(Felix, AD52-60)와 제 12대 총독 베스도(Festus, AD 60-62)였다. 2. 그의 아버지 헤롯 대왕을 닮아 향락과 시치를 사랑했으며 진안한 면이었었다. 즉위한 첫해에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군대를 투입하여 3.000명을 무차별 살육하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이런 아켈라오를 두려워했으며, 그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갈릴리 지방 나사렛으로 파하여 돌어갔다. 폭도들을 지지했다는 구실로 대제사장을 파면한 일, 아내와 이혼하고 불의하게 재혼한일, 그리고 그의 잔혹성이 유대인들의 눈에 거슬려 그는 인기가 없었다. 마침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연합하여 로마 황제에게 호소하여 아켈라오를 추방하는데 성공하였다 (AD-6). 1. 마태복음 2:22에 나오는 유대와 사마리아의 왕이다. 헤롯 대왕은 유언장에서 세 아들에게 영토를 나눠 주었다. 사마리아 여인 말다게의 아들 아켈라오에게는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를, 둘째 아들 안디바에게는 갈릴리 지방을,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빌립에게는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을 주어 다스리게 했다. B. 헤롯 아켈라오(Herod Archelaus, BC4-AD6) 4. 헤롯은 사마리아를 건축하여 세바스테(Sebaste)라고 일컬었다. 동방박사들이 찾아왔을 때 그는 거의 70세였으며 죽을병에 결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병적인 의심과 욕심은 베들레헴의 죄 없는 어린아이들을 주게 만들었다. 그이 치세는 폭력과 살육으로 얼룩졌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를 싫어했고 진정한 의미에서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 헤롯은 열 명의 여자와 결혼하였다. 그의 첫 아내는 이두매 여인인 도리스(Doris)였다. 그러나 그는 도리스를 버리고 히르카누스(Hyr-canus)II세의 손녀인 마리암네(Mariamne)공주와 결혼하였다. 유대 왕실과의 결혼은 그의 왕권의 정통성을 좀더 확고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헤롯은 마리암네를 사랑했으나 마리암네는 그를 싫어하였다. 마리암네에게서 아리스토볼루스(Aristobulus)와 알렉산더(Alezander)라는 두 아들을 낳았지만 헤롯은 후에 마리암네와 두 아들을 죽이고 만다. 마리암네가 죽은 후 헤롯은 예루살렘의 제사장 시몬의 딸인 또 다른 마리암네와 결혼하여 헤롯빌립을 얻었다. 이 빌립이 헤로다아의 첫 남편이 되지만 후에 헤롯 안디바에게 아내를 빼앗기고 만다.(마14:3;막6:17) 그 다음 헤롯은 사라미아 여자 말다게(Malthace)와 결혼하여 아켈라오(Archelaus)와 안디바(Antipas)를 낳았는데 이 두 아들이 헤롯 사후에 유대의 실권을 쥐게 된다. 헤롯의 또 다른 아내는 예루살렘 여인 클레오파트라(Cleopatra)이다. 이 여자는 빌립을 낳았는데 헤롯은 빌립에게 아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을 다스리도록 했다.(눅3:1) 다른 다섯 명의 아내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헤롯왕의 가계는 부록을 참고할 것) 2.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미워하는 것을 잘 알고 그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성전을 제 3성전 혹은 헤롯 성전이라 부를 만큼 오랜 서월에 결처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각종 건물들을 화려하게 건축하였다. 그리고 유대 하스몬 왕조의 공주인 마리암네(Mariamne)와 결혼하여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음모에 휘말려 사랑했던 마리암네와 두 아들을 죽이고 만다. 언제 로마의 지지가 끊어질지 모른다고 불안해하던 헤롯은 천혜의 요새인 거대한 마사다(Masada)를 건축하여 유사시에 피신하려고 했으나 사용해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렇게 병적인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헤롯이 유대인의 왕이 탄생했다는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베들레헴의 두 살 아래 모든 아이들을 죽이라고한 것은 그의 처지에서 보면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1. 예수께서 태어나신 당시의 헤롯은 헤롯대왕이라고 부른다. 마태복음 2:7-19과 누가복음 1:5에 나오는 헤롯 왕이 바로 이 사람이다. 그는 33년 동안 유대인들을 다스리다가 마지막으로 베들레헴의 어린이들을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고 예수께서 태어나던 그해에 죽었다. 헤롯 대왕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는 에서의 후손인 이두매 사람이다. 유대인들이 가증하게 여기는 이방인이 어떻게 유대인의 왕이 되었는가? 순전히 그의 아버지와 로마 세력을 등에 업었기 때문이다. 이두매(에돔)의 실력자인 헤롯의 어비지 안티파테르(Antipater)는 유대 마지막 왕조인 하스몬 왕조의 혼란기를 틈타 로마의 권력을 힘없어 유대의 행정장관이 된다. 아버지의 권세 때문에 25살의 젊은 나이에 갈릴리의 총독이 된 헤롯(BC 47)은 틈을 엿보다가 마침내 예루살렘을 무력으로 공략하여 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BC 37) A . 헤롯대왕(Herod the Gerat, bc37-4) 背景史(배경사) 성경을 보다보면 헤롯왕이 나오는데 복음서에서부터 한사람인지 또,다른 헤롯이 있는지 정신차리지 않으면 자세히 알 수 가없다. 오늘 그부분을 알아보자. 헤롯 왕은 순수한 유대인이 아니었다. 에돔(이두매) 출신으로 선조가 개종하여 유대인이 된 반쪽짜리 유대인 이었다. 그는 BC 37년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왕이 된 후 그는 기울어가는 하스몬 왕가의 딸 마리암네와 결혼하여 백성의 호감을 사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잔혹하여 자신의 왕권을 노린다고 생각되는 자는 가족도 예외없이 처단했다. 그는 왕비 마리암네의 남동생 아리스토블루스, 할아버지, 어머니, 왕비 마리암네, 마리암네의 아들 두명도 차례로 죽였다. 그리고 동방박사들로부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전해들은 헤롯은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유아들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헤롯의 계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무사히 피신시켜 주셨다. 신약에서 헤롯이란 말은 45번이나 나오지만 대부분 구분하지 않고 헤롯이라고만 부리기 때문에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다른 헤롯들이다. 헤롯대왕과 동생 아들이 각기 분봉왕으로 나누어 통치를 하였지만 구체적으로 기록을 하지않으므로 한 사람인줄 알기 쉽다.그래서 성경의 背景史(배경사)를 좀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 헤롯 왕들을 구분해 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자료를 준비하는데 협조하여주신 先後輩 목사님들께 감사를 드린다. 사도행전 12:1 “그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들 해하려하여” 마태복음 2: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 |||
왕의 이름 | 헤롯 대왕과의 관계 | 통치연대 | 배경설명 |
헤롯대왕 | BC37-4 | 예수님 탄생시의 왕이다. | |
헤롯아켈라오 | 아내 말다게의 아들 | BC4-AD6 | 유대의 영주로 임명되었으나 실정을 거듭하여 추방되고 총독이 파견되었다. |
헤롯 안디바 | 아내 말다게의 아들 | BC4-AD39 |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세례요한을 죽였고 수난주간의 마지막밤 예수님을 심문하였다 |
헤롯 빌립 | 아내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 BC4-AD34 | 갈릴리 북동쪽 골란 지방의 분봉 왕으로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
헤롯 아그립바 1세 | 아내 마리암네 사이에난 아리스토볼로스의 아들 | AD37-44 | 할머니와 아버지가 할아버지 헤롯 대왕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은 왕자이며 왕이 된 후에 야고보를 죽였다. |
헤롯 아그립바 2세 | 증손자로 아그립바 1세의 아들 | AD50-70 | 사도행전 26장에서 바울이 만난 왕으로서 나이가 어려서 실권을 갖지 못했다. |
2. 세례요한과 헤롯 안디바 헤롯 안디바가 유명한 이유는 그가 세례요한을 죽였기 때문이다. 안디바는 나바테아의왕 아레다 4세의 딸과 결혼했다.(AD14). 그러나 로마 여행 중 이복 형제 빌립을 방문했다가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Herodias)를 유혹하여 그와 결혼을 약속하고 이 사실을 안 아레다의 딸은 분노하여 그의 나라로 돌아갔다. 그들은 곧 결혼하였다. 세례요한은 이런 불의할 결혼에 대해서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헤로디아는 자기를 부정한 여자로 책망하는 세례요한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딸 살로메를 시켜 세레요한의 머리를 요구했다. 3. 예수와 헤롯 안디바 예수와 헤롯안디바가 관계된 세 가지 기사가 신약에 나온다. 첫 번째는 헤롯 안디바가 예수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두려워하며, “이는 세례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 도다”(14:2)라고 말한 경우이다. 두 번째는 예수께서 헤롯 안디바를 “저 여우”(눅13:32)라고 부르신 사건이다. 헤롯 안디바가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예수께서는 간교하고 음흉한 그를 여우에 비유하셨다. 세 번째 사건은 잡히신 예수께서 헤롯 안디바가에게 신문을 받으신 사건이다. 헤롯은 갈릴리 지방의 왕이지만 명절 때에는 예루살렘의 헤롯 궁에 와 있었다.(눅23:6-12) 빌라도는 난처한 입장에서 벗어나려고 궁리하다가 마침 헤롯안디바가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와 있는 것을 알고는 갈릴리 나사렛 사람인 예수를 그 지방의 분봉왕 헤롯에게 보냈다. 평소에 예수를 보고 싶어 하던 헤롯은 예수를 신문한 후 호기심이 충족되지 않자 별다른 판결 없이 예수를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4. 헤롯 안디바의 말년.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안디바의 아내 헤로디아의 동생이다. 아그립바가 불행한 시절을 보낼 때 잠시 안디바에게 몸을 의탁했었는데 그는 처남인 아그립바를 도와주면서도 그를 무시했다. 그러나 사태는 완전히 달라졌다. 후에 아그립바의 후원을 고맙게 생각한 로마의 갈리굴라 황제는 아그립바에게 빌립이 죽고 난후 그의 영토를 주고 왕의 칭호를 수여하였다. 아직 정식 왕의 칭호를 받지 못한 분봉왕 안디바와 헤로다아의 시기심은 대단했다. 그의 부부는 처남인 아그립바와 같은 왕의 칭호를 얻기 위해 급히 로마로 달려갔으나 아그립바가 선수를 쳐서 안디바는 영주의 자리마저 박탈당하고 추방되었다. 로마는 안디바의 영토를 아그립바에게 넘겨주고 만다. 이렇게 해서 세례요한을 죽이고 예수께서 처형 받도록 방관했던 헤롯 안디바는 마침내 불행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 D. 헤롯 빌립(Herod Philip, BC 4-AD34) 1. 빌립은 헤롯 대왕과 예루살렘의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난 아들이며, 아버지가 죽자 헤롯 대왕의 영토중 갈릴리 호수 북동쪽에 위치한 이두래 와 드라고닛 지방을 물려받았다. 그는 이복형제인 아칼라오, 안디바와 함께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가 다스린 백성들은 주로 수리아인과 헬라인 계통의 비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헤롯 왕가에서 제일 괜찮은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이복형제들처럼 야심도 없었고 간교하지도 않았다. 2. 그는 두 도시를 건설하였다. 하나는 요단강 수원에 위치한 파네아스(Panes)를 확장, 재건한 것이다. 그는 황제의 영광을 위하여 이도시를 가이사랴로 명명하였는데 후에 그것을 남쪽의 가이사랴와 구별하기 위해 가이사랴 빌립보로 부르게 되었다. 예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랴 하느냐”고 물으신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가 건설한 또 하나의 도시는 어촌인 벳새다를 헬라식 도시로 건설한 벳세다 율리아이다. 그는 아우구스투수 황제의 딸 율리아를 기념하여 이 도시를 벳세다 율리아로 명명하였다. 예수께서 소경의 눈을 고쳐주신 곳이 바로 여기다 (막8:22-26) 3. 그는 온건하고 평화스럽게 다스렸으므로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말년에는 30년이나 연하인 그의 질녀, 즉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와 결혼하였으나 자녀가 없이 죽었다. AD 34년에 빌립이 죽자 그의 영토는 수리아에 합병되었지만 3년 뒤 갈리굴라 황제는 아 땅을 헤롯 아그립바 1세에게 주었다. E. 헤롯 아그립바 1세(Herod Agrippa 1, AD37-44) 1. 헤롯 아그립바 1세는 헤롯 대왕의 손자이다. 즉 헤롯대왕과 하스몬가의 마리암네 사이에 태어난 아들 아리스도볼루스의 아들로서 헤로디아의 동생이다. 그는 키프로스(Cypros)와 결혼하여 4남매를 낳았다. 버니게, 마리암네,드루살라. 아그립바 II세가 그들인데, 두루실라 유대 총독 벨릭스의 아내가 되었고(행24:24), 버리게는 남편이 죽자 오빠인 헤롯 아그립바 II세에게 몸을 의탁하고 부인처럼 살았다.(행25:13). 2. 헤롯 아그립바 1세는 그의 할머니와 아버지가 할아버지인 헤롯 대왕에게 죽임을 당한 비운의 왕자였다. 그는 헤롯가의 왕자로서 로마에 유학하였으며 돈을 낭비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 마침내 그는 많은 빚을 지고 채무자들에게 쫓겨 낙향하였다. 매형인 헤롯 안디바가 일정한 수입을 보장해 주었으나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자 그는 로마로 돌아갔다. 로마에서 그는 칼리굴라와 교제했는데, 어느 날 디베료 황제가 물러나고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지각없는 말을 하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투옥되었다. 6개월 후 디베료 황제가 죽고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자 그는 즉시 아그립바를 석방하고 그에게 빌립의 영토를 주고 왕의 칭호를 수여하였다.(AD37), 그가 영토를 돌아보러 팔레스타인에 돌아오자 시기심에 불탄 헤롯 안디바와 헤로디아는 자기도 분봉왕의 칭호를 떼어버리고 왕의 칭호를 얻기위해 로마로 향했다. 그러나 아그립바는 재빨리 사자를 로마로 보내 헤롯 안디바를 고발하였으며 그 결과 안디바는 분봉왕 자리마저 빼앗기고 추방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아그립바는 이렇게 해서 매형과 누나를 몰아내고 마침내 안디바의 영토까지 차지하게 되었다.(AD39) 그의 행운은 여기서 머물지 않았다. 2년 뒤 AD41년 그가 잠깐 로마에 체류하고 있을 때 칼리굴라 황제가 암살당하고 글라우디오(Claudius) 황제가 즉위하게 되었다. 이때 복잡하게 돌아가는 정세 속에서 헤롯 아그립바 1세의 현명한 충고 덕분에 두려움을 이기고 원로원을 제압하여 권력을 얻은 글라우디오는 아그립바에게 총독이 다스리던 유대와 사마리아가지도 영토로 주었다. 이렇게 해서 헤롯 아그립바 1세는 명실상부하게 할아버지 헤롯대왕의 영토를 다시 한번 통일하여 다스리게 되었다. 3. 사도행전 12장에 헤롯 아그립바 12세는 초기 교회를 핍박한 왕으로 그려져 있다. 그는 세베대의 아들 사도 야고보를 카로 죽였으며 그 일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자 베드로를 잡아 투옥하고 유월절 후에 죽이려했다. 그날 밤 기적 적으로 베드로가 천사에 의해 구출되자 진노한 왕은 파수꾼들을 잡아 죽였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AD44년에 가이사fi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는데 누가복음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그 축제의 두 번째 날에, 아그립바 왕은 순은으로 짠 침으로 멋진 의복을 입고 새벽에 원형극장으로 들어갔다. 태양 광선이 찬란하게 비치자 그 옷은 신비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그 반짝임을 바라본 사람들은 기묘한 두려움과 경이를 느꼈다. 아첨꾼들은 아그립바 왕을 신아라고 부르면서 사방에서 목소리를 높였다.왕은 갑자기 엄습한 강한 고통으로 인하여 복부를 움켜잡았다.왕은 54세, 즉위한지 7년 되는 해에 세상을 떠났다(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xix 8.1)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아들 헤롯 아그립바 II세는 겨우 17세로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글라우디오 황제는 유대에 다시 총독을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F. 헤롯 아그립바 II세 (AD 50-100) 1. 헤롯 아그립바 1세가 갑작스럽게 죽었을 때 그의 어린 아들 아그립바 2세는 로마에 있었다. 헤롯 아그립바 1세와 친한 글라우디오 황제는 즉시 그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고 싶었지만 아직 어려서(17세) 영토를 다스리기에는 무리라는 반대를 할 수 없이 수용하여 다시 쿠피우스 파두스(Cuspius Fadus)를 유대 지방의 총독으로 파견하였다. 몇 년 후에 헤롯 아그립바 2세는 글라우디오 황제에게 빌립의 영토를 물려받았다. AD 54년 황제가 된 네로는 아그립바 2세 에게 갈릴리 주변의 땅을 추가해 주었다. 아그립바 2세는 유대에 파견된 총독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종교 문제의 자문에 응하기도 하였다. 총독 베스도는 헤롯 아그립바 2세에게 바울문제를 상의하였다(행25:26). AD 70년 유대 전쟁시 아그립바 2세는 로마를 지지하였으며 로마 황제가 네로(AD54-68), 갈바(Galba, 68),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 69-79). 티투스(Titus.97-81)로 바뀌는 동안 충성을 맹세하여 계속 좋은 관계를 맺고 영토를 보전하였다. 그는 AD 100년경에 죽었을 것이다. 그의 죽음과 함께 헤롯 왕조도 막을 내렸다. 2. 헤롯 아그립바 2세의 사생활은 건전하지 못한 것 같다. 그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다고 전해 내려오지만 확실치 않고 여동생 버니게는 남편이 죽자 오빠인 아그립바 2세의 집에서 살았다. 가이사랴에서 바울을 만났을 때도 그는 버니게와 함께 있었다(행25:23) 3. AD 60년경 어느 날 아그립바는 세로 부임한 베스도 총독을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가서 여러 날을 묵었다(행25:12,13).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자문을 구하지 아그립바 왕은 바울을 보고 싶어 했다. 바울은 헤롯 아그립바 2세와 버니게 앞에 섰다. 바울은 아그립바 2세가 유대인의 모든 풍습과 문제들을 잘 알고 있다고 인정하면서 그런 왕 앞에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긴다고 말한다(행26:2,3). 바울의 논리정연한 말에 당황한 아그립바 2세는 “네가 적은말로 나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26:28). 라고 말하였다. 아그립바는 그의 호기심은 채웠으나 구원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방탕하게 살았던 그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꼭 알아야 할 포인트 신약에 나오는 헤롯은 다 같은 인물이 아니다. 신약에 나오는 헤롯이란 이름은 무려 7명에 달한다. 그러므로 헤롯이란 이름을 잘 구분치 않으면 헤롯이란 이름 때문에 성경 해석에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다. 예수의 탄생 당시에는 헤롯 대왕이 왕이었고 그 후에 그의 아들 3명과(아켈라오, 안디바, 빌립) 그의 손자 1명(헤롯 아그립바 1세) 그리고 증손자 1명(헤롯 아그립바 2세)이 등장하여 다른 역할들을 수행하였다. 이제 성경을 볼때 잘 구분하여 혼란이 없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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