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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빠리에서 열리고 있는 2005.롱-티보콩쿨에서 제가 운영자로 있는 와인동호회 비노콤[http://vinocom.cyworld.com] 회원의 자녀인 박지윤양이 이 대회에서 6명이 진출하는 화이날에 올라갔다는 소식을 어제늦은 밤에 전화로 접했습니다.
화이날은 리사이틀 과 협주곡으로 나뉘어 진행이 되는데 오늘 리사이틀이 진행이 됩니다.
독주회때 맨처음곡인 모짜르트의 소나타외에4곡을 연주하고 주말에 브람스의 바이올린협주곡을 쿠르트 마주어가 지휘하고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립빠리 오케스트라의 반주로 연주를 하게 됩니다.
아쉽게도 방송은 없고 홈페이지 www.concours-long-thibaud.org 를 들어가시면 콩쿨에 대한 모든게 나와 있습니다
이 콩쿨은 퀸엘리자베스콩쿨,차이코프스키 콩쿨,미국의 인디아나 콩쿨과 더불어 4대 메이저 바이올린콩쿨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쿠르트 마주어에 대해[명지휘자 5명 소개하면서]>>
1. 20세기 최고의 명지휘자 헤르베르트 본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 1908. 4. 5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1989. 7. 16 잘츠부르크 근처 아니프. 오스트리아 태생의 관현악단·오페라 지휘자. 20세기 중반을 이끈 세계적인 음악가이다. 어려서 피아노의 신동으로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에서 공부했고, 이후 1927년 독일 울름에서 지휘자로 데뷔했다. 1927~41년 울름과 아헨에서 지휘했고, 1938~45년 베를린 국립 오페라단을 이끌었으며, 1955년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나치당원(1933~42)이었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방재판소로부터 면책받았으나, 1955년의 미국 데뷔 공연은 대중의 거부반응을 불러일으켰다. 1950년 후반부터 빈 국립 오페라(1956~64, 감독), 잘츠부르크 페스티벌(1956~60, 예술감독), 런던 필하모닉에서 활동했으며 또한 라 스칼라와 밀라노 극장의 상임지휘자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객원지휘자로도 활동했다. 1976년에는 잘츠부르크 이스터 페스티벌을 창설했고 파리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으며(1969~70), 1977년 빈 국립 오페라로 복귀했다. 그가 활동한 여러 음악 단체들 가운데서도 특히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활동의 중심이 되었지만, 1983년 이후의 잦은 음악적 분쟁으로 단원들로부터 멀어졌다. 카라얀의 음악 해석은 정확성과 객관성으로 정평이 나 있으나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보다 개인적인 성향을 나타냈다. 1986년 로저 본이 저술한 전기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rebert von Karajan〉이 출판되었다.
2. 역경을 이겨낸 명 지휘자 토스카니니 Arturo Toscanini 1867. 3. 25 이탈리아 파르마~1957. 1. 16 뉴욕 시. 이탈리아의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첼로 연주자가 되려고 파르마 음악원과 밀라노 음악원에서 공부했으며 19세 때 리우데자네이루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연주하던 중 공석이 된 지휘자 자리를 대신 맡게 되어 베르디의 〈아이다 Aida〉를 암보로 연주했다. 이탈리아와 기타 다른 나라들에서 지휘자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고 1908년 밀라노의 라 스칼라 오페라단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 1928~36년 뉴욕 필하모닉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었으며,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섰던 이탈리아와 독일을 제외한 세계 각지의 관현악단들을 지휘했다. 1937~54년 미국 라디오 방송국의 후원을 받는 NBC 심포니를 지휘했다. 베르디의 오페라와 베토벤의 교향곡 등에 대한 정평 있는 해석으로 유명했으며, 바그너의 음악 연주에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그의 지휘는 섬세하면서도 유려한 호흡과 셈여림의 절묘한 처리, 고전적인 형식감 등이 특징이었다. 특출한 기억력을 지닌 그는 항상 암보로 지휘해서 나쁜 시력을 극복할 수 있었고, 연주자들로부터 절대적인 존경을 받았다.
3. 청소년음악회의 선구자 레너드 번스타인 Leonard Bernstein 1918. 8. 25 매사추세츠 로렌스~1990. 10. 14 뉴욕 뉴욕시티. 미국의 지휘자·작곡가. 고전음악과 대중음악 양쪽에서의 업적과 특히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에서 보여준 뛰어난 교수법으로 유명하다. 10세 때부터 피아노를 쳤으며 보스턴 라틴 학교를 거쳐 1939년에 하버드대학교에서 문학사학위를 받았다. 이어 1939~41년 필라델피아에 있는 커티스 음악원에서 수학했고 프리츠 라이너와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에게 지휘로 사사했다. 1943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로 발탁되었고, 그해 11월 14일 브루노 발터가 병이 나자 그 대신 지휘봉을 잡게 되는 행운이 찾아왔다. 이같이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보여준 자신감과 탁월한 음악적 해석은 청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그때부터 화려한 경력이 시작되었다. 그후 1945~47년에는 뉴욕 시티 센터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미국·유럽·이스라엘 등지에서 객원 지휘자로 활동했다. 1958~69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겸 음악 감독으로 있으면서 때로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남아메리카와 유럽·소련·일본 등지로 여러 차례 순회연주를 했다. 텔레비전에 그가 지휘자와 피아니스트로서 뿐만 아니라 해설자와 연예인으로서 등장함에 따라 그의 인기는 점차 확산되어갔다. 고전음악 작곡가로서 번스타인은 〈예레미아 교향곡 Jeremiah Symphony〉(1942)이나 오라토리오 〈카디시 Kaddish〉(1963)에서 들려주었던 유대교 전례 음악의 주제로부터,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근심의 시절 Age of Anxiety〉(W. H. 오든의 작품에 기초함)에 나타나는 재즈 리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소들을 능숙하게 다루었다. 〈치체스터 시편 Chichester Psalms〉(1965)은 그리스도교 예배를 위해 작곡되었으며 그의 〈미사곡 Mass〉은 1971년 9월 워싱턴 D. C.에 위치한, 공연 예술을 위한 케네디 센터 개관공연에서 연주되었다. 정치성을 띤 서곡인 〈슬라바 Slava!〉,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3곡의 〈명상 Meditations〉, 6명의 가수와 관현악을 위한 연곡 〈합창회 Songfest〉는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가 지휘하는 내셔널 심포니의 연주로 1977년 케네디 센터에서 초연되었다. 그밖의 작품으로는 〈온 더 타운 On the Town〉(1944)·〈원더풀 타운 Wonderful Town〉(1953)·〈캔디드 Candide〉(1956)·〈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West Side Story〉(1957) 등의 뮤지컬과 〈팬시 프리 Fancy Free〉(1944)·〈모사 Facsimile〉(1946)·〈딥벅 Dybbuk〉(1974) 등의 발레곡이 있으며, 영화음악 〈해변에서 On the Waterfront〉를 작곡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음악의 즐거움 The Joy of Music〉(1959)·〈읽기와 듣기를 위한 청소년 음악회 Young People's Concerts, for Reading and Listening〉(1962)·〈음악의 무한한 다양성 The Infinite Variety of Music〉(1966), 그리고 1973년 하버드대학교에서의 찰스 엘리엇 노튼 강의를 책으로 엮은 〈대답없는 질문 The Unanswered Question〉(1976)이 있다.
4. 인도주의자인 지휘자 쿠르트 마주어 Kurt Masur 독일 태생의 지휘자 쿠르트 마주어는 1999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직을 계속 수행하면서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를 겸하기로 합의했다. 50년에 걸친 지휘 생활 동안 마주어는 음악의 거장으로서뿐 아니라 인본주의자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음악 면에서는 독일 낭만주의 걸작들에 감정적 표현을 불어넣는 작업에 특히 뛰어났다. 마주어는 1927년 7월 18일 독일의 브리크(지금의 폴란드 오폴레 주 브제크)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몇 개월 동안 독일군으로 참전했다. 1946~48년 라이프치히의 음악원에서 피아노·지휘·작곡을 공부했다. 원래는 피아니스트로 활동할 뜻을 세웠지만 손 힘이 약해지는 바람에 지휘로 진로를 바꾸었다. 독일의 여러 크고 작은 도시의 오페라 하우스와 콘서트 홀에서 경력을 쌓다가 1950년대 중반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드레스덴 필하모닉의 지휘자가 되어 처음으로 주요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1960~64년 동베를린의 코미셰 오퍼의 음악감독으로 있었으며, 1970~96년에는 유럽에서 가장 유구하고 화려한 역사를 자랑하는 오케스트라인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의 음악감독을 맡았다. 동독인들의 여행이 제한되어 있던 시절에도 마주어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는 서방 연주여행을 할 수 있었으며, 초청 지휘자 자격으로 유럽이나 미국의 오케스트라에도 여러 번 모습을 나타냈다. 마주어는 서방으로 이주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동독에 그대로 남았다. 라이프치히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된 콘서트 홀을 대신할 새 건물을 짓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이 건물은 1981년에 완공되었다. 1975년부터 그는 라이프치히 음악 아카데미에서 교편을 잡았다. 1989년 동독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되면서 폭력사태가 벌어질 기미가 보이자 대중 앞에 나서서 연설했는데, 이 후 평화가 유지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 같은 그의 영향도 컸다. 1990년에는 통일 독일의 대통령이라는 명예직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의 이름을 고려 대상에서 빼줄 것을 요청했다. 1991년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이 된 그는 오케스트라에 활력을 불어넣고 연주수준을 높였다는 평을 받았다. 오케스트라 음악을 좀더 많은 관객에게 들려주기 위한 프로그램을 실시했으며 학교 음악교육을 옹호했다. 뉴욕 필하모닉은 마주어의 지휘로 많은 곡을 녹음했으며 일련의 콘서트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비평가들은 마주어의 프로그램이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비판했으며, 마주어는 2002년 계약 만료와 함께 뉴욕 필하모닉을 떠날 것이라는 발표가 나왔다.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맺은 5년 계약은 2000년에 시작된다. 마주어는 독일의 십자훈장(1995)과 프랑스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1997)을 받았다. 1993년에는 〈뮤지컬 아메리카 Musical America〉지가 선정하는 '올해의 음악인'으로 뽑혔다.
5. 다재다능한 영국의 지휘자 벤자민 브리튼 (Edward) Benjamin Britten Baron Britten of Aldeburgh라고도 함. 1913. 11. 22 잉글랜드 서퍽 로스토프트~1976. 12. 4 서퍽 올드버러. 20세기 중반 영국의 대표적 작곡가·피아니스트·지휘자. 그의 오페라는 헨리 퍼셀 이후 영국 최고의 오페라라는 평을 받는다. 어릴 적부터 작곡을 했고 12세 때 저명한 작곡가이자 교사이던 프랭크 브리지에게서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런던 왕립음악원에서 존 아일런드, 아서 벤저민에게 배웠고, 그곳에서 합창 변주곡 모음인 〈한 아이가 태어나다 A Boy Was Born〉(1933)를 작곡했다. 이후 라디오·연극·영화 음악 작곡가로 활동했고, 시인 W. H. 오든과 친밀해졌다. 1937년 현악 합주를 위한 〈프랭크 브리지 주제에 의한 변주곡 Variations on a Theme of Frank Bridge〉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39~42년에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오페라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오페레타 〈폴 버니언 Paul Bunyan〉(1941, 오든의 대본)을 상연했고, 쿠세비츠키 기금의 위촉으로 오페라 〈피터 그라임스 Peter Grimes〉(1945, 조지 크래브의 시 〈도시 The Borough〉를 바탕으로 M. 슬레이터가 대본을 씀)를 작곡함으로써 20세기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로서 명성을 굳혔다. 이후 〈루크레티아의 능욕 The Rape of Lucretia〉(1946), 희가극 〈앨버트 헤링 Albert Herring〉(1947)·〈빌리 버드 Billy Budd〉(1951, 허먼 멜빌 원작)·〈글로리아나 Gloriana〉(1953, 엘리자베스 여왕 대관식용)·〈나사의 회전 The Turn of the Screw〉(1954, 헨리 제임스 원작)·〈한여름밤의 꿈 A Midsummer Night's Dream〉(1960)·〈오웬 윈그레이브 Owen Wingrave〉(1971, 텔레비전용)·〈베네치아에서 죽음 Death in Venice〉(1973, 토마스 만 원작) 등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의 음악극 개념은 우화 성격의 교회 오페라 〈컬류 강 Curlew River〉(1964)에서부터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여, 노[能:일본 전통음악으로 브리튼은 특히 소설 〈스미다 강 隅田川〉으로부터 영감을 얻음]와 영국 중세 종교극을 한데 섞는 실험을 꾀했다. 이어서 〈불타는 화덕 The Burning Fiery Furnace〉(1966)·〈방탕한 아들 The Prodigal Son〉(1968)이 나왔다. 이보다 먼저 쓴 교회 오페라 작품인 〈노아의 홍수 Noye's Fludde〉(1958)에서는 중세 체스터의 기적극 요소를 사용했다. 〈루크레티아의 능욕〉을 첫 공연 작품으로 '영국 오페라 그룹'이라는 오페라단을 설립해서 자신이 예술감독·작곡가·지휘자를 맡았다. 이것을 계기로 1947년부터 올드버러 음악축제를 열었으며 이후 이곳은 영국의 대표적인 음악 축제장소이자 그의 음악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오페라 이외의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인 장르는 연가곡으로서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미켈란젤로의 7개 소네트 Seven Sonnets of Michelangelo〉(1940, 평생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테너 가수 피터 피어스에게 헌정)·〈존 던의 신성한 소네트 The Holy Sonnets of John Donne〉(1945) 등으로 가곡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대규모 합창곡 〈전쟁 진혼곡 War Requiem〉(1962)은 라틴어 진혼 미사 식문과 제1차 세계대전 때 죽은 윌프러드 오웬의 시에 바탕을 둔 작품이다. 그밖에 합창곡으로는 〈성 체칠리아 찬가 Hymn to St. Cecilia〉(1942, 오든의 시에 붙임), 〈캐롤의 축전 Ceremony of Carols〉(1942), 축제 칸타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을 기뻐하라 Rejoice in the Lamb〉(1943), 〈성 니콜라우스 St.Nicolas〉(1948), 〈봄 교향곡 Spring Symphony〉(1949), 〈오늘의 목소리 Voices for Today〉(1965, 국제연합 창립 20주년 기념곡) 등이 있다. 주요기악곡으로는 현을 위한 〈단순한 교향곡 Simple Symphony〉(1925), 3개의 현악 4중주(1941, 1945, 1976), 피아노 협주곡들, 바이올린 협주곡들, 〈청소년을 위한 관현악 입문 The Young Person's Guide to the Orchestra〉(1945),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교향곡 D장조(1963, 러시아의 첼로 연주자 로스트로포비치에게 헌정) 등이 있다. 1953년 명예훈장과 1965년 메리트 훈장을 받았고 죽던 해인 1976년 6월에는 작곡가로서는 최초로 영국 종신 상원의원이 되었다.
일요일에도 볼수 있겠군요. 세종문화회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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