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불교에 대한 조예가 그리 깊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래에 밝히는 좋은 소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불교 연구자들이 아래 소재를 갖고 더 깊은 연구를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료를 공개합니다. 이미 몇몇 학자들에게는 사석에게 이야기한 적도 있고, 곧 출간될 연개소문 책에도 주)로 밝혀놓은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충분히 공개해도 별 무리가 없어서 소개합니다.
삼국시대의 왕명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었습니다.
왕의 명칭이 시호인가, 묘호인가 등등, 나는 고구려의 왕명은 장지명+업적명으로 보았습니다. 고구려의 역대 왕의 호칭에 대한 연구는 이미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부록으로 제시를 해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글에서 장수왕과 문자명왕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을 하지 못했습니다. 장수왕이 업적인지, 특징인지 구분이 잘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경 가운데는 <장수왕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석가모니의 전생에 대한 것인데, 평소에 남과 다투기를 싫어하여 양보를 하던 인물입니다.
장생불사, 혹은 장수한 임금이란 뜻이 아니라, 석가모니의 전생으로서의 장수왕이 고구려에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장수왕 시기인 5세기에는 고구려에 불교 유물이 비교적 많습니다. 왕이 불교세력과 결합하였다는 증거도 보이고요.
그런데 더 중요한 사료는 장수왕의 손자인 21대 문자명와의 이름인
나운(羅雲)이 실은 나후라(羅吼羅)라고도 불리는 석가모니의 아들의 이름이라는 점입니다.
문자명왕이 석가모니의 아들이다. 그렇다면 장수왕은 일찍 죽은 자신의 아들인 조다를 석가모니로 추존시킨 셈이 되는 셈이지요. 나후라는 잘 알려져 있듯이 석가모니의 아들로 출가해서 10대 제자가 되지요.
자. 장수왕이란 이름은 그가 죽은 491년 이후에 만들어진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470년대(조다가 죽고, 문자명왕이 태어난 후)부터 490년대까지가 고구려에서는 가장 불교가 성행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고구려에서 불교식 왕명, 특히 전륜성왕적 개념을 지닌 왕=부처 라는 이름은 곧 신라에 영향을 주어 신라에 불교식왕명 시대를 열게 됩니다.
고 김철준 박사가 말했던 신라의 불교식왕명의 연원이 고구려에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왜 내가 이것을 별도의 논문으로 발표를 하지 못하느냐 하면, 당시 고구려 불교계의 흐름과 사상적 동향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북위에서도 이 무렵 전륜성왕의 성격을 지닌 임금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전체적인 불교계의 흐름을 내가 모르기 때문에 남들에게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다만, 장수왕의 앞선 광개토대왕은 불교식 이름이 아닙니다. 또한 안장왕 이후는 불교가 쇠퇴합니다. 귀족들이 득세하면서 고구려에 불교는 크게 쇠락됩니다. 그래서 해동고승전에 나오는 왕고덕이 6세기 중반에 의현스님을 시켜 다시금 불교를 북조에 들어가서 배워오라고 시키지요. 왕고덕은 전형적인 왕실측근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문자명왕인데, 문자명왕의 시호는 그가 죽은 후인 안장왕 연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가 불교식 왕명을 갖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시대가 쇠퇴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 이 정도만 말하겠습니다. 왕실과 불교의 밀착, 그리고 귀족들은 전통종교의 숭배로 인한 후기 사상사의 흐름에 대해서는 내가 별도의 노하우가 있지만, 그것은 제외하지요.
5세기말 고구려에서 왜 석가족을 자임하는 호칭과 불교식 왕명이 등장했는지에 대한 좀 설득력있는 연구를 다른 학자들이 심도있게 해주었으면 합니다.
*** 최근 역사21 사이트에서 연합통신 김태식 기자가 삼국시대에 도교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 역시 고구려에 도교(신선사상)이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도 계속 번영했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또한 고구려에서 불교가 크게 번영하지 못했다는 것이 나의 기본 생각이며, 이를 여러차례 밝혀왔습니다. 하지만 종교나 사상이라는 것은 시기 시기별로 두드러지는 것이 다릅니다. 유교국가였던 조선도 문정왕후가 득세하던 시기에는 불교가 기를 폅니다.
장수왕과 문자명왕 시기에 불교의 부상에 대해서는 나는 매우 한시적인 일로 생각하고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