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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여인 마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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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벨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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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는 인류학을 가르치는 한 저명인사가 마리아에 대해 쓴 책을 읽었다. 그 책을 다 읽어갈 무렵 모욕감을 느끼는 구절을 대했다. ‘마리아는 한번도 춤을 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몹시 화가 났다. 이 표현이 마리아의 인간성을 무시할 뿐 아니라 모욕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소중한 존재이며 하와의 자녀로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훼손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마리아가 보통 여자와 같지 않다는 것이요, 그의 여성성이 육화하지 못해 춤을 추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리아는 열정이 없고 감정도 없고, 인간적인 따뜻함이라곤 없는 인간, 다만 단식과 금욕으로 쇠약해져 관상이라는 차가운 거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노래와 춤으로 터져 나오는 내적 갈망을 느끼지 못한 사람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셈이다. 이것은 인격모독이다. 복음서에서 우리가 발견한 한마디 말은 마리아가 춤을 능숙하게 추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기뻐한다 exult'는 표현이다. 이 말은 라틴어 ’ex-saltare'에서 파생된 것으로 ‘기뻐 뛴다’는 뜻이다. 따라서 마리아가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라고 외칠 때 마리아는 훌륭한 음악적 재능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어쩌면 춤을 추면서 마니피캇을 노래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춤과 죽음의 관계로 인해 마리아의 ‘예술적인’ 면을 특별히 강조한다. 죽음이 어떻게 춤과 연결된다는 말인가? ‘죽음 앞에서 춤을 추는’ 이미지가 그 의미를 주리라 생각한다. 마리아는 춤을 추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죽음과 춤이 지닌 공통성, 곧 숨가쁨, 격심한 고뇌, 고통스럽게 수축하는 몸과 같은 현상을 모른다고 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 말은 성모님의 고통이 지닌 구원의 가치를 헛되게 하며 일곱 개의 칼에 마음을 찔린, 통고의 어머니가 지닌 신비를 공허한 구경거리로 축소시킨다. 그 표현은 예수와 함께 주인공이 된 성금요일의 시나리오에서 마리아를 내치며 구원의 드라마가 결정적인 순간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한다.
춤추는 법과 고통을 잘 알고 계신 여인 성모 마리아님, 고통이 최후의 땅이 아님을 알게 하소서. 그러나 짐을 내려놓으려면 고통을 겪어야 하나이다. 고통과 슬픔을 없애 달라고 청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절망하며 비탄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 | |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