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용의 군자를 보았다
전통적으로 중국인의 유학적 심성에 서구인의 이분법적인 사고 — 예컨대, 정신과 물질, 마음과 육체, 선과 악,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창조주와 피조물, 신과 인간, 주체와 객체 등등 — 는 정면으로 대치된다. (W. Tu, 1997, A Companion to Worl Philosophies, p. 22)
저 인간성 소멸적이고, 지구 가이아성 파괴적인 서구합리주의의 이분법적 사고·사상의 원조는 소크라테스-플라톤이다. 플라토니즘을 비평적으로 이어받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중용 개념은 오늘날까지 서구인, 서구문명에 있어 금과옥조로 되어있다:
중용이란 양 극단의 중간이다. 용기라는 덕은 비겁과 만용의 중간이다. 후함이라는 덕은 인색과 낭비의 중간이다.
장엄이라는 덕은 모자람과 방탕의 중간이다. 만약 용기가 만용으로 나간다면 만용보다는 덜 나쁜 비겁을 택하라.
후함이 낭비로 나간다면 낭비보다는 덜 나쁜 인색을 택하라. 장엄이 방탕으로 된다면 방탕보다는 덜 나쁜 모자람을
택하라. (W. S. Sahakian, 1968, History of Philosophy, pp. 74~75)
요컨대 서양에서 중용은, 그들의 이분법적 사고패러다임에서, 가운데를 취하는 것이다. 반면에 유학에서 중용은 시중(時中)적 알맞음을 잡는 것, 그러므로 결국 다 잡는 것이다. 그러한 군자의 전형적 모습이 <중용> 14장 전반부에 그려져 있다:
군자는 자신이 처한 위치에 알맞게 행할 뿐, 결코 그 알맞음을 벗어나지 않는다. 부유하고 고귀한 자리에 있으면
그 처지에 맞게 행한다. 비천한 자리에 있으면 그 처지에 맞게 행한다. 야만족들 가운데 있으면 그 처지에 맞게
행한다. 어렵고 위험한 자리에 있으면 그 처지에 맞게 행한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나 항상 스스로가 편안하다.
<중용(中庸)>이 제시하는 중용의 중(中)은, 그 제1장에 의하면, 천하의 근본이 되는 중심 곧 [가운데가 아니라]알맞음이다. 중은 그러므로 형이상학적 체(體)이고 조화(和)는 그것의 용(用)이다. 달리 말해, 알맞음[體]은 조화[用]의 미발未發이고, 조화는 알맞음의 이발已發이다(體用一源). [체용일원은 플라톤 이래 이분법에 기반한 서양의 주류 철학과 사상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개념이다. 반면에 그것은 우리 동양의 유불도 모두를 관통한다(유가에서 陰陽對待, 불가에서 不一不二, 도가에서 天均兩行). 이러니 그들로서는 동양의 철학과 사상을 행핀없는 것이라고 폄척하는 것이다].
그리고 용(庸)은 평상/평범이다. 천하가 달성해야 할 도 곧 조화가 어떤 특별한 장소, 특별한 생활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에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멀리 가려면 가까운 데부터 가는 것이 도이다. 높은 데 오르려면 낮은 데부터 오르는 것이 도이다. 동일한 원리로, 가장 근본이 되는 도는 바로 효제(孝悌) 즉 가까이 있는 부모님과 형제부터 사랑하는 것이다. 제(齊)나라 왕이 재상을 시켜 맹자가 무엇이 다른 지 엿보게 했다. 그 말을 듣자, 맹자는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소. 요순(堯舜)도 보통사람과 같은데[평범]’ 하면서 크게 웃었다.
중용의 도를 성취한 군자의 마음이라고 해서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남과 특별하게 다를 것이 없다. 그는 인간 본연의 감정과 (이기적 욕심이 아닌)자연스러운 욕망을 따라 기쁘면 웃고 화나면 성도 내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 삶의 토대는 알맞음(中)/조화(和)이기 때문에 그의 언행은 불지불식 간에 남에게 감화를 주고 동시에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나아가 인간과 자연을 조화롭게 하나로 아우른다. <중용>의 총장總章이라 할 수 있는 제1장의 끝 절은 중용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중/화에 이르면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육성한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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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30일, 학수이는 그러한 중용인의 모습을 실제로 보았다.
그날 코로나사태로 인해 우리 재부총동문회가 3년만에 열렸다.
한 식탁에 4명씩 기별로 앉았다.
내 왼쪽에 대충 올림차순(?)으로 선배님들이 앉으셨고, 오른쪽에 대충 내림차순으로 후배들이 앉았다.
내가 앉은 식탁과 내 왼쪽 식탁들에 앉은 동문 중에 나는 한두 중용인의 모습을 언뜻언뜻 보았다.
학수이 모처럼 친구들과 즐거움이 커서 [늘 그런 것처럼]헬렐레 과음 되었다.
서면역에 내리니 스피커로 하단행 막차 맨트가 나온다. 집에 오니 새벽 1시다.
다음날 아침 학수이 여축없이 파리약 먹은 파리 상태다.
겁쟁이 학수이 항상 비치해두고 있는 코 자가진단 키트로 검사했다. 두 번 했는데 두 번 다 음성이 나왔다.
이에 용기를 내어 파리약 후유증 완화를 위해 목욕탕에 갔다. 코로나 이후 딱 두 번째이다.
늙고 야윈 몸이지만 뜨끈한 물에 담그고 있으니 몸 콘사이스가 서서히 풀리면서 어제 밤 그 한두 중용인의 이 모습, 저 모습이 생각에 떠올랐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 모습에 비추어 못난 내 자신에 대한 여러가지 반성이 뒤따랐다.
80이 가까운데도 학수이 아직도 인간적 수양이 멀었다.
더욱 끊임없이 반성하고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다시 한번 다졌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툭수바리라도 닦고 또 닦으면 놋그릇 비스무리하게라도 된다는 유학의 믿음을 소생은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