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코 잊지 못할 달빛을 품은 거인의 무덤
새별오름·이달오름
일출이 좋은 오름을 올랐으니, 일몰이 좋은 오름을 가지 않을 수 없다. 일몰이 좋은 오름 하면 서쪽 바닷가에 접해 있는 오름을 예상한다. 그러나 겨울 일몰은 바다 속으로 바로 잠기는 해보다 바다와 눈 쌓인 오름을 고루 비추는 햇살의 여운이 더 긴 법이다. 그래서 겨울 해넘이는 약간 내륙의 새별오름이 제주 겨울의 매력을 더 풍부하게 보여준다. 제주 산악인 고길홍(70ㆍ전 제주산악안전대장)씨와 함께 새별오름으로 향한다. 원래는 새벨오름이었다고 한다. 민초들이 집 지붕을 덮는 데 쓸 짚을 베는 오름이었다 해서 유래하며 세월이 흘러 바뀌어 새별이 되었다.
새별오름은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에 있다. 한라산을 기준으로 서쪽이며 서부관광도로 바로 옆에 있어 접근이 편하다. 진입로도 포장되어 있고 주차할 공간도 드넓다. 여기서 매년 정월대보름 들불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면 수십 만 평 초원과 오름, 동녘자락이 붉은 화염에 휩싸인다. 소와 말을 방목하던 시절, 우마에 해가 되는 진드기 같은 해충을 없애기 위해 행했던 화입을 축제로 승화시킨 행사다. 시뻘건 화염이 일렁이는 밤하늘로 불꽃잔치가 섬광처럼 빛나면서 축제는 피날레를 장식하는데, 이 황홀한 장관을 보려고 제주사람은 물론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거대한 왕릉이다. 나무 하나 없이 거대한 잔디 덩이가 둥글둥글한 선을 그리며 산을 이뤘다. 멀리 있어도 능선에 있는 사람이 몇 명인지 보일 정도다. 오름으로 가는 길은 드넓은 평지에 난 도로다. 비행기 활주로를 걷는 기분으로 거인의 무덤 같은 새별오름에 다가간다. 밑에서 올려만 봐도 능선의 경치가 시원할 거란 걸 알 수 있다. 어떤 모양의 화구를 품고 있을지 궁금할 따름이다. 마침 단체로 온 사람들이 오름을 내려온다. 평범한 이들이 아닌 장애아들을 봉사자들이 대동해서 왔다. 눈이 내려 20cm 넘게 쌓였는데도 이들이 즐겁게 산행을 즐길 수 있는 그런 오름이다.
정면으로 바로 오르는 길이 있지만 사진가이자 오름 전문가인 고길홍씨는 오른편으로 이끈다. 오름 아래의 철책을 따라 240m 우측으로 가서 철망을 지나 말 목장 곁으로 오름을 오른다. 정면은 가파르니 오른편 능선으로 우회해서 오르는 것이다. 말들은 추위에도 끄떡 없이 풀을 뜯고 있다. 여느 오름들처럼 억새가 온 땅을 뒤덮었다. 눈이 쌓였지만 인기 오름이라 사람이 많이 다녀 길이 뚜렷하다. 간혹 얼어붙은 비탈이 있어 아이젠을 벗진 못한다.
사진을 찍어가며 느리게 걸었는데도 20분 만에 정상이다. 표지석과 삼각점이 있고 드넓은 경치와 혹독한 바람이 오름 나그네를 반긴다. 서쪽으로 새별오름보다 높은 오름이 없어 바다까지 시선이 닿는다. 넓은 평원과 사이로 솟은 많은 오름들, 눈보라가 휘날리는 날이라 일몰은 없지만 날씨만 좋다면 잊지 못할 노을을 볼 수 있겠다. 아니 밤에 올라 달을 맞는 은밀한 장소로 써도 좋겠다. 그럴 사람이 있다면 말이다.
흰색과 노랑이 어우러진 억새눈밭을 따라 간다. 갈림길에서는 북쪽 봉우리로 가는 길이 있다. 시야가 훤해 어디로 내려서게 될지 다 보인다. 이달오름(489m)으로 이어진 완만한 내리막 주위엔 무덤이 많다. 한결같이 돌로 낮은 담을 네모 낳게 쌓았다. 옛날에는 모두 소와 말의 방목지여서 가축이 무덤에 들어오는 걸 막고, 들에 난 불이 번지는 걸 막기 위해 돌을 쌓던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서쪽 바로 옆에 이달오름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이달봉이라고도 하는데 고씨의 말에 따르면 이름만 봉일 뿐이지 엄밀히 따지면 모두 오름이라고 한다. 두 개의 봉우리가 솟았는데 왼쪽의 봉우리가 더 높다. ‘이달(二達)’에서 ‘달’은 높다 또는 산 이라는 고구려에서 나온 말이다. 즉 두 개의 산봉우리를 뜻한다. 왼쪽 남봉에는 키 큰 삼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고 북봉은 소나무가 듬성듬성 자라고 있다. 새별오름의 날머리로 내려서자 바로 이달오름 들머리다.
입구는 철책을 치고 사람이 ‘ㄷ’ 모양으로 돌아들어가도록 통로를 만들었다. 가축이 들어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삼나무숲과 억새 오르막을 10분간 숨차게 오르자 바로 정상이다. 성격 급한 사람들이 좋아라 할 만한 코스다. 오르막에서 뒤돌아본 새별오름은 주차장에서 본 것과는 딴판의 다른 오름 같다. 굴곡이 훨씬 완만하고 너른 품을 가졌다. 겉은 무뚝뚝하지만 속 정 깊은 사람처럼 말이다.
고길홍씨는 오름의 매력에 대해 “차로 입구까지 갈 수 있어 접근이 쉽고, 올라가는 길이 짧고, 올라가면 경치가 시원하고, 아이들이나 노약자가 갈 수 있을 정도로 쉽다”고 한다. 오름의 다른 매력은 밖에서 본 오름은 작은 산이지만 올라가서 보면 화구가 있어 완전히 딴판의 모양새라 보는 재미가 있다. 또 비슷한 것 같지만 오름마다 각각 개성이 틀려 오름이야말로 제주도만의 매력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자연환경이다. 오름은 육지의 자연과는 다른 점이 분명해 마치 다른 나라, 다른 행성에 와 있는 것 같은 신선함을 육지 사람들에게 선사한다.
정상에는 표지석과 삼각점, 산불초소가 있다. 나무가 높지만 북쪽으로 트여 있어 이달봉의 작은 봉우리와 제주 들판이 드러난다. 소나무숲을 따라 능선을 내려가다 길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두 봉우리 사이의 안부로 이끈 다음 이달봉 북봉을 올려치게 한다. 안부에서 150m 오르면 북봉 꼭대기인데 ‘이달이 촛대봉’이란 표지석이 있다. 촛대봉 정상은 바위지대인데 정상에 닿기 직전에 세로로 길쭉하게 벌어진 동굴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바람을 막아주는 임시 대피소로 써도 될 성싶다. 제주말로 이런 굴을 ‘궤’ 라고 한다. 촛대봉 정상은 남봉보다 낫다. 표지석에 적힌 456m 높이가 GPS의 산높이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바다가 새별오름에서 좀더 가깝다. 생전에 전망 좋은 곳을 선호하는 분이었는지 정상에 무덤이 있다.
비탈진 내리막 길의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해 고무로 바닥을 깔았지만 얼어붙은 눈길의 미끄러움을 완전히 막진 못한다. 사람 소리를 들은 노루 한 쌍이 저만치서 뛰어간다. 철책을 빠져 나오자 인가도 없고 차량 통행도 뜸한 도로가 나온다.
미니 인터뷰
제주사람 오순희
제주 바람처럼 시원한 여장부
제주 토박이 오순희(41)씨는 전국의 산 좀 탄다 하는 사람들에게 꽤 알려져 있다. 제주도에서 구조대 활동을 하며 활발한 산악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시원시원한 목소리와 성격, 강한 체력도 한번 함께 산행하면 그녀를 기억하게 되는 이유다. 활동적인 성향의 오씨는 고상돈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대산련 청소년분과위원, 제주도연맹 등산의학이사를 맡고 있으며 제주시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한복집을 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네 통장과 산악회 회장을 겸하고 있었기에 과거에 비하면 덜 바쁜 편이란다.
고교 시절부터 산을 좋아했던 그녀는 제주산악안전대 활동을 하며 2000년 여성 기혼자를 중심으로 한라솜다리산악회를 창립한다. 이후 자녀를 동반해 제주도의 알려지지 않은 오름을 숱하게 올랐다. 청소년 아웃도어 활동에 관심이 많은 오씨는 한국 보이스카우트 대장도 맡고 있다. 그녀는 “아이와 함께하는 오름산행만큼 좋은 교육은 없다”며 “오름은 아직 체력이 약하고 인내력이 부족한 아이들의 체력향상과 정서순화에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고 한다. 지난해에는 울산연맹에서 주관한 히무룽(7,126m) 원정에 참가해 5,800m까지 진출, “스무 살 때 가졌던 꿈을 나이 마흔이 되서야 이루게 됐다”며 활짝 웃는 제주 산악인 오순희씨다.
오름 가이드 Guide
새별오름과 이달오름은 자가용을 이용해야 한다. 1135번 서부관광도로 곁에 있어 접근이 수월하다. 차를 세우고 20분이면 새별오름 꼭대기에 설 수 있다. 정상에서는 능선따라 직진해서 이달오름으로 가거나 오른편의 북봉을 들러 능선을 타고 내려와 이달오름으로 가는 방법이 있다. 이달오름은 이달봉과 촛대봉, 두 개의 봉우리인데 촛대봉을 지나 길 따라 서쪽으로 내려서면 도로를 만나긴 하지만 차를 세워둔 곳까지 돌아가기가 까다롭다. 촛대봉까지 가서 경치를 보고 온 길을 되돌아가 이달오름과 새별오름의 안부에서 주차장까지 돌아오는 게 일반적이다. 이달오름과 촛대봉 사이 안부에서 새별오름 쪽으로 내려오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새별오름과 이달오름의 산행 거리는 3.3km,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숙식 (지역번호 064)
오름은 뿔뿔이 흩어져 있으므로 숙소는 제주시나 서귀포시에 잡는 것이 낫다. 제주시에서 유명한 맛집은 유리네(740-0890)다. 간단한 식사류부터 회나 구이류까지 다양한 제주 별미를 맛볼 수 있다. 도새기몸국(7,000원)과 성게미역국(8,000원)이 맛나다.
서귀포는 우정횟집(733-8522)이 유명하다. 서귀포시의 저렴하고 비교적 깨끗한 숙소로는 서문로터리 부근의 은하장(733-6678)이 비성수기 2만~3만 원에 이용 가능하고 여관 옆 골목의 수더분한 동네식당인 수궁식당(762-7948)도 괜찮다. 삼겹살과 전골, 사골곰탕(6,000원), 육개장(6,000원), 해장국(6,000원) 등이 있다.
/ 글 신준범 기자
사진 김영선 객원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