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9일 [대림 제4주간 월요일]
루카 1,5-25
믿음과 거짓말
도산 안창호 선생이 상해 망명시절, 한 동지의 16세 된 아들 생일 축하 자리에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전에 왜경들이 이 소식을 듣고 집 주변에 잠복하고 있었습니다.
주위의 독립운동을 함께하던 동지들도 참석을 극구 반대하며 말렸습니다.
“선생님, 이번에 가시면 체포되십니다.”
“그래도 가야 합니다.”
“애들 생일잔치인데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십니까?”
“작은 약속이라도 반드시 지켜야만 합니다.”
그렇게 고집을 부리고 그 곳에 가서 왜경에 체포되고 맙니다.
이 어리석으리만큼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줄 알았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이 행동은 그 분이 평생 지니고 살았던 4대 정신이 무엇이었는지 알면 바로 이해가 됩니다.
그 첫 번째 정신이 ‘무실(務實)’입니다.
무실은 말 그대로라면 노력해 열매를 맺자는 것이겠지만 實은 ‘진실’이란 뜻도 있습니다.
즉, 무실은 진실이란 뜻이고 그 반대는 거짓입니다.
그 분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
그 두 번째 정신은 ‘역행(力行)’입니다.
알면 행하라는 뜻입니다.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것을 알았기에 그 분은 다만 행한 것뿐입니다.
세 번째 정신은 ‘충의(忠義)’입니다.
충성과 신의를 나타내는데, 맡은 일에 대해 충성을 다하고 사람에 대해서는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동지들이게 이렇게 씁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몸부터, 우리 집부터 고치는 것을 큰 일로 보지 않는 이가 있다고 하면, 우리는 세상을 속이는 사람이요 우리 스스로가 속는 사람이외다.”
그리고 마지막이 ‘용감(勇敢)’입니다.
도산은 ‘용단력과 인내력’이란 글에서 이렇게 씁니다.
“일이 옳은가 그른가, 이 일을 할까 말까 방황하고 주저하면 거기에는 고통이 생깁니다.
또 결국은 낙망합니다.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어째서 작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셨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도 그분에 대한 짧은 글들을 찾아 읽으면서 지금까지 지키지 못한 많은 약속들이 떠올라 부끄러웠습니다.
그 분은 중학교 학력밖에는 없는 분이셨는데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너무나도 확실한 신념을 지니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아예 하지 맙시다.
그리고 했다면 목숨을 걸고라도 지키도록 합시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것도 일종의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브리엘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즈카르야 부부에게 아들이 생기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자신과 아내가 나이가 많고
지금까지도 자녀가 없었다는 말을 하며 잘 믿으려하지 않습니다.
덕분에 즈카리야는 아들이 출생하여 할례를 받을 때까지 말문이 막히게 됩니다.
만약 즈카리야도 도산 안창호 선생과 같은 신념으로 살았다면 주님의 말을 믿지 못했을까요?
물론 믿기 어려웠을 테지만 ‘나도 거짓말을 안 하는데 하느님이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실 수 있을까?’ 하며 결국 믿지 않았을까요?
사람은 무엇이든 믿어야 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믿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또 믿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내가 부모로부터 태어난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도 결국은 자기 자신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을 우리는 ‘교만’이라 부릅니다.
이 교만은 아담과 하와를 죄에 빠뜨리기 이전에 이미 사탄의 무리를 죄에 빠뜨리게 하였습니다.
또 예수님은 사탄을 ‘거짓말의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따라서 교만과 거짓말과 믿지 못하는 것은 매우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사실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은 좀처럼 믿기 힘들지만, 그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남을 믿기는
더 힘듭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도 자기처럼 거짓말을 하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믿지 못할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망각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을 더 증가시킵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에서부터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거짓이 내 믿음을 갉아먹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초대에 대한 응답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믿음을 가지기는 매우 힘듭니다.
그만큼 우리 자아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내 자신을 죽여 믿음을 더 증가시켜야 합니다.
가장 구체적이고 좋은 방법은 내 입에서 거짓이 절대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길 약속을 하는 것도 일종의 거짓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은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합시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믿음도 증가하고 그 안에서 더 큰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19일 [대림 제4주간 월요일]
그냥 모든 것을 맡겨드리고 나니
비록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난 후의 응답이었고, 너무 늦은 감이 드는 응답이었지만 하느님의 응답에 기쁨과 감격에 찬 어조로 외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의 남편 즈카르야는 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한 평생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로 법이 없어도 살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무수히 많은 율법 계명과 규정들이 백성들을 괴롭혔지요.
그 모든 계명들을 다 지켜나가기란 하늘의 별따기 였습니다.
정녕 숨 막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두 사람은 그 모든 율법과 규정들을 철저하게 지켜나갔습니다.
한 점 흠 없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언제나 성실하게 성전에서 봉사하며 하루 온 종일을 기도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한 가지 있었는데, 자식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했었지만, 끝까지 자식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렀습니다.
둘 다 이젠 자식을 희망할 수 없는 노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많은 후손’처럼 큰 축복은 없었습니다.
자식 많은 것은 축복 중의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반대로 자식이 없다는 것은 축복의 반대 개념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눈길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노년에 손자손녀를 안아보는 기쁨은 얼마나 큰 것입니까?
평생의 결실, 뿌듯함과 흐뭇함의 대상이 아들이요, 손자손녀이지요.
명절이 다가오면 외로움은 더욱 커졌습니다. 집집마다 찾아온 아들들, 며느리들, 손자손녀들로 복잡한 이웃집이 부러웠습니다.
밤늦도록 왁자지껄 떠들면서 먹고 마시는 모습들이 정말 부러웠습니다.
오직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집만이 적막감이 감돌았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원망도 많았습니다.
섭섭함도 많았습니다.
“저희가 도대체 뭘 잘 못 했길래?” 하는 억하심정도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하느님께 충실했습니다.
끝까지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성전에서 충실하게 봉사했습니다.
항상 기도 안에 살았습니다.
고통스러웠지만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이런 두 사람의 항구한 신앙, 충직한 종의 모습에 마침내 하느님께서 응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힘을 포기할 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복음의 진리도 인간의 능력을 내려놓을 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녕 하느님을 만나고 진하게 하느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그냥’ 모든 것을 맡겨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께서 주도하시는 흐름에, 그분의 물결에 그냥 내 존재 전체를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 체험의 출발점은 어디입니까?
하느님은 내 힘이 다한 곳에서 체험됩니다.
하느님은 내 존재의 비참한 곳까지 내려가 외롭게 되었을 때 비로소 체험되는 존재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며 완전히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풀이 죽을 때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는 곳에서 비로소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제민, 제3의 영성, 바오로딸 참조)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앞서 한 사람>
2022. 12. 19
루카 1,5-25(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에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로서 즈카르야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으로서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이 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 다 나이가 많았다.
즈카르야가 자기 조 차례가 되어 하느님 앞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할 때의 일이다. 사제직의 관례에 따라 제비를 뽑았는데, 그가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기로 결정되었다. 그가 분향하는 동안에 밖에서는 온 백성의 무리가 기도하고 있었다. 그때에 주님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분향 제단 오른쪽에 섰다. 즈카르야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즈카르야가 천사에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하고 말하자, 천사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한편 즈카르야를 기다리던 백성은 그가 성소 안에서 너무 지체하므로 이상하게 여겼다. 그런데 그가 밖으로 나와서 말도 하지 못하자, 사람들은 그가 성소 안에서 어떤 환시를 보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몸짓만 할 뿐 줄곧 벙어리로 지냈다. 그러다가 봉직 기간이 차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 뒤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였다. 엘리사벳은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
<주님 앞서 한 사람>
홀로 오실 수 있는
주님이시지만
홀로 오시지 않는
주님이시기에
오시는 주님 앞서
한 사람 늘 있답니다
주님께서 앞서 보내신
주님 모신 사람 말이에요
그러니 주님을 모신 내가
주님 앞서 그대에게
그러니 주님을 모신 그대가
주님 앞서 나에게
오시는 주님 맞이할
설레는 마중길 되어 볼까요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