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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단이 태안사에 있는지는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지만 무작정 태안사에 가서는 찾기가 쉬운일이 아니자나요...^^그래서 좀 더 쉽게 찾아가는 길을 사진과 함께 곁들어 올릴게용~♥ 태안사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가는 길 전남곡성IC에서 구례방향으로 국도 17호선을 따라 약15km 가다보면 섬진강과 보성강이 합류하는 압록유원지(압록다리)가 나옵니다. 다리를 지나기 바로 전 우측으로 보성강변(석곡)으로 5분여 달리다 보면 왼편으로 태안사 이정표가 눈에 띄죠..좌측 보성강 다리를 건너 다시 10분 동리산을 향해 달리면 태안사 초입에 이릅니다. 이 곳 입구에서 산길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2km에 이르는 태안사 진입로는 계곡과 함께 울창한 숲그늘을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비포장 산책로죠..물론 차로도 절 안까지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진입로 입구에 매표소가 있습니다. 어른 1,500원) 일주문 옆 우측 화장실쪽으로 올라가면 선방 입구가 나옵니다. 스님들 공부하는 곳이라서 원칙적으로는 출입을 금했으나 올라가도 무방합니다. 단, 외부 출입을 삼가고 피눈물나는 수행을 하고 있을 스님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조심스럽게 올라가야합니다..^^* |
곡성 태안사 뒷산을 오르다보면 신숭겸장군님의 장군단을 알리는 안내석이 나옵니다.
이곳이 바로 고려개국일등공신 평산신씨 시조이신 고려태사 장절공 신숭겸님의 장군단입니다.후손으로서 조금 부끄럽습니다.
장군단을 다시 위엄있고 보기좋게 조성했으면 하는 생각이 절로 납니다. 장군단 재조성하는데 저한테도 종중에서 연락주시면
성의껏 내겠습니다.
용산재
용산재에 있는 신숭겸장군님 동상
전남 곡성 ‘봉두산’ 태안사 목 무덤 이야기
(신숭겸장군(申崇謙將軍)의 영정(影幀) )
목 무덤은 ‘고려태사개국장절공(高麗太師開國壯節公)
신숭겸장군(申崇謙將軍)’의 묘를 지칭한다.
태안사 경내에서 뒷길로 오르면 스님들이 직접 재배하고 경작한 차밭, 야채밭,
다양한 과실수 밭이 제법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사람의 흔적이 없는 이 고요한 산길을 따라 10여분 오르면
‘고려태사개국장절공(高麗太師開國壯節公)
신숭겸장군(申崇謙將軍)’의 목 무덤이 있다.
‘장절(壯節)’이란 후백제군과의 공산(公山:지금의 경북 달성군 팔공산)
동수대전투(桐藪大戰鬪)에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위왕대사(衛王代死)로
위기를 모면한 ‘고려 태조 왕건 (高麗 太祖 王建)이 자신을 대신하여
장렬히 전사했다 해서 내린 시호이다.
왕건(王建)은 신숭겸의 사후에도 나라의 잔치가 있을 때마다
신숭겸이 없는 것을 슬퍼하며 짚으로 그의 형상을 만들어 관복을 입혀 앉히고
그를 잊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임금을 대신해 목숨을 버린 신숭겸의 충성심과 희생정신은 이후에도 크게
존경을 받았었다.
고려 성종 13년(994)에는 태사(太師)라는 높은 벼슬에 올려 졌고
역대 임금의 신주를 모신 태묘의 태조 사당에 공신으로 함께 모셔졌다.
또 예종 15년(1120)에는 예종이 서경(지금의 평양)에 행차해 팔관회에서
신숭겸· 김낙 장군 이야기를 듣고 두 장군의 충성심에 감동받아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노래를 지어 그 넋을 기렸다.
이 노래는 신숭겸의 사적을 기록한 책인 ‘장절공유사(壯節公遺事)’에 실려 있다.
양주동(梁柱東)의 주해(註解)를 참고하여 도이장가를 대략 우리말로 옮겨가며 읽어본다.
님을 온전히 지키시려는
그 마음 하늘 끝까지 미치셨네
넋은 이미 가셨지만
대왕께서 내리신 벼슬은 대단하도다.
바라보니 알겠도다
그 때의 두 공신이시여
이미 오랜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빛나는도다
전남 곡성출신으로 평산(平山) 신(申)씨의 시조인 신숭겸(申崇謙)장군은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의 건국에 큰 공을 세운 4태사
(四太師 : 신숭겸, 복지겸, 홍유, 배현경)의 한 사람으로 고려의 개국 공신이다.
왕건(王建)은 신숭겸, 복지겸, 배현경과 한 가족의 결의를 맺었다고 해서
이들의 성씨를 지닌 사람끼리는 결혼을 피하는 풍습이 생겼다고 전한다.
신숭겸장군은 고려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해 가고 있던 시기에 견훤(甄萱)이
이끌던 후백제(後百濟)와 맞붙은 공산동수대전투(公山桐藪大戰鬪)에서
견훤(甄萱)의 부대에게 포위를 당하는 상황에 이르자 왕건(王建)을 살려내기 위하여
자신이 대신 왕건(王建)의 복장을 갖춰 입고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바로 고육지계(苦肉之計)였던 것이다.
그 바람에 왕건(王建)은 살려낼 수 있었지만 그는 목이 잘리고 말았다.
후백제군(後百濟軍)과 공산동수대전투(公山桐藪大戰鬪)에서 왕을 피신시키고
왕을 대신해 싸우다가 패배한 신숭겸장군을 후백제군이 왕건(王建)의
수급(首級)인 줄 알고 꿰어갔다가
뒤늦게 왕건(王建)의 수급(首級)이 아닌 줄 알고
진(陣)밖으로 던지자 신숭겸장군의 애마인 용마가 수급을 물고
고향과 인접한 태안사의 뒷산(신숭겸 장군이 어릴 적 무술을 연마했던 동리산
; 봉두산(鳳頭山))에 와서 3일간을 울다가 굶어 죽었다.
이를 발견한 태안사(泰安寺) 승려들이 필시 수급(首級)은 신숭겸 장군의
머리이고 말은 그의 애마라는 것이리라 믿고 장군 단에 말의 무덤과
신숭겸장군의 무덤을 만들어 매년 3월 16일 신제와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사찰의 승려들에게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다고 한다.
신숭겸장군이 애지중지 했던 용마는 신숭겸장군이 어려서
대황강(보성강 또는 석압강) 용소에서 목욕을 하다가 굴에서 나온
용마를 얻었다고 한다.
목 무덤은 고려 전형적인 석축으로 둘러싸인 형식이다.
제단 석에는 절의 표시가 새겨져있는데 이는 절에서 관리하였기 때문이다.
갑술년(서기 1934년)에 태안사 승려와 유림, 본손이 날짜를 잡아
묘를 더 좋은 곳으로 이장하려고 지관을 불러 미명에 단소 봉분을 파묘하니
석함이 나오는 순간 청명하던 날씨가 갑자기 어두워지며 소나기가 쏟아지고
뇌성벽력이 치므로 작업을 하던 인부가 혼비백산하여 도망하므로
봉분을 덮어 버리고 나니 날씨가 다시 맑아졌으며 그 후로도 단소를
더럽히는 자가 있을 때면 큰 구렁이가 나타나 혼내주었으며
또 벌초나 제향을 거르거나 소홀히 하면 귀촉도(歸蜀道:두견이)가
슬피 울며 고을에 흉년이 들기도 했다고 한다.
동리산문 개산조 혜철스님 寂忍禪師照輪淸淨塔을 참배하기 위한 "배알문" 拜謁門 편액은 창암 이삼만 (1770~1847)의 글. 적인선사 :785~861 경문왕 원년 입적
태안사 능파각 (凌波閣) 朝鮮 英祖 43년(1767)에 복원.
태안사 능파각 침목을 의자로 앉아 주위 경관을 만끽하고 천장을 바라 보노라면...
능파각을 지나 오르면 桐裏 작은돌로 둥글게 봉황의 알을 상징하는듯... 동리산(桐裏山) 鳳凰이 서식하는 나무가 오동나무이고 태안사가 자리잡은 곳을 둘러싼 주변 산세가 오동나무 줄기속 처럼 아늑해서 동리산이라 ...일주문의 전면을 동리산태안사, 이면을 봉황문이라고 편액을...
태안사 불탑지(佛塔池) 한가운데에 봉래산을 조성하여 삼층석탑을 보수하여 봉안.
동리산 태안사 일주문. 뒷면에는 봉황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대웅전은 6·25 전쟁 때 소실, 1969년 주법전을 새로 신축,,,현판을 ???殿으로 하였다가... 재중창 이후??? 대웅전으로 편액 !!!! 으로 여겨진다.
후불탱화 본존은 아미타여래 ! 삼존불 (본존: 아미타여래,좌협시:관음, 우협시:지장보살) ▽
태안사 동종 보물 제1341호. 세조 3년(1457) 주조이후 깨어져 선조 14년(1581) 재주조 . 용뉴 ▽
태안사 적묵당
태안사 해회당 태안사 금구 영조 46년(1770) 주조 봉안
태안사 수조
태안사 보제루; 보제루에 걸린 목어 ▽
태안사 약사전
태안사 삼성각
< 태안사 염화실
태안사 선원
태안사 배알문 下心으로 이 門을 들어오시람니다
동리산문 개산조 혜철선사 적인선사조륜청정탑. 방형축대밖의 네모퉁이에 기둥을 세웠던 초석 ?
적인선사조륜청정탑 (785~861) 보물 제273호 寂忍禪師照輪淸淨塔 상륜부▽
동리산문 개산조 적인선사조륜청정탑 하층기단면석 익살스럽게 돋을새김한 사자상 ↕
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
태안사 광자대사 부도 (864~945) 보물 제 274호
광자대사 부도비 보물 제 275호 이수. 적인선사와의 !!! ? 가릉빈가로 여겨지는 새가 날개를 활짝펴고 금방이라도 훨훨 날으려는듯.... 그러나 머리가 ???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석조조형물의 가릉빈가로서는 가장 아름다웁고 생동감이 있는 !!!!!
태안사 부도군 △ ; 태안사 뒤깐 불2546년상량 ▽
고려태사 장절공 개국공신지단. 將軍壇 : 곡성군 죽곡면 동리산(桐裏山 泰安寺) 뒷산에 있다. 위해 새로이 단을 쌓고 태안사 스님들과 유림이 같이 매년 음 3월 16일에 茶禮를 행했다고 한다. 용산재(龍山齋)는 신숭겸장군의 탄생지로 木寺洞面 九龍里에 위치한다.
곡성 동리산문 태안사
태안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원년(742)에 이름모를 스님 세 분이 세웠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에는 광자대사가 크게 늘려 지었는데 이 때 절의 규모는 총 40여 동에 110칸이었고,
조선시대에는 숙종 10년(1684)에 주지 각현이 창고를 새로 지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혜철 적인선사조륜청정탑(보물 제273호), 광자대사탑(보물 제274호), 광자대사비(보물 제275호), 바라(보 제956호), 동종(보 1349호), 일주문(전남 유형문화재 제83호), 태안사삼층석탑 등이 있다. |
신숭겸 장군 에게는 득성에 관한 기록과 전사 당시의 일화가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전해 온다.
신숭겸 장군이 어느 해 평산 땅을 지나면서 왕명에 따라 날아가는 기러기의 왼쪽날개를 쏘아 보기 좋게 맞췄다. 기러기가 화살을 맞고 떨어진 곳에 관향과 궁의전(弓位田-활솜씨를 겨루어 땅을 하사 받는 것)을 상으로 받을 만큼 신궁이기도 하였으며 또한 왕건을 대신하여 목숨을 버려 오백년 고려 왕도를 잇게 했던 신 장군은 고려 왕건과 예종이 여러 토속 신에게 제사하던 의식인 팔관회를 베풀 때 일이었다.
신장군의 형상을 본따 만든 짚이 살아있을때와 같이 반열에서 일어나더니 절하고 춤추며 말을 타고 뛰어 달렸다고 하며 신숭겸 장군에게 내려준 술잔도 금방 닳아 마르는 기이한 일들이 일어났다고 한다. 죽어서도 애국과 왕에게 충성하는 그의 고혼이 영원하듯 하여 높은 기개에 다시 한 번 고개 숙여지는 대목이다.
곡성에 남아있는 신숭겸장군의 흔적을 소개하도록 한다.
용산재
신숭겸 장군의 출생지인 목사동면 구룡리에는 물을 마셨다는 구룡리의 신공정과 용산재가있다. 용산재는 선조 22년(1589년)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고 있는 서원으로 신숭겸 장군( ~927) 탄생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유적이다. 용산 재에는 평산 신씨 33대손인 신종국씨가 종가에서 민박집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
용산재 뒷산(신유봉)에는 신숭겸 장군이 무예를 닦았다는 훈련 터가 있고 아래 언덕에는 변소로 이용했다는 측간(치간) 바위가 있다.
또한 화장산(525m)은 죽곡면에 있는 산으로 신숭겸장군이 이곳에서 무예를 익혔으며 당시 입었던 갑옷을 숨겨두었다는 바위 철갑바위가 있다고 전해진다.
죽곡면 삼태리에는 맬을 매었다는 계마석이있다.
대황강 가운데 여울과 소와 바위가 있다. 이 소에서 신숭겸 장군이 목욕하였다는 곳이라 하여 용소라고 이름하고 그 여울 역시 용탄(龍灘)이라 하였다. 여울 옆에 용암이라는 큰 바위가 있다.
보성강의 용탄 여울에서 목욕을 하는데 큰 바위굴 에서 용마가 나와 장군에게 다가오자 그는 즉시 이 말을 타고 5리 정도의 거리인 유봉리의 산을 날았다. 이로부터 그 산 이름을 신유봉(申遊峰)이라 부르게 되었고, 용마가 나온 바위는 용암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 바위에 용마 발자국이 있고 말구시(말 밥통)이 있으며 신 장군이 목욕할 때 등을 문질렀다고 하는 반들반들한 돌도 볼 수 있다.
연화부수형(蓮華浮水形)의 지형인 화장산 중턱에 있는 장군천은 신숭겸장군이 산에서 무예를 닦다가 목이 마르면 마시던 샘으로 금으로 만든 복지개(물그릇)가 항상 물위에 떠 있었다고 하는데 이상한 것은 어떤 사람이 이 금복지개로 물을 마시다가 금복지개가 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고 3일 만에 떨어 졌다는 신기한 얘기도 전해온다.
신숭겸장군은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이며 호는 장절공(壯節公)으로써 고려시대 개국공신이다. |
처음에 이름은 능산(能山)으로 야사기록에 의하면 서기 877년(신라)이곳 욕내군(곡성군 목사동면 구룡리 - 현, 용산제)에서 출생하였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몸은 장대하고 천성이 용맹스러웠으며 활쏘는 재주와 무예가 뛰어나 장사다운 자질을 갖추었다. |
태봉(泰封)의 기장(騎將)으로 있을때인 서기918년 6월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등과 의논하여 궁예(弓裔)를 몰아내고 태조 왕건을 받들어 고려를 개국한 개국공신이다. |
태조10년(서기927년) 가을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태조는 신라를 돕기 위해 대구 팔공산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수가 많은 후백제군에게 포위를 당해 위험한 상황에 이르렀으며,이때 태조와 비슷한 용모를 갖춘 신숭겸장군이 왕의 복장을 하고 대신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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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태조는 공의 시신을 찾아내어 통곡하며,광해주 비방동(현, 춘천시 비방동)에 예장한 다음 직접 제례를
지내고 그 자리에 순절단(殉節壇)을 모시고 대구지방에 지묘사(智妙寺)라는 절을 지어 공의 명복을 빌게 하였고, 봉분셋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1120년(예종15)에 신숭겸과 감락장군을 추모하는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를 지어 찬양케 하였다.
- 신숭겸 장군의 유적지 -
용산재(목사동면 구룡리 - 지방기념물 제56호)
신숭겸장군의 태생지로 용산재에는 구룡문과 용산재, 비, 용산단이 있다. 2003년에 완공 계획으로 추진중인 용산재 성역화사업은 경내지 확장과 홍살문, 동·서재, 교직사, 내·외삼문을 건립할 계획으로 사업이 완료되면 군인들의 학습장으로 활용됨은 물론이며 신숭겸장군과 관련된 유적지의 메카로 부상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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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거송작가님의 시조이신 신숭겸장군 유적지를 소개해주셨군요...거송이 좋아하시겠네...
올 봄 곡성 전원마을 조성지..섬진강따라 강빛마을 드라이브 하다가
우연하게 들른 곳 ..곡성군 목사마을 구룡리 용산재..
동네 어귀가 개울따라 오래된 팽나무와 함께 아직도 땔감으로 불을 지피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돈만 있으면 동네 마을 전체 사고 싶다는 생각을..ㅎㅎ
보성 송광사와 대원사 근처 고인돌 조각공원 근처 서재필 탄생지도 넘 좋았던 이런 느낌...
짧은 지식 업그레이드... 감사합니다... 드라마에 비취진 신숭겸장군이 메칭 되네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