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詠柳[영류]-버들을 노래하다
賀知章[하지장]
碧玉妝成一樹高,벽옥장성일수고
벽옥이란 소녀가 단장하여 나무로 섰으니
萬條垂下綠絲絛.만조수하록사조
수많은 푸른 실끈을 줄줄이 드리웠네
不知細葉誰裁出,부지세엽수재출
갸름한 잎사귀를 누가 마름했을까
二月春風似剪刀.이월춘풍사전도
이월의 봄바람이 가위되어 만들었네
妝=꾸밀 장(다른 표현: 단장할 장).동자(同字)糚.
條=가지 조, 씻을 적. 동자(同字)
속자(俗字)条
絛=絛끈 조, 끈 도. 동자(同字)縧.
裁=마를 재. 剪=剪벨 전. 자를 전.
수양버들 한 그루를 벽옥이란 여인으로 비유하고 있다.
벽옥은 남조 시기의 민요에 나오는 다정다감한 소녀이다.
동시에 '푸른 옥'으로 버들을 만들었다는 뜻도 담고 있다.
버들잎이 생생하고 윤기난다는 느낌이다.
수많은 가지는 허리에 늘어뜨린 푸른 실끈과 같다.
그런데 그 갸름한 잎들은 누가 만든 것일까.
시인은 음력 이월의 봄바람이 가위가 되어
이들을 잘라내었다고 말하고 있다.
봄바람이 불면 잎이 핀다는 생각은 전통적인 것이지만,
한기를 담고 있는 바람을 가위 같다고 묘사한 것은 개성적이다.
이하=충청타임즈,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문득 궁금증이 동한다.
버들잎 따다가 연못 위에 띄워놓고 쓸쓸히 바라보는 이름 모를 소녀 는
왜 하필 버들잎을 땄을까?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는 계절인 봄철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 버들잎이기 때문일 것이다.
주로 물가에 서식하는 관계로 해동(解凍)의 봄물을 가장 먼저 빨아들이는
행운의 주인공이 버드나무이고, 그 생기(生氣)가 고스란히 스며든 것이 버들잎이다.
게다가 연록(軟綠)의 빛깔로 치장한 버들잎의 자태(姿態)는 그 자체가 봄 아니던가?
당(唐)의 시인 하지장(賀知章)은 이러한 버들잎을 섬세한 감각으로 그려낸다.
◈ 버들을 노래하다
碧玉成一樹高(벽옥장성일수고)
푸른 옥으로 단장하여 키 큰 나무 한그루 되었나?
萬條垂下綠絲(만조수하녹사조)
만 갈래 가지마다 녹색 실 가지 늘어졌네
不知細葉誰裁出(부지세엽수재출)
가느다란 나뭇잎 누가 마름질했는지 모른단 말인가?
二月春風似剪刀(이월춘풍사전도)
이월의 봄바람이 가위와 같도다
※ 귀하디 귀한 푸른 옥(碧玉)도 버드나무 앞에서는 한 개의 단장(丹粧) 소품에 불과했다. 아무리 명품족이라도 온 몸을 푸른 옥으로 휘감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버드나무만은 예외이다. 키가 큼에도 불구하고 그 큰 키를
온통 푸른 옥이 감싸고 있으니, 호사(豪奢)도 이런 호사(豪奢)가 없다.
그리고 여느 나무들에 비해 가지가 월등히 많은 게 버드나무라서,
만(萬) 개는 족히 될 가지가 드리워져 있다.
모두 하나같이 녹색 실로 된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푸른 옥으로 온 몸을 휘감았다거나, 녹색 실로 된 가지를 드리웠다거나
하는 말들은 버들잎의 빛깔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버들잎의 빛깔은 이만하면 되었다 싶었는지,
시인은 버들잎의 생김새로 시선을 돌린다. 그러나 생김새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아예 없다. 다만 잎이 가늘다(細葉)고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잎이 가는 것이 그냥 된 게 아니다.
마치 가위로 정교하게 마름질(裁)이라도 한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정한 크기로 자그맣게 만들어진 버들잎은
가히 예술이라 할 만하다.
문제는 이 정교한 솜씨의 장인(匠人)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는 데 있다.
조물주(造物主) 정도로 예상하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시인의 대답은 독자들의 의표(意表)를 찌른다.
음력 이월(二月)에 봄의 온기(溫氣)를 잔뜩 품고 부는 봄바람이
버들잎을 만든 장인(匠人)이라는 발상(發想)은 참으로 기발하다.
봄의 따스한 기운을 받아 버드나무에 잎이 돋았을 터이므로,
봄바람이 버들잎을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마름질(裁)의 주체로 봄바람을 상정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버들잎을 마름질한 장인(匠人)이 봄바람이라는
시인의 대답은 반전(反轉)의 요소를 포함한다고 보아도 좋다.
그래서 시인은 부연(敷衍)한다. 봄바람이 가위(剪刀)와 흡사하다고 한 것이다.
봄바람을 형상화(形象化)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더구나 따스한 속성의 봄바람을 날카로운 속성의 가위(剪刀)를 통해
형상화(形象化)하는 것을 생각하기란 더욱 어렵다.
버들잎의 생김새에 대한 경탄을 표현한 시인의 솜씨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봄바람이 마름질한 것은 버들잎만이 아니다. 겨울을 참아내고 소생한
봄의 생명들은 무어라도 버들잎이요,
그것들의 장인(匠人)은 모두 가위 공력(功力)의 봄바람이었다니!
이하=2007 오마이뉴스
하늘하늘 봄을 알리는 그녀, 수양버들
▲ <낙신부도>의 첫 부분. 낙양 남쪽 낙수의 강가에 수양버들이 늘어져 있다. 중심인물은 삼국시대 조조의 아들 조식이다. |
ⓒ2007 동진 고개지 그림 |
봄이 오는 길목에서 봄의 도래를 가장 먼저 알려주는 나무는 무엇일까.
고대 중국인이라면 당연히 수양버들을 가리켰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나무들이 아직 성긴 가지로
잎도 없이 서있을 때 수양버들이 먼저 푸르러진다.
바람을 안고 치렁치렁 흔들리는 수양버들의 모습은 참으로 시원하다.
봄 햇빛이 성긴 가지 속에 들어와 찰랑거리면 더욱 한가롭고 아름답다.
바람에 휘휘 늘어질 때마다 연녹색 물감이 흩어지는 듯하다.
나무들 가운데 가장 여성적인 수양버들은 섬세하고 미묘하고 정감적이다.
겨울 동안 세찬 바람 앞에서 뻐센 가지가 휘날리던 수양버들은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가지가 풀어지고 힘이 없어진다. 봄을 맞이하려면 유연해져야 한다.
바람에 잘 흔들리는 촛불처럼 수양버들도 봄바람에 민감하다.
버들은 바람이 머무는 집이다.
식물학에서는 버드나무(楊)와 수양버들(柳)을 구별하여 부르지만,
사람들은 이를 구별하지 않고 버드나무란 말로 수양버들을 가리키는 경우도 많다.
이는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양수와 유수는 각기 다른 나무이고,
또 이들을 '양류'로 통칭하기도 하지만, 때로 양류라는 말로 수양버들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수양버들을 아예 소양이라 부르기도 한다.
수양버들에 대한 인상이 강하기에 버드나무의 호칭이 자리를 잃은 것이다.
금곡원, 곡강, 소제, 이화원... 중국의 버들 명소들
▲ <죽림칠현과 영계기> 중의 산도와 왕융 부분. 두 사람 가운데 있는 수양버들이 양식화된 수법으로 그려져 있다. |
ⓒ2007 중국 강소성 남경 서선교(출토 분묘 벽화 |
▲ <귀거래사도 부분. 도연명의 ><귀거래사> 내용을 그렸다. 도연명은 자신의 집 앞에는 수양버들이 다섯 그루 있어 자칭 오류선생이라 불렀다. |
ⓒ2007 유송 육탐미 그림으로 추정 |
옛날에는 수양버들을 도처에 심었다. 예컨대 중국의 경우 집안 마당에도 심었는데
동한 말기에 지은 '고시십구수'에 '무성히 우거진 정원의 버들'이란 말에서 알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수양버들이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의 모습이라 하여
울타리 안에 심지 않은 것과는 대조된다.
가로수로 심은 경우도 많은데, 동한 말기 유정의 시구
"수양버들이 길 양쪽에서 자라고"라 한데서 알 수 있다.
도시에 심었던 경우는 남조 유송의 성홍지가
"성벽과 둑방을 따라 모두 세류를 심었는데,
파란 가지가 바람에 흩날리고 거리에 시원한 그늘을 던진다"고
한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잘 알려진 경우는 수대 때인 605년, 낙양과 양주를 잇는 운하를 건설할 때
둑방을 따라 수양버들을 심었다. 수양버들은 물가에서 잘 자라기도 하지만
그 뿌리가 둑을 보호해 주기 때문에 안성맞춤이다.
끝없이 이어진 제방 위로 수양버들이 서 있는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는지
이후 '제방 위의 버들'은 시의 고정된 소재가 되었다.
명소에도 수양버들이 우거졌다. 낙양의 금곡원이나 장안의 곡강에도
수양버들이 많지만, 백거이는 소주에 버들이 더 많다고 하였다.
또 소주 근처 항주의 서호를 가로지르는 소제도 버들이 유명하다.
이를 그대로 모방한 북경 이화원의 서제도 버들이 '한 풍경' 한다.
북경에서 유학할 때 봄을 맞아 서제를 거닌 적이 있는데 참으로 한가하였다.
여행객들은 멀어서 오지 않기에, 어쩌다 한두 사람이 걸어가거나
아니면 바람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갈 뿐이다.
만약 누군가 봄날 이화원의 서제를 휘적휘적 걸어간다면
또 하나의 봄을 맞을 수 있으리라.
눕혀 심어도 거꾸로 심어도 꺾어 심어도 버들버들
▲ <수양버들, 까치, 기러기> 싹이 나기 시작한 수양버들을 그렸다. |
ⓒ2007 송 조길 그림 |
▲ 비단 부채에 그려진 <인물도>. 수양버들은 곧잘 이별과 돌아오길 기다리는 의미를 환기한다. 여인은 버들을 보며 떠나간 사람을 그린다. |
ⓒ2007 청대 임이 그림 |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수양버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우리나라 전래 이야기 가운데 목마른 나그네에게 아낙이 우물물을 떠다주면서
버들잎 세 잎을 띄워 주는 대목이 있는데서 알 수 있듯,
버들은 동네에 흔하던 나무였다. 그러나 국민의 60% 이상이
아파트에 들어가 살면서 버들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버들은 시멘트와 아스팔트에 어울리지 않아
잘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아직도 수양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얼마 전에 베이징에서는 버들솜이 알레르기를 일으키므로
자금성 주위에 서 있는 수양버들을 다른 수종으로 교체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이러한 의견은 고도(古都)의 이미지에 수양버들이 가장 잘 어울린다는 견해에 밀려
채택되지 않았다. 사실 붉은 담장을 배경으로 초록으로 흔들리는 버들처럼
고성의 면모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없다.
수양버들은 잘 자란다. 봄바람이 불면 금방 발아하고 사월이 되면 금방 우거지고
오월이 되면 그 아래 쉬기 좋다. <전국책>에는 "버들은 가지를 옆으로 눕혀
심어도 자라나고, 거꾸로 심어도 자라고, 꺾어서 심어도 잘 자란다"고 하였다.
<장자>에도 황제가 쉬었다 간 곳에 수양버들이 자라났다고 했는데,
신화적인 의미는 둘째 치고 여기서도 수양버들이 잘 자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수양버들이 잘 자라난다는 속성에서 사람들은 세월의 빠름을 탄식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잘 알려진 예로 삼국시대 조조의 아들 조비의 이야기가 있다.
그의 <유부>에 기록된 바로는, 14세 때 마당에 1자 높이의 버들을 심었는데
15년 후에는 두 팔로 껴안을 정도로 자랐다고 한다. 이를 보고 그는
"해와 달이 빨리 지나감을 탄식하나니, 시간이 분주히 달려가도다"라고 하였다.
동진의 뛰어난 장수로 황위를 찬탈하려 했던 환온도 북벌하러 가는 길에
금성(지금의 남경 근처)에 들렀는데 예전에 심었던 버들 둘레가 열 뼘이나 되어
"나무도 이와 같은데 사람이 어찌 세월을 견딜 수 있으랴!"고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공구는 강물이 흘러가는 걸 보고 세월을 아쉬워했는데
조비와 환온은 버들에서 세월의 빠름을 탄식하였다.
버들가지같은 그녀의 가는 허리
▲ <동궐도>에 그려진 수양버들. 현재 창경궁 홍화문 맞은편으로, 서울대병원 위치인 오른편 구릉 아래 수양버들이 많이 서 있다. |
ⓒ2007 <동궐도> |
위진남북조 시대 사람들은 수양버들의 모습에서 사람의 준수한 풍모를 연상하였다.
어떤 사람이 왕공의 뛰어난 모습에 찬탄하며 말하였다.
"깨끗하고 밝은 모습이 봄날의 버드나무 같구나." (<세설신어> '용지')
왕공(王恭, ?~398)은 동진 시대의 인물이다.
동시대를 살았던 도연명(365~427)도 집 앞에 다섯 그루의 수양버들을 심어
스스로 오류선생이라고 했는데, 역시 이러한 정신을 공감해서인지도 모른다.
이보다 앞선 시기에 활동했던 혜강(223~262)도 마당에 수양버들이
한 그루 서 있어 그가 좋아하는 대장간 일을 하다가 그 아래에서 쉬곤 하였다.
수양버들에서 느끼는 한아한 이미지를 사람의 풍모에 비기면서 새로운 미감을
발견해내었다.
이러한 맑고 깨끗한 이미지는 후대에 오면서 여성적인 이미지로 굳어졌고,
특히 허리가 가늘거나 눈썹이 아름다운 미녀를 가리키게 되었다.
특히 버들가지가 휘휘 늘어진 모습에서 여성의 가는 허리를 비유하여,
'유요'는 곧 여인의 날씬한 허리를 의미하였다.
두보는 "문 밖의 나긋나긋한 버들은, 마치 열다섯 살 딸아이의 허리 같아라"고 읊었다.
백거이도 "버들잎에 맺힌 이슬은 눈물 흘린 눈 같고, 미풍에 한들거리는 가지는
춤추는 허리 같다"고 하였다.
버들잎은 '유미'라 하여 곧잘 미인의 눈썹을 가리켰다.
장안석은 "비단 자리와 은 병풍엔 하릴없이 먼지만 쌓이는데,
버들 같은 눈썹과 복사꽃 같은 얼굴에 봄날은 흘러간다"고 하였다.
이러한 표현은 너무 많아 예시하자면 지루할 것이다.
수양버들이 이별을 의미하는 것은 중국문학에선 아주 뚜렷한 전통이다.
이와 관련된 작품도 수없이 많다. 한대 이래 헤어질 때 떠나는 사람에게
수양버들의 가지를 꺾어 주는 습속이 있었다. 보통 배를 타고 떠나면
강가에서 헤어지게 되는데, 강변에는 으레 버들이 심어져 있었다.
버들의 '유(柳)'는 머물게 하다는 '유(留)'와 음이 같아, 가지 말라고
만류하는 뜻을 갖는다. 또 버들은 이른 봄에 가장 먼저 싹이 피기 때문에
가장 일찍 돌아오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이러한 풍습에 근거하여 <절양류>라는 노래가 만들어졌고,
송별의 곡이 더 나아가 망향의 그리움을 나타내는 곡이 되기도 하였다.
봄의 상징, 꽃보다 버들
▲ 항주 서호 호심도의 수양버들. 1월인데도 벌써 잎이 나기 시작했다. 1월 5일 촬영. |
ⓒ2007 서성 |
오늘날에는 봄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두말할 것 없이 꽃이지만,
고대에는 수양버들의 '부드러운 가지'를 드는 경우도 많았다.
서진의 육기는 그의 유명한 <문부>에서 가을의 낙엽에 대비하여
봄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부드러운 가지'를 들었다.
부드러운 가지는 봄을 의미하는 또 하나의 문화적 기호이자 인식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송대 안기도는 "미풍이 버들을 스치고 얼음이 녹기 시작할 때,
가는 비에 먼지가 씻기고 구름은 아직 개이지 않았네"라고
이른 봄의 모습 가운데 버들을 들고 있다.
왕유 역시 "곡강에 녹색 버들이 우거지기 시작하면,
차가운 계곡의 얼음이 따뜻한 기운에 녹기 시작한다"고 초봄의 특징을 잡아냈다.
두보 역시 '수양버들 옆에서' 이른 봄의 버들을 노래하고 있다.
只道梅花發 매화꽃 핀다고만 말들 하길래
那知柳亦新. 버들도 새로운지 모르고 있었소
枝枝總到地, 가지들이 모두 땅까지 내려닿고
葉葉自開春. 잎사귀 하나하나 절로 봄빛이구료
꽃 가운데 가장 먼저 봄의 도래를 알리는 것은 매화일 것이다.
나무 가운데 가장 먼저 산뜻한 녹색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수양버들이다.
벌거벗은 빈 나무들 사이에서 연녹색으로 물들어 있는 버들의 모습은
어찌 그리 선연한가. 매화꽃만 봄을 알아차리는 줄 알았는데
수양버들도 미리 아는구나. 두보의 놀라움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느껴진다.
이른 봄의 버들을 읊은 시 가운데
하지장의 <버들을 노래하다>를 빼놓을 수 없다.
碧玉妝成一樹高, 벽옥이란 소녀가 단장하여 나무로 섰으니
萬條垂下綠絲絛. 수많은 푸른 실끈을 줄줄이 드리웠네
不知細葉誰裁出, 갸름한 잎사귀를 누가 마름했을까
二月春風似剪刀. 이월의 봄바람이 가위되어 만들었네
수양버들 한 그루를 벽옥이란 여인으로 비유하고 있다.
벽옥은 남조 시기의 민요에 나오는 다정다감한 소녀이다.
동시에 '푸른 옥'으로 버들을 만들었다는 뜻도 담고 있다.
버들잎이 생생하고 윤기난다는 느낌이다.
수많은 가지는 허리에 늘어뜨린 푸른 실끈과 같다.
그런데 그 갸름한 잎들은 누가 만든 것일까.
시인은 음력 이월의 봄바람이 가위가 되어 이들을 잘라내었다고 말하고 있다.
봄바람이 불면 잎이 핀다는 생각은 전통적인 것이지만,
한기를 담고 있는 바람을 가위 같다고 묘사한 것은 개성적이다.
봄 소식 먼저 전해주고 있지만
▲ 창경궁 춘당지의 수양버들에 잎이 나기 시작하고 있다. |
ⓒ2007 서성 |
▲ 창경궁 춘당지의 수양버들. 3월 28일 촬영. |
ⓒ2007 서성 |
서울에서는 수양버들을 만나기 쉽지 않다.
3월 29일 나는 수양버들을 보기 위해 창경궁을 찾았다.
<동궐도>를 보니 홍화문 밖인 지금의 대학병원 후문 쪽은
예전에는 낮은 구릉으로, 버들이 많이 그려져 있었다.
아침 무렵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한산한 창경궁 길을 따라 춘당지 쪽으로 걸었다.
연못가에 서 있는 몇 그루 수양버들이 볼 만했다. 한결같이 키가 컸다.
이날도 봄바람에 수양버들이 쓸리고 있었다. 잎사귀는 이제 나기 시작하여
빛을 띠었다. 봄이 오는 소식을 누구보다도 먼저 전해주고 있었지만
알아주는 사람은 없는 듯, 관람객들은 선연히 핀 진달래와
매화 앞에서만 사진을 찍고 있었다.
/서성 기자
덧붙이는 글-서성 기자는 열린사이버대학교
실용외국어학과 조교수로 재직중입니다.
이하 동아일보=봄바람의 경이[이준식의 한시 한 수]〈152〉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2-03-18 03:00
옥으로 단장한 듯 미끈하게 솟은 나무, 수만 가닥 드리운 푸른 비단실.
가느다란 저 잎사귀 누가 재단했을까. 가위와도 흡사한 2월 봄바람!
(碧玉장成一樹高, 萬條垂下綠絲조. 不知細葉誰裁出, 二月春風似剪刀.)
―‘버들의 노래(영류·詠柳)’ 하지장(賀知章·659∼744)
훤칠한 미녀의 형상으로 우뚝 선 버드나무. 줄줄이 드리워진 실버들의 야리야리한
가지 사이로 봄바람이 헤집고 들어온다. 바람의 자취 따라 가위로 마름질한 듯
파르라니 버들 이파리가 돋아난다. 자연의 손길에 감탄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노라면
버들잎의 파릇파릇한 떨림에 절로 탄성이 우러나는 봄바람의 영묘한 솜씨!
새 생명의 고운 자태를 빚어내는 봄바람의 경이 속에 새봄의 생기가 새록새록 피어난다.
바야흐로 봄꽃보다 한발 앞선 싱그러운 봄의 향연이 막을 올리고 있다.
동심 어린 시선으로 자잘한 일상을 그리는 데 뛰어났던 하지장은
소탈한 성품에 술을 무척 즐겼다.
불쑥 낯선 별장을 찾아가서는 ‘주인과 일면식도 없으면서,
마주 앉은 건 숲과 샘이 좋았기 때문’이라 할 정도로 자유분방했다.
그런 그가 호방한 기질의 이백과 만나 의기투합한 건
너무나 당연한 노릇. 첫 대면의 자리에서 이백의 시와 기질에 매료되어
이백을 ‘적선’(謫仙·하늘에서 쫓겨난 신선)이라 부를 만큼 가까워졌다.
어쩌면 하지장은 본인의 시적 성취보다는 이백의 시재와 진가를
누구보다 먼저 평가해 준 것으로 더 유명하다.
그날 수중에 돈이 없어 하지장이 고관의 표지인
금구(金龜·금장식 거북)를 저당 잡히고
술을 마셨다는 호쾌한 미담도 전해진다.
그의 애주가로서의 면모를 두보는 이렇게 묘사했다.
‘술 취해 말을 탄 하지장은 배라도 탄 듯 흔들흔들./
시야 흐려져 우물에 빠지고도 바닥에서 그대로 잠들어버렸지.’
(‘음주에 빠진 여덟 신선’)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