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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주님을 바라보는 것 외에 저는 아무것도 청하지 않습니다!
삶이 너무 팍팍해 우왕좌왕할 때 마다 자동으로 제 입술을 맴도는 노래 하나가 있습니다. ‘아무 것도 너를!’
“어느 것에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아무 것에도 놀라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하느님은 변치 않으십니다. 인내가 모든 것을 얻게 합니다. 하느님을 모신 사람에게는 부족함이 없으니 하느님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교회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혹은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관상기도의 최고봉에 오른 사람입니다. 그녀는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연인관계로 설정했습니다. 하느님과 비밀스럽게 주고받은 연서(戀書), 연애편지가 바로 그 유명한‘천주자비의 글’입니다.
그녀의 인생에서 깊은 묵상기도와 황홀한 관상 생활은 큰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영적 생활의 기쁨과 행복, 감미로움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깊은 우물에서 건져 올린 하느님 사랑의 체험을 이웃들과 연결시켰습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서 있던 수도회와 교회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은 그녀를 용감한 수도회의 개혁가이자 투사로 변모시켰습니다.
우리가 절실히 체험하는 바처럼 인간 존재는 대체로 한결같지 못합니다. 바깥에서는 천사, 법 없이도 살 사람, 성인군자가 따로 없지만 귀가(歸家)즉시 폭군으로 돌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타인으로부터 받는 평가 중에서 가장 정확한 평가이자 신빙성 있는 평가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잘 알고 있는 가족, 이웃, 동료들로부터 받는 평가입니다. 이런 면에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크게 칭송받을 만합니다.
그녀는 교회 역사상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대 영성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매력적인 여성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평가들보다 훨씬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평가가 있습니다.
그녀와 동고동락했던 동료 수도자들의 평가입니다. “이토록 거룩하고 신비로운 분, 이토록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성녀를 저희에게 보내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영성 생활과 관련된 그녀의 가르침은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는지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렇게 영성 생활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바가 없었습니다.
“좋은 벗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 하느님과 단둘이 우정을 나누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성(理性)만으로 그분에 대해 생각하지 마십시오. 많은 개념들도 끄집어내지 마십시오. 대단하고 복잡한 명상도 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바라보는 것 외에 나는 아무것도 청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탁월하고 매력적인 인물이요 성인 가운데서도 대성인인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였지만 자신의 생애 안에 방황하던 청소년기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지난 시절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한때 연애 소설에 심취해서 밤낮없이 많은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또한 외모를 가꾸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예쁜 옷, 값비싼 향수, 화려한 장신구를 구하는데 혈안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래 여자 친구들과 수다 떠느라 하루해가 짧았습니다.”
지금은 만인이 존경하고 흠모하는 대성인께서도 한때 이런 ‘흑역사’가 있었다는 것 오늘 우리에게는 큰 위안꺼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갈 길이 멀지만, 아빌라의 데레사 역시 우리와 똑같은 조건에서, 똑같은 방황과 갈등을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점진적으로 성덕의 길로 나아갔다는 것을 기억하고, 또 다시 힘을 내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성화의 길을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루카 11,42-46
자녀에게 사랑 받으려면 십일조를 가르쳐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십일조의 목적이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가 그래서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봉헌을 왜 가르쳐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결국 우리는 자녀에게 봉헌을 가르치지 않으면 자녀가 행복하게 살 수 없을뿐더러 그것을 가르친 사람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어머니께서는 주일 미사에 갈 때마다 헌금하라고 50원짜리 동전 하나를 쥐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때 저는 왜 내 소중한 동전을 헌금함에 넣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몰래 성당을 빠져나와 그 돈으로 오락실에 가곤 했습니다.
그 50원으로 즐기는 게임이 하느님께 드리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느껴졌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의 저는 어떻습니까? 이제는 제 수입의 일부를 십일조로 봉헌하고 있습니다.
문득 궁금해집니다.
어머니의 50원을 가로채던 어린 시절의 저와, 지금의 저 중에 과연 누가 부모님과 하느님을 더 깊이 사랑하고 있을까요? 답은 명확합니다. 봉헌이라는 사랑의 언어를 배우고 실천할 때, 우리의 사랑은 비로소 깊어지고 성숙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루카 11,42)
그들은 봉헌이라는 ‘행위’는 철저히 지켰지만, 그 ‘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봉헌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참된 목적은 무엇일까요? 네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봉헌을 통해 돈의 노예에서 벗어나 참된 자존감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원래 주님의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그 일부를 돌려드릴 때, 우리는 돈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됩니다.
돈은 우리 삶의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 도구가 됩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원래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쾌락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는 모든 것을 바꾸기로 결심합니다.
자신을 비난하는 아버지와 사람들 앞에서, 그는 입고 있던 값비싼 옷까지 모두 벗어 던지며 선언합니다.
“이제부터 저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한 분뿐이십니다!” 그는 재물을 봉헌함으로써, 돈이 주는 거짓된 안정감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오는 참된 자유와 자존감을 얻었습니다.
돈을 잃었을 때 크게 슬퍼하지 않는 사람, 돈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 바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입니다.
둘째, 봉헌은 우리가 하느님 앞에 떳떳이 나아갈 수 있는 ‘의로움’의 표현입니다.
자녀가 평생 부모에게 받기만 하고 단 한 번도 감사의 선물을 드린 적이 없다면, 그 부모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을까요? 아마 죄스러운 마음에 얼굴을 들지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하느님 앞에서는 어떻겠습니까?
실제로 죄책감과 부끄러움 때문에 수십 년 동안 부모를 찾아뵙지 못하고 다리 밑이나 외딴 산속에서 숨어 사는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우리는 종종 듣습니다.
그들은 부모님께 용서를 청하고 싶지만, 닳아빠진 옷과 빈손으로는 차마 그 사랑 앞에 나설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봉헌은 바로 이 부끄러움의 벽을 허무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물이 아무리 작을지라도, 그것은 “아버지, 저도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랑의 증표가 되어, 우리를 ‘돌아온 탕자’처럼 아버지의 품으로 담대히 나아가게 합니다.
셋째, 봉헌 곧 나눌 줄 아는 삶은 우리를 이웃에게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가수 비(정지훈)는 연습생 시절, 스승인 박진영에게 이런 조언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조언을 철칙처럼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박진영은 갓 데뷔를 앞둔 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에게 잘하려고 하지 말고 무대를 설치하시는 분들, 운전하시는 분들, 후배들에게 잘하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정지훈 씨는 이 가르침이 지금의 자신을 있게 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덕분에 사랑받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재능과 부를 이웃에게 나눌 때, 우리는 하느님께도 이웃에게도 사랑받는 사람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봉헌이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과 만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왜 부모는 자녀에게 작은 심부름이라도 시키고 용돈을 주며, 때로는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달라고 요청할까요?
자녀가 ‘내어주는 아픔’을 통해, 자신을 위해 평생 모든 것을 내어주신 부모님의 ‘희생의 마음’을 배우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봉헌할 때 느끼는 그 작은 아까움, 그 작은 희생은 우리를 위해 외아들마저 내어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그 엄청난 고통과 사랑을 아주 조금이나마 체험하게 하는 창문이 됩니다.
나의 작은 희생을 통해 이 말씀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게 될 때, 우리의 신앙은 비로소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자녀’의 신앙으로 성장합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였던 존 록펠러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용돈을 줄 때마다 장부를 함께 주며 이렇게 가르쳤다고 합니다.
“아들아, 네가 받은 모든 돈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란다.
그러니 수입의 십분의 일은 반드시 먼저 떼어 하느님께 바치고, 나머지를 사용하거라.”
어린 록펠러는 이 가르침을 평생의 철칙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첫 월급 20달러에서 2달러를 떼어
봉헌했고,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어서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수입의 십일조를 계산하여 봉헌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자녀들에게도 똑같이 가르쳤습니다.
그는 봉헌을 통해 자신이 돈의 ‘주인’이 아니라
‘관리인’임을 고백했고, 그 믿음 안에서 더 큰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최고의 부자가 되었고 나눔도 실천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록펠러는 누구에게 가장 감사해했겠습니까?
그것을 알려준 어머니가 아니겠습니까?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1,42-46: 정의와 사랑의 실천을 소홀히 하는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매우 엄격한 책망을 하신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라는 표현은 단순한 꾸짖음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에서 멀어져 있음을 드러내는 심판의 말씀이다.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외적인 형식에만 집착할 때, 우리도 그들과 다르지 않음을 돌아봐야 한다.
바리사이들은 십일조와 같은 율법의 세부 규정에는 열성적이었지만, 정작 더 중요한 정의와 하느님의 사랑은 실천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왜곡된 신앙태도를 “드러나지 않는 무덤”에 비유하신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경건해 보이지만, 속은 썩어 악취가 나는 무덤과 같다는 것이다. 또한 율법 교사들 역시 자신들은 행하지 않으면서 남들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우고, 의무만 강요하는 위선적 태도로 책망을 받는다.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직분을 받았지만,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과 정의를 잊어버린 것이다.
성 예로니모는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꾸짖으며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율법의 글자에는 집착하지만, 영을 알지 못한다. 글자는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죽이며, 영은 생명을 준다.”(Commentarium in Matthaeum 23,23)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도 경고한다: “율법을 해석하는 자가 자신은 행하지 않고 남만을 책망한다면, 그는 가장 무거운 심판을 피할 수 없다.”(Homiliae in Matthaeum 72,3)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겉모습만으로는 하느님 앞에 설 수 없으며,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참된 신앙인의 모습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겉모습만 신앙인으로 보이려 하지는 않는가? 나는 말로만 옳은 것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사랑과 정의를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신앙은 단순히 전례 참여나 기도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의 삶 속에서 자비, 정의, 용서, 사랑의 열매로 드러나야 한다.
가정에서는 서로 존중하고 용서하는 모습으로, 직장에서는 정직과 정의로운 태도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자비와 섬김으로 드러날 때, 우리는 바리사이들의 길이 아니라, 참된 제자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불행하여라”가 아니라, “행복하여라”라는 축복으로 바뀌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겉과 속이 일치하는 신앙,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때 이루어진다. 주님 앞에서 진정한 신앙인으로 서도록 은총을 청하자.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영국에서 3주간 마사지 수업을 함께 들은 부부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가 흥미롭습니다. 배우자에게 마사지를 해준 사람과 마사지를 받은 사람 중에 누가 더 기쁘고 행복한가를 본 것입니다. 누가 더 기쁘고 행복했을까요? 마사지를 받은 사람이 더 행복했을 것 같지만, 결과는 똑같이 행복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도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똑같이 감소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받는 데에 더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못합니다.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모의 자녀 사랑이 크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막상 자녀들은 그 행복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자기를 간섭하고 힘들게 한다고만 생각합니다. 부모가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행동으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받는 사랑은 느끼기 힘듭니다. 그래서 나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주는 사랑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 역시 똑같은 행복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결국 행복은 자기 의지만 확고하게 세운다면 얼마든지 얼마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사랑을 주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불행의 길로 가는 사람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특히 사람들의 모범이 되는 종교 지도자들의 삶이 불행으로 가고 있음에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들의 삶이 다른 사람까지 불행으로 이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의 뜻은 잃어버리고 형식과 외적인 모습에만 치중했습니다.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2)
바리사이들은 십일조를 매우 철저하게 지켜서, 심지어 정원에서 나는 아주 사소한 박하, 운향, 채소 등의 십일조까지 계산해서 마쳤던 것입니다. 대단한 종교적 열심입니다. 이 열심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율법의 가장 큰 정신인 정의와 사랑을 저버린다면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교만과 명예욕, 그리고 숨겨져 있는 죄들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정의와 사랑에 기초한 겸손한 삶이고, 자기를 온전하게 주님께 드러내는 마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불행 선언의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반대인 행복 선언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는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 온전히 자기를 내려놓을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으며, 주님께서 말씀하신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작지만 “고맙다.”라는 말에는 마법이 들어 있다(아나스 로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루카 11,42)
오늘 우리는
우리 안에 숨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를
보게 됩니다.
사랑의 온기가
필요한 우리들의
삶입니다.
영혼의 여정은
멀리 나아가는
길이 아니라,
깊이 들어가는
길입니다.
바리사이들의 불행은
율법 그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느님과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하느님께
마음을 드리는
일이 중요합니다.
옳다고 여겨지는
자신의
틀 속에 갇혀
안주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겸손으로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 어느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는
없습니다.
진리는 지배의
도구가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형식에만 갇히는
껍데기가 아닙니다.
행복은 우리 자신을
바르게 보는 것에서
자라납니다.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관점이며,
상태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불행은
하느님 없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행복은
하느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다시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참된 행복은
사랑과
자비임을
진실로
믿습니다.
겸손과
성찰 속에서
내면의 성을 세우고,
사랑과 자유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걷는
은총의 삶이길
기도드립니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오늘 독서 말씀과 복음 말씀의 분위기가
사뭇 무겁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설명이
가벼울 리가 없고
바리사이들의 ‘불행’을 지적하신
예수님의 마음도 결코 편치가 않았을테니,
이해됩니다.
영원한 생명은
계명의 준수나 선행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재물도 지식도 명예도
주님을 향한 길에서는
훼방꾼이 될 소지가 큽니다.
때문에 오늘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새겨듣기 바랍니다.
주님의 지적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오늘도
마음을 뺏고 있는…
그것에 대하여
진지하게 성찰하기 바랍니다.
단호하게
그 아닌 것과의 이별을 다짐하고
실행하기 바랍니다.
하여 사제는 새벽을 깨우며 기도드립니다.
세상의 모든 교회가
온전히 하느님을 향한 예배로
우뚝 일어서게 해 주시기를,
교회의 모든 시간이
당신께 기쁨이 되도록 도와주시고
우리 모두가 하늘을 향한 소망으로
승리하게 해 주시기를,
빌고 또 빕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굿뉴스
로마2,1-11 루카11,42-46
행복하여라, 회개한 이들!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이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 하느님을 그리나이다
내 영혼,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건만
그 하느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까?”(시편42,2-3)
많은 가을비로 인해 줄기차게, 끊임없이, 한결같이, 흐르는 불암산 계곡 물소리가 흡사 자연의 하느님 찬양 노래처럼 들립니다. 이 또한 참 좋은 회개의 표징입니다. 회개의 여정도 저처럼 한결같이, 끊임없이 흐르는 계곡물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자의 말씀도 우리의 회개의 삶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면 불의가 되고, 욕심내지 말아야 할 것을 욕심내면 탐욕이 된다.”<다산>
분수에 만족함이 겸손이자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회개의 열매가 겸손과 지혜입니다.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하지 않고, 원하지 않아야 할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와 같을 뿐이다.”<맹자>
성인들에게 삶의 원리는 이처럼 단순명료합니다. 회개의 삶이 이토록 단순명쾌합니다. 혼란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어제 코이노니아 자매회 모임시 미사 끝날 때 강조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자선과 사랑의 나눔뿐이다” 강론 제목에, “무지에 대한 답은 미사뿐이다.”하나 추가했습니다. 날마다 미사를 정성껏 봉헌하는 것보다 무지의 병의 치유에 좋은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회개 역시 의식적 선택, 훈련, 습관화해야할 수행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행복선언과는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행복하여라” 대신에 “불행하여라”가 세 번이나 거푸 나옵니다. 모두가 무지한 일부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을 대상으로하지만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 모두를 대상으로 합니다. 결국 불행선언의 요지는 회개에 있음을 봅니다. 하여 강론제목도 긍정적 말마디로 바꿨습니다.
“행복하여라, 회개한 이들!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이다.”
오늘은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학자 기념일입니다. 한마디 더 추가하면, “무지에 대한 답은 성인들뿐이다”가 됩니다. 회개의 참 좋은 본보기가 가톨릭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이요, 가톨릭교회 하늘에 무수한 반짝이는 별같은 성인들이 명실공히 가톨릭교회를 명품종교로 만듭니다.
기억하고 기념할뿐 아니라 성인으로 불림받았으니 모두 성인이 될 것을 촉구하는 성인축일입니다. 자기 삶의 자리에서 회개의 여정에 충실할 때 누구나 평범한 성인이 될 수 있고, 이런 명품신자로 명품인생을 사는 것이 세상에 나온 우리의 존재이유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기도의 계절에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아빌라의 대 데레사 성녀는 회개의 모범이자 기도의 스승이 됩니다. 16세기 스페인 출신의 성녀는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자이자 제2창립자요 스페인의 수호성인이요, 교황 바오로 6세는 1970년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함께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교회학자로 선포합니다.
데레사의 가족은 유대인 출신으로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귀족집안이었고 가족 모두가 신심이 깊었습니다. 데레사는 12살에 어머니를 잃자 성모상 앞에서, “성모님께서는 이제 제 어머니가 되어 주세요.”기도를 올렸고, 19세 나이에 가르멜회에 입회합니다.
데레사는 1560년대를 중심으로 가르멜 수녀원의 대대적인 개혁을 주도합니다. 데레사는 스페인 전역에 각 10개의 남녀 수도원을 창립하였고, 가르멜 수녀회내의 보수파와 개혁파간의 무수한 논쟁을 이겨내면서 마침내 그레고리오 13세 교황으로부터 자신이 설립한 맨발의 가르멜 수녀회 인가를 받아냅니다.
성녀의 수도회 개혁에 좋은 조력자이자 동지였던 십자가의 성 요한 신부의 영적우정도 참 아름다웠습니다. 십자가의 요한은 성녀보다 27세 연하의 아들뻘 되는 나이였지만 성녀의 수녀회 개혁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둘의 영적우정은 “성 베네딕도와 성녀 스콜라스티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와 프란치스카 드 샹탈”관계처럼, 깊고 아름답고 순수했습니다. 성녀는 기도의 스승이자 가톨릭교회의 대표적 신비가였습니다. 어렸을 때 아기 예수님과 만남의 환시체험도 흥미롭습니다.
-어느 아이가 “너는 누구니?” 묻자, 데레사는 “나는 예수의 데레사야” 대답했고, 이어 데레사가 “너는 누구니?”묻자 아이는 ”나는 데레사의 예수야“
화답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 앞서 예수님과 데레사의 깊은 영적우정관계를 깨닫게 됩니다. 성녀는 1582년 여행 도중에 쓰러지고 10월4일 향년 67세,
“주여, 저는 거룩한 교회의 딸입니다.”
유언후 선종합니다. 성녀가 선종후 성녀의 성무일도에서 발견했다는 기도시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무것도 너를”이라는 유명한 성가의 모태가 됩니다. 성녀의 기도시는 언제 읽어도 신선한 감동의 충격에 회개의 삶에도 참 좋은 도움이 됩니다.
“아무것도 너를 흔들지 못하리라
아무것도 너를 놀라게 하지 않으리라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니
인내가
모든 것을 얻게 하리니
하느님을 소유한 이는
아무런 부족이 없고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도다”
오늘은 아빌라의 성녀 대 대레사 기념일입니다. 시간 되시면 10월의 대표적 성가라 할 수 있는 성녀의 “아무것도 너를”(김충희 호세아 수녀곡) 성가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찬가”를 꼭 들으며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의 여정에 충실함으로 하느님을 내 삶의 중심에 모시는 길뿐입니다.
부단한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내 중심에 모신 삶이 참으로 우리 모두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나 주님의 빛 안에서 참 행복하고 부요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이런 회개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됩니다. 참으로 무지로 인해 주객전도, 본말전도의 삶에 고착된 바리사이의 회개를 촉구하는 충격적 불행선언입니다.
1.“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바치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2.“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3.“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은 모른다.”
참으로 무지로 인해 주객전도, 본말전도의 삶에 고착되고 허영에 눈먼, 또 겉과 속이 다른 부정의 진실을 은폐한 표리부동의 위선을 꾸짖는, 분별력의 지혜를 상실한 당대의 바리사이뿐 아니라, 오늘 무지한 우리를 한없이 부끄럽게 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충격적 불행선언입니다.
로마서의 바오로 사도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도 층격적이며 매섭습니다. 무지에 눈멀어 심판하지 정말 자기의 부족과 한계, 죄인임을 아는 겸손한 자들은 주제넘게 결코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아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든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그대는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 인해, 하느님의 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는 진노의 날에 그대에게 쏟아질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이어 회개한 이들을 격려하고 고무하는 바오로 사도요, 오늘의 우리를 더욱 분발, 분투의 노력을 다하게 하는 참 고마운 권고입니다.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미사은총임을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새삼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와 더불어 성인들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닮아 성인들은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의 여정에 충실함으로 무지에서 벗어나 참 행복하고 부요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의 자애를 노래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시편89,2).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10.15)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루카11,42.46)
'그리스도의 사랑이 되자!'
오늘 복음(루카11,42-46)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아빌라의 데레사로 알려져 있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가르멜 수도회에 들어가 평생을 완덕의 길에 정진하여 '신비적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신비적 계시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데레사는 그의 저서에서 '언제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간직하도록 합시다.'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도 좋은 벗이고 그렇게도 훌륭한 지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곁에 계신다면 무슨 일도 견디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분은 늘 도와주시고 견고케 해주십니다. 필요할 때 돌보아 주시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그분은 참되시고 성실하신 벗입니다. 이렇게도 좋은 벗이 우리 곁에 계시는 것 이상으로 더 바랄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성무일도서 제2독서 중에서)
아빌라의 데레사는 '사랑은 사랑을 일으킨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되어 우리 마음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일으키자고 호소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시면서 불행하다고 하신 이유는 그들 마음 안에 율법의 본질인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2,6)
그리스도의 사랑이 됩시다!
십일조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향해 있는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먹고 사는 이들은 늘 낮아져야 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낮은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화이며, 너를 주님께로 이끄는 힘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여, 저희를 도와주소서."
복음말씀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모든 이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2,1-11
1 아,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든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
남을 심판하는 바로 그것으로 자신을 단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우리는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심판이
진리에 따른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3 아,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을 심판하면서도 스스로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하느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4 아니면, 하느님의 그 큰 호의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그분의 호의가 그대를 회개로 이끌려 한다는 것을 모릅니까?
5 그대는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는 진노와 계시의 날에
그대에게 쏟아질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
6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7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8 그러나 이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쏟아집니다.
9 먼저 유다인이 그리고 그리스인까지,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환난과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10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
11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42-46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42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43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44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45 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46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