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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4. 묵상글 ( 성 치릴로 수도지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 욕망과 갈망의 차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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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4. 성 치릴로 수도지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2.14 03:18
- 욕망과 갈망의 차이
독서와 복음에서 모두 열림이 일어납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는 눈이 열려 자기의 알몸 곧 죄의 부끄러움을 보게 됩니다.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
복음에서는 눈이 열려 주님의 위대한 업적을 보고 입은 찬미를 드립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이것을 볼 때 누구는 자기를 보고, 누구는 하느님을 보고,
누구는 자기 죄를 보고, 누구는 하느님의 은총을 보며,
누구는 장점을 더 보고, 누구는 단점을 더 봄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볼까요?
제 생각에 인간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봅니다.
자기 안에 미움이 있으면 모든 것을 밉게 보고,
자기 안에 사랑이 있으면 모든 것을 곱게 보곤 하지요.
어둠이 있으면 어둡게 보고,
빛이 있으면 밝게 봅니다.
자기 안에 욕구 또는 욕망과 욕심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욕구만 있어도 자기가 욕구하는 그것만 보게 되고,
욕망과 욕심이 있으면 더더욱 그것만 보게 됩니다.
오늘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가 그러합니다.
욕구하는 것을 보자 탐심이 발동되면서
그것이 좋게 보이며 소유하고 싶어집니다.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순간 하느님을 놓칩니다.
그것에 시선을 뺏겨 하느님을 놓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소유한 다음에는 숨기에 놓치기도 합니다.
욕심내던 것을 보던 눈이 이때부터는 죄지은 자기를 보며
자기 죄를 감추고 자기를 숨기려다 하느님을 놓치는 겁니다.
하느님은 놓치고
죄지은 자기와 욕망의 허망함만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욕망 대신 갈망이 있으면 달라집니다.
욕망이나 갈망이 모두 결핍감에서 비롯된 면에선 같지만
욕망이 아담과 하와처럼 많이 소유하고 누리고 있음에도
더 소유하고 싶은 탐욕적인 결핍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갈망은 오늘 복음의 가난한 사람들처럼 너무 가난하기에
생존이 위협받는 사람들의 절박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욕망이 풍족한데도 불만을 채우려는 것이라면 갈망은 살려는 것이며
욕망이 스스로 채우려는 것이라면 갈망은 채워지기를 바라는 것이고,
누군가에 의해 채워지기를 바라기에 채워줄 구원자를 바라게 하는 것입니다.
다르게 비교하면
욕망이 이것저것 진탕 먹고 마시면서도 더 맛있는 것이 먹고 싶은 것이라면
갈망은 가뭄으로 바짝 타들어 가는 벼처럼 비 한 방울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타는 목마름이고 그래서 비를 내려주십사고 하느님께 빌게 하는 목마름입니다.
어쨌거나 욕망은 욕심에 눈이 멀어 죄짓게 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숨게 하는 데 비해
갈망은 타는 목마름으로 구원자를 찾게 하고 뵙게 하는 것임을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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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4. 성 치릴로 수도지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떤 사람이 아주 귀한 보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석 감정사도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이라고 감정한 보속이었습니다. 이 보석을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선물했습니다. 그리고 보석 감정사도 인정한 최고의 보석이라는 말을 전했지요. 그러나 청렴한 이 사람은 보석 받기를 거절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보석을 보배로 여기지만, 저는 탐내지 않는 마음을 보배로 여깁니다. 제가 이 보석을 받으면 우리 둘 다 보배를 잃어버리는 일이 됩니다. 그러니 보석을 가지고 돌아가십시오.”
보석의 귀중함을 알지만, 이 보석이 자기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게 하는 마음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이런 태도를 갖추어야 생각대로 되면 기뻐하고, 생각대로 되지 않아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마음을 통해서만이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에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주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즉, 지금의 상태를 넘어 그 너머로 향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많은 물건을 바라봅니다. 이 물건의 중요함을 알되, 그 물건 자체 때문에 ‘나’의 삶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됨을 자주 깨닫습니다. 그래야 나를 넘어 그 너머의 주님께로 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이런 우리가 되기를 원하시는 마음입니다. 그래야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되고,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세상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가장 귀한 보배임을 인정하고 그 말씀을 따르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머리에 손을 얹어 주시지 않고 다른 방법을 쓰십니다. 먼저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시지요. 이 예수님의 행위는 중요한 것을 상징합니다. 즉, 성령을 부어 주시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파타!”(열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성령을 받은 뒤, 그는 귀가 열리고 입이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세상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다릅니다. 더 큰 가치인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는 길입니다. 성령을 받음으로 인해 세상 것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귀가 열리고 입이 풀려서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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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나무는 제 손으로 가지를 꺾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제 마음으로 가까운 이들을 베어버린다(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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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4. 성 치릴로 수도지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인 티로와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지역을 지나 다시 갈릴래아로 오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마르 7,31)
사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는 혼자 깨달음에 이르는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그 ‘말씀’에 따라 사는 종교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귀’와 ‘입’은 신앙을 형성하는 조건에 해당합니다.
‘귀먹은 이’란 단지 듣지 못하는 이가 아니라, 곧 귀가 있어도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입니다. 또한 ‘말 더듬는 이’란 입이 있어도 혀가 굳어져 말씀을 삼키지 않는 이입니다. 그러니, ‘귀먹고 말 더듬는다’는 것은 소통과 통교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친교를 나누지 않음이요, 단절과 분리요,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친교를 나누지 않고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그것은 닫혀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귀와 입이 닫혀있어 말씀이 드나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막혀 있어서 흘러들고 흘러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완고하여 고집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사실, 우리도 귀 막고 입 막고 사는 귀머거리요, 벙어리임에 틀림없습니다.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바로 귀머거리요, 타인을 칭찬하지 않을 때가 바로 벙어리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요,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요, 하고 싶은 말만하고 하고 싶지 않는 말은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따로 광야로 불러내듯, 여인을 광야로 불러내어 사랑을 속삭여주듯(호세 2,16-25 참조),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시어, 당신 손가락을 우리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우리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마르 7,33). 그리고 빵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셨을 때처럼,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의 뜻에 의탁하여 ‘숨을 내쉬어’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에파타!(열려라)”(마르 7,34)
바로 그 순간, 저희는 그분 손가락을 통하여 만질 수 없는 신성을 만집니다. 곧바로 묶였던 ‘혀’가 풀리고 닫혔던 ‘귀’의 문이 열립니다. 마치, 아담이 말을 배우지 않고도 곧바로 말을 하게 해 주셨던 것처럼(창세 1,27-28;2,20), 힘들게 배워야 하는 말을 배우지도 않고도 말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당신 말씀을 듣도록 ‘듣는 귀’를 열어 당신 말씀을 심으십니다. 당신 손가락으로 혀를 도유하여 영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리고 이로써, “귀머거리는 귀가 얼리리라.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이사 35,5-6)는 이사야의 예언을 저희에게서 이루시고, 메시아 시대가 왔음을 알리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도유하십니다. 저희 귀를 열어주시어 당신 말씀을 담아주시고, 혀로 그 아름다운 향기를 맛보게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당신 말씀의 향기를 뿜게 하소서!
당신 영으로 도유된 진리의 말씀을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에파타!(열려라)”(마르 7,34)
주님, 저는 귀 막고 입 막고 사는 귀머거리요, 벙어리입니다.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바로 귀머거리요,
타인을 칭찬하지 않을 때가 바로 벙어리입니다.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귀머거리요,
당신께 감사드리지 않을 때 벙어리입니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을 때 귀머거리요,
하고 싶은 말만하고, 하고 싶지 않는 말은 하지 않을 때 벙어리입니다.
주님, 저의 영혼을 도유하소서.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시어 저의 귀와 입을 열어주소서.
저희 귀에 당신 말씀을 담아주시고,
저의 혀로 그 아름다운 향기를 맛보게 하소서.
제가 당신 말씀의 향기를 뿜게 하시고,
당신 영으로 도유된 진리의 말씀을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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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4. 성 치릴로 수도지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귀를 열어 주시고 혀를 풀어주십시오
귀가 있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그는 귀머거리입니다. 입이 있어도 하느님에 관해 말할 수 없다면 그는 벙어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생각하고 그분의 현존을 깨닫기도 전에 먼저 나를 생각하고 찾으셨습니다. 먼저 믿고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로마10.17)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에파타!” 곧 “열려라!” 하시며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 주셨듯이 우리의 귀와 입을 열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사회적으로는 공부도 많이 하고 지위도 있으며 세상 것에는 해박하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는 둔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는 들을 귀가 없는 사람과 같습니다. 입이 있어도 주님을 전하는 일에 사용하지 못한다면 말 더듬는 이입니다. 그들의 귀와 입을 활짝 열어 주시길 청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엘리사벳 자매는 청각장애인입니다. 그분의 취미는 음악 감상입니다. 놀라시겠지만 ‘음악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육체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지금도 서예를 가르치고 글쓰기를 지도하며 장애인을 위한 활동을 열심히 하십니다. 말씀도 얼마나 예쁘게 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는 영적인 귀와 입이 열려 있어 해맑은 웃음으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환자를 따로 데리고 나가서 손가락을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듯이 주님과 한적한 곳에서 따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말씀으로 끝날 수 있음에도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 주셨고, 자신을 가두어 놓은 주위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손가락을 귀에 넣고 침을 발라 혀에 대는 행동으로 당신의 관심과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셨듯이 우리도 구체적인 행동을 통하여 이웃사랑을 드러내야 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꼭 안아주는 포옹으로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그의 손길에 담았습니다. 눈먼 이에게 눈이 되어주고, 듣지 못하는 이에게 귀가 되어줄 수 있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침을 발라 혀에 대는 것은 비위생적이고 단정치 못한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늘 혼자 외롭게 지냈던 그들에게는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아직 소화 능력이 떨어지는 아이에게 엄마가 먹을 것을, 꼭꼭 씹어서 주었던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셨다고 하였는데 하늘을 우러러본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망하였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물고기 2마리와 빵 5개로 5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루카9,16)을 베풀 때도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어떤 처지나 환경 안에서도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을 찾으면 만나 뵐 것이다”(신명4,29)라고 적고 있습니다. 모두가 귀를 열어 주시고 입을 열어 주시는 주님을 뵙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말씀에 열리게 되고 그로 인하여 위로와 구원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너 한껏 네 입을 벌려 보라, 나는 곧 그 입을 채워 주리라”(시편80,11). 사람들이 우리의 변화된 삶을 보고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 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하고 놀라워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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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4. 성 치릴로 수도지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일주일에 한 번씩 부주임 신부님과 ‘운동치료’를 받으러 다닙니다. 부주임 신부님은 몇 개월 다니면서 몸이 많이 유연해졌습니다. 아직은 젊고, 운동신경이 좋아서입니다. 저는 같이 다니고 있지만 부주임 신부님은 할 수 있는 동작을 따라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나이도 들고, 운동신경이 그리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신부님은 신용카드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국에서 신용카드를 만들려는데 그리 쉽지 않다고 합니다. 저는 제가 아는 방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저는 6년 전에 신용카드를 만들었습니다. 신문사에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미국에서 살아온 시간과 연륜이 있기에 제게는 가능한 것이 신부님에게는 어려울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신부님과 이야기하면서 문득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우리는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젊은 날에는 열정과 패기로 앞으로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나이가 들어 늙어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뭇잎이 떨어져야 봄이 온다는 것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의 선악과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여전히 반복되는 인간의 본성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선택의 가능성을 주셨을까요? 이것은 우리에게 깊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단순히 로봇처럼 명령에만 따르는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자유 의지는 하느님 사랑의 큰 표현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자유에는 항상 책임이 따릅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 선택의 결과로 에덴동산을 떠나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들을 마주합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신앙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택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와 하느님께 영향을 미칩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하와를 유혹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했습니다.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너희 눈이 밝아져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라는 말은 인간의 마음 깊숙한 욕망을 건드렸습니다. 금지된 것을 탐하려는 본성은 오늘날에도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우리 각자는 현대 사회에서 다양한 형태의 유혹을 마주합니다.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 물질적 성공에 대한 갈망, 그리고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선택들입니다. 이를 ‘판도라의 상자’에서 알 수 있습니다. 판도라는 상자를 열지 말라는 말을 들었지만, 너무 궁금했습니다. 결국 판도라는 상자를 열었습니다. 그러자 상자 안에서는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것들이 나왔습니다. 질병, 슬픔, 죽음, 가난 등 인간의 삶에 불행과 고통을 가져오는 모든 형태의 어려움이 상자에서 퍼져 나왔습니다. 이는 인간이 처음으로 완벽했던 삶(에덴동산과 유사한 평화)을 잃고, 고통과 투쟁을 겪게 되는 이야기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상자에 남아 있던 마지막 요소는 바로 희망(엘피스, Ἐλπίς)이었습니다. 이는 인간이 모든 재앙과 고난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고, 극복할 가능성과 위안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유혹을 직면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 이야기는 단지 인간의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벌하시지만, 동시에 가죽옷을 만들어 주시며 보호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우리의 약함과 실패 속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며, 구원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시작된 죄는 예수님의 순종으로 극복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 이야기는 우리의 삶 속에서 매일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선택의 순간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를지, 아니면 우리의 욕망을 따를지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도 돌아올 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의 선택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 깊게 하고, 공동체를 사랑으로 이끌어가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그에게 ‘에파타!’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 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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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4. 성 치릴로 수도지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못 듣던 사람이 듣게 되면 어떤 마음일까요? 저는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 머릿속으로 그려 짐작은 하겠지만 그 기쁨을 완벽히 헤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제가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못 듣는 사람들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듣고 싶은 것만을 들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듣고 싶은 것만을 선택적으로 듣게 되면 말도 하고 싶은 말만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서 동시에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듣지 못하는 사람들과 비슷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그들의 귀를 열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제대로 들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제대로 듣게 된 그들은 입을 열어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듣고 싶은 것만을 듣지 않고,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사람으로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에파타’라고 말입니다. 더 이상 듣고 싶은 것만 듣지 않기를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르며 그분을 찬미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졸음 쉼터
저는 가끔 졸음 쉼터에 들러 쉬곤 합니다.
화려한? 휴게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졸음 쉼터
간식거리도 놀이시설도 없지만
꼭 필요한 쉼을 주는 졸음 쉼터입니다.
올해는 누군가에게 졸음 쉼터 같은 사람이 되어보면 어떨까요?
화려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지만
쉼을 선물하는 사람 말입니다.
우리가 서로 쉼을 선물하는 사람이 되기를….
그렇게 조금더 따뜻한 세상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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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4. 성 치릴로 수도지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느 자리에서나 최선을 다하는 삶
“예수님과 성인들”
오늘 옛 현자들의 가르침이 평생 배움의 자세로 살아갈 용기를 줍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이요 성인들이 그러했습니다.
“배움은 입에서 입으로가 아니라 삶에서 삶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배우는 자와 가르치는 자가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다산>
파스카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러합니다. 우리의 일상의 삶 모두를 포괄하는 말씀입니다.
“배우기를 널리 하고, 뜻을 돈독히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까운 것부터 생각한다면 인(仁)은 그 가운데 있다.”<논어>
매사 겸손히, 부지런히, 절실히 배움의 자세로 살아갈 때 공자 말씀대로 주님의 제자다운 어진 인(仁)의 사람이겠습니다.
바로 오늘 기념하는 두 형제 성인들의 삶이 이러했습니다. 오늘은 ‘슬라브 민족의 사도’라 불리는 그리스 테살로니카 출신의 9세기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테디오 주교 기념일입니다. 12세 연하의 동생인 성 치릴로는 42세로, 형 메테데오 주교는 70세까지 장수했습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형제 성인들이었고 매사, 매순간 최선을 다한 순교적 삶이었습니다. 두분 형제 성인의 생애 마지막 부분만 소개합니다.
‘성 치릴로는 그 동안의 선교 활동과 반대자들과의 투쟁에 힘이 쇠진해 로마에 있는 한 수도원에 은퇴하여 수도 서원을 발한 후, 50일 만에 869년 2월14일 오늘 42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성인은 세상을 떠나기전 손을 쳐들고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우리를 보이지 않는 원수의 이빨에 먹이로 넘겨주지 않으신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당신은 원수들의 덫을 끊으시고 그 멸망의 수중에서 우리를 구하셨습니다.”
교황은 로마에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인들과 로마 시민들이 모여 촛불을 들고 그분의 장례를 마치 교황 자신의 장례처럼 성대하게 지내도록 명했고, 치릴로는 로마 성 클레멘스 성당에 안장됩니다.
반면 형인 성 메테디오의 경우, 독일교회와 성인간의 투쟁은 그의 일생을 두고 계속됩니다. 그 투쟁은 그가 건강 악화로 인해 885년 4월6일 파스카 성목요일에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레라트 자신의 주교좌 성당에서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니, 참으로 고난으로 점철된 힘든 생애를 산 성인입니다.
슬라브 민족의 사도로 불리는 두 성인 형제는 모라비아, 보헤미나, 불가리아를 복음화했고, 동유럽교회와 그리스 정교회에서 큰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1999년 10월 1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1.성치릴로, 2.성 메테디오와 함께 3.성 베네딕도, 4.스웨덴의 성녀 브리짓타, 5.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6.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에디트 슈타인)등 모두 여섯 성인들을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윗 두 형제 성인과 매사, 매순간 충실했던 복음의 예수님을 묵상하던중 문득 떠오른 오래전 “제비꽃”이란 시가 생각났습니다.
“자리 탓하지 않는다
그 어디든
뿌리내리면
거기가 자리다
하늘만 볼 수 있으면 된다
회색빛 죽음의 벽돌들
그 좁은 틈바구니
집요히 뿌리내린
연보랏빛 제비꽃들!
눈물겹도록 고맙다
죽음보다 강한 생명이구나
절망은 없다”<2001.4.18.>
바로 예수님과 성인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어제에 이어 계속되는 예수님의 사랑의 치유 이적입니다. 예수님은 날마다 눈부시게 분주한 일상을 사셨습니다. 어제는 티로에서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마귀들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셨고, 오늘은 티로를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볼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시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주십니다.
온갖 정성을 다한후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 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하시니 곧바로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제대로 말하게 되니 참 통쾌한 장면입니다. “에파타!” “열려라!”는 “탈리타 쿰!” “일어나라!”는 말마디와 함께 제가 참 좋아하는 말마디입니다.
답답할 때 에파타! 하며 마음을 활짝 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주님의 “에파타!” 미사은총이 우리의 귀를 열어주시고 입을 열어 주십니다. 모두가 순탄대로의 인생이 아닙니다. 오늘 창세기의 설화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지혜를 줍니다. 며칠전 말씀드렸다 시피 한계를 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여자를 유혹하던 간교한 피조물 뱀 역시 하느님의 창조물입니다. 하느님을, 뱀을 탓할 것이 아니라 유혹을 통과함으로 영적 성장과 성숙의 계기로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뱀과 대화후 여자는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의 열매를 따 먹었고, 이어 남편에게 주자 그도 먹어 둘다 눈이 열려 알몸인 것을 알게 되었고 주 하느님께서 나타나시자 동산 나무 사이에 두려워 숨습니다. 한계를 넘는 죄를 지어 순수를 잃어버리니 그 자리에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들어섭니다.
이제 둘은 한계를 넘어섬으로 수습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래서 교황님이 자주 강조하시는 바, 악마와 대화하지 말라는 것이니 십중팔구 악마의 유혹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대화중 변명, 핑계, 비난, 판단, 과장이 없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고, 아니다 싶으면 즉시 침묵하는 편이 지혜입니다.
이래서 ‘주님의 기도’중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해 달라’는 청원이 절실할 수 뿐이 없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오늘 하루도 “에파타!” 열린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게 하시고, 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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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4. 성 치릴로 수도지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제 괜찮아>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셨다.”(마르 7,33ㄱ)
많은 사람들 틈에
한 사람
아무도 말하지 않으니
들을 수 없었기에
말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서
들을 수 없었던
그 사람
따로 데리고 나가시어
그분께서 말씀하셨다네
나 그대에게
말하고 있으니
이제 맘껏 들으시게나
많은 사람들 틈에
한 사람
아무도 듣지 않으니
말할 수 없었기에
듣지 않았던
사람들에게서
말할 수 없었던
그 사람
따로 데리고 나가시어
그분께서 들으셨다네
나 그대에게
듣고 있으니
이제 기꺼이 말하시게나
사람들 틈에
한 사람
아무도 품지 않으니
있을 수 없었기에
품지 않았던
사람들에게서
있을 수 없었던
그 사람
따로 데리고 나가시어
그분께서 품으셨다네
나 그대를
품고 있으니
이제 오롯이 있으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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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4. 성 치릴로 수도지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마르 7,33)
주님의 손길
만질 수 없는 권능께서 만질 수 있는 지체를 입고 내려오셨습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당신께 다가와 당신 인성을 만짐으로써 신성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몸소 당신 손가락으로 이 귀먹은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 다. 당신 손가락을 그 사람의 귀에 넣으시고 그의 혀를 만지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은 그분 손가락을 통하여 만질 수 없는 신성을 만졌습니다. 곧바로 묶였던 혀가 풀리고 그 귀의 닫힌 문이 열렸습니다(마르 7,32-37 참조). 몸을 설계하시고 육신을 지으신 분께서 몸소 그에게 다가가시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의 닫힌 귀를 아무런 고통 없이 열어 주셨습니다. 한마디 말도 내 뱉을 수 없이 굳게 닫혀 있던 입이 황폐함을 풍요로움으로 바꾸어 주신 분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아담이 배우지 않고도 곧바로 말을 하게 해 주셨던 그분은(참조 창세 1,27-28; 2,20), 힘들게 배워야만 하는 말을 귀먹은 이가 쉽게 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시리아인 에프렘-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5
철저한 버림은 참으로 그대로 두는 행위다
엑카르트는 말한다.
이 세계를 멀리한다고 해서, 사물로부터 달아난다고 해서, 외톨박이 생활을 한다고 해서, 이것 - 만물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법 - 이 터득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든, 우리가 누구든 간에, 우리는 내적인 독거를 익혀야만 합니다. 우리는 사물들을 뚫고 들어가서 거기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법을 익히고, 하느님을 본질적으로 강력하게 그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버림과 그대로 둠은 피조물에게서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에게로 되돌아가는 일에 종사한다. 버림과 그대로 둠은 피조물을 새롭게 보는 방법이다. 그것은 지금도 하느님 안에 있고 원래부터 하느님 안에 있었고, 항상 하느님 안에 있도록 계획된 방법이다.
이 복된 새 피조물 안에서 버림과 그대로 둠은 모든 형태의 무에 대한 존경으로 끝난다. 하느님의 무한한 지혜가 다시 한 번 입을 열 수 있게 된다. 하느님의 무한한 지혜는 아무도 듣지 못한 말, 곧 우리가 태어나기 전의 말을 할 것이다. 그것은 침묵의 말을 할 것이고, 침묵만이 외칠 수 있는 일치의 말을 할 것이다. 그것은 추상적이거나 어렴풋한 침묵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활동을 수반하는 침묵일 것이다.(332)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노
성체성사에 대하여(강론 272)
강론 60
마치 주님께서 그들에게 직접 말씀하시기라도 하듯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너희들이 범한 죄 때문에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사라져 없어지고 마는 그런 일들 때문에 너희들이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모든 잘못들로부터 돌아서서 믿음으로 나에게 충실하면서 자선으로 죄를 갚았더라면, 그 자선이 너희들을 구원하고 영원한 불속에 있는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게 했을 것이다. 자비로운 사람은 행복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비로운 대접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이제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다. 왜냐하면 “무자비한 사람은 무자비한 심판올 받습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13).
그러므로 나의 형제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주는 유일한 권고를 받아들여, 이 세상의 빵을 나누어주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시오.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만약 여러분이 궁핍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면, 그분께서 어떻게 여러분에게 자신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참된 주님이신 그분께서 우리가 가진 재물을 필요로 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위해 어떤 것을 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분께서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궁핍을 드러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굶주리는 그리스도께 먹을 것을 드려 배부르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공로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또한 굶주리는 그리스도를 소홀히 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을 귀담아 듣기 바랍니다.(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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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4. 성 치릴로 수도지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친한 정신과 의사인 친구와 나눈 신앙인의 정신 건강에 관한 이야기
강만연 [fisherpeter] 2025-02-13 ㅣNo.180036
오전에 정신과 의사인 친구를 만났습니다. 개인적으로 휴가를 내서 거제로 가는 길에 저를 오랜만에 만난 지도 좀 됐고 해서 어제 통화를 한 후에 커피숍에서 한 두 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냥 잠시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대전에서 일어난 하늘이 양 사건을 이야기하게 됐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요즘 사람들의 정신 건강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됐습니다. 당분간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묵상글을 조금은 텀을 주려고 했는데 오늘 친구랑 나눈 이야기는 혼자만 생각하기엔 조금 아까운 내용이라 공유를 하려고 합니다. 친구는 개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어도 정신과 의사라서가 아니라 집안 자체도 독실한 신앙관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그런 개신교 신자가 아닙니다. 개신교 신자이지만 정말 집안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 말씀처럼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예수님 앞에서 칭찬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진짜 신앙인이라고 말해도 부끄럽지 않을 그런 집안에서 성장했고 친구도 그런 친구입니다. 절친인 친구인지라 제가 개종을 했다고 해도 천주교에 대해 이상한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친구입니다.
정신과 의사로서 하는 말이지만 요즘 사람들은 강도가 약해서 그렇지 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어느 정도는 있다고 말할 정도로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에 조금 놀라웠습니다. 그 문제를 일반화하기엔 힘들지만 그럼 보통의 사람인 경우에 있어서 누가 봐도 겉보기엔 정상적인 사람 같은데 실제는 정상이 아닌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의학적으로는 비정상인 것입니다. 의학적으로는 비정상인데 일반 보통 사람이 봐서는 그 사람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걸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상한 현상 가운데 요즘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가장 큰 이상 징후에 대해 말해줬는데 이건 중요한 부분인 것 같고 또 특히 친구도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신앙인에게만 나타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보통 보면 신앙인에게 많이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이라고 합니다.
친구는 자기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도 그렇고 아무튼 아무도 개신교 신자라는 걸 모른다고 합니다. 보통 보면 어떤 경우는 병원에 액자 같은 걸 통해서 하나님이나 하느님을 믿는 걸 표시하기도 합니다. 근데 친구는 자신의 신앙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직업적인 의식과 윤리 때문에 숨긴다기보다는 그냥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고 합니다. 환자를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스님, 목사 등등 우리가 흔히 일반적으로 말하는 성직자들도 많이 진료를 했다고 합니다. 제가 기독교 성직자는 편의상 제외하겠습니다. 조금은 민감한 부분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편의상 스님의 예를 들겠습니다.
친구가 스님 이야기를 하길래 제가 한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만약에 환자 중에 스님이 있다면 너 솔직히 어떤 생각을 가지고 상담을 하니 하고 물었습니다. 확실히 똑똑한 친구인지라 이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빨리 파악해서 그런지 단번에 하는 말이 설령 나랑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어떤 편견을 가지고 진료를 한다면 그게 의사냐고 하는 것입니다. 저도 의사라면 그래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혹시나 해서 마치 노파심에서 그랬던 것입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이지만 일반적인 내용만 언급해줬습니다. 친구가 불교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데 상담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친구가 언급한 스님은 불교계에서도 좀 유명세가 있는 스님입니다.
친구는 스님과 상담을 하면서 그 스님이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저에게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이 이야기를 저에게 해 준 이유는 알면 저도 가톨릭 신앙이지만 신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습니다. 포괄적으로 말해서 종교를 가진 사람은 자기가 믿는 신이나 어떤 절대자에 대한 믿음보다는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보여지고 평가가 되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운다는 경향이 많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은 종교를 불문한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 때문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느냐 하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남에게 좋은 평가라든지 또는 좋은 모습으로 보여지려고 자신을 과대포장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는데 그게 어떤 한계를 넘어서면 마치 인간의 욕망이 끝없듯이 이 또한 욕망처럼 계속 자신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포장을 계속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시점부터는 자신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마치 가면을 쓰고 살게 되는 이중 인격자 아닌 이중 인격자처럼 변장한 모습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이 장기화되면 포장된 모습이 진짜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이전의 원래의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것입니다.
여자의 화장에 비유하면 아주 적절한 예가 될 것 같습니다. 좀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화장을 했는데 나중에는 화장을 지우고 해야 하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이 화장을 해야 하는 경우였다고 해도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원래의 모습으로 변화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피부도 건강할 테니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야 정상인데 어떻게 된 것인지 이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인드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생각보다는 많다는 것입니다. 친구는 역설적으로 말을 합니다. 오히려 신앙을 가진 사람이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보다도 포용과 이해, 관용이 더 없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친구는 신앙을 가지고 있고 또 정신 의학적인 면을 고려해서 두 개념을 포괄적으로 설명을 하면 단 하나로 진단을 해줬습니다. 신앙을 하면서 신앙이 어떤 정신적인 자유를 주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 신앙이 한 사람의 정신을 구속시켜 자유롭지 못하고 경직된 사고를 가지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 친구를 만나고 난 후에 참 아이러니한 걸 발견했습니다. 신앙생활도 잘못하면 오히려 정신이 건강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이렇게 된다면 참으로 불행한 신앙생활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불행한 신앙생활이 되지 않으려면 어딘가에 갇혀 굳어지는 사고에 빠지면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시각으로 폭넓게 다양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신앙도 그런 시각으로 바라봐야 건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오늘 친구랑 만나서 나눈 이야기를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묵상을 한 다음에 공유를 해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어서 짧은 생각이었지만 그 내용만이라도 전해드리면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공유를 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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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4. 성 치릴로 수도지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땅 끝까지 복음을 선교하는 삶을 /
박윤식 [big-llight] 250213. 19:15 ㅣNo.180040
슬라브 민족의 사도로 유럽의 수호성인 치릴로 수도자와 그의 형인 메토디오 주교는 그리스의 테살로니키에서 고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거기에는 슬라브인이 많이 살고 있었고, 훌륭한 학교 또한 많았다. 그래서 그들은 어려서부터 슬라브 민족의 언어와 풍속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치릴로 성인은 어려서 콘스탄티노플로 가 왕립학교에 다녔다. 그는 형처럼 지방의 총독직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하고 사제품을 받아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메토디오 형은 그곳 슬라브 식민지 가운데 한 지역을 맡은 총독이 되었다가, 물러난 뒤 은수자가 되었다.
형제는 수도원에서 살고 있었는데, 미카엘 3세 황제가 러시아의 드니프로강과 볼가 강변에서 사는 하자르족을 회개시키도록 파견하자 하자르 언어를 배워 수많은 이를 개종시켰다. 선교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친 치릴로 성인은 이후 몇 달 동안 교황청이 운영하는 학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메토디오 성인은 소아시아 헬레스폰트에 있는 폴리크로니온 수도원 원장이 되었다.
형제 성인은 슬라브어 실력에 뛰어난 면모를 보여, 치릴로는 선교를 위해 성경을 고대 슬라브어로 번역했고, 그리스 문자를 기초로 슬라브 알파벳을 만들었다. 완성된 키릴 문자는 여전히 러시아어와 다른 슬라브 언어의 알파벳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 그는 형의 도움을 받아 복음서와 시편, 바오로 서간을 슬라브어로 번역했고 슬라브어의 전례서를 만들어서 미사를 거행했다.
이렇게 성 치릴로와 성 메토디오는 9세기 교회의 탁월한 인물로서 비록 힘든 생애를 살았지만, 토착화된 방식으로 슬라브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 ‘슬라브 민족의 사도’로 불리며, 동유럽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에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그리고 두 형제와 제자들이 행한 슬라브 전례는 오늘날의 러시아 전례가 되어 러시아, 세르비아,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그대로 전해온다.
‘그 뒤 예수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해, 몸소 가시려는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이르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해라. 가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해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이가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해라.”‘
오늘은 슬라브 민족의 사도라 불리는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형제 기념일이다. 형제는 동유럽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서 큰 공경을 받고 있으며, 그들이 행한 전례는 오늘날에도 러시아, 세르비아,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그대로 전해져 온다. 1985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들을 베네딕토 성인과 함께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그들은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은 지역으로 하느님 평화를 전하려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래서 두 성인의 정신은 불가리아와 보헤미아 그리고 남부 폴란드로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님을 전하는 우리도 저마다의 선교 사명을 지고, 복음을 널리 전하는 삶을 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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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 명령 에파타! /
박윤식 [big-llight] 250213. 19:14 ㅣNo.180039
/ 연중 제5주간 금요일(마르 7,31-37)
“곁에 있는 이가 멀리서 울리는 피리 소리를 듣는데도 나는 들을 수 없을 때, 목자가 노래하고 있는 것을 남들은 다 듣는데 내가 들을 수 없을 때, 나는 절망에 빠져 죽음을 선택하려 했다. 다만 음악만이 나를 다시 삶으로 데리고 왔다. 나에게 부과된 창조를 완전히 이룩할 때까지는 이 세상을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천재 음악가 베토벤의 말이다. 그는 점차 청각을 잃어버렸다. 음악이 천직인 그에게 청각 장애는 심성이 더욱 피폐해져 삶이 죽음과 같을 게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데리고 나가셔서,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였다. 그분께서는 이를 말하지 말라셨다. 사람들은 더욱 더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들은 모두 훌륭하다. 듣게도 하시고 말하게도 하시는구나.”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셨다.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신 것이다.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으셨지만 의당 그렇게 하셨다. 그의 아픔에 동참하시는 모습이다. 못 듣는 그 서러움을 이해하셨던 것이다. 사람들이 만날 때 조금만 웃어만 주어도 그가 따뜻해 보인다. 조금만 다정하게 악수해도 사람이 달리 보인다. 그런데 그걸 아낀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에게 일부러 손가락을 대시는 예수님 모습을 묵상하자.
이렇게 자비의 예수님께서는 그 바쁜 일정에서도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아픔을 같이하셨다. 손가락에 침까지 발라 그의 혀에 대셨다. 그렇게 사랑의 행동을 취하셨던 것이다. 사실 듣지 못한다는 신체적 장애로 겪는 고통이 크겠지만, 우리 사회는 제대로 듣지 않아서 생기는 오해와 편견이 참 많다. 그리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올바른 정보 없이 자기 해석을 덧붙여서 진실을 왜곡하여 ‘말더듬이’처럼 남에게 말을 전해 벌어지는 갈등과 분열의 상처도 도를 더한다.
음악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거장 베토벤을 다시 살게 한 것은 음악이었다. 들릴 듯 말들 한 그 음률 때문에 죽음 같은 절망에 빠졌지만, 음악 때문에 다시 심기를 찾아 살아났다. 육체적인 귀는 닫혔지만, 그는 정신과 마음의 귀를 열었다. 이 절망을 넘어 내면의 귀가 열리자, 오히려 베토벤은 더욱 눈부신 창작 시기를 맞았단다. 예수님께서는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신다. 무릇 예수님께서는 귀먹은 이를 치유하시는 것만이 목적은 아닐 게다. 대대로 이 말씀이 세상에 울려서, 마음이 닫힌 이들의 귀를 열고자 하신 것이리라.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내면의 귀가 닫혀 있기 때문일 수도. 세상에서 패배자가 되는 것은 불행한 운명 때문이 아닌, 마음을 닫고 있어서이다. 내면을 열고자 하는 노력은 어쩜 우리 몫일 게다.
우리가 살면서 남과 나눌 수 있는 것은 물질뿐만이 아닌, 상대에게 귀를 기울여 함께 마음을 갖는 것도 포함된다. 남의 말 잘 듣는 것도 정말 훌륭한 나눔이다. 그저 듣고만 있었는데도, 상대는 스스로 고민을 해결했다며 좋은 이야기에 감사의 말을 곧장 전해준다. 이처럼 우리 역시 다른 이들께 복음을 전하려면 먼저 하느님 말씀을 잘 들어야만 한다. 그분 말씀을 듣지 않고 전하면, 복음이 아닌 자신만의 이야기일 뿐이다. 오늘 하루 하느님께서 주신 말씀에 귀 기울이자. 그리고 곁의 그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시간을 갖자. “에파타!” 다 열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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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4. 성 치릴로 수도지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귀먹고 말 더듬는 이”(마르 7,32)를 낫게 하시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마치 성사를 집행하는 사제 같으십니다.
사람들은 단순히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실 것을, 곧 안수를 청하였을 뿐인데 예수님께서는 손가락, 혀, 숨 등을 통한 정교하고 신중한 동작으로 그의 귀와 혀를 열어 주십니다.
말씀 한마디로, 때로는 병자를 직접 만나시지 않고 원격으로 고쳐 주시기까지 하시던 분께서 여기서는 당신 지체로 병자의 몸을 접촉하시면서 일종의 전례 예식 같은 치유 행위를 보여 주십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육신을 취하신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구체적인 모습을 목격합니다.
하느님이신 분께서 만질 수 있는 지체로 육화하시어 당신을 만지는 사람들이 당신 신성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귀먹고 말 더듬던 사람은 예수님의 손길이 닿는 순간 그분의 신성을 체험하게 됩니다.
육화하신 하느님께서는 말씀만이 아니라 인간적이고 구체적인 모든 수단으로 우리를 낫게 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성령 기도나 초자연적 방식으로만이 아니라 당신께서 마련하신 자연적인 수단들이나 의사들을 통해서도 고쳐 주십니다.
그러니 그들 안에서도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인간 조건에 맞추어 눈에 보이는 표시와 말씀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전해 주는 도구가 바로 ‘성사’입니다.
우리는 성사를 받을 때마다 눈에 보이는 표지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보고 합당하게 모셔야겠습니다.
그때 우리의 영혼은 은총으로 활짝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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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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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4. 성 치릴로 수도지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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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4. 성 치릴로 수도지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7, 34)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접촉으로
우리는
건강한
소통을
다시 배웁니다.
막혀있는
접촉을
예수님께서
열어주십니다.
소통하지 못한
우리의 아픔을
치유자이신
예수님께
내어드립니다.
인격은
존중입니다.
존중은
막힘 없이
잘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파타이며
이것이
열림입니다.
진정한 열림은
판단과 평가가
아닌 진정한
공감으로
한 사람을
치유합니다.
소통은
소통의 과정을
지나갑니다.
소통의 과정은
진정성과
소중함의
과정입니다.
소중함의
과정은
우리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는
가장
가치있는
나눔입니다.
예수님이
따로 있고
소통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 삶의
진정한
소통이 되십니다.
우리의
귀가 열리고
우리의
묶인 혀가
풀려서
우리들 또한
건강한 소통
건강한 인격으로
살아가는
열린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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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4. 성 치릴로 수도지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찌 보면 우리는 또 다른 귀먹은 사람이요, 말 더듬는 사람입니다!
‘에파타!’ 복음을 접할 때마다, 제 지난 삶을 되돌아보지 않을수 없습니다.
솔직히 수도회 입회 전까지만 해도, 저는 도통 말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루 온종일 말을 거의 하지 않다 보니, 당연히 말주변이나 말재주가 전혀 없었습니다.
당시 제 모습에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 있습니다.
‘꿔다놓은 보리 자루!’
어떤 정소를 가든, 어떤 모임에 가든 저는 조용히 한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습니다.
거의 투명 인간처럼 그렇게 지냈습니다.
학창시절 제 생활기록부에 단골로 적혀있던 표현들이 있었습니다.
조용한 성격, 남 앞에 나서기를 지극히 꺼려함,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많이 탐...
그런데 지금은 스스로가 생각을 해도 깜짝 놀랄 정도로 바뀌었습니다.
얼마 전, 몇십년 만에 해후한 고등학교 동창 친구가 있었는데, 하루는 그가 제가 주도한 한 강좌에 참석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바뀌어버린, 제 모습에 강의 내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크게 변화된 제 모습을 보며, 주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제 신앙 여정 안에 ‘에파타!’라고 외치시며 저를 치유하셨음을 믿습니다.
오늘도 또 다른 깨달음, 또 다른 시야를 지니도록 계속해서 ‘에파타!’ 작업을 지속하고 계심을 굳게 믿습니다.
올바른 목적을 설정하고, 죽기 살기로 노력하면, 놀랍게도 주님께서 힘을 보태주십니다.
선한 의지를 갖고, 한 방향으로 선택과 집중을 해서, 혼신의 노력을 하면 기적이 가능합니다.
제대로 한번 변화되어 보려고, 제대로 한번 눈을 떠보려고, 제대로 한번 깨달음에 도달하려고
총력을 기울이다 보면, 반드시 주님께서는 선한 일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옛날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의 귀를 열어주시고, 혀를 풀리게 하는 사랑의 기적을 행하셨는데, 그 기적은 오늘 우리 안에서도 되풀이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 듣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솔직히 놓치며 살아가는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서늘한 가을바람에 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동료 이웃들의 음성을 통해 전해지는 성령의 목소리를 놓치며 살아갑니다.
주변에서 매일 발생하는 다양한 사건 사고들을 통해 전해지는 시대의 징표를 놓치며 살아갑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말을 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중요한 말, 꼭 필요한 말, 반드시 해야할 말은 하지도 못하고 살아갑니다.
어찌 보면 우리는 또 다른 귀먹은 사람이요, 말 더듬는 사람입니다.
부드럽고 감미롭지만, 강한 생명력을 지닌 주님의 한 말씀, ‘에파타!’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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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4. 성 치릴로 수도지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7,31-37: 열려라-에파타
예수님은 다시 갈릴래아로 가시자마자 귀먹은 반벙어리를 만나신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주 친절하시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신다. 귀먹은 반벙어리를 따로 불러 친절하게 손가락을 귀에 넣으시고 그의 혀를 만지셨다. 그리고 그 불구를 완치시켜주는 은혜가 어디서 오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하여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에파타!” 곧 “열려라!”(34절) 하신 것이다. 그는 혀가 풀리고 귀의 닫힌 문이 열렸다. 성령은 “하느님의 손가락”(루카 11,20)이라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당신 손가락을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귀에 넣으시어,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그 사람의 마음을 믿음을 향해 열어 주셨다. 그분이 귀를 만지신 것은 그의 귀가 막혔기 때문이고, 입을 만지신 것은 그가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파타!”, 즉 “열려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의 입과 귀도 열어 주시기를 청하자.
주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해 주셨다. 주님께서는 이 일을 통하여 진리를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을 듣고 이해하게 되리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거룩한 복음을 듣지 않고 행할 바를 실천하지 않는 자들이 바로 말 못 하는 청각장애인이라 할 수 있다. 주님의 능력은 말 못 하는 사람을 제 혀로 다시 말할 수 있게 해 주셨다. 단순한 사건이기는 하지만 이 능력 안에는 미래의 일을 드러내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 예전에는 천상의 것에 대해 무지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지식과 지혜의 진리를 깨달아 하느님에 관하여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37절) 감탄하였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인간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해 주셨다.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백성들이 감탄했듯이 오늘의 우리도 다른 이들이 우리의 믿음의 행실을 보고 “참으로 놀랍기만 하구나!” 하며 우리와 같이 신앙을 갖기를 원하게끔 우리의 행위를 예수님의 모습을 닮을 수 있도록 고쳐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니겠는가! 조금씩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할 때, 그분의 속삭임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살려고 노력할 때, 묶여있던 혀가 풀려 올바로 주님을 찬미하고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조그마한 일에서부터 꾸준한 노력의 결실로 나에게 돌아오는 결과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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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4. 성 치릴로 수도지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가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느껴질 때
찬미 예수님.
오늘은 복음은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치유해 주신 이야기입니다.
정말 많은 것을 묵상할 수 있겠지만, 오늘은 그를 데려온 사람들에 대해 묵상해보고 싶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에게 단지 “나을 것이다.”라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직접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으시고, 침을 찍어 그의 혀에 대시며, “에파타!” 곧 “열려라!”라고
분명히 표현하셨습니다.
이는 그 대상에게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더욱 신경써 주고 계심을 느끼게 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 보스코의 말처럼,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도 몸소 실천하신 사랑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에파타라고 말씀하시면서,
행동과 언어를 결합하여 상대가 체험할 수 있는 사랑을 선사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를 데려온 사람들은 예수님께 그저 “손을 얹어 주십사” 청하였을 뿐입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사랑을 느끼게 하는 힘이 되었는지 우리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느 때는 더는 내가 저 사람에게 필요 없는 존재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헤어질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그럼 헤어져야 할까요?
영화 ‘아이 엠 샘(I Am Sam)’은 지적 장애를 가진 아버지 샘이 어린 딸 루시를 키우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샘은 스타벅스에서 일하고 단순한 삶을 영위하는 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입니다.
루시가 태어난 직후에 여자는 떠나버립니다.
샘은 자신의 인지적 제한에도 불구하고 루시를
흔들리지 않는 사랑으로 키우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으로 아이에게 제공합니다.
그런데 루시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아버지를 지적으로 능가하기 시작합니다.
그녀가 7세가 되자 그녀는 아버지가 다른 성인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읽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버지 앞에서만은 일부러 글을 읽지 못하는 척합니다.
샘은 딸과 함께 간 식당에서 어린이처럼 없는 메뉴를 주문하며 떼를 쓰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보는 딸의 입장은 매우 난처합니다.
이런 일이 이어지자 사회 복지 서비스는 샘이 루시를 키울 수 있느냐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재판이 열리고 샘은 결국 아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에게 더는 줄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같이 살고 싶어 하지만, 샘은 루시를 위해 그녀를 좋은 집안으로 입양 보냅니다.
딸은 새로운 집에서 잘 적응해갑니다.
샘은 딸을 만나러 갔다가 자신 없이도 잘 지내는 것을 보고는 그냥 돌아옵니다.
그러나 루시는 아빠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기를 그러한 집에서 자라게 해 준 아빠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빠와 딸을 키우는 집의 엄마는 마치 공동 육아처럼 서로 협력하여 루시를 키우기 시작하며 영화는 끝납니다.
이 영화에서 샘이 딸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딸을 잘 키워줄 누군가에게 딸을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하며 가장 잘하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그들에게 감사받는 일입니다.
한국 영화 ‘말아톤’의 초원이 역시 자폐성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를 키우기 어려웠던 엄마는 동물원에서 아이의 손을 일부러 놓아 아이를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이 기억은 아이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었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자기 힘만으로 키우려 합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아이가 마라톤을 하려고 하자, 페이스 조절을 할 수 없는 아이가 말아톤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엄마와 아이가 화해하는 때는 엄마가 아이에게 말아톤 코치를 소개해주면서부터입니다.
초원이는 달리는 법을 배우고 행복하게 달립니다.
그리고 자신을 코치에게 보내준 엄마도 용서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만이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그에게 자신을 데려온 그 사람이 치유를 받고 그 사람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힘만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려 하지 맙시다. 한계에 부딪힙니다.
주님께 데려가는 사람은 당장은 그 사람을 잃는 것처럼 느끼겠지만, 영원히 그 사람에게 감사받고 관계가 끊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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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4. 성 치릴로 수도지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못 듣는 것은 죄가 아니고, 안 듣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1-37)”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고장 난 세상을 고쳐서
원상복구하시는 메시아” 라는 증언입니다.
37절의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를
원문대로 번역하면 “저분은 모든 것을 좋게 하신다.”인데, 이 말은 창세기 1장에 반복해서 나오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에서 온 말이고, “예수님은 새로운 창조자”, 또는 “예수님은 창조 질서를 회복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는 이사야서 35장 5절,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에서 온 말이고,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증언입니다.
이 증언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4ㄴ-6).”
메시아 시대는 모든 것이 완전해지는 시대입니다.
<모든 것이 완전했던 에덴동산이 원래대로 복구되는 시대.>
2) 예수님께서 다른 장애자를 고쳐 주실 때와는 다르게 여러 가지 동작을 하면서 장애자를 고쳐 주신 것은, 아직 믿음이 없는 그에게 믿음을 심어 주기 위해서, 또 그가 듣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배려로 ‘눈에 보이는 동작’을 사용하신 것으로 해석됩니다.
‘에파타!(열려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몸’을 치료하는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그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말씀입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고통의 억압에 짓눌려 있는 사람의 영혼을 해방시켜 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 한 번으로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듣고, 올바르게 말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몸의 장애를 고치는 일은 이루어졌지만, 영혼 구원의 완성은 아직 미완성 상태이고, 그 완성은
그 사람 자신이 끝까지 노력해야 할 숙제입니다.
3) 장애 때문에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들을 수 있는데도 듣지 않고, 말할 수 있는데도 말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복음’을
잘 듣고 실천하고 증언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는,
“침묵은 금이다.” 라는 격언은 맞지 않습니다.
‘말씀’과 ‘복음’을 전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것은 죄입니다.
선을 선이라고 말해야 할 때, 또 악을 악이라고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것도 역시 죄입니다.
침묵도 죄이지만, 들으면 안 되는 ‘악한 말’만 듣는 것, 그리고 그 말을 퍼뜨리는 것은 더 큰 죄입니다.
요즘 인터넷을 통해서 가짜 뉴스와 악한 말들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자들은 하느님의 일을 심각하게 방해하는 ‘사탄의 일꾼들’입니다.>
4)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 주니 말입니다(2코린 11,3-4).”
<오늘날에도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교리를 왜곡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변질시켜서 사람들을 홀리고,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 밖의 사이비 종교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그런 자들이 있어서 신앙인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거짓 사도들에게 속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러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로 위장한 거짓 사도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일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닙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러니 사탄의 일꾼들이 의로움의 일꾼처럼 위장한다 하여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행실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2코린 11,13-15).”
자신들의 잘못된 신념과 사고방식을 ‘진리’인 것처럼 퍼뜨리는 자들에게 속지 않으려면 더욱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 안에서, 말씀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잘 들어야 하고, 들었으면 그대로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에파타!(열려라!)” 라는 명령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열어라!” 라는 명령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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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4. 성 치릴로 수도지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7,31-37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는 혼자 도를 닦아서 깨달음에 이르는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며 그 말씀에 따라 사는 종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구원의 진리가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하여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귀와 입은, 즉 제대로 듣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형성하는 기본이자 필수적인 조건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귀 먹은 이’란 단지 물리적인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가 아니라 귀가 있어도 편견과 고집 때문에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를 가리킵니다. 또한 ‘말 더듬는 이’란 음성적인 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가 아니라 입은 있지만 용기와 의지가 부족하여 하느님의 뜻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리는 이를 가리키지요.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듣기 싫은 말에는 귀를 막을 때 우리도 귀머거리가 됩니다. 하고 싶은 말만 하고 해야 할 말은 하지 않을 때 우리도 벙어리가 됩니다. 그렇기에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분 뜻대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크나큰 축복이라고 할 수 있지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이는 그런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단지 물리적으로 소리를 못 듣고 못 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쌓인 수많은 상처들 때문에 마음이 굳게 닫혀버려 제대로 된 소통을 할 수 없는 상태였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병자를 치유하실 때처럼 그를 ‘말씀’으로 치유하지 않으시고 그만을 위한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그가 온몸과 마음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그의 아픈 부위를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신 것이지요. 슬픔과 괴로움으로 절망에 빠진 이에게 한 마디 말보다 옆에 같이 앉아 그의 마음에 공감해주고 어깨를 보듬어주며 손을 잡아주는 것이 더 큰 위로로 다가오는 것처럼, 예수님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그의 마음 속 더 깊은 곳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당신 손을 소통의 도구로 사용하신 겁니다.
그리고 그에게 ‘에파타’, 즉 ‘열려라’라고 외치십니다. 부정의 문을 열고 긍정의 길로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절망의 문을 열고 희망의 길로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미움의 문을 열고 화해의 길로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분노의 문을 열고 사랑의 길로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받은 상처들을 용서의 강에 흘려보내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과정에서 받은 상처들을 순명의 물로 씻어내어 활짝 열린 마음과 영혼으로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그가 자신을 세상에 옭아매는 부정적인 감정들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열어주신 구원의 문을 통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더 늦기 전에 ‘에파타’해야겠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찬미를 하느님께 바치며 그분께서 누리시는 참된 기쁨을 함께 누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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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4. 성 치릴로 수도지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에페타!” 곧 “열려라!”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 보고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라고 하지요?
우리는 가끔씩 이런 경험을 합니다.
사람들에게 이 근처에 문방구가 어디에 있지? 하고 물으면 이웃은 친절하게
건물 옆에 있는 그 장소를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그 거리는 수 없이 다녔는데 문방구를 못 본 것입니다.
그래서 호기심 반, 의심 반으로 가 보면 이웃이 말한대로 그곳에 문방구가 있는 것입니다.
평소에 관심이 없으니까 아니면 먼 큰 문방구를 다니던 버릇 때문에 그 자리에 있는
문방구를 못 보는 것입니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관심도 없고 더더군다나 흥미도 없으면 내 이웃이 말하는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때로는 짜증나게 하는 소리롤 들릴 수 있지요.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나는 내 이웃에게 칭찬 듣기를 원하고 때로는
나를 대단한 주인공이 되는 줄거리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이 부족한 자신을 위해서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고 나에게 이로운 소리는
귀에 거슬린다.'라는 말이 있는 것인가 봅니다.
가끔씩 매스컴을 통해서 '억대 사기를 당했다.' 또 내 이웃이 '어리석게 속아서
있는 돈을 다 날렸다.' 라는 마음 아픈 소리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을 들여다 보면 사기나 속임수의 시작은 '내가 듣고 싶은 소리'에
걸려 넘어 간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 꿈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달픈 삶, 실망스러운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며 아름다운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벗어나서 지나친 욕심에 빠지다 보면 그야말로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고
혹하는 마음으로 흐르게 마련입니다.
하느님께서 당부하신 '동산에 있는 어떤 열매도 따 먹어도 되지만 한 가운데에 있는
열매만큼을 따먹지 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뱀은 슬쩍 말을 바꾸어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창세 3,1)라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이간질 질문을 합니다.
하와는 그 속임수에 걸려 넘어트리려는 속셈도 모르고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 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2-3절)라고 잘난 체 하며 가르치려고 듭니다.
그것은 뱀이 이미 계산하고 덫을 놓았는데 말이지요.
뱀의 속셈과 하와의 어리석음이 결국 유혹의 올가미에 걸려들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잘난 체 하거나 상대방을 가르치려고 달려들면
달콤한 유혹의 독이 스며들게 되어 있지요.
그 틈새로 뱀은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이간질을 해대기 시작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의심하게 하며 하와를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창세기 저자는 이런 인간의 심리를 투박한 낙원의 이야기를 통해서 깊이 있게
또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뱀은 이번에는 소리 대신 시각적으로 하와를 꼬드깁니다.
저자는 이 사실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지요.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그래서 여자가
열매 하나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6절)
예수님께서 한번은 갈릴래아 호숫가로 오셨습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한 숨을 쉬시며 '에페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 환자는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기 시작합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제각기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이 치유된 것을 보고 감탄하지요.
우리는 벙어리도 아니고 귀머거리도 아닙니다. 그런데 내 이웃에 대해서
제대로 판단하지도 못하고 내 감정에서 떠나 객관적으로 표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와를 꼬드기고 부추기던 뱀이 우리의 삶의 틈새를 그냥 둘 리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열매를 두고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어도 된다.”(창세 2,2)라고
말씀하셨지요.
간교한 뱀은 하와에게 묻기를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창세 3,1)라고 살짝 바꾸어 놓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인간과 이간질 시키는 뱀의 간교함을
피하기가 쉽지가 않네요.
그래서 사람은 일반적으로 혀가 있어도 바르게 말하지 못하고 심술스러운,
또 질투를 발라서 다르게 말합니다.
귀가 있어도 자기 좋은 소리만 듣고 싶으니 올바른 소리가 귀에 들어오겠어요?
다 ‘짜증나는 소리’이고 ‘잔소리’가 되고 마는 것이지요.
우리 한국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있지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요.
우리는 이웃이 잘되는 꼴을 못 본다고 해서 ‘배가 고픈 것은 참아도,
배가 아픈 것은 못 참는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부족함을 치유해 주셔야 제대로 보고 들을 수 있지요.
내 안이 주님으로 채워져야 사랑과 정의의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웃이 잘 되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이웃이 아파하면
위로와 기도를 함께 해 주는 주님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만이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지요.
오늘 하루를 지내며 ‘좋게 생각하고 좋게 말하자!’의 의미를
삶으로 옮기는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부족하지만 용기를 내어 주님을 따르며 그렇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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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4. 성 치릴로 수도지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열린 마음으로 맡기고 받아들이는 삶♣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온갖 피조물을 우리에게 맡겨주셨다. 나아가 그분은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창조 사업을 이어가고자 하시고, 이 순간도 당신의 창조의 얼을 불어넣어 주신다. 그런데 왜 우리는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영적 성장을 이루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일까? 오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자.
인류 타락의 원인은 인간이 하느님을 믿지 않고,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는 교만에 있다(창세 3,1-4). 자만심은 모든 악의 뿌리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주신 모든 것을 사람들이 기꺼이 서로 나누고 서로 위해 주면서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신다. 교만한 인간은 하느님의 계획을 무시하고 자기 뜻을 앞세운다. 그는 자신만의 자유를 누리려 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함으로써 타인을 노예화하고 자신도 물질과 탐욕의 노예가 된다. 이렇게 하느님 보시기에 참으로 좋게 창조하신 생명의 낙원은 실낙원(失樂園)이 되어가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뜻은 남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하느님께 순종하며 서로를 이롭게 하며 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어떤가? 제 잘난 멋에 살고, 마치도 자신이 심판관이나 된 듯이 다른 이들을 저울질하고, 자기 기준에 모든 것을 꿰어 맞추려 하며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는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한 자유이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을 성취하고자 할 때, 우리는 죽음의 길로 치닫게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가장 중요시 여기며 그분께 온전히 맡기는 자세를 지녀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벙어리는 예수님께 맡기려는 자세로 믿음을 가지고 다가갔다. 이 벙어리는 예수님 앞에 나아가 치유되기에 앞서, 이미 부족하고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알고, 또 ‘스스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알았다. 또한 그는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는 물론, 주위 사람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계심을 알았기에 사람들을 통해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늘 깨어있었다.
성인이란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죄나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이다. 우리도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통째로 맡기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군중 가운데서 벙어리를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7,33) 치유해주신다. 그분은 군중의 인기를 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서 행해진 신비 그 자체를 보여주신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호기심에 가득 찬 군중들의 시선을 피해 그 기적을 행하고자 하셨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가 하는 봉사나 선행에 대하여, 자신의 능력에 대하여 은근히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 주님 마음에 드는 일은 무엇이나 이미 하느님께서 보고 계시며, 저절로 드러나 모두에게 흐뭇함을 안겨주고 서로를 살리는 힘이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예수께서 ‘열려라’ 하고 말씀하시자 곧바로 병자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7,34). 벙어리의 치유를 통해서 예수께서는 병자든 죄인이든 모두를 조건 없이 사랑으로 받아주셨다. 이것이 바로 모든 피조물을 풀리게 하고 다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재창조의 열쇠이다. 우리 삶의 결정적 중심이요 하나뿐인 방향이신 주님께 우리의 삶을 통째로 내맡기면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받아들이도록 하자.
받아들임은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너그러이 대하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방을 존중하며 끝까지 들어주는 것이다. 받아들임은 차별없이 모두를 향하여 여는 것이다. 그것은 남의 죄, 약점, 고통, 허물 등도 기꺼이 함께 지는 것이며, 계산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나누는 것이다.
받아들임은 자기 마음에 드는 면만이 아니라 인격 전부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침묵 안으로 모든 것을 돌려 드리며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우리 모두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 주님께 모두를 내맡기고 사랑으로 서로를 받아들임으로써 ‘서로를 살리는 살맛나는 세상’을 이루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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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4. 성 치릴로 수도지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 - 평화의 사도 복사 안됨 :
https://cafe.daum.net/apostlesofpeace/Jrqr/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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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4. 성 치릴로 수도지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
<2025.2.14> 아침을 여는 묵상 (눅 3:1~14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
❚ 자신의 삶을 냉정하게 돌아보고 회개함으로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이어야 합니다.
✔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이란 무엇입니까?
➲ 겸손히 순종하여 사명을 감당하는 삶입니다(1~6절).
세례요한은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 전까지 빈 들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즉 하나님의 계획보다 먼저 앞서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사야의 예언(사 40:3)을 순종하여, 메시아의 오실 길을 철저하게 준비하였습니다(4~6절).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시간표에 순종하는 믿음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늘 경험하는 것이지만 내 자신 스스로가 괜히 조바심을 느껴 섣부르게 계획하고 행동했다가 후회하는 일을 자주 경험합니다. 우리 인생에는 분명 기다려야 할 때가 있고, 당당하게 나아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출발 신호는 하나님이 하셔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내 사역 가운데 그리고 내 인생 가운데 ‘빈 들’에 머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빈 들일 수 있음을 기억하여 조바심을 느끼지 말고, 잠잠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순종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더더욱 ‘빈 들’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충분히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 후에 행할 수 있는 순종의 믿음이 필요할 때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갈 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 인생의 주도권을 주님께 의탁하는 삶입니다(7~9절).
요한은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선포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는 자부심에 빠져서 자신들이 지금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교만한 신앙을 책망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요한은 외쳤습니다. 요한의 외침은 회개하고 열매를 맺는 데까지 나아갈 것을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좋은 열매를 맺지 않으면 도끼에 찍혀 불에 던져지는 운명에 처할 것(9절)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눈물, 콧물을 쏟으며 통곡하면서 회개를 했더라도, 삶의 변화가 전혀 없으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삶의 변화를 통한 열매를 맺는 삶이어야만 참된 회개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우리 인생의 주도권을 우리 자신이 쥐고 있는 것 역시도 참된 회개의 모습이 아닙니다. 결국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쳤던 교만한 삶을 회개하고 우리 인생의 주도권을 주님께 온전히 맡겨 드리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처음엔 쓰리고 아픔이 있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과정이 주님께 이르는 복된 길이요,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주님의 임재 가운데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 됨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인생의 주도권을 주님의 손에 의탁함으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삶으로 변화하는 자신을 증명하는 삶입니다(10~14절).
무리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이에 대해 요한은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10~11절). 세례를 받고자 온 세리들도 물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12~13절). 군인들도 물었습니다. 요한은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14절)라고 말했습니다.
회개의 열매란 곧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즉 삶으로 증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추상적인 개념에서의 회개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이라는 개념으로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눔과 자비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정직과 공정이라고 하는 단어를 삶으로 살아내야 하겠습니다. 어쩌면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고, 기초적인 사회 질서를 지키는 것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우리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삶이야말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변화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영적인 정체성을 증명해 내는 삶을 살아감으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목적 없이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것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명 감당이라고 하는 분명한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삶의 변화로 이어지는 참된 회개의 삶을 통해 날마다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며, 의의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눅 3:1~14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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