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질서 [15]
결혼식이 끝나고 다시 조용한 나날이 이어졌다. 결혼식이 엄마의 병을 기적적으로 낫게 하거나 아니면 엄마가 풍선처럼 허공 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는데, 막상 결혼식이 끝나고 나니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똑 같은 병, 똑 같은 증상, 똑 같은 약, 똑 같이 고요한 집, 모든 게 그대로 였다. 아빠는 내파밸리로 다 같이 와인 시음 하러 갈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여세를 몰아 계속 아무 일도 없는 척 얄팍하게 위장해보려는 속셈이었다.
뭔가 계속 기대할 만한 게 있으면 이 병을 속여나갈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암아, 지금은 때가 아니야 곧 결혼식이 있어! 그리고 이젠 내파밸리로 와인 투어를 하러 가야해! 그다음엔 결혼 기념일, 생일이 있고, 나중에 우리가 바쁘지 않을 때 다시 오렴. 그런 식의 주의 돌리기가 점점 비현실적으로 보이기 시작 했다. 나는 대부분 시간을 엄마 곁에 가만히 누어 엄마 손을 잡고 텔레비전만 봤다. 이제 집안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엄마는 날이 갈수록 기력이 떨어져 우리가 별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엄마는 잠을 더 자주 잤고 말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호스피스가 병원용 침대를 가져와 안방에 놓았지만 우리는 엄마를 그 침대로 옮기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너무 우울해질 것 같아서였다. 결혼식이 끝나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 계씨 아주머니는 그제야 휴식시간을 가졌다. 아주머니는 엄마 차를 빌려 타고 하일랜즈 술집으로 가서 도박을 했다.
아빠는 부엌에서 컴퓨터를 했고, 엄마와 나는 침대에 누워 〈인사이드 디 액터스 수튜디오〉 [배우 및 영화감독을 초대해 인터뷰하는 내용을 주로 다루는 토크쇼] 〈법과 질서〉 [한국에서는{성범죄 전담반} 혹은 {성범죄 수사대}로 알려져 있다.]에 출연하는 마리스카 하지 테이가 게스트로 나왔다. 진행자 제임스 립튼은 이 배우에게 어머니의 때 이른 죽음에 대해 물었다. 우리는 아름답고 냉정한 성인 여자가 곧장 눈물을 터뜨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얼추 40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엄마라는 말 한마디의 파급력은 그 정도였던 것이다. 나는 몇 년 뒤에 똑같은 감정과 맞닥뜨릴 내 모습을 상상했다.
엄마의 죽음이라는 벌에 쏘이는 그 순간부터, 나란 존재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남은 평생을 벌침이 박힌 채로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내 얼굴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려내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엄마도 울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부등켜안으며 서로의 티셔츠에 얼굴을 파묻고 한바탕 서럽게 흐느꼈다. 우리는 둘 다 〈범과 질서〉를 본 적이 없고 이 배우가 누군지조차 몰랐다. 마치 나의 미래를, 평생 내 안에 가지고 다닐 고통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렸을 때 넌 우리가 어딜 가건 주야장천 내 옆에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었어." 엄마가 힘겹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속삭였다. "근데 이리 나이를 먹고도 여기 이렇게 나한테 찰싹 달라붙어 있네." 그때 우리는 실컷 마음놓고 울었다. 지난 25년 동안 그랬듯이 서로에게 꼭 달라붙어서, 눈물이 서로의 티셔츠를 흠뻑 적실 때까지. 테레비전에서 나는 박수 소리 너머로 자동차 바퀴가 자갈 진입로를 밟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뒤이어 차고 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 계씨 아주머니가 집안으러 들어와서 싱크대 위에 자동차 열쇠를 툭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와 나는 부여잡은 손을 놓고 눈물을 닦았다. 아주머니가 의기양양하게 방안으로 들어왔다. 아빠가 뒤따라와 문턱에 멈춰 섰다. "나 TV땄어!"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하면서 엄마 옆에 벌렁 드러누웠다. 술을 꽤 마신듯했다. "아주머니, 바로 가서 주무셔야 할 것 같아요."아빠가 말했다. "고단하실 테니." 아주머니는 아빠의 말을 무시하고 엄마 손을 잡고는 자기 몸을 엄마 베개 쪽으로 바짝 붙였다. 내겐 두 분의 정수리밖에 안 보였다. 아주머니의 반백 머리카락은 벌써 2~3센티미터 자란 반면 엄마의 민머리는 뒤통수만 보여 내 시야에서 그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아주머니에게 한국말로 뭐라고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