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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사유상의 성립과 전개
원통형 의자위에 앉아 수직으로 내린 다리 위에 반대편 다리를 걸쳐 놓고 (半跏), 걸친 다리 쪽의 팔을 무릎에 괴고 검지와 중지를 뺨에 살짝 대고 있는 (思惟) 모습의 보살상을 반가사유상이라고 한다.
불교 수행의 기본 자세 중 하나인 跏趺坐에서 한쪽 다리를 지면을 딛고 있는 절반의 가부좌( 반가)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인간이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철학적 행위(사유)가 하나로 합쳐져 탄생하였다.
존엄하고 숭고한 神性과 친밀한 人間美가 하나의 작품에 융화되어 빚어낸 완벽한 종교적 예술품이다.
한국에는 그중 으뜸이라 할 수 있는 국보 78호와 83호 반가사유상이 있다.
반가사유상의 등장 : 간다라
반가사유상은 간다라 지역에서 처음 등장한다.
인도 마투라 지역에도 반가사유상이 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지만 많지 않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대기에서 기념비적인 이야기를 부조로 표현한 佛傳圖중 <출가결의>, < 수하관경>, <혼약>, < 항마성도>,< 사위성 神變> 이나 대형 설법도의 장면에서 반가사유를 한 모습의 상이 자주 보인다.
잠들어 있는 태자비옆에서 출가를 다짐하는 <출가결의>, 나무 아래에서 밭가는 농부의 모습을 바라보고 처음으로 종교적 명상에 들었다는 <수하관경>, 태자비를 맞이하는 <혼약> 장면에서, 세속과 탈속 사에에서 방황하고 고뇌하는 싯다르타 태자를 반가사유상으로 표현하였다.
마왕 파순의 방해를 물리치고 도를 깨우치는 <항마성도>의 장면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을 방해하는 마왕이 반가사유의 모습을 하고 있다.
속세와 해탈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을 마왕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동시에 ' 俗 ' 이 ' 聖 ' 에게 패배하여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안에 성스러움이 내재해 있고 언젠가는 發現함을 예견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사위성 신변>
또는 대형 설법도라고 보는 부조에는 여러 가지 신비로운 광경을 표현했는데, 설법하는 석가를 중심으로 상단 좌우 양쪽에 아치형 건물을 만들고 그 안에 반가사유상, 혹은 교각 보살상과 반가사유상을 대칭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사위성 신변 2~3세기 프랑스 국립기메 동양미술관 / 천불화현
아치형 건물안에 반가사유상을 새겨 넣어 아주 특별하게 대우하고 있음을 의도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데, 세속과 해탈세계의 매개자인 보살이 행한 사유는 부처의 본질과 佛世界의 심원함을 ' 사유' 라는 형식을 통해 함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특화된 반가사유상은 특정의 존명을 가진 보살이기보다는 보편화된 성스러운 보살로 여겨진다.
불전도의 여러 장면에 반가사유상은 세속과 탈속에서 고뇌하는 싯다르타 태자, 성도를 방해하는 마왕, 성스러운 보살 등 여러 의미를 지닌 다양한 존재로 등장한다.
간다라 지역에서 반가사유상은 불삼존상의 경우 좌우 협시보살로도 자주 등장한다.
양쪽 모두 반가사유상인 경우도 있으나, 교각보살상과 세트를 이루어 좌우 대칭으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양쪽 모두 반가사유상인 경우는 각각 蓮華樹와 梵經을 들고 있어 관음과 문수 ( 물론 연화수=관음, 범경= 문수)의 持物은 후대에 성립된 도상이다.
교각보살과 세트를 이루고 있는 경우는 미륵(교각보살)과 관음(반가사유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간다라에서 교각보살이 반드시 미륵이라는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중앙아시아, 중국 등지에서는 교각보살이 미륵으로 보편화되어 있으며, 삼존상에서 양 협시로 미륵과 관음이 세트를 이루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
더욱이 반가사유상이 오른손으로는 사유하는 자세를 취하고, 왼손에는 간다라에서 관음보살의 지물인 화만(꽃다발을 풍성하게 엮어서 만든 장식)을 들고 있고, 간다라 후기부터 등장하는 단독의 반가사유상 대부분도 연화 또는 화만을 들고 있어 반가사유상이 관음일 가능성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한쪽 다리는 수직으로 세우고 반대편 다리를 무릎 위에 얹은 반가라는 자세와 한쪽 손 (주로 오른손 )을 뺨에 대고 생각에 잠긴 사유라는 형식의 기원이 서양인지 동양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른 시기의 반가사유상이 간다라 지역에서 부터 나오고 있음은 분명하다.
반가 자세와 사유 모습을 하나로 결합하여 반가사유라는 독립된 형식으로 탄생한 불상은 간다라 지역에서 처음 창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싯다르타 태자를 비롯하여 마왕, 성스러운 보살, 관음보살 등 다양한 도상으로 반가사유상을 만들었는데, 특히 성도하기 전 싯다르타 태자의 일상생활을 묘사한 불전도에는 고뇌에 찬 인간의 모습으로, 예배 대상의 불삼존상에는 신격화된 관음보살로 등장하고 있다.
세속과 탈속사이에서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사유함을 표현할 때는 태자로, 사유를 거쳐 신의 단계로 들어갈 때는 관음보살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황수영 박사님 해설 추가>
이 반가사유상은 본디 천룡산 석굴(제 3굴)의 벽에 장엄되어 있던 부조상의 일부이다. 나무 아래에서 깊은 명상에 잠긴듯 고개를 깊이 숙인 모습이다. 본디 반가사유상이 싯달타 태자의 사유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이 부조도 그 하나의 예로 볼 수 있겠다.
(참고 ====
태자 사유상은 붓다의 전기 가운데 <수하관경>의 고사에서 유래한다고 보여진다.
곧 싯달타 태자가 인도의 옛 풍습에 따라 파종식에 참여하였을 때 보습에 찍혀 나온 벌레를 새가 날아와 잡아먹는 것을 보고 약육강식이란 현실세계으 고통을 직접 보고 크게 고뇌한다.
이에 나무 그늘에서 명상에 잠긴 태자는 시간가는 줄도 몰랐지만 해가 기울어도 나무 그늘은 싯달타 태자의 주변에만 드리우는 신비한 일이 벌어져 함께 온 모든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는 내용.)
반가사유상 또한 당시 유행하던 불상의 하나였기에 불상에서 구비할 두 가지 장엄구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
그것은 모든 불상은 그 위아래에 각기 광배와 대좌를 갖추어야 하는데 이 들 위아래의 장엄구는 오랜 세월이 지나면 서로 분리가 되기 쉬워서 자연 불상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므로 바위에 새겨진 마애상이외는 대좌나 광배를 구비하면서 오늘에 전래된 불상은 매우 드물다.
뒤에서 설명하려는 백제의 서산 像이나 고신라의 단석산 신선사 같은 오랜 반가상은 오늘까지 이동하지 않고 원위치에서 전래한 작품인데 모두 머리 뒤에는 둥근 광배를, 발 아래는 연꽃무늬 대좌를 장엄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같은 장엄구는 차치하더라도 특이한 자세를 보이며 사유의 모습을 보이는 반가사유 양식의 불상이 일찍이 인도나 중국에서는 우리에 앞서 유행힌 사실을 알 수 있다.
인도에 있어서는 그 서북방인 오늘의 파키스탄(간다라)을 중심으로 불상이 처음 발생하였을 당시에 이같은 양식의 조각이 보이고 있다.
이 지방은 일찍부터 서방의 희랍 그리고 로마 미술의 영향을 받아서 그 사이 불상을 만들지 않던 관습을 깨고 불상을 만듦으로서 인도 불상 조각의 시발을 이루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와 거의 때를 같이 하여 인도 내륙에서는 뉴델리 남방(마투라) 지방이 중심을 이루면서 또한 불상이 처음 조성되어서 많은 작품을 오늘에 전하고 있다.
반가사유상의 전개
중국에서는 5 - 6 세기에 걸쳐 집중적으로 반가사유상이 만들어졌다.
초기 5 세기에는 간다라와 마찬가지로 불전도 중에서 <수하관경>이나 <애마별리> 장면 등에서 고뇌하는 싯다르타 태자롤 나오는데 특히 <수하관경> 장면을 선호하였다.
간다라에서는 태자가 반가사유가 아닌 결가부좌에 선정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으나, 중국에서는 항상 나무 아래에서 반가사유를 하고 있는 태자를 표현하였다.
이로 인해 반가사유가 <수하관경>의 설화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싯다르타 태자가 사랑하는 말 칸타카와 이별하는 <애마별리> 장면에도 반가사유를 한 태자가 등장하는데, 간다라에는 보이지 않는 중국만의 특징이다.
북위(386 ~534)부터 북제(550~577)에 이르는 시기에 하북성을 중심으로 대리석제 불상이 다수 제작되었다. 일부 불상에는 ' 玉 '과 같은 명칭들이 표기되어 있어 대리석을 옥과 같아ㅣ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상은 1943년 취양현 수덕사지 출토품으로 투각 기법을 사용하여 높은 수준의 조각을 하였습니다.
6 세기 이후 반가사유상은 교각보살의 좌우협시상, 단독상, 무성한 나무(용화수)를 광배로 삼은 보살상 등으로 등장하였다. 교각보살을 좌우에서 협시하고 있는 반가사유상은 미륵인 교각보살을 補處하는 태자로 추정하고 있으나 명확한 증거는 없다.
단독의 반가사유상 대좌에 종종 '太子像' , 太子思惟像, 思惟像 등의 명문이 적혀 있는 경우가 있으나, 觀音이나 彌勒으로 적혀 있는 상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한편 두 마리 용이 나무기둥을 감싸고 , 무성한 나뭇잎으로 광배를 장식하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반가사유상이 미륵신앙과 더불어 6 세기 중엽부터 크게 유행하였다.
중국에서 반가사유상을 미륵보살로 추정하게 하는 도상으로, 미륵신앙을 주요 경전 중 하나인 <미륵하생경>에 의거하여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용화수 아래에서 중생 구제를 위해 사유하였다는 내용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간다라에서 다양한 도상으로 출발한 반가사유상은 중국으로 들어와 태자와 미륵보살로 정착되었다.
간다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초기에는 佛傳圖 등에서 인간적으로 고뇌하는 설화속의 싯다르타 태자로 표현하다가, 불교가 정착하고 발전해 나가면서 설화에서 벗어나 신앙의 대상인 태자나 태자사유의 독립상으로 만들었다.
이후 6 세기 중엽부터 반가사유상을 미륵보살로 만들기 시작했다.
북위, 동위, 북제로 급격하게 바뀌는 6 세기 중국의 정치 상황에서 히루속히 안정된 세상이 찾아오기를 열망하는 사회적 염원과 미륵 정토라는 이상향을 현실세계에서 베풀어 줄 수 있다는 종교적 믿음이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을 탄생시킨 것으로 보인다.
반가사유상의 완성 (한국)
한국에서 반가사유상은 6세기후반부터 7 세기 사이에 주로 만들어 졌다.
반가사유상중 단연 으뜸으로 손꼽히는 국보 78호, 83호 상을 비롯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봉화 북지리 출토 반가사유상 등 기념비적인 작품이 만들어 졌다.
현재 남아 있는 반가사유상의 수량은 많지 않지만 작품의 예술적인 완성도, 종교적으로 승화시켜 이루어 낸 숭고미, 스케일 등에서 반가사유상에 대한 애착이 인도나 중국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반가사유상이 어떤 연유로 만들어졌고 존명이 무엇인지는 문헌이나 명문자료 등 전하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반가사유상이 처음 전래되었을 때 중국의 불교 상황과 삼국시대의 정치 사회적 상황, 유행했던 불교신앙, 현존하는 작품의 완성도와 스케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상당수는 미륵보살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인도나 중국과는 달리 석가의 일대기를 묘사한 불전도가 남아 있지 않아 태자로 추정할 근거는 희박하다.
국보 83호 상을 비롯하여 봉화 북지리 출토 반가사유상, 경주 송화산 출토 석조 반가사유상 등 대부분의 大作들이 미륵신앙이 크게 유행하던 7 세기 전후 신라에서 만들어졌다는 점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삼국 통일의 원동력이 된 신라의 화랑제도가 화랑과 용화향도라는 명칭에서 미륵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이들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시기가 7 세기 전반으로 대작의 반가사유상을 만든 시기와 일치한다.
크기 20cm 내외의 반가사유상까지 모두 미륵보살로 만들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1 m내외의 큰 반가사유상들은 당시 사회 전반의 쇄신을 이끌었던 화랑제도와 불국토라는 이상국가를 이 땅에 실현시킬 것으로 믿었던 미륵신앙이 합쳐져 만들어낸 미룩보살이었으며, 특별한 지위를 부여 받아 별도의 독립된 공간에서 숭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는 7 세기 이후부터 8 세기까지 반가사유상이 만들어졌다.
서기 666년에 만든 野中寺의 반가사유상 대좌에 ' 弥勒像' 이라고 분명하게 존명을 밝히고 있어 이를 근거로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미륵보살로 간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반가사유상을 소유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찰이 쇼토쿠 태자 聖德太子와 관련이 있어 최근에는 일본의 반가사유상을 모두 미륵보살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으나, 달리 해석할 뚜렷한 근거가 부족하여 답보 상태이다.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곳이 한반도이기에 일본의 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 연구에 따라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
불교의 東漸과 더불어 중국으로 건너온 반가사유상은 출가를 결심하는 태자사유상과 용화수 아래에서 중생구제를 사유하는 미륵보살로 처움 만들어졌다.
우리나라로 건너와서는 당시 크게 성행한 미륵신앙과 결부되어 미륵보살상으로 완전히 정착하여 대형의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으로 만들어져 독립된 공간에서 숭배되었으며, 일본에까지 그대로 전해졌다.
세속의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시작한 반가사유상의 인간적 사유는 시간이 흐르고 불교가 동쪽으로 전래되면서 중생을 구제히고자 하는 신의 사유로 점점 바뀌어 갔다.
일본 광륭사 목조 반가사유상
국보 제 83호 금동 반가사유상과 아주 흡사하여 쌍둥이 상이라고까지 일컬어지고 있는 목조 반가사유상이 일본 교토 光隆寺에 전한고 있다.
금동과 목조라는 재질의 차이와 광륭사의 상이 약간 큰 점을 제외하고는 언뜻 봐서는 쉽게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닮아 있다.
국보 83호 금동 반가사유상
광륭사 목조 반가사유상
혹자는 같은 조각가에 의해, 같은 工房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광륭사의 조각상에 사용된 나무는 赤松으로 밣혀졌다.
고대 일본에서 목조불상을 만들 때 사용한 나무는 주로 녹나무와 비자목을 많이 사용했으며. 시대를 내려오면서 편백나무를 사용하기도 헸으나 , 적송은 사용하지 않았다.
소나무는 크게 표면이 붉은 빛을 띠며서 내륙에서 주로 서삭하는 陸松과 검은 빛을 띠고 주로 해안가에서 자라는 海松으로 구분되는데 적송은 육송에 해당되며 한반도와 일본 열도가 주 서식지이다.
한반도에서는 육송중에서도 최상급의 목재를 춘양목, 금강송 등으로 불렀고 , 옛 신라의 영토였던 강원도와 경상도 북부 일대에 분포하고 있다.
육송은 옹이가 있고 벌목후 송진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조각하기 매우 까다로워 일본에서는 목조 불상의 재료로 사용하지 않았으며, 광륭사의 조각상이 일본에 남아있는 고대 목조불상중에서는 유일하게 적송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일본에서 목조불상을 제작하는 방법으로는 하나의 통나무를 이용하여 머리에서 발끝까지 조각하는 법 (一木造) 과 머리와 몸통을 분리하고 목재 여러 개를 덧붙여 조각하는 기법(寄木造)이 사용되었다.
일목조법은 立像에만 적용하였고 , 반가사유상이나 좌상은 여러 나무를 덧붙여 조각하는 기법을 사용하였는데, 광륭사의 상은 반가사유상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통나무를 깎아서 만드는 일목조법으로 만들었다.
또 일본의 일목조법과는 다르게 머리 뒷 부분, 등 중앙, 왼쪽 다리 정강이 부분에 직사각형의 홈을 파고 들어가 일정한 두께를 유지하며 내부에 있는 나무를 완전히 제거한 다음, 나무판으로 막았다.
불상의 내부 모습만을 보면 목조불상보다는 금동불 특히 우리나라 국보 제 78호의 금동반가사유상의 내부와 아주 흡사하다.
국보 제 83호 상과 흡사한 외모때문에 20 세기 초부터 제기되었던 광륭사 반가사유상의 우리나라 제작설은 나무와 제작 방법이 동시대 일본 불상과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이 밝혀지면서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서기 623년에 신라에서 불상을 보내와서 하타데라(현 광륭사의 전신 )에 안치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한반도의 신라 제작설에 힘을 실어 주었다.
원래는 나무로 된 불상 표면에 옻칠을 두껍게 입히고 그 위에 금박으로 도금하여 완성하였던 것이다.
두꺼운 옻칠로 인해 얼굴에는 원만함이 , 옷주름엔 볼륨감이 지금보다 훨씬 뛰어났을 것이다.
시대가 흐르면서 금박한 옻칠이 완전히 박락되고 벌레에 의해 불상 표면이 심하게 손상되어 있던 것을 19세기말 목재 수복 전문가가 벌레 구멍을 막고 필요한 부분에는 나뭇결까지 새롭게 만들어 넣는 등 깨끗하게 수리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광륭사의 상이 쓰고 있는 보관은 세 개의 반원을 이어붙인 三面冠으로 표면에 아무 장식도 하지 않아 매우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주는데, 이 독특한 형태의 보관은 중국을 비롯하여 다른 나라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오직 신라 지역에서만 발견된 반가사유상만 착용하고 있다.
그리고 옛 신라 지역인 경상도 북부 일대가 주산지인 육송을 사용하고, 신라에서 전해졌다는 < 일본서기>의 기록과 더불어 신라 제작설에 힘을 실어주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 사유 >>>>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 사유 ' 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 중 하나였다.
' 사유 '는 인간의 내면 세계를 성찰하고 본질을 깨닫게 하는 시발점이며, 평범한 인간을 신의 경지로 올려주는 최선의 방편이기도 하다.
안으로는 내면의 고통을 치유하고, 밖으로는 해탈을 통해 신으로 탈바꿈시킨다.
어쩌면 사유는 인간과 신이 동시에 실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유가 인간과 신의 접경에 있는 半跏坐와 만나 완벽하게 예술품으로 승화되어 탄생한 것이 바로
반가사유상이다.
{{{{ 인도, 중국, 한국, 일본의 반가사유상}}}}
연꽃을 든 보살
간다라의 사유상은 동아시아의 반가사유상처럼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에 올린 자세로 정형화되어 있지는 않다.
일반적인 불입상, 불좌상의 딱딱한 자세와는 달리 자연스럽게 풀어진 모습이며, 다리의 자세도 다양하다.
두 다리를 모두 내리거나 , 한쪽 다리만 약간 올리거나, 또는 발목 부분을 교차하며, 때로는 동아시아의 반가사유상처럼 한쪽 다리를 다른 무릎위에 올려놓고 있다.
독립상으로 만들어 질 때 사유상은 연꽃을 들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관음보살을 나타낸 것으로 추정한다.
이 보살상은 머리와 몸이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오른손을 얼굴 가까이 올린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을 표현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리는 발목 부분에서' X' 자로 교차하고, 아래로 내린 왼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다.
상반신에는 짧고 긴 여러 개의 목걸이를 걸쳤고, 왼쪽 어깨와 팔에는 숄을 둘렀다.
얼굴은 좌우 대칭이 아니며, 백호도 미간 중심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머리에 쓴 터번은 구슬고 꽃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정면에는 긴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이 있다. 좌우로 길게 늘어지는 귀걸이도 매우 장식적으로, 끝 부분 구슬을 엮은 줄을 물고 있는 사자 머리 형상이 달려 있다.
대좌는 연꽃을 엎어 놓은 형태로, 길고 큼직하게 표현된 연꽃잎이 3 단의 층을 이룬다.
대좌 양측에는 승려가 합장한 채 가운데를 향해 앉아 있다.
반가사유상
산동 장저우 용흥사지에서 발견된 북제 시대(550~571) 반가사유상
지금까지 알려진 중국 산동 지역의 반가사유상은 20 점 가량으로 보싱현에서 출토된 소형 금동불 한 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단독으로 조성된 석조상이다.
산동 지역에서 발견된 남북조 - 唐代의 석조상이 2.000 여 점 이상인 것을 감안할 때 반가사유상의 제작이 아주 성행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동시대 불교조각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던 하북 수덕사지 출토품 가운데 반가사유상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가장 이른 시기의 사례는 린치우 明道寺址에서 출토된 북위 후기- 동위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滑錫製 상이다.
명문에 의하면 연대와 존명을 모두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상은 6점으로 모두 북제 시대의 작례이다.
상의 존명은 ' 玉石像' , ' 白玉石像' , ' 태자 O 유상 太子OO 惟像' , 思惟像 ' 등이다.
이 상은 용흥사지에서 발견된 3 점의 사유상 가운데 하나로 비교적 대형의 상이다.
광배와 오른 팔 일부가 결실된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원형으로 넓은 어깨와 입체적인 얼굴, 천의를 걸치지 않은 상반신과 간략한 군의 표현에서 북제 시대 조각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동위 시대 이후의 사유상들이 일반적으로 화려하고 풍부한 옷주름을 조각하는 것과는 달리 몇 줄의 융기선만으로 주름을 표현하고 끝단에는 연주문을 두른 장식문양을 그렸다.
산동 지역에서 발견된 반가사유상 가운데 70cm 이상의 대작이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은 주지할 만한 점이다. 칭저우 시 인근 린치우 현 명도사지와 린치우 현 城址에서 출토된 두 점의 사유상은 모두 하반신만 남아있지만 높이가 41~ 65cm에 달한다.
특히 칭저우 용흥사지에서 이 상과 함께 출토된 또 한 점의 사유상은 단독으로 조성된 대형의 상이라는 점, 측면에 요패수식이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삼국시대 사유상의 원류로 주목되기도 하였다.
' 태자' 라고 불린 반가사유상
'태자'라고 불린 반가사유상 하단의 글
중국 보싱 현은 칭저우(靑州市)에서 서북쪽으로 120 km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남북조 시대에는 칭저우의 강역에 속하였다.
이 지역 역시 불교가 매우 성행했던 지역으로 龍華寺, 鄕義寺, 般若寺, 高昌寺 등의 사원지가 확인되었다.
용화사지와 향의사지에서는 150 여 점의 석불과 170 여 점의 금동불이 집중적으 출토되었다.
이 상은 장식을 배제한 나신의 상반신에 간결한 신체 표현을 보이는 전형적인 북제 시대의 반가사유상으로, 두 팔과 머리가 결실되고 채색도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자연스러운 자세와 신체 비례, 입체적인 裙衣의 표현 등 수준 높은 조각수법을 보여준다.
명문에 의하면 이 상은 562년에 조성된 太子像이다.
상을 발원한 高業부부는 평신도로 추정된다.
산동 지역 在銘 사유상의 조상주는 대부분 평민이나 승려 계층으로 대개의 願目은 죽은 가족의 성불이나 西方妙樂國土 왕생 등 망자 追善의 내용이 많다. 이처럼 주된 발원 계층이 평민이나 승려인 점은 용화사지에서 출토된 금동불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이는현상으로, 상의 규모와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칭저우 지역의 대형 석상들이 유력가문 구성원들에 의해서 조성된 것과는 구별되는 흥미로운 현상이다.
삼국 시대 반가사유상
고구려 7세기 전반, 금동불
사유의 자세를 나타내는 오른팔의 아랫부분이 결실되었고, 보관에는 별도의 장식을 부착했던 흔적이 남아 있는 삼국시대의 반가사유상이다.
갸날프게 표현한 상체에 비해 하체는 대좌밑으로 내려갈수록 비대해서 육중한 느낌을 주는데, 이 부분은 구리의 두께도 두껍고 치맛자락과 옆구리에서 늘어뜨린 허리띠 장식(腰佩)도 깊게 조각되어 있다.
연화대좌와 족좌가 함께 조각된 점은 금동제 반가사유상에서는 처음 나타나는 형식이다.
원을 사등분한 보관의 형태는 국보 제 83호 반가사유상과 傳 황룡사지 출토 반가사유상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 옛 신라지역 반가사유상의 특징이기도 하다. 전체를 하나로 주조하였는데, 상반신 내부는 동으로 꽉 차 있으며 대좌 아랫부분은 비어 있다.
네모난 얼굴과 가늘고 긴 신체, 원통형의 팔, 도식적인 옷주름 등에서 중국 隨 양식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보 제 78호 반가사유상
이 반가사유상은 국보 제 78호로 지정되어 있어서 일반적으로 ' 국보 78호상' 이라고 부르고 있다.
머리에 쓴 보관의 특이한 장식문양을 강조하여 '탑형보관 반가사유상' 또는 ' 일월식 삼산관日月籂 三山冠 반가사유상'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비슷한 크기의 또 다른 반가사유상인 국보 제 83호 상과 함께 삼국시대 불교 조각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예술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본에 전하는 목조로 된 비슷한크기의 반가사유상인 교토 廣隆寺의 상( 신라 7 세기), 나라(苶良) 中宮寺의 상 (일본 아스카 7 세기) 을 합쳐서 세계 4 대 반가사유상이라고도 일컫는다.
출토 위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故 황수영 박사는 일제 강점기 국내 고 미술품의 유통상황을 잘 알고 있던 일본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경북 북부지역인 영주, 안동 일대의 어느 사찰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 지역은 신라에서 불교가 가장 먼저 전래된 지역으로, 현존하는 반가사유상 중 가장 큰 석조 반가사유상을 비롯하여 소형의 여러 금동 반가사유상이 여러 점 발견된 곳이다.
78호 반가사유상은 화려한 보관, 온화한 얼굴에 맺혀 있는 엷은 미소, 갸날픈 몸매, 양팔에서 날렵하게 위로 향한 천의자락, 單板의 연화문 足座 등에서 중국 東魏의 불상 양식을 볼 수 있다.
특히 화려한 보관의 장식은 해, 초승달, 새의 날개. 식물의 꽃잎 등 자연의 사물이나 동식물을 단순화시켜 문양으로 만든 것이다.
이 문양들은 서아시아 아나톨리아 지역의 아시리아나 이란 고원의 페르시아 제국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활발한 동서 문화교류를 통애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과 한국, 일본에 까지 전해졌다.
주로 지배자들의 절대적인 권위와 인간을 매개하는 성스러운 존재임을 상징하여 통치자의 왕관에 장식되었으며, 불교 미술에 차용되어 보살의 고귀함고 위엄을 나타내는 보관 장식으로 사용되었다.
현재 가슴 위쪽부터 머리 끝 부분까지. 그리고 양팔의 내부에는사각형 철심이 들어 있고 內形土로 채워져 있다.
상의 두께가 2 mm 내외로 크기에 비하여 매우 얇은 편이고, 일부분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일정한 두께를 유지하고 있다.
매우 복잡하고 정교하게 주조되었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失蠟鑄造法 lost -wax casting 만이 아니라 分割鑄造法, 원형깎기법 등 다양한 기술이 복합적으로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보 제 83호 반가사유상
이 반가사유상은 국보 제 83호로 지정되어 있어서 통상 '국보 83호 상' 이라고 한다.
머리에 세 개의 반원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보관을 쓰고 있어서 ' 三山冠 반가사유상' 혹은 옛 덕수궁미술관의 소장품이었음을 상기하여 ' 덕수궁 반가사유상 ' 으로 불리기도 한다.
비슷한 크기의 국보 78상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조각을 대표하는 최고의 예술품이다.
일본 교토 廣隆寺에 있는 목조 반가사유상과 매우 흡사하여 일찍부터 서로 자주 비교 논의되어 왔다.
1912년에 李王家 박물관이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일본인 고미술상 가지야마 요시히데에게 당시엔 거금인 2600원을 주고 구입하였는데 출토 위치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에서 문화재 조사 활동을 하였던 일본 도쿄대 교수 세키노 다다시는 경주 오릉 부근의 절터에서 나왔다고만 언급하였고 구체적인 증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황수영 박사는 경주 박물관장을 지낸 오사카 긴타로와 경주 지역의 사찰의 주지 및 인근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경주 남산 서쪽 선방사지 근처의 절터에서 나왔다고 추정하였다.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은 세 개의 반원을 이어붙인 三面冠형식인데, 표면에 어떤 장식도 하지 않아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인도나 중국 등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형식의 보관이며,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 반가사유상, 황룡사지 출토 금동 반가사유상 머리편, 경주 성건동 출토 금동반가사유상 등 옛 신라 지역의 반가사유상에서만 보인다.
갸름한 계란형 얼굴과 童顔의 미소, 치장하지 않은 단순한 형태에서 중국 北齊 불상 양식이 엿보인다.
전해져 내려오는 출토 위치, 신라 지역의 반가사유상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형태의 형식의 삼면보판, 623년 경에 제작된 일본 교류사 목조 반가사유상과의 친연성 등을 고려해볼 때 7 세기 전반 신라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큰 반가사유상
봉화군 북지리 반가사유상
1963년 11월 봉화 북지리의 마애여래좌상 하반부를 발굴조사중 약 1 km 떨어진 남쪽 구릉에서 발견되었다. 이듬해 1 월에 반가사유상을 경북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기던 과정에서 연화형을 足座를 추가로 수습하였다.
경북대학교 박물관은 1966년 6월 반가사유상의 발견 지점에 대한 부분적인 발굴조사을 실시한 결과 반가사유상의 봉인처로 추정되는 자연석의 불단을 발견하였다, 주변에서는 당시 사찰의 존재를 입증하는 ' 大寺', ' 金堂瓦 ', ' 天德三年勿也 ' 등이 새겨진 명문 기와편이 나왔다.
현재 상반신은 결손되었으나 잔존 높이가 약 170cm 에 달하는 것을 볼 때, 전체 규모는 대략 300cm에 이르는 동양 최대의 반가사유상이라 할 수 있다.
거대한 크기와 함께 국보 제 83호 반가사유상과의 조형적인 유사성 또한 주목되고 있다.
전반적인 자세와 대좌위를 덮은 자연스러운 표현의 옷주름 등은 83호 반가상과 유사하나 허리가 과장되게 가는 점, 높이 치켜든 오른쪽 무릎, 요패수식의 표현에는 차이가 있으며 옷주름의 표현이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반가사유상이 발견된 봉화와 인근 영주 등지는 신라의 북방 경계 지역으로 마애불 등 거대한 불상이 제작된 곳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일본으로 건너간 반가사유상
도쿄 국립박물관의 호류사 보물관(법隆寺보물관)에는 ' 48 體佛 ' 로 통칭되는 작은 금동불상들이 보관되어 있다. 이 금동불상들은 헤이지(明治) 11년 (1878) 호류사에서 황실에 헌납한 300 여건의 '호류사 헌납보물 '의 일부로, 일본 초기 불교조각사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작픔들로 평가된다.
그 중 이 반가사유상은 보관의 뒷면부터 머리 뒷부분 위쪽을 제외한 상 전체에 도금이 매우 잘 남아 광채를 띠고, 눈동자와 콧수염, 턱수염은 검은 먹으로 그려 넣었다.
상반신은 내부가 銅으로 꽉 찬 통주조이고, 대좌 아래의 내부는 비어 있는 中空式이다.
오른손 엄지 손가락 부근은 별도로 주조한 것이다.
갸름한 얼굴에 가는 눈과 긴 코, 강하게 위로 올라간 입꼬리는 일본 아스카 조각의 주류양식과는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
호류사 헌납보물의 48체불 가운데 143호 금동삼존불, 196호 갑인년 왕연손명王延孫銘 금동광배 등과 함께 한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상 가운데 하나이다.
호류사 반가상
###참고 사항###
금동반가사유상은 일반적으로 오른발을 왼쪽 허벅지에 올리고 오른손을 뺨에 댄 채 명상하는 자세(반가사유상)를 청동(구리와 주석 등의 합금)으로 제작한 뒤 도금한 불상을 말한다. 반가사유상은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양국 금동반가상의 바탕금속 성분을 분석한 결과, 주요 차이점은 주석과 납의 함유량으로 나타났다. 삼국시대 불상은 주석이나 납 함유량이 대부분 5% 이상이지만 일본 불상은 3% 이하였다. 주석, 납 함유량으로 제작지를 추정할 수 있는 과학적 근거를 마련한 셈이다.
또 합금 비율은 불상의 세부 형태에도 영향을 미쳤다. 주석이나 납 함유량이 높은 한국에서는 밀랍 성형단계에서 세부 문양을 새겼지만 일본은 주조 이후에 새긴 사례가 많다.
중앙박물관 권강미 학예사는 “양국 불상은 금속 성분뿐 아니라 전체적인 비례와 대좌 형태, 채색 흔적에서도 일부 차이를 보였다”며 “제작방식은 밀랍형 주조로 다르지 않았다”고 밝혔다. 삼국시대 불상은 상반신이 가늘고 길며 대좌 폭이 좁은 반면 하쿠호시대 불상은 상반신이 짧고 대좌는 높으며 폭도 상대적으로 넓었다. 일본 불상은 입술 등에 채색 흔적이 남은 경우가 있지만, 삼국시대 불상은 채색 가능성은 높지만 그 흔적이 남은 경우는 거의 없어 채색 여부가 명확하지 않다. 한국 불상은 대부분 출토품인 데 비해 일본은 전세품이어서 채색 흔적이 더 잘 남았을 수도 있다고 분석한다.
이번 조사에서는 기존 양식분석에 따라 삼국시대 반가상으로 여겨져온 불상들이 실제 과학적 분석에서도 한국적 특성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백제 작품으로 여겨지며 주석 함량이 11.7%에 이르는 나가노 간쇼인(觀松院) 불상을 비롯해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한 나치의 경총(經塚) 출토 불상이 대표적이다. 또 호류사 헌납보물 158호상, 나가사키 조린사 불상, 나라 고노사 불상, 국보 83호와 닮은 나가사키 일본 이십육성인기념관 불상, 도쿄예술대 소장 반가상 등도 한국계 특성을 나타냈다.
새로운 불상들이 한국계로 추정되기도 했다. 오사카대 후지오카 유타카 교수는 묘덴사(妙傳寺), 게이운사(慶雲寺), 개인소장 2구 등도 삼국시대 작품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보고서에 수록한 논문 ‘일본에 전해진 삼국시대 반가사유상-교토 묘덴사 상과 효고 게이운사 상을 중심으로’에서 “일본에 현존하는 금동불 가운데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은 20여건으로 여겨진다”며 “한반도에서 전래된 불상은 목조불, 석불도 있었지만 금동불이 대다수일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의 국보 83호인 금동반가유상과 흡사한 것으로 유명한 교토 고류사(廣隆寺) 목조반가사유상은 한국산 적송으로 제작된 사실 등으로 일찍부터 신라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아스카의 반가상
아스카 반가상
이 상은 왼쪽 다리는 내려 직각으로 세우고 그 위에 오른쪽 다리를 걸쳐놓은 반가 자세를 취하였으나 오른손이 사유의 모습이 아닌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여 올리고 있다.
이러한 자세는 헤이안平安시대(794~1192)후기의 불교 도상집인 별존잡기別尊雜記에 수록된 시텐노사 (四天王寺) 구세관음상(求世觀音像)의 도상과 일치한다.
머리 뒷 부분에 광배가 소실된 것을 제외하면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는 상으로 , 머리 카락에는 군청색, 보관 및 양 어깨의 화염보주 뒷면과 입술에는 붉은 칠을 한 흔적이 있고, 눈썹과 눈의 윤곽 및 눈동자, 콧수염, 턱수염은 먹으로 그려 넣었다.
전체적으로 중후한 분위기이나 커다란 삼산관, 어깨 위로 2 개의 돌기가 솟은 수발垂髮, 양 어깨에 화염이 있는 보주를 표현한 점등은 스이코(推古) 31년 (623) 도리불사(止利佛寺)가 제작한 호류사 금당 석가 삼존상의 양 헙시사이나 호류사 大寶藏殿의 보살입상과 유사하다.
제작기법에 있어 머리 부분까지 안틀(中型)을 사용하여 정수리에서 철심을 뽑은 흔적이 확인되는 점 또한 도리파(止利派) 금동불의 특징중 하나다.
전체적인 균형과 세부표현이 훌륭한 아스카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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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서............
( 황수영 박사님의 ' 반가사유상' 에서...............)
인도 간다라와 마투라에서 조성된 불상 조각에는 반가사유상이 들어 있어서 이들이 다시 중앙 아시아를 지나서 마침내 중국 땅에 들어와 널리 남북 각지로 퍼져 나갔다.
좌측은 간다라 석조 보살 반가사유상 = 간다라 지방에서 조성된 석조 반가사유상이다. 광배등에 조금의 손상이 있으나 거의 원형을 보여 주고 있어서 마투라 출토 반가사유상과 더불어 인도의 반가사유상의 원류를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우측의 석조 보살은 마투라 양식의 반가사유상으로 보관속의 화불이 매우 이채롭다.
이같은 반가사유상은 처음 인도에서는 太子상으로 조성된 듯 하다.
석가여래 부처님이 처음 왕궁을 빠져 나와 속세로 들어가 수도를 하면서 깊은 사유에 잠겼던 당시의 모습이라고 한다. 그러나 모두 그런 것은 아니며 三尊 조각 가운데는 좌우대칭으로 반가사유상을 조각한 유례도 보이고 있다.
이같은 인도의 방식은 중국에 들어와 처음에는 역시 태자상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점차 시대가 흐름에 따라 이같은 불상이 龍樹菩薩이라고도 불리게 되었고 그 뒤 우리 한반도 삼국에 들어와서는 당시 크게 유행하던 미륵 신앙을 배경으로 그 보살상으로 조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반가사유상은 한반도에 있어서는 태자상으로 조성된 흔적은 아예 보이짖도 않으며 삼국에서의 유품은 모두 미륵보살상으로 신앙을 받던 것을 보인다.
그것도 오랜 시간이 아니라 6 세기에서 7 세기에 걸쳐 , 국내에서는 삼국의 통일전쟁이 한참 가열하던 시대를 지나 삼국이 통일된 초기까지 대략 유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삼국을 통하여 수용 경로의 차별은 있었다 하더라도 그 시기는 비슷하였다고 생각되므로 이 시기에 조성된 미륵보살상은 반가사유 양식이 많이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삼국 가운데 최후의 승리를 거두어 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신라에서는 다른 두 나라보다 이같은 반가사유상이 크게 유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금세기 들어서 먼저 일본 사람이 수집한 것과 해방 뒤 우리 손에 의하여 전국 각지에서 새로 조사된 것, 그리고 기존 작품에 대한 우리의 연구를 통하여 밝혀진 사실들을 종합해서 그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까닭은 불교에서 어떤 불상이 많이 만들어지고 또한 우수한 작품이 만들어지는가 하는 문제는 무엇봇다도 그 불상에 대한 신앙의 강도 그리고 기술의 연마에 달렸기 때문이다.
예배와 믿음이 없는 곳에 불상이 만들어질 수가 없으며 시대의 간절한 염원이 따르지 않는 곳에 믿음과 예배의 대상인 불상이 만들어질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불상 조상의 유행과 그 기술의 연마는 모두 시대의 믿음과 국민의 소원에 정확하게 비례하고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특히 종교 미술의 각 부분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미륵 신앙이 크게 유행하던 삼국시대에 있어서 그 보살상이 반가사유 양식으로 이루어져서 삼국 제일의 우수한 불상이 이 시대에 만들어진 사실이나 또는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7,8 세기에 걸친 아미타불상의 신앙이 마침내 그 유행의 정점인 8 세기 중엽에 이르러 경주 토함산에 석굴암 부처님을 조성한 사실과도 대비할 만하다.
이들 삼국의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신라 국보 금동상 = 제 78호, 83 호 )과 백제의 서산 마애불상은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의 미술사에서도 그 자리를 나란히 하는 걸작품임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이전 파리에서 ' 한국미술전시회 ' 가 열렸을 당시 많은 파리의 시민과 관광객이 이 곳을 찾았는데.......
국보 제 83호 금동 반가사유상이 가장 큰 주목을 받았다.
즉 파리 전시회에서 금동 반가사유상이 성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것이었다.
그러면 세계 미술의 걸작인 이 작품에서 파리 시민들은 과연 어떠한 인상을 받았을까?
아마 추측건대 로댕의 대표작인 ' 생각하는 사람 '을 연상하였을 것이다.
두 작품의 시대 차이는 거의 1300년에 이르는데, 우리의 반가사유상과 로댕의 작품을 비교해 보면 하나는 불교의 불상이지만 다른 하나는 종교적 제품은 아니다.
곧 우리의 것은 예배의 대상으로 전래된 것이고, 서양의 것은 분명히 예배의 대상은 아니다.
우리 고대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조각가의 작품이 천 수백년을 지나서 이방인의 놀라움과 공감을 한몸에 모았다면 그 사실은 결코 소홀히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고대 미술에 자긍심을 갖고 새로운 성찰이 따라야 할 것이다.
반가사유상뿐만 아니라 석굴암도 세계에서 아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하고 새로운 방향에서위 우리의 고대 미술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삼국시대의 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은 다른 불상과 마찬가지로 古代에 있어서는 얻기 쉬운 재료를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면 흙 같은 것인데 이같은 흙과 나무는 오늘에 있어서는 거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고 오직 하나 나무 (赤松)의 유례가 알려졌으나 그것은 국내가 아니고 일본에서 전하고 있다.
또 흙으로 조성된 작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이 같은 흙과 나무를 제외하고는 두 가지 재료가 많이 사용되었다.
그 하나는 금속이요 다른 하나는 돌이다.
오늘날 전래하는 삼국의 반가사유상은 모두가 이 두 가지 재료로써 만들어진 것뿐이다.
지금까지 전래하는 반가사유상 양식의 유품은 지역별로 그 분포상을 표시할 수 있다. 다만 작은 불상은 쉽게 이동함으로써 오랜 전래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쉽게 옮겨갔다.
특히 금세기 초에는 우리나라에 건너온 日本상인들이 앞을 다투어 고물을 탐색하여 서울에서 또한 해외에서 매매한 사실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고대의 미술품은 모두 그 전래 장소나 그에 따른 자료가 있으므로 그 작품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는 될수록 많은 관계 자료가 그 작품에 따라야만 한다.
그 유품이 중요하면 할수록 그 작품이 지녔던 여러 가지 자료가 함께 있어야 한다.
각 개의 호적이 확실하게 그 작품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비단 불상에 국한되는것은 아니며 미술사에서의 올바른 고찰을 위해서는 작품이 중요할수록 이같은 자료가 꼭 따라야만 한다.
먼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반가사유상은 시대로 보아 삼국 말에서 통일신라초기인 서기 6 , 7 세기에 유행하였으며 다음에 지역적인 구분은 北의 고구려, 西의 백제, 東南部의 신라 등 셋으로 구분을 두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삼국의 확실한 반가사유상들을 들어서 연구해보면........................
고구려의 반가사유상
해방 전까지는 고구려시대에는 반가사유상이 있었다고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북쪽에서 금동 반가사유상 1 구가 서울로 피난하여 왔다.
이 반가상은 평양 시내 平川里에서 출토된 것이 틀림없는데 그 당시 평양에서 고물상을 경영하던 김동현씨가 매입하여 南下한 것이다.
평천리 출토 금동 반가사유상
평천리에는 고구려 시대의 큰 절터가 있었는데 해방직전에 병기창 공사가 있아 이때 우연히 출토되었다고 전한다. 이 작품은 오른 손의 일부가 절단되는 큰 손상을 입었으나 다른 부분은 잘 남아 있어 원형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머리에는 보관을 쓴 흔적이 있고, 앞뒤에는 흘러내린衣文의 조각이 뚜렷하다.
그리고 몸의 좌우에는 긴 띠가 흘러내려 초기 반가상의 양식을 전하고 있다.
높이는 17.5 cm인데 아직도 도금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금동불은 옛 고구려 영토인 평양 평천리에서 출토되었다. 출토지를 근거로 7세기 전반경에 만들어진 고구려 불상임을 알 수 있는데, 고구려 반가사유상으로 출토지가 확실한 유일한 예이다. 따라서 이 상은 고구려 반가사유상 연구의 기준이 되고 있으며, 7세기 초 이전에 백제나 신라의 경우처럼 고구려에서도 반가사유상이 성행하였을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 네모진 얼굴과 가늘고 긴 신체, 원통형의 팔, 도식적인 옷주름 등에서 중국의 수(隋) 양식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가좌의 자세와 발대좌[족좌(足座)]의 형식 등은 일반적인 반가사유상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원을 사등분한 보관 형태는 국보 83호 반가사유상 보관의 원형이 되고 있어 주목된다. 신체는 가냘프게 표현된 상체에 비해 아랫부분이 비대해 육중한 느낌을 주는데, 이 부분은 구리의 두께도 두껍고 치맛자락과 허리띠 장식도 깊게 조각되어 있다.
단면을 보면 백제와 신라의 반가사유상은 타원형 내지는 모를 죽인 단정한 형태를 이루지만 이 불상에서는 일정한 형태가 나타나지 않는다. 연꽃대좌와 족좌가 함께 조각된 것은 금동제의 반가사유상에서는 처음 나타나는 형식이며, 이 불상의 경우 족좌 앞쪽이 심하게 돌출되었다.
우리는 이 금동불을 통해서 단편적이나마 고구려에서도 독특한 양식의 반가사유상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평천리 출토 금동반가사유상 (한국 미의 재발견 - 불교 조각, 2003. 12. 31., 강우방, 곽동석, 민병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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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반가사유상
부여 부소산 출토 납석제 반가사유상
부여 부소산 출토 반가사유상
===>허리가 잘려 상체는 떨어져 나가고 하반신만 남아있다.
그러나 왼쪽 무릎에 얹은 반가한 오른발과 그 발목을 잡고 있는 왼손 그리고 오른쪽 무릎에 남아있는 흔적등으로 미루어 반가사유상임을 알 수 있다.
아래쪽 끝부분에 타원형의 돌출부가 있고 내려뜨린 왼쪽 다리 밑부분 역시 구멍이 나 있어 이 상을 받치는 대좌 부분이 따로 만들어 졌음을 짐작케 한다.(국립 부여 박물관 소장)
백제의 반가사유상은 고구려 작품과 때를 같이하여 1940년대 초에 부여 부소산의 건물터에서 발견되었는데 고구려 금동상과는 달리 납석으로 조성되었으며 상반신을 잃은 하반신 뿐이다.
이 작품의 양식은 허리 이하에서 잘 보이는데 왼손이 오른쪽 발목 위에 남아 있어 반가한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상과 같이 앞뒤에 의문이 새겨져 있고 좌우 양측에 똑바로 내려지 긴 띠가 새겨져 있다. 현재의 높이는 13.3cm 이다.
여기서 잠깐 참고해야 할 것은 백제가 그 말기인 6 세기 후반에 미륵상을 일본에 전했다는 일본의 기록이다.
이 기록의 石彌勒은 아마도 부소산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크기의 작품으로 반가사유상 양식의 미륵보살상으로 보인다.
이같은 납석제 반가사유상은 해방뒤에도 부여 읍내에서 1 구가 출토되어 현재 국립 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이같은 납석제 반가상이 부여를 중심으로 유행하였고, 일본에도 건너가 영향을 끼쳤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남은 것이 모두 하반신뿐인 사실은 애석하다.
서산 마애 반가사유상
이 삼존불이 위치한 지리적 위치는 태안반도에서 백제의 도읍지인 부여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어서 중국과 빈번한 교통이 이어지던 교통로인 까닭에 화려한 문화의 꽃이 피었던 곳이다. 이 삼존불은 구도상에서도 매우 다른 특색을 보여주고 있는데, 여래 입상을 가운데 두고 왼쪽엔 반가사유상이, 오른쪽에는 보살 입상이 배치 되어 있다. 특히 여래 왼쪽의 반가사유상은 신라 지역의 단석산 반가사유상과 더불어 대좌와 광배를 모두 갖추고 있어서 우리나라 반가사유상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백제 반가사유상의 최대 작품은 해방 뒤 1956년 부여 서북방인 서산에서 발견되었다.
그것이 바로 서산 마애 삼존불인데, 그 가운데 협시보살 1 구가 반가사유상 양식을 보이고 있었다.
이 반가상은 다행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잘 보존되어서 광배나 연화대좌를 갖추고 있다.
큰 암석면에 조각되었으므로 아마도 백제의 작품으로는 제작 이래 가장 자기의 위치를 오늘에 지켜온 가장 소중한 백제의 반가상이 틀림없다.
머리에는 삼면 보관이 있어 꽃무늬를 장식하였고 둥근 얼굴에는 웃음을 머금고 있다.
목걸이가 있으며, 상반신은 나신인데 하반신에 이르러 의문 표시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가장 아래에는 둥근 單瓣 연꽃이 대좌를 이루고 있다. 이 상은 삼존 가운데 협시 보살로 조각되었는데, 다른 본존과 보살상은 立像이어서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백제의 반가상으로서 이 서산 마애상이 해방 뒤 새로이 발견되어 국민의 주목을 받아서 오늘날 국보 제 84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 곳의 삼존불은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삼국시대 백제에서 유행하던 세 종류의 불, 보살을 모두 한자리에 조각한 느낌을 준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서산 마애불은 과거 제화갈라 보살, 현재 석가모니불, 미래 미륵불(반가사유상) 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종범 스님은 법화경의 견보탑품의 도상이라고 주장하고 계십니다.)
김제 대목리 銅板 반가사유상
김제 대목리 출토 판불중 반가사유상
그리고 백제의 작품으로 금속판에 조각된 일례가 1980년경에 전라북도 김제군 대목리의 백제의 절터에서 발견되었다.
사각형 동판 중앙에 반가상 1 구를 主尊으로 새기고 그 좌우에는 각 1 구의 나한 입상을 새겼다.
반가상은 탑 모양을 보관 중앙에 새겼으며 상반신은 나체인데 하반신에는 儀文이 새겨져 있다.
아마도 백게 말기의 작품으로 보이는데 전라북도에서 발견된 것으로는 처음이다.
( 김제 대목리 출토 판불은 여래 삼존상과 공양자상 그리고 화불로 보이는 인물 군상의 동판상과 더불어 백제의 옛 땅인 김제에서 출토되었다.
반가사유상은 독존상이 아니라 좌우에 나한이 시립한 三尊형식인 점도 독특하다.
뿐만 아니라 반가사유상의 위쪽에 보이는 병풍을 펼친 듯한 장식은 일본 광륭사의 목조 반가사유상의 뒷 장식과 유사하여 흥미로운데, 이는 앞서 간다라 출토의 석조 반가사유상에서 보이는 등나무 대좌와도 연결되고 있어 매우 古式의 모습이라 생각된다. )
백제의 확실한 작품으로 석제상과 마애상 그리고 금솩 작품 등을 하나씩 예를 들었는데 그 밖에도 보물 제 33인 방형대좌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백제에서는 미륵 신앙에 따라서 이같은 반가사유 형식의 미륵보살상이 크게 유행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연기군 비암사 碑像
백제가 멸망한 직후 그 유민들에 의하여 충청남도 연기군 비암사를 중심으로 碑像이 여러 개 만들어진 사실이 해방뒤에 밝혀졌다.
그 가운데 2 개의 비상석에서 각각 반가상을 조각한 작품이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그 중에서 비암사의 예를 들면 T 자형을 이루고 정면에는 반가상만을 크게 새기고 그 좌우 양면에는 각기 1 구의 보살 입상을 새겨, 정면을 향하게 하였으며, 다시 뒷면에는 1 기의 寶塔을 크게 새겼다.
이 보탑으로 보아서 정면의 반가상이 미륵보살임을 상징한 것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
높이는 41cm이다.
비암사에는 이 밖에 명문이새겨진 아미타삼존불 비상이 있는 데, 이 반가상이 미륵보살로 추정된다면 백제 멸망 직후인 673년에 이르러 아미타와 미륵, 兩像에 대한 그 당시의 신앙 추세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같은 반가상의 또 하나의 예로서는 연기군서면 연화사에서 조사된 것이 있어서 또한 귀중한 유례가 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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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
비암사 소장 삼존석상
1) 계유명 전씨 아미타상
계유명 전씨 아미타상의 정면과 뒷면
계유명 전씨 아미타상의 측면
충청남도 연기군 비암사에서 발견된 이 삼존 석상은 사각의 긴 돌의 각 면에 불상과 글씨를 조각한 碑像형태이다.
정면은 가장자리를 따라 테두리를 새기고, 그 안쪽을 한 단 낮게하여 아미타 삼존상을 조각하였다.
커다란 연꽃 위의 사각형 대좌에 앉아 있는 본존불은 얼굴 부분이 갸름한 모습이며, 신체는 건장하면서도 안정된 자세를 이루고 있다.
설법인을 하고 있는 손은 비교적 크게 표현되어 삼국시대이후의 전통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사각형의 대좌를 거의 덮고 있으며, 대좌 아래 좌우에는 사자상을 배치하였다.
원형 모양의 광배는 3줄의 동심원안에 연꽃으로 장식하고 있다.
사자 등위의 연꽃 무늬 대좌위에 서 계신 협시 보살상은 본존불쪽으로 몸을 조금 돌린 자세로 , 얼굴은 훼손이 심하여 알아볼 수 없으나 연꽃이 새겨진 원형의 두광배만 남아 있다.
본존불과 협시보살사이에는 나한상이 얼굴만 내밀고 있으며, 협시보살의 양 옆에는 인왕상이 서 있다.
불상위로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광배가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안쪽의 광배에는 5구의 작은 부처님이 새겨져 있다.
광배 밖의 좌우 공간은 조금 더 낮추어 비천상을 새겼다.
그리고 양 측면의 하단에는 정면을 향하고 있는 용머리를 조각하고 그 위로는 연꽃위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표현하였다.
뒷면은 4 단으로 나누어 각 단마다 5 구씩의 작은 부처님이 앉아 계신 모습을 조각하였으며, 불상 사이사이에 사람의 이름과 관직을 새겨 넣었다.
조각이 정교하면서도 장엄하고, 세부 양식에 있어서도 옛 형식을 남기고 있는 점이 계유명삼존천불비상 (국보 제 108호)과 비슷하며, 만든 연대는 삼국통일 직후인 문무왕 13년 {673)으로 추정된다.
----------------문화재 청 발췌 ----------------
참고)
계유명 삼존천불비상
계유명 삼존석상은 연기라는 지역적 특수성과 아울러 하나의 특정 양식으로 설정할 만한 조상들이다.
더욱이 이들이 백제 유민의 작품임을 알리는 명문의 각자로 해서 더욱 주목되고 있는 것이다.
계유명 전씨 아미타상은 단면 장방형의 석재 정면에 보살, 나한, 인왕을 포함하는 7 존을 배치하고 그 배면에 해당하는 공간에는 2 중의 주형 광배와 상단 좌우에는 비천, 화불, 당초, 화염, 밑에는 사자등이 정각되었다.
후면에는 상하 4 단에 걸쳐 각 단 5 구 씩의 僧俗像을 조각하고 옆에 인명을 음각하였고 , 좌우 측면에는 2 단에 걸쳐 각각 줄기가 있는 연화 위에서 주악하는 天人을 조각하였으며, 각 면 최하단에는 200여 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2)기축명상 =기축명 아미타정토비상
비암사에서 발견된 3구의 비상(碑像) 가운데 하나로 조상기 중의 「기축(己丑)」년은 689년으로 추정된다. 광배 형태의 비상으로, 연기지방의 비상 가운데 가장 회화성(繪畵性)이 강한 작품이다.
정면 중앙의 9구의 불보살상을 중심으로 그 아래에는 연못 속에서 피어난 향로 모양의 연꽃과 2마리의 사자, 그리고 계단이 나 있는 난간(欄干)을, 그 위로는 보배 구슬[寶珠]과 영락(瓔珞)이 달린 화려한 극락수(極樂樹)와 화불(化彿)을 배치하여 중앙의 9존불을 장엄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곧 극락정토(極樂淨土)를 묘사한 것으로, 극락정토의 모습을 조각으로 표현한 것은 이 비상이 처음이다.
본존과 협시들의 적절한 신체비례와 유연한 자세에서 앞의 두 「계유명비상」보다 진전된 작풍을 나타내지만 기본적으로는 백제 조각양식을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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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명상은 정면 상단이 반원을 이루며 밑으로 내려올수록 폭이 넓어졌고 배면은 밖으로 만곡된 석재를 사용하였으며 조각은 정면에만 있다.
조상은 步階가 있는 기단위에 臺蓮池에서 대연화가 피어 올라 본존은 그 위에서 결가부좌하였다.
본존 좌우에는 나한, 보살, 천부, 인왕을 배열하였고 위에는7불과 5구의 화불이 반원을 그리며 상하에 조각 되었다.
3)비암사 비상 미륵 반가석상
연기군 비암사 비상의 미륵보살 반가 석상 납석으로 만든 이 석상은 그 생김새가 탑비(塔碑)와 닮았다고 하여 비상(碑像)이라고 일컬어진다. 이러한 비상은 중국 동 · 서위 시대에서 비롯되어 수 · 당시대까지 유행하였으며, 우리도 이 영향을 받았다. 대좌와 사면석 그리고 용이 새겨진 옥개(탑비에서 螭首라고 함)가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잇다. 이 석상은 1960년에 충남 연기군에 있는 비암사에서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삼존 석상'(국보 제106호) '기축명 아미타여래제불보살 석상'(보물 제367호)과 함께 발견되었다. 장방형의 사면석에는 앞쪽에 반가사유상, 뒤쪽에 보탑 그리고 좌우에는 공양자상이 각각 새겨져 있다. 보물 제368호. 높이 41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미륵반가상은 정면에는 반가사유상 1 구를 조각하고 그 밑에 향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공양상을 배치하였고 양측에는 연화좌상에 보살상 1 구씩과 그 밑에 무릎을 끓고 공양하는 상 1 구씩을 조각하여 정면과 아울러 삼존을 이루고 있다.
배면에는 2 중 기단위에 寶塔을 전면에 걸쳐 크게 조각하였다.
(참고)
연화사 칠존불 비상
연화사 칠존불 비상의 정면 아미타 오존상과 배면의 반가 미륵 삼존상
연화사 무인명불 비상
무인년 7월7일 이라는 명문이 각자되어 있다.
이 사면불비상은 다른 비상들과 비슷하게 신라 문무왕 18년(678)에 조성된 신라 시대의 귀중한 작품이다.
비상신부는 사각형의 대좌 위에 서 있는 비신형태인데, 정상부로 보아 지붕돌을 올려놓았던 것이 분명하다. 비신 밑쪽의 꽂이는 현 대좌와는 맞지 않으므로 원대좌로 볼 수 없지만, 앙련(仰漣)과 복련(覆漣)으로 구성된 사각형 대좌는 같은 종류의 비상대좌로 생각된다
앞면에는 연줄기 위의 대좌에 앉은 본존불과 좌우에 서 있는 보살상과 제자상이 각각 새겨져 있는 5존불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본존불은 마멸로 얼굴이 불분명하지만 건장한 신체, 두터운 통견의(通肩衣), U자형의 굵은 주름 등 연기비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뒷면에는 반가사유상이 돋을새김으로 표현되었는데 좌우에 공양보살상이 꿇어앉은 삼존구도를 보여준다. 얼굴들은 역시 마멸 때문에 잘 알 수 없지만 다소 딱딱한 형태와 자세는 비암사 반가사유상과 일치하고 있다. 둥근 연꽃광배와 연줄기 위의 연꽃대좌, 머리 위쪽의 7세기의 고졸(古拙)한 장식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좌우 측면에는 상하로 나누어 위쪽에는 선정인(禪定印)의 불상을, 아래쪽에는 조상기(造像記)를 새기고 있는데, 아마도 사면사방불을 의도해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비상이라 하겠다.
연화사의 조각양식도 비암사의 여러 상과 유사하다.
이들 비암사와 연화사의 여러상에 있는 '계유년' '무인년' 기축년' 등의 간지명은 각각 서기 673,678, 689년으로 추정되어 7 세기 후반에 집중적으로 조성된 상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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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래 반가사유상
대마도 정림사 전래 동제 반가사유상
백제의 반가사유상은 본국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깊은 믿음을 받았던 사실으 소홀히 해석할 수는 없다.
그 첫번째 예의 백제 동제 반가상은 파손되기는 하였으나 일본 대마도 정림사에서 우리가 해방뒤 조사한 하반신을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 불상은 화재로 인하여 몹시 손상되었으나, 가는 허리의 모습이나 왼손이 무릎위에 놓여진 양식 그리고 좌우에 길게 내려진 띠의 양식이 모두 백제의 작품임을 짐작케 해주었다
이 불상은 아마도 海路를 통해 일본 대마도에 건너가 오랫동안 믿음을 받았고 화재로 손상되었지만 다행히 일부가 보존된 것 같다.
나가노현 관송원 전래 동제 반가사유상
이 상은 오른 손을 잃고 현재 나무로 보수하였는데 그 외는 모두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