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
<마티>
아카데미 사상 각본(색)상부문에 가장 많이 노미네이트된 작가는 우디 앨런이다. 그는 지난 30년 동안 무려 10편의 후보작을 냈고 그 중 <애니홀>(1977)과 <한나와 그 자매들>(1986)로 두개의 오스카를 가져갔다. 놀라운 기록이긴 하지만 굳이 타율로 따지자면 2할. 패디 차예프스키는 그에 비해 훨씬 실속있다. 네번 노미네이트되어 세개의 오스카를 챙겼으니 타율이 무려 7할5푼. 타율도 타율이거니와 현재까지 아카데미 각본(색)상 최다수상기록이다.
뉴욕 브롱크스의 빈민가 태생인 차예프스키가 본래의 희망이었던 코미디언의 꿈을 접고 작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2차대전 때 입은 상처 때문. 조지 큐커의 <이중생활>(1947)에 단역배우로 잠깐 출연하며 영화계와 인연을 맺은 다음 그는 TV쪽으로 활동무대를 옮긴다. 차예프스키는 1950년대를 대표하는 TV드라마 작가였다. 그는 특히 하층 노동자계급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키친-싱크 드라마’(kitchen-sink drama)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유머와 풍자가 적절히 섞인 작품으로 당대의 시청자들을 매일 웃기고 울리며 엄청난 시청률을 올렸다.
그의 시나리오 데뷔작이자 첫 번째 오스카 수상작인 <마티> 역시 자신이 쓴 TV연속극을 압축한 것이었다. 빈민가의 한심한 정육점주인으로 나와 열연을 펼친 추남배우 어네스트 보그나인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기고, 칸에서도 그랑프리를 수상한 걸작소품이다. 1950년대에 쓴 다른 시나리오들도 대개 TV에서 크게 성공한 자신의 키친-싱크 드라마나 희곡을 각색한 같은 계열의 작품들. 가령 <케이터드 어페어>에서는 허영심 많은 부인 베티 데이비스가 딸의 결혼피로연을 폼나게 치르기 위해 남편인 택시기사 어네스트 보그나인을 들들 볶고, <미들 오브 더 나이트>에서는 의류공장을 경영하는 홀아비 사장 프레드릭 마치와 푼수기질이 있는 여공 킴 노박의 꾀죄죄한 사랑이야기를 다루는 식이다.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는 작품세계의 변모를 꾀한다. <에밀리를 미국사람으로 만들기>는 전쟁과 로맨스를 섞어놓은 작품. 그러나 비평과 흥행에서 모두 시원찮은 성적을 거두어 이제 막 스타로 도약하려던 줄리 앤드루스에게는 잊고 싶은 영화가 되어버렸다. 브로드웨이의 뮤지컬을 각색한 <페인트 유어 웨건>에서는 엉뚱하게도 당대의 마초맨인 리 마빈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코믹한 노래를 부르게 만들었는데 역시 가당치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섣부른 장르전환 시도를 깊이 반성한 차예프스키는 결국 자신의 본령인 ‘노동자계급의 삶을 다룬 유머와 풍자’로 되돌아간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블루칼라에서 화이트칼라로 바꾸고 유머는 약화된 대신 풍자가 더욱 신랄해졌다는 것이다. 후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블랙코미디 <종합병원>과 <네트워크>가 이 계열에 속한다.
<종합병원>에서 독설가이자 자살충동에 휩싸여 있는 의사로 나와 열연한 조지 C. 스콧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웃음이 치민다. 그러나 터져나오지는 않는다. 가슴 아픈 유머 혹은 잔인한 풍자의 결과다. <네트워크>에 이르면 그 정도가 더욱 심해진다. 시청률 때문에 실직위험에 처한 앵커가 절망적인 심정으로 다음 뉴스시간에 시청자들 앞에서 권총자살하겠다는 계획을 공표한다. 그러자 아이로니컬하게도 시청률은 폭발적으로 뛰어오르고 방송사에서는 그에게 프로를 계속 맡아달라고 간청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자, 이제 그는 어떻게 할 것인가? 진퇴양난에 빠진 퇴물앵커 피터 핀치는 생방송중에 시청자들을 선동한다. 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대사들 중 하나이다. “여러분, 지금 모두 창문을 열고 크게 외치십시오, 미칠 것 같아, 더이상은 못 참아!”
이 대사에서 평생을 시청률과 흥행성적에 맞서 싸워온 노작가의 항변을 읽어낸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그의 사망 직후 개최된 198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1953년의 TV연속극 <마티>에서 주연을 맡았던 로드 스타이거가 나와 패디 차예프스키의 명복을 비는 아름다운 장면이 연출된다. 이제 더이상 참을 필요없어요, 편히 쉬세요.
자료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