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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10권
제4부 전쟁과 분단
25 피아골 7쪽
25. 피아골
지리산의 시월은
가을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고 있었다.
골짜기 골짜기마다 가을빛으로
흥건하게 물들어 있었다.
잎이 작고 얇은 나무들부터
색갈이를 하기 시작하여
잎이 크고 두꺼운 나무들까지
가을로 치장하고 있었다.
분홍·주황 ·노랑·빨강, 나무에 따라
그 색깔은 가지가지로 물들어 산을 뒤덮고 있었다.
여러 가지 나무들이 무질서하게
숲을 이루었어도 녹음은 자연스럽게 조화되었듯이
그 나무들이 단풍들어 온갖 색깔들로 변해도
그 다양한 채색들은 또 그지없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봄이 늦어 철쭉을 유월 초순에나 피워내는
지리산은 가을은 또 유난스레 빨라
시월이면 단풍들지 않은 나무가 없었다.
다만 바늘잎을 가진 침엽수들만이
둔감하게 초록빛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골짜기마다 단풍이 흐드러지고
자지러지지 않은 데가 없었지만
피아골은 특히나 유별났다.
피아골에는 금방 뿌려놓은 핏빛 같은
선홍의 단풍들이 다른 골짜기에 비해 유독 많았다.
그 새빨간 단풍들은 계곡의 물까지 붉게 물들였다.
주황빛이나 주홍빛의 단풍들 사이에서
핏빛 선연한 그 단풍들은
수탉의 붉은 볏처럼 싱싱하게 돋아보였다.
피아골을 단풍으로 유명하게 만들어
지리산 십경 중에 하나로 끼이게 한
그 나무는 바로 단풍나무였다.
피아골에는 단풍나무가 다른 계곡에보다 많아
단풍이 빨리 들면서도
그 곱기가 빼어나 다른 계곡을 앞지르고 있었다.
경사가 급한 계곡을 올라가면서 보면
단풍잎들은 곧잘 하늘과 겹쳐져 보이고는 했다.
해맑게 푸른 가을하늘과 어우러진
새빨간 단풍의 투명함은
흡사 백설 위에 접점이 찍힌 피의 선연함이었다.
그러나 피아골의 단풍들이 유명한 것은
단풍이 고와서만이 아니었다.
피아골은 그 길이가 길 뿐만 아니라
암반과 기암괴석들이 많았고,
암반 위를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넣고 굴었다.
단풍잎들은 가지가지 형상의 바위들과
넉넉하게 흘러내리는 물과 조화를 이루어
그 곱기가 한층 돋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피아골 단풍이
그리도 핏빛으로 고운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고 했다.
먼 옛날로부터 그 골짜기에서
수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원혼이
그렇게 피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떠도는 말은,
연곡사 아래서부터 섬진강 어름까지
물줄기를 따라가며 양쪽 비탈에 일구어놓은
다랑이논마저 바깥세상 지주들에게 빼앗기고
굶어죽은 원혼들이 그렇게 환생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바람이 떠돌며 전해져오는
그 두 가지 이야기를 아니라고
부인하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옛날부터 피아골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던 것이고,
바깥세상에서는 살 길이 없어
이 지리산 골짜기로 파고들어 비탈에다가
층층이 돌을 쌓아올려 땅쾌기를 만들어내
연명해가던 사람들은 여러 곡절 끝에
그것마저 빼앗기고 굶어죽는 일들이
분명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잊지 않고
아래로 아래로 전하는 것은
원혼들이 단풍으로 환생했다는
신기함 때문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거기서 많은 목숨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 자체를
알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바람처럼 떠도는 그 이야기는 바로
사람들의 삶을 엮어놓은 역사였던 것이다.
사람들의 한뜻한 죽음은
임진왜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왕조라는 것이 한심하고,
거기에 붙어서 일신의 영화나 누리자고 도모하는
벼슬아치들 또한 한심하여
왜놈들이 쳐들어왔으나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왜놈들은 방화와 약탈과 살인을 일삼으며
경상도지방을 휩쓸고,
전라도땅도 더럽히고 들었다.
그런데 그놈들이 섬진강을 따라
전라도땅으로 들어오는 외길목이
바로 피아골 입구였던 것이다.
그 길목에서 왜놈들을 막아내지 못하면
전라남도 내륙땅은 그대로 내줄 수밖에 없었다.
관군은 이미 있으나마나한 상태라서
백성들은 의병을 일으키기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승려들도 합세하여
연곡사에 군량미를 쌓고 지휘본부를 만들었다.
의병들은 밀려드는 왜놈들에 맞서서 싸웠지만
무기부터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의병들은 섬진강 상류를 피로 물들이며 죽어갔고,
힘이 모자라게 된 그들은
피아골로 밀리게 되었다.
싸우며, 죽으며, 밀리며를 되풀이하면서
의병들은 연곡사도 빼앗기고
자꾸 피아골 깊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국 왜놈들의 포위에 걸려
삼홍소 부근에서 거의 다 잡히고, 말았다.
왜놈들은 결박한 의병들을 바위에 세워
일일이 목을 쳐죽였다.
칼을 내려칠 때마다
목 따로, 몸뚱이 따로 계곡물에 곤두박혔다.
삼홍소가 시체로 넘치고,
거기서부터 피로 물든 계곡물이
이십 리를 넘게 흘러 강에까지 닿았다.
그리고,
갑오년에 일어난 농민전쟁으로
또 피아골의 물은 피로 물들었다.
그때도 농민들은 목이 뎅겅뎅겅 잘리며
계곡물에 곤두박혀 온몸의 피를
남김없이 쏟아내고 죽어가야 했다.
알량한 왕조는 왜놈들을 불러들여
청부살인권을 주었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
왜놈들의 노골적인 식민지화에 저항하여
한일협약을 계기로 도처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그때 전남의병은 몰리고 몰리다
그최후를 피아골에서 맞았던 것이다.
그리고 여순사건 때도
많은 사람들이 섬진강을 건너
피아골로 쫓겨들어와 피를 뿌렸던 것이다.
연곡사 언저리에서부터 강변마을 가까이까지
계곡의 양쪽 산비탈에 다랑이논들이
수십 개씩의 계단을 이루며
빈 틈이라고는 없이 촘촘하게 일구어진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피아골에 물이 많기 때문이었다.
이 산, 저 산을 옮겨다니며
고달픈 삶을 부지해가는 화전민이라는 것도
다 생겨나지 않을 수 없는
사회적 이유가 있듯이,
바깥세상을 등지고 피아골로 들어와
다랑이논을 일구어야 하는 사람들도
다 그들 나름으로 바깥세상과
고리지어진 쓰라리고 아픈
곡절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부지런하고
끈질기고 선량한 사람들인가는
그들이 일궈낸
다랑이논들이 입증하고 있었다.
돌투성이 산비탈들을 따라
일구어진 다랑이논들 -
성품이 선량하지 않고,
정신력이 끈질기지 않고,
몸이 부지런하지 않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는 일이었다.
돌투성이 산비탈에다
농사지을 땅을 만들어내는 그 일은
생존의 터전을 잃고
죽음과 맞선 인간이 마지막으로 하는 일이면서,
인간의 인내와 의지와 성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게 하는 시험장이기도 했다.
그 세가지 중에 어떤 것 하나만 모자라도
그 일은 해낼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다랑이논을 일구자면
먼저 산비탈에 박힌 돌들을 다 파내야 한다.
물론 파낼 수 있는 정도의 돌들을 말하는 것이고,
움직일 수 없는 돌들은
그대로 두었다가 땅을 고를 때
가능하면 논둑으로 이용한다.
돌을 파낸다음에는
물을 실을 논을 만들어야 하니까
비탈을 수평의 땅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러자면 비탈을 직각으로 깎아서
계단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러나 땅을 한꺼번에 넓게 할 욕심으로
비탈을 마음대로 깊이 깎아서는 안된다.
깎은 높이가 높을수록
물이 아래로 떨어지는 힘이 커져
산사태의 위험도 따라서 커지고,
깎인 면적이 윗논의 논둑이 되는 것이므로
전체적으로 볼 때는
논 넓이가 오히려 줄어들게 된다.
그러니까 산사태도 막고,
논의 넓이도 최대한 넓히자면
억지를 부리지 말고
지형에 따라 비탈을 깎아나가면서,
생기는 만큼씩 수평의 땅을 얻어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논둑은
구불구불한 추상적인 곡선이 되고,
어느 부분에선 딱 밥소반만한 땅이
생기게도 되는것이다.
그런 식으로 비탈을 깎아내려가면
하나의 산비탈에는
수십 개의 곡선계단이 층을 이루게 되고,
계단마다에는 모양도 크기도 제각기 다른
수평의 땅이 붙게 된다.
비탈을 깎아나가다가
골이 심하게 파인부분을 만나게 되면
그 아래의 땅을 이용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공간에서도 땅을 얻어내기 위해
몇 단계로 돌을 쌓아올린다.
그리고 계단마다 흙을 퍼넣어
골을 연결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해서 생긴 땅의넓이는
쌓아올린 돌축대의 넓이보다
작은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한 치의 땅이라도 넓히기 위해
논둑이 경사진 것이 하나도 없듯이
돌을 쌓아올리는 것도
반드시 직각쌓기를 한다.
비탈은 그런 식으로 하지만,
개울에 가까워지면
그때부터는 돌쌓기가 본격화된다.
폭넓게 버려져 있는 개울가의 공간을
땅으로 살려내기 위해서는
돌쌓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돌담이 아닌 돌논둑이
직각으로 쌓여올라가며 층계를 이루게 된다.
골을 메울 때처럼
그 층마다 흙을 퍼다부어 땅을 만들어낸다.
개울과 맞닿는 마지막 돌논둑은
그 높이가 사람의 키를 훨씬 넘기가 예사인 것이다.
장마가 져 개울물이 불어나는 것에 대비한 것이다.
그런 논의 넓이는
돌논둑 넓이의 반도 안되기가 예사인 것이다.
그런 원시적인 노동을 바쳐
다랑이논을 일군 그들은
근근이 목숨줄을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노라면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엉뚱한 일에 부딪치게도 되었다.
생활의 여유라고는 없는 그런 사람들에게
뜻하지 않은 우환이 닥치는 것이었다.
그것은 대개 식구들 중에 누가
큰 병을 앓게 되는 경우였다.
그렇게 되면
온갖 민간요법을 동원해 치료를 하다가
더는 견딜 수 없게 되면
병원을 찾아나설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 갈 수 있는 돈은 빚밖에 없었다.
빚은 바깥세상에 나가야얻을 수 있었다.
그 빚돈은 이자가 높아
양잿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식구를 죽일 수는 없었다.
다랑이논을 담보로 오 부 빚돈을 쓸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빚돈에 손을 대게 되면
다랑이논은 십중팔구 빚쟁이 손으로 넘어갔다.
오 부 이자라는 빚구덩이는
호랑이 아가리나 다름없어서
한번 빠지면 벗어날 가망은 아무에게도 없었다.
빼앗긴 논을 소작이라도 부칠 수 있으면
또 모르지만,
그것마저 틀어지고 말면
그 사람은 완전히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 사람들은 더 이상
다랑이논을 일궈내지 못하고
피아골을 헤매다가 죽어갔다.
피아골-
그 이름이 하필 왜 피아골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해룡은 화엄사골과 문수리골을 거쳐
마지막으로 피아골로 파고들었다.
이동병력의 안전대피를 위해
세 골짜기에 분산시키고 있었다.
세골짜기에 병력을 분산시키는 것으로
전남도당에는 구례군당을 바탕으로 한
지리산지구가 새로 형성되는 것이었다.
이해룡은 유치기구에서 지리산기구로 옮기며
그 기적도 결대강에서 부사령관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는 직위가 올라간 것 대해서
별다른 기쁨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그의 신경은 기리기구가 만들어기기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불같기구가 일까 감기 스멸되었고,
그 뒤를 따라 노렇기구도
가슴 약해기다가 끝나는 스몰리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른 기구들도 해방구를
검가로 길어가더니만
이젠 해방구를 확보하고 있는 기구가
하나도 없는 결편이 되고 말았다.
그 일 년에 걸친 투쟁 결과가
지리산기구의 형성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 상황변화는 여순투쟁 때와 똑같은 과정을
거치고 있었던 것이다.
평지에서 야산으로,
야산에서 좀더 크고 깊은 산으로,
거기서 또 더 크고 깊은 산으로,
그 마지막으로 이르는 산이 지리산이었다.
지리산보다 더 크고 깊은 산은 없었던 것이다.
그때 십사연대를 제외한 군단들이
지리산까지 물러서지 않았던 것은
지금처럼 비무강병력이 많기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방전쟁이 일어나기 않고
갈수록 군기에 몰리게 되었더라면
결국 군당들도 지리산으로 뒷걸음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쩌어그 저 아래가 삼홍소구만이라.」
구례군당의 선요원이 걸음을 늦추며 아래쪽을 손가락길했다.
「알겠소. 오륙 년 전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소.
이해룡은 눈에 익은 삼홍소와 그 언거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먼이라, 산잉께라.」
선요원이 가볍게 대꾸하며 이해룡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마 그런 것 같소. 」
이해룡은 옛 기억과 함께 물큰 풍겨오는
어떤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 아련한 추억의 냄새 속에는
염상진 선배의 냄새도 섞여 있었다.
적색농민운동 주모가들 검거와 학병을 피해
염상진과 지리산 생활을 하면서
이맘때쯤이면 땅꾼 노릇을 하기에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뱀잡기는 단순한 재미나 소일거리가 아니었다.
지리산 독사는 정력이나, 보신에 더없이 좋은 특효약이라고 옛날부터 소문이 나 있었고,
뱀은 가을뱀이라야 약효가 뛰어나다는
것 또한 널리 퍼져 있는 상식이었다.
그래서 나뭇잎들이 물들기 시작하는 구월부터 된서리가 내리기 직전인 시월말까지
두 달 동안은 뱀값이 최고로 오르는 철이었다.
그건 자신들이 월동준비를 손쉽게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워째 이러고 서 있소? 질 까묵어 뿌렀소?」
하대치가 이해룡의 옆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아, 하 동무! 이 골짜기가 전부 피아골이오.
다 온 겁니다. 」
이해룡은 생각에서 깨어나며 하대치를 반갑게 대했다.
「잉, 나도 그럴란지도 몰르겠다.
허는 생각이야 있기넌 있었소.
피아골! 참말로 단풍이 오지고 오지요이.」
하대치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숨을 있는껏 들이켰다.
「너무 강행군을 했으니까
잠시 휴식을 취하게 하는 게 좋겠소. 」
「그리 혀얄 것이요. 비무장덜이야 산 타는 것이
무장덜보담 서툴릉께로, 」
하대치는 골짜기의 위아래를 휘둘러보며 대꾸했다.
그는 말로만 들어왔던 피아골과
그 이름난 단풍을 함께 눈에 담고 있었다.
「여기 도착하는 부대별로 휴식을 취하게 하도록!」
이해룡은 연락병에게 명령을 내렸다.
「참말로 소문대로 단풍도 기맥히고,
저 바우뎅이덜에 물소리도 기맥히요.
우리도 쩔로 가 자리잡고 담배나 한 대썩 꼬실립시다.」
하대치의 들뜬 듯한 목소리였다.
「경치가 볼 만합니까?」
이해룡이 하대치를 보며 웃었다.
그 웃음에 따라 그의 왼쪽볼에 길게 팬 번들번들한 흉터가 이상스러운 모양으로 구겨졌다.
「말해 머 허었소, 지리산이 요리 끝도 한도 옳이 크고,
또 골골이 요리 풍광 기맥힌 것에 맘도 눈도 다 놀래뿌렀소, 」
하대치는 비탈을 걸어내려가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하 동무, 그렇게 놀라고만 갈 것이 아니라
지리산에 온 기념으로
피아골 독사나 몇 마리 같아먹고 가도록 하시오. ]
이들이 옆에서 걸으며 말했다.
「비암얼!」
하대치가 목청을 높이며 우뚝 멈춰섰다.
아니, 그 그리 놀라시오? 햄고기 못 먹소?
이해룡이 의아스럽게 하대치를 쳐다보았다.
「와따 고런 징상시런 소리 허덜 마씨요.. ]
하대치가 상을 찡그리며 팔을 내저였다.
아니 뭐가 징그럽다고 그러는 거요?
뱀이 정력에 좋고 보신에 좋다고
돈 많은 사람들이 일삼아 비싼 돈 써가며
뱀 사들이는 것 몰라서하는 소리요?
「아이고메, 고런 눔덜이나 비암 많이 처묵고
색질 씨게 혀감서
오래살아보라고 허씨요, 나야 싫은께로,」
「하 동무, 뱀장어도 안 먹소?」
「뱀장어?.... 고것이야 묵제라.」
이해룡의 말에 하대치는 잠시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하대치는 곧 반격을 가했다.
「아니, 이 동무넌 고것이 같다고 말하고 잡은 모냥인다디
고것이야 생판 달브게라, 뱀장어야 물괴기고,
비암이야 즘생이요.」
「뱀도 물에서도 살아요. 알도 물에다 낳고 말이지요.
뱀하고 뱀장어는 대가리와 꼬리만 다를 뿐이지 몸뚱이는 다 똑같아요.
뱀이나 뱀장어나 대가리는 안 먹는 거니까,
뱀을 먹으나 뱀장어를 먹으나 똑같다.그겁니다.
이건 내가 기어낸 말이 아니라 염 동지의 말입니다.」
『 동기, 글먼 염 동기가 비암얼 묵는다 그것이요?」
하대치의 눈이 휘둥글해졌다.
「그럼요, 아주 자알 먹지요. 나도 뱀고기 먹는 걸
염 동지한테 배웠으니까요.
굽지도 않고 생으로 먹는 맛이 아주 그럴듯합니다.」
이해룡은 하대치를 한히 쳐다보며
능청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 점잖은 염 동기가 비암얼 쌩짜로 묵는다고라? 예끼! 그짓말 마씨요.
나가 그리 오래 뫼시고 댕김스롱도 한 분도 비암 잡아묵는 건 본일이 없소,
염 동지가 아무리 맘이 넓어도
고런 택옳는 소리 들으먼 화낼 것이오. ]
하대치는 화가 난 듯한 얼굴로 완강하게 말했다.
「허허허허...… 남대문 본 사람하고,
안 본 사람하고 다투면 누가 이기는지 알지요?
오륙 년 전에 나하고 이 지리산에서 살 때
살이 통통하게 오른 독사를
백 마리, 아니 백 마리는 너무 많고,
아마 오십 마리씩은 넘게 잡아먹었을 것이오.
그게 거짓말인지 참말인지는 지구로 돌아가서
하 동무가 염 동지한테 직접 물어보시오. ]
이해룡은 느물거리고 웃으며 말했고,
하대치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표정이면서도
막상 아무 말도 내놓지 못한 채
걸음만 떼어 놓고 있었다.
그들은 물가에 다다랐다.
해맑은 물줄기가 넓은 폭을 이루며 거침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울긋불긋한 나뭇잎들이
그 위에 실려 떠내려가고 있었다.
물 밑에 가라앉아 있는 낙엽들도 많았다.
물이 어찌나 맑은지
개울바닥이 유리병 속처럼 환히 들여다보였다.
「여기 앉읍시다.」 이해룡이 먼저 바위에 걸터앉으며,
「하 동무, 이건농담이 아닌데 말이오,
가을뱀은 겨울잠 준비를 하느라고
살도 많이 오르고, 기름도 많이 쪄서
영양이 아주 좋으니까 몇 마리 먹도록 해봐요.
씨름대회에 나가자면 기운을 돋워얄 게 아니겠소?
기운을 돋우자면 고길 먹어야 하는데,
당장 구하기 쉽고 몸에 좋기로는 뱀밖에 없어요.」
그의 얼굴은 이제 사뭇 진지해져 있었다.
「아이고메 고런 말 마씨요.
씨름얼 첫판에 져도 존께 고 징헌 비암언 못 묵겠소.」
하대치는 질색을 하며 물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상체를 기울여 엎드리더니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울대 울리는 소리와 물 넘어가는 소리가 시원스러웠다.
그런 하대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참 사람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뱀 잡아먹는 것쯤 예사로 할 줄 알았던 저 사람이
그리도 끔찍스러워하다니,
이해룡은 생각하고 있었다.
하대치는 두 가지 일을 해내기 위해
잠시 지리산에 온 것이었다.
비무장들의 이동을 그의 무장부대가
경계하는 것이 첫번째였고,
시월혁명기념 씨름대회에 참가하는 것이 두번째였다.
그러나 하대치로서는
또 하나의 목적을 개인적으로 감추고 있었다.
씨름대회에서
'이현상 선생을 만나보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씨름대회에 나가보지 않겠느냐는 권유에
선뜻 응했는지도 몰랐다.
비무장대원들은 계곡의 물가에 차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물가에 앉자마자 하나같이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든 모습들로 물을마셔대고는 했다.
물을 양껏 마신 다음에야 그들은 사방을 둘러보며
경치의 아름다움에 서로 감탄을 나누었다.
「워따, 간뎅이가 얼어붙을라고 허네웨.」
물을 다 마신 하대치가 몸을 일으키며
입술을 훔치고는,
「저 씨언헌 물에다가 무등산수박 한뎅이럴
푹 잠겼다가 쪼개묵으먼 신선이 따로 욻겠다.」
그는 짭짭 입맛을 다시며 담배쌈지를 꺼냈다.
보통 수박보다 두 배 이상 크면서,
산중에서 늦 되는 무등산수박이
한창 제맛이 날 때이기도 했던 것이다.
「허, 빨치산 팔자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 그만 하시오.
빨치산 팔자에 어울리는 건 독이 탱탱하게 오른
뱀이나 잡아먹는 것뿐이오. 」
이해룡이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하대치를 옆눈질하고 있었다.
「이 동무가 그리 비암 잡아묵는 타령 허다가는
오늘 저녁에 자다가
장개도 못 간 잠지럴 다 물어떧길 것이오...
하대치가 담배를 말며 퉁명스레 내쏜 말이었다.
「하하하하……
하 동무가 왜 뱀을 안 먹으려고 하는지 인자 알았소.
뱀을 죽이면 그 짝이 밤에 찾아와서
잠지를 물어 복수하고,
뱀을 꼬리까지 다 안 죽이면
밤중에 이슬을 맞고 되살아나
꼭 복수를 하고 만다는
어릴 적에 들은 얘기 때문이군요.
유물론자가 그런 미신을 믿으면 좀 곤란하지 않겠소?
빨치산한테 뱀은 뭔가 하면 말이요,
한 끼밥이고, 양식이오.」
하대치는 이해룡의 탄력이 넘치는 말을 못 들은 척 담배만 빨아대고 있었다.
그런 하대치를 보고 이해룡은 짓궂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 동무, 기다리시오. 이따가 내가
몇 마리 잡아다가 맛을 봐드릴테니까.
생으로 먹는 게 징그러우면 구워서 먹는 방법도 있소.
구워서 먹으면 기름이 지글지글한 게
그 구수한 맛이 뱀장어 뺨칩니다.」
「아이고메, 나 싸게 지리산 떠야 쓰겠소. 」
얼굴을 찡그린 하대치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해룡도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는 왼쪽 옆구리의 혁대 사이에
찔러넣고 있던 막대기를 뽑아
손바닥을 딱 · 딱·딱 때렸다.
그 소리는 유난히 맑고 카랑하게 울려퍼졌다.
어디에 있었던지연락병이 그의 앞에 금방 나타났다.
「대대장과 중대장들 곧 집합시키도록!」
이해룡은 또 막대기로 손바닥을 딱 치며 명령했다.
「야아, 댕게오겠구만요. 」
거수경례를 붙인 연락병이 황급히 돌아섰다.
이해룡이 들고 있는 것은 그냥 막대기가 아니었다.
팔길이 반만한 그것은
대나무를 가늘게 잘라서 서로 맞대어,
손가락 세 개 정도를 합한 넓이가 되도록
삼끈으로 엮어 묶은 죽도였다.
검도 솜씨가 남다른 그가 총만큼 소중하게 여기며 몸에서 떼지 않는 물건이었다.
그것의 쓰임새는 다양했다.
호신용 무기였고, 지휘봉이었고,
작전지시기였으며, 연락병 호출기였다.
연락병의 전갈을 받은 간부들이
서둘러 모여들었다.
「동지 여러분, 우리는 목적지 피아골에 도착했습니다.
부대를 인솔하느라고 여러분들 수고가 많았습니다.
오늘은 강행군을 한데다가 시간도 늦었으니
트는 내일부터 만들기로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부대별로 저녁밥을 하는 동시에
야영하기 적당한 장소들을 찾도록 하시오.
또한, 아직 별 위험은 없습니다만,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무장대가 보초를 철저히 서도록 해주시오. 이상입니다.」
이해룡이 하대치와 농담 반, 진담 반 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그의 냉엄한 얼굴에는 상급지휘관다운 무게와
여유가 실려 있었다.
하대치는 그런 이해룡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저 사람도 인자 염 동지하고 어슷비슷하니 되았구만, 하는 생각을 또 하고 있었다.
하대치는 이번에 그가 부대를 지휘하고 인솔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런 생각을 몇 번이고 했던 것이다.
그럴 때면 그의 왼쪽볼을 길게 찢고 있는 흉터도
꼭 흉하게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말마따나 그것은 '인민의 훈장' 이고
'빨치산의 훈장' 으로 당당하고 값지게 보이기도 했다.
지시를 받은 간부들이 흩어져가고 있었다.
그들 속에는 하대치를 따라온 강동기와
천점바구도 끼여 있었다.
「여그가 산 높기로 치자먼 워디짬이요?」
하대치가 골짜기를 둘러보며 이해룡에게 물었다.
「이 피아골이 오십 리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중간쯤 되겠소. 」
「글먼 우선에 안전허기넌 허겄는디……」
하대치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저었다.
「왜 그러시오?」
이해룡은 신경에 자극을 느끼며 빠르게 물었다.
「금메라…… 머시라 혀얄랑가.」
하대치는 난색을 표하며 느리게 바위에 앉더니,
「지리산얼 와서 봉께 듣는 것보담 훨썩 크담하고
짚은 산언산이요.
긍께로 묵자것만 있다먼 피허기도 좋고,
신선놀음도 좋겠는데,
묵자것이 옳어갖고야 요것도 저것도
낭패가 아니겠냐 하는 생각이 드요.
산이 높아논께 폴세 요리 단풍이 왁짜허게 들어뿔고,
이리 가자먼 삼동도 금세 닥칠 것인데,
삼동 나자먼 옷이고 양석이 문젠디다가,
이리 깊이 들어앉자먼 보투도 을매나 심이 들었소.」
그의 말이 걱정스러웠다.
「예, 도당에서도 그 문제를 제일 걱정했소.
그러나 토벌대들의 수가자꾸만 늘어나면서
공격도 치열해지니까
우선 피할 수밖에 없는 일 아니겠소.
구례군당과 힘을 합쳐 무슨 수를 쓰든지
이번 겨울을 넘기는 것이 우리 지구가 할 일이요.
어떡하든 겨울만 넘기고나면
다시 도당으로 돌아가게 되니까요. 」
「하먼이라. 우리 헹펜이 좋아져서
지리산얼 싸게 벗어나게 되야겠제라이.
어런덜이 허는 말로 지리산인 명산임스로도 악신이라는 말이 안 있습디여?
귀경허기로넌 명산이라도,
반란 일으킨 백성들한테는 악산이라는 말이제라.
옛적부텀 들판에서 들고일어난 백성들은
산으로 피해감스로 싸우고 싸우다가
지리산으로 몰리면 종당에닌 끝장나뿌렀다는 것인데,
우리야 싹 다 지리산으로 쫓기는 것이 아니고
비무장만 임시변통으로 뒤로 빼는 것잉께
달브기야 허제만,
그려도 지리산으로 뒤뺀다고 할 적에 맘이 껄쩍지근혔고,
이리 와서 봉께로 맘이 쌔코롬해짐스로
탁 까라지는 것이, 자고 어런덜 말이 되씹히고 그러요
「나도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사실 지리산은 본격적인 투쟁지가 아니라
투쟁의 마지막 장소일 뿐입니다.
지리산으로 들어오면 더 이상 갈 곳이 없거든요.
길목길목을 다 막아버리면
꼼짝을 할 수 가 없게 됩니다.
싸워서 죽지 않으면 긴 겨울에
굶어서 죽을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안 동무와 우리가 함께 만난 첫날
내가 그 점을 걱정한 겁니다.
어쨌든 해동하면 바로 벗어나야지요.
본격적인 투쟁은 언제나 인민의 옆에서 해야 됩니다.」
「근디 말이요, 우리가 이동하는 것을 적덜이
다 알었는데, 고것은 위찌 될 것 같으요?」
아무리 유인작전을 써가며 야간이동을 했다고 해도
이쪽의 수가 워낙많아서 적들의 눈을
말끔하게 속일 수가 없었다.
적들의 대항이 의외로 약했던 것도
그 많은 수에 기가 질린 탓이라고 보아야 했다.
적들은 어둠 속에서 이쪽의 무장과 비무장을
구분할 리 없었던 것이다.
하대치는 이동을 완전하게 감추지 못한 것이
아무래도 께름칙하게 걸려 있었다.
「글쎄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데,
당장 뭐라고 할 수가 없군요.
토벌대들도 병력에 한계가 있으니까
당분간이야 별문제가 없지않을까 싶은데요.
각 지구들이 맹렬하게 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이상
이쪽으로 병력을 투입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만약 그렇게만 해준다면 말이지요,
우리로선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지요.
우린 여기 이 넓은 지리산을
골짝골짝 피해다니며 싸우고,
그러는 동안에 각 지구들은
빼앗긴 해방구를 되찾고 말이오.
허나, 적들도 그리 미련하지는 않겠지요.」
이해룡의 말에는 풀기가 없었다.
「여그 지리산에넌 우리 도당만 들어온 것이 아니라는데,
그 수럴 다 합치면 을매나 되겠소?」
「글쎄요……
남부군 사령부 병력이야 삼사백일 뿐이고,
전남·북도당에다가 경남도당까지 합하면
한 삼사천 정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염 동지 말로는 우리 도당과 경남도당이
팔 할쯤 될 거라고 했소.
어쨌거나 지금으로선 최선의 조처를 취한 거니까
좀더 두고 봅시다.
나보투 나갈 참인데 하 동무도 같이 갑시다. 」
이해룡이 밝은 얼굴로 몸가볍게 일어났다.
「보투요?
하대치가 의아스런 표정을 지으며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뱀 잡으러 가잔 말이오. 」
「와따 참말로 그눔에 비암 이약 찔기기도 허요.
혼자 가서 배터지게잡아묵고 오씨요.」
하대치가 벌컥 화를 내듯이 했다.
[흐흐흐흐..,,]
이해룡은 어깨를 들먹거리고 웃으며 돌아섰다.
하대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부대별로 무리를 이룬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불을 피우고,
물가에서 무엇을 씻기에 바쁜 사람들도 있었다.
온갖 색깔의 단풍들이 곱고,
맑은 물소리 요란한 골짜기에는
해거름의 스산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거기에 연기냄새까지 퍼지고 있어서
하대치는 갑작스럽게 솟기는 시장기를 느꼈다.
이해룡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정말 뱀을 잡으러 간 것인지 어쩐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생으로 뱀을 먹는 염상진을 상상할 수가 없었고,
그 생각을 하면 속이 메슥거려지려고 했다.
그러나 염상진이 뱀고기를 먹을 리가 없다고
자신있게 부정할 수도 없었다.
보기에 징그러울 뿐이지 뱀도 고기는 고기였고,
염 대장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뱀을 먹을수 있는 사람이라 싶었던 것이다.
느닷없는 뱀먹기타령을 듣게 되자
그는 까마득한 옛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여섯 살인가 일곱 살 때
논가 풀섶에서 개구리를 잡다가
뱀에게 오른쪽 다리를 감겨 까무라친 일이 있었다.
그때 얼마나 놀랐던지
그 뒤로도 뱀만 보면 질겁을 하고 도망쳤고,
아이들이 떼몰려 돌질로 뱀을
토막쳐서 죽이는 일에도 끼지 않았다.
뱀에게 다리만이 아니라 목까지 감기는
꿈에서 겨우 벗어나게 된것도
불두덩에 거웃이 날 무렵이었다.
물뱀에게 물렸으니까 괜찮았지
산에서 사는 독사에게 물렸더라면
영락없이 죽었을 것이라는 말은
그보다 훨씬 뒤에까지 잊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대치는 손바가지로 물을 몇 모금 마시고
자기 부대를 찾아나섰다.
여기저기서 아무 거리낌 없이
연기를 피워대고 있는 것에서
지리산 깊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실감할 수 있었다.
그는 싸아한 연기냄새를 맡으며,
지리산에 소나무가 별로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잎 넓은 나무들이 많았고, 바늘잎을 가진 것으로는 소나무보다 잣나무가 더 많았다.
산에 소나무가 적으면 그는 이상하게도 허전함과 생소함을 느꼈다.
그가 조계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도
그 산이 온통 참나무로 뒤덮여 있는 탓이었다.
「대장님, 여그구만이라 여그!」
하대치는 귀에 익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동기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손을 맞흔들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밥은 워찌 되야가요?」
하대치는 친근한 눈길로 대원들을 둘러보며 웃음지었다.
대원들도 스스럼없이 마주 웃으며
자리를 조금씩 비켜앉았다.
「인자 끊을라고 허능마요. 」
강동기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대답했다.
천 동무는 워디 있소?」
하대치는 강동기 옆에 앉으며 물었다.
「바로 쩌그 바위 옆에 자리잡았구만요.」
「좀 불러왔으먼 좋것소. 」
[그러제라.」
강동기가 연락병을 띄웠다.
「강 동무도 지리산이 첨이요?」
하대치가 쌈지를 꺼내며 물었다.
「그렇마요.」
「기분이 으쩌요?」
「금메요, 워디가 워딘지 정신이 하나또 옳구만이라.」
그때 천점바구가 나타났다.
「대장님, 여그서 진지 잡수실라고라?」
천점바구가 대뜸 물은 말이었다.
「그러시기로 혔소.」
강동기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그래뿔던 영 섭헌디요. 빈말로라도 의논이 있었어야게.」
천점 바구는 서운한 기색을 보였다.
「천 동무, 앉으씨요. 강 동무가 맥엄씨 허는 소리요. 」
하대치가 손짓을 했다.
[형! 나가 또 강 동무 싱건 소리에 넘어갔구만이라.」
천점바구가 멋적게 웃으며 하대치 옆에 앉았다.
[긍께로 머시냐, 오늘로 우리 부대가 맡은 임무넌
다 끝낸 심이요.
오늘밤에 대원덜 푹 쉬게 혀서
낼 아칙에 여그럴 플 참이요.
남치기 일언 씨름대회럴 보고,
지구로 무사허니 돌아가는 일잉께
끝꺼정 대원덜 단도리 잘 혀얄 것이요. 」
[아아.」
[알겠구만이라..]
천점바구와 강동기가 함께 대답했다.
하대치는 담배말이에 침을 흠뻑 바르고 있었다.
「씨름 연습은 많이 허셨는게라?」
강동기가 하대치에게 넌지시 물었다.
연십얼 파로 혈 새가 워디 있소.
그냥 옛날 맘으로 샅바 같고 한바탕 놀아보는 것이제.」
하대치는 연기를 내뿜으며 싱긋 웃었다.
「근디, 장사헌테 황소럴 상으로 준다는 밀이 있등마, 고것이 참말일께라?」
천점바구가 하대치를 쳐다보았다.
「아매 헛말은 아닐 성불르요.
본시 씨름판이야 소가 상금으로 안 내걸리먼
신바람이 안 일어나는 법잉께..
「글먼 대장님이 그 소럴 쌈빡허니 따내 뿌씨요.
그눔얼 턱하니 몰고 지구로 돌아가먼
대원들이 을매나 반가워라 허겠는게라.」
천점라구는 눈을 빛내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맘이야 그러고도 잡은디,
고것이 에로운 일일 것이요.
빨치산 환갑이 시물다섯이라먼
씨름꾼 환갑이야 그보담 더 밑인께로,
나가 나이 쉰디다가 키할라 요리 쪼깐허니
크다가 말어 뿌렀이니
소 탈 욕심이야 진작에 털어뿌는 것이 안 좋겠소?
같은 동지찌리
부자지럴 걷어차서 이길 수도 옳는 일이고, 」
하대치는 쿡쿡거리며 혼자 웃고 있었다.
그 옛날, 황소를 눈앞에 둔 결승전에서
연 삼년째 맞붙은 상대방을 도저히 이길 수가 없어서
부자지를 걷어차 쓰러뜨리는 오기를 부렸던 일이 선하게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연대장 동지, 부사령 동지께서 찾으싱마요.」
이해룡의 연락병이 하대치 앞에 거수경례를 붙였다.
「이 동지가!」 하대치의 얼굴이 갑자기 구겨지면서, 「비암 몇 마리나
잡아왔는지 봤소?』 화를 내는 것처럼 소리질렀다.
「비암은 무슨 비암이요? 무신 말인지 몰르겠는디라.」
연락병은 어리둥절해했다.
「아, 부사령 동지가 비암얼 묵겠다고 잡으로 갔다. 그것이요.」
「아닌디요. 손에 진 작대기럴 들기넌 들었는디, 비암은 옳드만이라.」
고것 참말이여? 동무가 잘못 본 것 아니요?」
하대치의 얼굴은 반색을 했고 목소리는 밝아졌다.
「지가 똑똑하니 봤는데, 틀림옳이 빈손이었당께라.」
연락병의 자신있는 말이었다.
「되았소, 갑시다.」
하대치는 활기차게 일어섰다.
역시 연락병의 말은 맞았다.
이해룡은 끝이 시자로 갈라진 긴 나뭇가지로
땅을 푹푹 질러대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담배 피워대고,
사람냄새 풍겨대고 하니까 뱀들이 다 도망가고 숨어버린 것이요.
이거 참, 지리산 온 기념으로
몇 마리 잡아 구울려고 했었는데. 」
이해룡은 짭짭 입맛을 다셨다.
「아조 꼬시게 자알 된 일이요. 흐흐흐흐….…」
이제 하대치가 아까의 이해룡 닮은 웃음을
어깨 들먹거리며 웃어대고 있었다.
「하 동무 심뽀 참 고약하오.
씨름대회 나가서 이기라고
기운 돋워주 려는 동지애도 모르고 그리 좋아하다니.」
이해룡이 섭섭한 척하며
나뭇가지를 반으로 부러뜨렸다.
「아이고메 아즘찬이요.
그 맘이 고마워서 나가 꼭 소럴 타갖고
이 동무 보신하게 소붕알얼 보내겠소. 」
하대치는 시원하게 말하고나서
한참이나 껄껄거리고 웃었다.
「아이고 고맙소. 밥이나 먹읍시다.」
이해룡이 털퍽 주저앉았다.
물소리가 되울림하는 긴 골짜기에는
안개발이 퍼지듯 어둠살이 끼어오고 있었다.
어둠살을 타고 선뜩거리는 바람결도 일어나고 있었다.
높고 깊은 지리산 골짜기에는 벌써 겨울기운이 서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저녁밥을 마치자 이해룡은 다시 간부들을 집합시켰다.
「모닥불을 피우고 중대별로 한 시간 정도씩
오락회를 실시하도록 하시오.
여기 온 대원들은 오늘밤이
지리산의 첫날밤이나 마찬가지요.
밤에 불을 못 피운 지도 오래됐으니까
맘껏 모닥불을 피우고 오락회를 즐기도록 하시오.
학습은 내일 낮에 하도록 합시다.」
이해룡의 이런 지시에
하대치는 순간적으로 염려를 느꼈다.
그러나 곧 염려를 털어버렸다.
부대의 지휘책임자는 이해룡이었고,
여기는 지리산이었던 것이다.
오락회도 투쟁의 하나인 한, 장소가 바뀌었으면
그장소에 어울리게 오락회를 벌이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아직은 토벌대의 위험이 전혀 없는 지리산에서
맘껏 모닥불을 피워올리고 오락회를 하는 것은
그 동안 억눌려왔던 감정을 풀고,
앞으로의 사기를 높이는데
더없이 효과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적의 위협이 없다고 해도
그런 결정을 척척 내리는 이해룡의 과감성을 보며
하대치는 또 그의 변모를 느끼고 있었다.
어둠이 가득 찬 골짜기의 사방에서 모닥불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너훌거리는 불길들이 어둠을 사르며
둘러앉은 사람들의 얼굴, 얼굴을 붉게 드러내고 있었다.
어둠 속 여기저기에서는 수십 개의 불꽃들이
싱싱하게 피어났다.
그리고 다투듯이 박수소리들이 울리고,
노랫소리가 흐르고, 웃음소리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 소리들은 물소리와 함께 섞여 밤계곡을
한층 요란하게 흔들어대고 있었다.
하대치는 어둠 속에 묻혀 담배를 피우며
그 모습들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뿌듯하게 솟기는 힘을 느끼기도 했고,
어딘가 빈 듯한 허전함을 느끼기도 했다.
저리 심 뻗치는 대원들 손에 각단지게
총이 들렸드람사 을매나 좋을 것이여.
그리 되냐으먼 여그꺼정 뒷걸음질 안쳤을 것인다.
참말로 목심 내걸고 싸우겠다고 나슨 사람덜헌테
총이 옳는 것맹키로 환장할 일이 또 있으까!
허나 워쩔 것이여, 빨치산인디
싸와감스로 무장혀야제. 워쨌그나
오랜만에 모닥불덜 푸지게 피우고
아무 눈치 볼 것 옳이 오락회럴 헌께로 좋구만.
요것도 다 지리산이 보둠아준 덕이여.
근디 원제꺼정 보둠기고 있어야 헐랑가 몰르겠네.
이해룡이 말대로 해동이 됨스로는
참말로 일이 풀렸으먼 쓰겄는디..……
하대치는 마음 무거움을 떼치지 못한 채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닥불들의 불길은 한층 기세좋게 일렁이고 너훌거렸으며,
모닥불을 에워싼 사람들의 얼굴은
더욱 붉게 물들어가면서
오락회의 흥은 고조되어가고 있었다.
하대치는 다음날 아침 일찍 부대를 집합시켰다.
그리고 달궁골을 향해 피아골을 출발했다.
「이 동무, 해동되먼 만냅시다이!」
하대치가 이해룡의 손을 굳게 잡았다.
「그럽시다. 씨름에 꼭 이기도록 하시오
여기서 이기면 지리산 장사요.
이해룡도 하대치의 손을 굳게 맞잡았다.
이 말을 나누고 두 사람의 입은 다물렸다.
그들은 서로를 맞쳐다보다가 손을 놓았다.
그리고 하대치는 돌아섰다.
그의 눈 언저리가 순간적으로 파르르 떨렸다.
이해룡의눈가에도 경련이 스치고 지나갔다.
선요원을 앞세운 하대치의 부대는
바위투성이인 험한 피아골을 치올라
임걸령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임걸령 샘터에서 목을축이고,
담배 한 대씩을 말아피운 그들은
곧장 심원계곡을 타고내렸다.
내리막길 심원골은
피아골에 비하면 너무 심심할 정도로
험한 데라고는 없었다.
피아골이 남성적이라면
심원골은 여성적이었다.
같은 산이면서도 등성이를 가운데 두고
그리도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심원골의 단풍들도 피아골에 못지않게 고왔고,
샛가지 많은 깊은 골짜기의 경치는
신비스럽기 그지없었다.
심원골 용소에서
주먹밥으로 점심을 먹은 그들이
달궁골로 접어들어 돌고개를 지나
달궁에 도착한 것은 오후 세시경이었다.
보통사람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로,
세 배 정도의 빠르기였다.
그러나 선요원은 그 빠르기마저도 불만스러워했다.
달궁을 처음 본 하대치와 그의 대원들은
모두 놀라고 말았다.
골짜기가 갑자기 확 트여 넓어지면서
눈앞에는 평평한 풀밭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지리산에 들어와 사흘 동안
줄기차게 골짜기들만 넘나들고 오르내리면서
그런 곳을 본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 운동장처럼 넓은 풀밭에는
광목천막 대여섯 개가 나란히 쳐져 있었다.
맑게 흘러가는 물과 넓은 풀밭과
울긋불긋 물든 숲과 나란히 쳐진 천막들 -
그건 그지없이 평화로운 별천지의 풍경이었다
[옛날 옛적에 여그에 궁궐이 있어서
달궁이라고 헌답디다.
긍께 저풀밭이 궁궐터였을 것이오.
쩌그 쳐져 있는 천막은
남부군 사령부 기동부대 것이오.」
선요원의 설명이었다.
「허먼, 이현상 선생님이 쩌그 기신단 말이제라?」
하대치의 긴장된 목소리였다.
「하먼이라. 나가 도착보고럴 허고 올 것잉께
쉬고 있으씨요.」
선요원이 다람쥐처럼 재빠른 동작으로
돌들을 타고 개울물을 건너갔다.
하대치는 그때서야 골짜기의 이곳저곳에
모둠모둠 자리잡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들이 씨름대회에 참가하러 온
다른 도당의 대원들이겠거니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하대치는 아랫배에서 뻗질러오르는 힘을 느끼며 부하들에게 말했다.
「동무덜, 편허게 앉어 쉬씨요. 」
하대치는 바위에 걸터앉으며 어제와는 달리
황소를 한번 타볼까 하는 욕심이 슬그머니
동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 욕심에 따라 그는 몸의 이 부분, 저 부분으로
힘이 몰려다니는 것도 느끼고 있었다.
업어치기 · 허리치기 · 옆물리기 · 들어치기 ·
다리치기 · 밀어치기 · 당겨치기 ·꼬아치기 .... 씨름기술이 빠르게 떠오를 때마다
몸의 부분부분이 꿈틀 꿈틀하고 있었다.
「맘에 드는 디럴 골라 하로밤 편안하니 쉬랑마요.
보초야 사령부 기동대가 다 알어서 헌다고라. 」
선요원의 전갈이었다.
「이, 손님대접 지대로 하는구마.」
하대치는 흐뭇하게 웃고는,
「우리 구례군당이 도착혔는가 몰르겠소?」
그는 선요원에게 좀 알아보라는 의사를 표시했다.
「으쩌제라? 지가 시방 딴 일얼 명령받었는디라.」
「되았소, 나가 알어서 허겠소. 우리 여그꺼정
딜꼬 오니라고 동무 수고가 많었소.」
하대치는 선요원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수고넌 무신 수고라. 당연허니
허얄 일인디요. 편하게 쉬시씨요들.
선요원이 흡족해하며 다시 개울을 건너갔다.
「와따 빨치산 오래 허다봉께
보초 안 스고 자보는 밤도 생기네이.」
「그런 맛도 있어야 기분나제.」
「하먼, 오늘 저녁이 우리덜 생일잔치시.」
대원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며
하대치는 빙긋이 웃고 있었다.
부하들을 쉬게 한 하대치는
연락병을 데리고 직접 넓은 골짜기
여기저기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구례군당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하대치는 구례군당과 함께 오기로 되어 있는
김범준 소장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염상진은 그분을 지리산까지 무사하게 모시라고 특별히 다짐했던 것이다.
하대치는 바위 위에 앉아 담배만 연거푸 말아 피우며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는 이번에 김범준이란 사람을
며칠 동안 가까이에서 대하며
염상진이 그 사람을 왜 그리도
대단하게 생각하는지 대충이나마깨닫게 되었다.
그는 잔잔한 웃음이 감도는 얼굴로
하루종일 가야 말 한 마디가 없었고,
어쩌다가 아랫사람들이 작전에 대한 것을 물으면
한동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거나 저었다.
고개를 저을 때는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는데,
그때도 하는 말은 짤막했다.
그런데 그 작전지시가 빈틈없이 들어맞고는 했다. 그리고 나이가 많은데도
젊은 대원들과 똑같은 속도로 걷는가 하면,
대원들보다 쌀이 좀더 많이 놓인 밥을
한사코 먹지 않았다.
웃음기 감도는 얼굴에 비해
눈은 이상하게 매웠는데,
그 눈이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날이 갈수록 그의 앞에 서는 것이
어려워지면서도 마음은 끌리고 있었다.
[다 오랜 투쟁경력이 저런 인품을 만들어내는 거요.」
그분을 모시게 된 것을 기뻐하며 이해룡이 한 말이었다.
그분은 지리산지구사령관을 옆에서 돕는다고 했다.
차마 지구사령관을 맡길 수가 없어서 그리 된 것이고,
사령관의 옆에 있는 것이 아니고
‘위’에 있다는 것을
하대치는 나름대로 판단하고 있었다
구례군당은 두 시간 남짓 지나 도착했다.
하대치는 허겁지겁 그쪽으로 뛰어갔다.
「장군 동지, 인자 오신게라.
피아골꺼정 무사허니 이동하고,
지 부대넌 쪼깐 아까 여그 도착혔구만요.」
하대치는 거수경례를 붙인 채 보고했다.
「아 하 동지, 수고하셨소.」
김범준이 따스하게 웃으며 경례를 받았다.
「인자 푹 쉬씨요, 하 동무.」
김범준의 옆에 선 지구사령관이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그들 두 사람은 대원 하나를 앞장세워
개울물을 건너갔다.
그들이 가고 있는 방향은 천막 쪽이었다.
앞장선 선요원이
가운데 어느 천막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김 장군 동지허고 지구사령 동지께서 오셨구만요. 」
선요원이 보초에게 말했다.
보초가 문득 긴장한 얼굴이 되더니
재빨리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되돌아나와 천막깃을 들춰올린 채말했다.
「안으로 드십시오. 」
키가 큰 김범준은 고개를 약간 구부리며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김 장군 동지,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굵으면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김범준을 맞이했다.
김범준은 손을 내미는 오십객의 남자가
이현상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범준이라고 합니다.」
김범준은 상대방의 손을 잡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인사드립니다. 이현상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통키의 이현상은 약간 올려다보는 눈길이었고,
키가 큰 김범준은 약간 내려다보는 눈길이었다.
두 사람은 웃음 띤 얼굴로
한동안 그렇게 서 있기만 했다.
그들 사이에는 초면 같지 않은 어떤 친숙함과
반가움이 오가고 있었다.
「저쪽으로 앉으시지요]
이현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김범준은 뒤에 서 있는 지구사령관을 인사시켰다.
이현상은 지구사령관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들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김범준은 이현상을 한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강건하게 다져진 체격에 기름한 얼굴은
중후하고 수려했다.
콧마루가 긴 높으담한 코가
어떤 품위를 지녔으면서도
남자다운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고,
유난히 맑은 눈은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예리한 빛을 품고 있었고,
귓밥이 많은 큰 귀는 복스러우면서도
인정이 많아보였다.
그리고, 가무잡잡한 얼굴에 잡히고 있는
몇몇개의 주름살들은
평생을 혁명의 길로 살아온
고난과 경륜을 담고 있었다.
그 전체적인 모습이 그 유명한 혁명가
이현상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김범준은 느끼고 있었다.
이현상은 빨치산답게 미군장교복 차림이었다.
혁대까지도 미군용이었다.
「김 동지의 경력은 대강 전해듣고 있습니다.
중국땅에서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자리를 잡은 이현상이
나지막하면서도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저야 뭐…. 적진 속에서 싸우시느라고
이 선생께서 고난 많이 겪으셨지요.」
「아닙니다, 숨어 사느라고 변변히
투쟁해본 적이 없어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저를 그냥 동지라고 불러주십시오. 」
이현상은 아까와는 다른 세심한 눈길로
김범준의 면모를 살펴보고 있었다.
「겸양의 말씀이십니다.
퇴로를 두고 적과 싸우는 것하고,
퇴로도 없이 적진 속에서 싸우는 것하고,
그 어려움은 비교가 될 수 없는 문제겠지요.
그건 성과로만 따질 성질의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김범준의 신중한 말이었다.
「예에..... 그런데 그게..…」
이현상의 미간이 좁혀들며
눈에 힘이 모아지는 듯싶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더 계속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입은 점점 굳게 닫혀지고 있었다.
김범준은 잔뜩 힘이 뭉쳐진 그의 입을 보면서
그가 무슨 속말을 되넘기고 있다는 것을
여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담배…. 태우십니까?」
이현상이 기분을 바꾸듯이 담뱃갑을 내밀었다.
「예, 고맙습니다.」
김범준은 이현상이 되넘긴 말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담배를 빼들었다.
그런데,
이현상이 기름한 가죽쌈지에서 빼든 것은 파이프였다.
그는 그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입에 물었다.
의외라는 느낌은 들었지만
그의 준수하고 중후한 면모에
파이프가 잘 어울린다고 김범준은 생각했다.
「파이프가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
「아닙니다. 뭐 멋을 부리자는 게 아니라
매번 말아 피우는 것이 번거롭고,
불빛도 막을 수 있고 해서 어쩌다 손에 들어온 것을 이용하고있을 뿐입니다.」
멋은 부수적인 것일 뿐인 셈이었다.
김범준은 그 세밀한 철저성에서
오랜 지하투쟁자의 일면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더 말이 없이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김범준은 조선공산당의 커다란 두 갈래인
남로당과 북로당, 그리고 거기에 연결된
국내파와 국외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이현상이 되넘긴 말은
그 당의 구조와 직결되는 것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것에 관한 발언은 곧 정치적인 것이었고,
그래서 무슨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김범준은 혁명과 정치의 그 복잡한 이질성을
오래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오로지 혁명전쟁의 시기라는 것만을 생각하고자 했다.
시월혁명 기념 씨름대회날은 더없이 쾌청했다.
시월의 청명한 햇살이 달궁에 가득 퍼지면서
기념식이 시작되었다.
남부군 사령부 병력과 전남·북,
경남도당의 대원들까지 합해
육백여 명이 넓은 풀밭에 도열했다.
시월혁명을 성취한 볼셰비키의
위대한 정신을 이어받아 해방투쟁을
더욱 가열하게 전개해나가자는 내용으로
이현상이 짤막하게 연설을 했다.
그리고 곧이어 씨름대회로 들어갔다.
맑은 날씨에 산들산들한 바람은
씨름판을 벌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가지가지 색깔로 물든 나무숲은
국민학교 운동회날 펄럭이는 만국기를과
다름이 없었고, 누릿누릿 변한 풀밭은
모래밭보다 더 좋은 씨름판이었다.
그리고 풀밭 가장자리에 매어진 황소가
씨름대회의 기분을 한껏 돋워올리고 있었다.
도당별로 뽑힌 선수들이 위통을 벗어젖히고 씨름판으로 나섰다.
씨름도 붙기 전에 각 도당의 대원들이
와아, 와아 소리지르며 응원을 해댔다.
그런 출렁거리는 열기와는 상관없이
하대치는 아까부터 한곳에만 눈길을 박고 있었다.
그의 눈길은 이현상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는 오래오래 간직해왔던 소망을
이루고 있는 참이었다.
그는 가까이 가서 인사를 드리고 싶은 간절함으로
이현상에게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건새로 생겨난 욕심이었다.
그전의 바람은 그저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보는 것이었다.
「와아, 다리 걸어라, 다리!」
「어, 쩌쩌쩌쩌…」
「넘겨라, 넘겨!」
대원들은 제각기 외치고 손짓해가며
신명을 올리고 있었다.
하대치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위통을 벗고 씨름판으로 나서며
두 팔을 휘둘러댔다.
그의 부대원들이 박수를 쳐대며 소리소리 질렀다.
샅바를 잡고 일어서며 하대치는
벌써 상대방이 싸울 상대가 못된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어깨와 다리에 받쳐 오는 힘이
영 시원찮았던 것이다. 기술을 쓸까,
기운을 쓸까를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기왕 기운을 한판 쓰기로 한 것,
다음 판을 위해 기운을 돋울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생각한 순간 하대치는 허리를 불끈 세우며
두 팔을 끌어당겼다.
상대방이 붕 떠올랐다.
하대치는 허리를 약간 비틀었다.
그 연속동작에 상대방은
허망하게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다섯 판을 별 어려움 없이 이기고
하대치는 여섯 판째에서 결승전에 나서게 되었다
소가 대장님 보고 웃소 」
「우리 대장 동지가 비문할라고,
대원들이 신바람나서 말들을 다투었다.
하내치는 씨름판으로 나서며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어깨가 떡 벌어진 체구에 젊디젊은 얼굴이었다.
나이가 스물이나 됐을까....…
허리치기 와 다리치기가 눈에 들어오던 대원이었다.
하대치는 두 팔을 벌리며 숨을 양껏 들이켰다.
가슴이 팽창되며 양쪽 옆구리에 힘이
팽팽하게 잡히는 것을 느것다.
상대방을 보기좋게 메다꽂고 싶은
전의가 솟구쳐 올랐다.
하대치는 상대방의 다리 샅바를 틀어잡으며
손목을 확 꺾었다.
손목에 느껴지는 상대방의 힘이 제법 짱짱했다.
힘을 써볼 만한 상대라는 느낌이 들었다.
샅바잡기가 끝나고 서로의 힘을 어깨로 받치며
두 사람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대치는 그때 약간 거친 숨소리와 함께
상대방의 힘이 자신의 어깨에 얹히는 것을 느꼈다.
묘한 탄력을 지닌 그 힘에서 하대치는 문득
자신의 그만한 나이때를 떠올렸다.
기운이 펄펄했던 만큼 이기고 싶은 기도
펄펄했던 나이였다.
아니나다를까 상대방이 먼저 공격을 가해왔다.
들어치기 같으면서 허리치기로 들어왔다.
하대치는 상대방의 샅바를 확 끌어당기면서
허리를 뒤로 뺐다.
공격을 피하면서 상대방의 중심을
허물어뜨리는 것이었다.
상대방이 흔들리는 느낌과 함께 하대치는
다리걸기로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상대방의 기운은 예사가 아니었다.
분명 다리가 감겼는데도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큰 몸집으로 누르고 들었다.
다리를 감은 채 눌리면서 밀리다가는
볼품없이 주저앉게 될 것이었다.
하대치는 다리를 풀면서
허리치기로 연결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몸의 중심을 뒤로 빼며 다리를 풀었다.
그 순간이었다. 상대방이 엎어치기로 들어왔다.
하대치는 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면서, 하먼 나이 한 살이라도
덜 묵은 기운이 이겨야 순리제,
하는 생각과 함께 하대치는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한순간에 골짜기와 사람들과 하늘이
빙그르르 뒤집히는 것을 보며
하대치는 풀밭에 쿵 나가떨어졌다.
어느 때 없이 큰 함성이 터져올랐다
풀밭에 주저앉은 하대치는 웃는 얼굴로
상대방을 올려다보며 팔을 뻗했다.
얼굴이 상기된 젊은이가
하대치의 손을 붙들어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보며 대원들의 함성과 박수소리가
다시 터져올랐다.
「동무, 기운 참 씨요. 투쟁 잘 허씨요이..
하대치가 젊은 대원의 어깨를 두들겼다.
「야아, 상한 데 없는교?」
젊은 대원이 고개를 꾸뻑했다.
「대장님, 아실아실혔는디요이.」
「와따 수고허셨구만이라.」
「참말로, 황소 내주기넌 아까운디요. 」
대원들이 박수를 치며 하대치를 맞이하면서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저 사람이 나보담 훨썩 씨요.
젊은 기운에 기술할라 존께 나가 지는
것이야 당연지사요.」
하대치의 구김살없는 말이었다.
젊은 장사에게 소가 상으로 주어졌다.
그리고 그 소는 오늘의 잔치를 위해 곧 잡게 되었다.
점심때가 다 되어 있었던 것이다.
소잡이에 지난날 백정 노릇을 했던
대원들이 자진해서 나선 것은 물론이었다.
「간은 몰라도 붕알이야 우리 대장님 차진께
나도 나서야 쓰겠소. 」
천점 바구가 그들 사이에 끼려고 나서며 한 말이었다.
부대마다 소고기가 나눠졌다.
고기를 굽고 끓이는 냄새가 달궁 골짜기에 진동했다.
대원들의 흥겨운 웃음소리와
정다운 이야기들이 오가며
푸짐한 점심이 준비되고 있었다.
천점바구는 정말로 축 늘어진 소불알을 가져와
한바탕 부대원들의 박수를 받았다.
점심을 배불리 먹은 대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락회였다.
오락회는 씨름대회 못지않게
모든 대원들을 흥겹고 즐겁게 만들었다.
여성대원들이 참여한 까닭인지도 몰랐다.
문화공작대가 이끌어가는 오락회는
다채롭고도 성대했다.
단막극 ·노래·집단춤· 개인 장기 등으로
엮어지면서 흥겨움이 넘쳐났다.
해가 지면서 오락희가 막을 내렸는데,
그 마지막 순서는 빨치산의
노래' 합창이었다.
태백산맥에 눈 날린다.
총을 메어라 출전이다.
눈보라는 밀림에 우나
가슴속에 피끓는다.
참고 견디는 고향 마을
만나러 가자 출진이다.
고난에 찬 산중에서도
승리의 날을 믿었노라
높은 산을 넘어넘어
눈에 묻혀 사라진 길을 열고
빨치산이 영(嶺)을 내린다.
원수를 찾아 영을 내린다.
모든 대원들은 똑바로 서서 합창을 하고 있었다.
약간 애조를 띤 듯 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노랫소리는
우렁차게 달궁 골짜기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서쪽 하늘에서는 노을이 붉게 타고 있었다
첫댓글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
열권 중 마지막 권인 10권
그 중에 25번 째 주제 '피아골'
상당히 많은 량의 글을
빅스비로 옮겨 적었습니다.
빅스비의 사용이 아직은 익숙치 않아선지
글자를 잘못인식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다시 본문을 보며 확인되는대로 수정을 했으나
그래도 잘못 표시된 글자가 있어
문장연결이 끊어질 수 있음을 참고하셔서
전체 흐름을 고려해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