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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39권, 숙종 30년 3월 27일 병인 1번째기사 1704년 청 강희(康熙) 43년
사은사가 돌아오다
사은사(謝恩使) 여산군(礪山君) 이방(李枋), 부사(副使) 서문유(徐文𥙿), 서장관(書狀官) 이언경(李彦經)이 청(請)나라에서 돌아왔다. 임금이 인견(引見)한 다음 위유(慰諭)하고, 이어 그곳의 일들에 대해 하문하니, 방 등이 도로(道路)에서 들은 것으로 아뢰기를,
"산동(山東)은 자주 수재(水災)를 입어 백성들이 모두 유리(流離)하였는데, 그 가운데 강장(强壯)한 사람들은 모여서 도적이 되었습니다. 우주(于州)에는 회회적(回回賊)이 있고 광서(廣西)에는 홍묘적(洪苗賊)이 있습니다. 이른바 장비호(張飛虎)란 자는 무리가 10여 만에 선박도 수백 척인데, 해중(海中)을 떠나니 못한 채 먼저 참람된 연호(年號)를 세웠으니, 그에게 큰 뜻이 없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숙종실록 41권, 숙종 31년 1월 26일 신유 1번째기사 1705년 청 강희(康熙) 44년
사신으로 다녀온 임창군 이혼·이세재·이하원 등을 인견하다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돌아온 임창군(臨昌君) 이혼(李焜)과 이세재(李世載)·이하원(李夏源) 등을 인견(引見)하였다. 이보다 먼저 사신 등이 별단(別單)으로 치계(馳啓)하였는데 이르기를,
"장비호(張飛虎)란 자가 삼선도(三仙島)를 점거하여 출몰(出沒)이 무상(無常)하며, 또 백씨(白氏) 성(姓)을 가진 여자 장수가 있는데 날래고 용맹스럽기가 비할 데 없으므로, 청(淸)나라 사람들이 제어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세재가 말하기를,
"이른바 장비호(張飛虎)란 자에 대하여 어떤 이는 ‘삼산도(三山島)에 있다.’고 하는데, 삼산도는 산동성(山東省)의 바다 가운데 있으며 우리 나라와는 서로 가깝습니다. 혹 어떤 이는 ‘삼선도(三仙島)에 있다.’고 하는데, 이 섬은 절강성(浙江省)과 복건성(福建省) 근처에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이른바 제본(題本)069) 을 얻어 왔더라도 의거하여 믿을 것은 못되는데, 만약 삼선도에 있다면 우리 나라의 근심은 조금 덜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청주(淸主)가 사냥하기를 좋아하며 뇌물이 멋대로 행해지고 인재의 등용이 고르지 않으므로 인심(人心)이 좋아하지 않으나 다만 재물을 소중히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황태길(黃台吉)인데, 황태길이 만약 움직이면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전생기(田生琦)란 사람을 만났는데, 그에게 물으니 ‘계씨(季氏)의 근심은 소장(蕭檣)에 있고 전유(顓臾)에 있지 않다.070) ’고 하였는데, 비록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지만 국내의 근심거리가 있는 듯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세재가 또 두 통의 문서(文書)를 올리며 말하기를,
"명나라의 자손으로 주안세(朱安世)란 사람이 수양(睢陽)을 습격하였는데, 장비호(張飛虎)에 비하여 조금 강대하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저들이 영고탑(寧古塔)으로 굴혈(掘穴)을 삼았는데도 견고하다고 여기지 않고서 심양(瀋陽)에 힘을 다 기울여 제택(第宅)과 인력(人力)이 북경(北京)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또 관장(串傷)은 심양(瀋陽)과의 거리가 12일 노정(路程)인데도 심양보다 웅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汗)의 묘(墓)를 보았는데, 웅장하기가 견줄 데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심양은 바로 그들의 근본 지역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세재가 말하기를,
"저들이 비록 패배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심양(瀋陽)에 웅거할 것이며, 만약 심양을 잃은 뒤에는 틀림없이 영고탑(寧古塔) 등지로 갈 것이니, 서쪽의 근심은 북변(北邊)보다 줄어든 듯합니다."
하였다.
[註 069]제본(題本) : 왕이나 상급 관청에 올리는 문서의 초본.
[註 070]계씨(季氏)의 근심은 소장(蕭檣)에 있고 전유(顓臾)에 있지 않다. : 노(魯)나라 계씨(季氏)가 전유(顓臾)를 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제자인 염유(冉有)와 계로(季路)에게 듣고 공자(孔子)가 한 말로, 계씨의 근심은 전유를 공격하여 차지하는 데 있지 않고 문교(文敎)와 도덕(道德)이 닦아지지 않음으로 인심이 이반된 국내(國內)에 있다고 한 고사를 인용한 말.
숙종실록 41권, 숙종 31년 4월 6일 기사 2번째기사 1705년 청 강희(康熙) 44년
이이명·이희무 등이 청으로부터 돌아와 해적 장비호의 패망을 아뢰다
동지 정사(冬至正史) 이이명(李頤命)·부사(副使) 이희무(李喜茂)·서장관(書狀官) 이명준(李明浚)이 청(淸)나라로부터 돌아왔다. 임금이 인견(引見)하니, 이이명이 말하기를,
"신이 해적(海賊) 장비호(張飛虎)에 대한 확실한 내막을 알기 위해서 역관(譯官)을 시켜서 내각(內閣)의 장핵비(張翮飛) 문서(文書)를 가까스로 구해서 보니, 과연 바로 산동(山東) 순무사(巡撫使) 제본(題本)의 진본(眞本) 문서였습니다. 해적을 섬멸시킨 한 가지 일은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기를, ‘과연 패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북경(北京)은 바다와의 거리가 하루 일정(日程)에 불과하니, 만일 해적의 우환이 있다면 북경이 반드시 요란할 터인데 지금 아무 일도 없으므로, 그들이 확실히 패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 문서(文書)를 본다면 해적(海賊)이 섬멸되었음은 의심할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청(淸)나라가 새로 경하(慶賀)의 표전식(表箋式)을 반포하여 우리 나라로 하여금 해마다 이 서식에 의거하여 방물(方物)240) 과 사은(謝恩)하는 표전(表箋)을 올리도록 한 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註 240]방물(方物) : 토산물(土産物).
숙종실록 43권, 숙종 32년 3월 15일 계유 2번째기사 1706년 청 강희(康熙) 45년
돌아온 동지사가 장만종의 일을 별단으로 서계하여 말하다
돌아온 동지사(冬至使)가 별단(別單)으로 서계(書啓)하여 말하기를,
"‘장비호(張飛虎)의 아들 장만종(張萬鍾)이 무리를 모아 삼산도(三山島)에 둔주(屯住)하였다.’ 하고, 또 ‘장만종이 관군(官軍)에게 초멸(勦滅)되었다.’는 말이 있으나, 진위 허실(眞僞虛實)은 헤아려 알기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였다.
숙종실록 47권, 숙종 35년 3월 3일 갑술 3번째기사 1709년 청 강희(康熙) 48년
동지사의 선래가 가지고 온 장계를 들이다
동지사(冬至使)의 선래(先來)가 가지고 온 장계(狀啓)가 들어왔는데, 그 장계에 이르기를,
"대개 듣건대 황제(皇帝)가 태자(太子)를 폐한 뒤에 곧 도로 뉘우치고서 다시 세워 태자로 삼았고, 장차 내달 초에 고묘(告廟)하고 반사(頒赦)한다고 했고, 칙사(勅使)로 내보냈던 장비호(張飛虎)의 아들 장만종(張萬鍾)이 바다의 섬을 차지하고 있는데 군사 기세가 자못 왕성하다 했고, 숭정 황제(崇禎皇帝)의 셋째 아들의 촌락(村落)사이에 유리하다가 요사이 절강(浙江)에서 군사를 일으켰다고 하였는데, 혹자의 말은 ‘이미 평정했지만 여당(餘黨)이 아직도 남아 있고 이밖에도 해적(海賊)들이 또한 많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숙종실록 50권, 숙종 37년 4월 30일 무자 2번째기사 1711년 청 강희(康熙) 50년
연은문 괘서 사건이 발생하다
지난밤에 연은문(延恩門)에 괘서(掛書)한 사건이 있었는데, 조선국(朝鮮國)에 고유(告諭)한다고 일컬은 글이었다. 그 글에 이르기를,
"대개 듣건대 이적(夷狄)을 물리치고 악인[凶穢]을 제거하는 것은 임금[天吏]의 큰 책무인지라, 사양(辭讓)할 수 없는 바이며, 먼저 고유(告諭)하고 뒤에 갑병(甲兵)을 일으키는 것은 왕이 된 자의 성대한 절차이니,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호명(胡命)189) 은 백년(百年)의 오랜 궁진함을 당하였고, 황강(皇綱)은 다시 창성할 운세에 속하였으니, 비유하건대 일월(日月)이 잠깐 일식(日蝕)·월식(月蝕)을 하였다가 도로 밝아지고, 절서(節序)가 벗겨지고 떨어지면 반드시 소복(蘇復)함과 같은 것이다.
저 청호(淸胡)190) 라는 자가 일시적인 소[牛]·양(羊)의 힘을 업고서 백대(百代)를 이어온 문물(文物)의 나라를 별안간 침입하여, 우리 종팽(宗祊)191) 을 멸망시키고 우리 황통(皇統)을 찬탈하였었다. 하늘은 악덕[穢德]을 미워하는지라, 장성(長星)192) 은 오기(五紀)193) 의 요언(謠言)을 예언하였고, 운수는 진인(眞人)을 계도(啓導)하는지라, 황하(黃河)가 천년의 상서(祥瑞)를 고하였는데, 아직도 감히 내복(內服)에 의거하여 눈앞의 안일만을 탐하고 중원(中原)을 본래 소유(所有)한 것처럼 보아 사해(四海)의 재물을 모아서 그 소혈(巢穴)을 채우는 것이 어찌 연회(輦賄)의 어리석음과 다르며, 만승(萬乘)의 부(富)를 가지고서도 계산이 계돈(鷄豚)에 미치는 것은 이익을 독점하는 천박함보다 심함이 있다. 호걸(豪傑)이 봉기(蜂起)하는 데도 미친 개[猘獷]처럼 오히려 멋대로 행동하고, 부자(父子)가 암컷을 함께 하고도194) 음란하고 잔학함을 고치지 않으니, 이 어찌 수달[獺]이 물고기를 몰면서 암무지개[霓]가 돌아갈 곳이 있기를 바라고, 하늘이 혼백을 빼앗으니 귀신의 죽음이 장차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하건대 우리 성상(聖上)의 그 신무(神武)하심은 진실로 타고난 모습에서 품부(稟賦)하였고, 세주(世胄)195) 를 서로 제실(帝室)에서 이어받으셨도다. 혁혁(赫赫)한 빛이 사해(四海)를 탕평(蕩平)하니 헌후(軒后)196) 의 홍류(虹流)의 상서로움을 지나고, 신령한 거북이 구주(九疇)를 계도(啓導)하니 성조(聖祖)가 가람(伽藍)의 점친 것에 부합하도다. 의려(義旅)197) 를 처음 일으키니, 해외(海外)의 12국(國)이 표문(表文)을 받들어 신(臣)이라 일컬었고, 천병(天兵)이 잠깐 임(臨)하니 강좌(江左)의 수천 리가 격문(檄文)을 따라 귀순하였다. 막하(幕下)198) 의 모사(謀士)는 수레에 두량(斗量)하여 실을 만큼 많았으며, 군전(軍前)의 맹장(猛將)은 안개가 잡답(雜畓)하고 구름이 둔취(屯聚)한 듯하였다. 정 군사(鄭軍師)의 신기(神機)199) 는 지난날의 관중(管仲)·제갈양(諸葛亮)이요, 장 원수(張元帥)의 웅략(雄略)은 오늘의 한신(韓信)·팽월(彭越)이었다. 유 독부(劉督府)는 눈앞에서 견고한 성(城)을 잃게 되었고, 경홍추(耿鴻樞)의 계산으로도 유책(遺策)이 없었다. 여 선생(呂先生)의 소매 속에는 천지(天地)를 번도(飜倒)200) 하는 조화(造化)의 관건(關鍵)을 유백온(劉伯溫)에게 사양하지 않으며, 정 조사(鄭祖師)의 흉중(胸中)에는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바닷물을 줄이는 법계(法界)의 기함(機緘)201) 이 실상 요광효(姚廣孝)를 넘으니, 이는 모두 주(周)나라의 십란(十亂)202) 이며, 한(漢)나라의 삼걸(三傑)203) 이다. 이들이 정벌(征伐)하면 어떤 적(敵)인들 꺾이지 않겠으며, 이들로 무수(撫綏)204) 하면 어떤 먼 곳인들 복종하지 않겠는가? 바야흐로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속국(屬國)을 규합(糾合)하여 백년토록 오래된 포구(逋寇)205) 를 소탕하고 일통(一統)의 옛 터전을 회복하리라.
돌아보건대 조선(朝鮮)은 본시 예의지국(禮義之國)으로 일컬었고, 대대로 충정(忠貞)을 돈독히 하였다. 어진 임금 6, 7인이 나라의 바탕을 이룩한 이래로 영조(靈祚)206) 가 3백 년의 오랜 세월에 이르도록 천자(天子)에게 미부(媚附)하였고, 제후(諸侯)의 법도를 정성껏 부지런히 힘써서 잘못이 없었다. 돌아보건대 이 번방(藩邦)을 황조(皇朝)에서 예(禮)로써 대함이 박하지 않았고, 생각하건대 우리 만력 황제(萬曆皇帝)207) 께서 명하여 궁중의 재화(財貨)를 가지고 이 동방(東方)에 혜택을 베풀게 하였으니, 그 은택(恩澤)이 망극(罔極)한 지라, 그대 삼한(三韓)208) 의 군신(君臣)은 뼈에 새기고 마음속에 새겨 후손(後孫)에 이르기까지 감사하고 떠받들기를 끝이 없게 함이 마땅할 것인데, 어찌하여 흉노(凶奴)의 뜰[庭]에 무릎을 꿇고, 신첩(臣妾)의 욕(辱)됨을 달게 여긴단 말인가? 만약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살코기를 삼키는 법이어서 부득이 항복하여 의부(依附)하였다고 말한다면 혹은 그럴 수도 있겠지마는, 천조(天朝)를 공격하는 것을 돕는 데에 이르러서는, 차마 이런 흉역(凶逆)한 짓을 하다니, 그대에게는 편안하던가?
또 오랑캐에게 항복한 원수(元帥)는 그 죄가 옛 이능(李陵)209) 보다 큰 것이었으나 마침내 부월(鈇鉞)의 죽임을 면하였고, 임금을 판 모신(謀臣)은 그 간악함이 진회(秦檜)210) 보다 지나쳤는 데도 도리어 기상(祈常)211) 의 은총을 크게 내렸으니, 그 악한 사람을 징계하는 데 절연(截然)함이 있다고 말하더라도 토죄(討罪)하는 데 엄중하지 못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아! 손가락을 꼽아 그 죄(罪)를 헤아린다면 마땅히 왕주(王誅)에 복종하여야 하며, 눈을 씻고서 그 정사를 보면 천토(天討)를 피(避)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훈(祖訓)이 아직도 있다면 감히 용물(容物)하는 덕의(德意)를 잊겠으며, 대보단(大報壇)212) 을 새로이 창건하였으니 존주(尊周)하는 평소의 정성을 믿을 만하므로, 아직은 문죄(問罪)하는 군사[師旅]를 정지하고, 먼저 유의(諭意)하는 격문(檄文)을 날려 보내노라.
생각하건대 추로(醜虜)213) 의 이경(二京)보다도 지름길로는 빠르나, 만해(蠻海)의 제국(諸國)과 도리(道里)는 균일하다. 한없이 넓은 바다는 온전히 익수(鷁首)214) 의 바람에 의지하고 삼지(三枝)의 기번(旗旛)은 바야흐로 제잠(鯷岑)215) 의 길을 빌려, 성낸 범과 같은 장병을 길러 견양(犬羊)의 소혈(巢穴)을 탐색하고, 황월(黃鉞)216) 과 백모(白旄)로 성전(腥羶)217) 을 환우(寰宇)218) 에서 소탕하고는 상명(桑溟)의 닻줄[纜]을 놓으니, 검기(劒氣)에 충돌되어 모두(旄頭)를 떨어뜨리고 계수(桂水)에 돛을 열었으니, 부고(府庫)를 다하여 전사(戰士)에게 호궤(犒饋)219) 하리로다.
이에 출전(出戰)할 기일을 다시 가리니 날짜가 길(吉)하고 때가 좋으며, 제왕(帝王)의 군사가 만전(萬全)하니 명분이 바르고 말이 사리에 순(順)하도다. 귀국(貴國)은 휴양(休養)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어찌 일전(一戰)할 마음이 없겠는가? 국토[壤地]는 비록 편소(褊小)하더라도 천리(千里)의 땅을 가지고서 두려워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노라. 모순(矛楯)을 불리고 갑주(甲胄)를 수선하여 향도(鄕導)할 군사를 정비하여 단속하고, 마초(馬草)를 쌓고 군량(軍糧)을 마련하여 일찍 호말(犒秣)220) 할 기구(器具)를 판비하여, 돈호(敦好)의 예(禮)를 크게 닦고 강사(講事)하는 사령(使令)을 급히 위촉해야 할 것이다. 아! 혹은 이 나루[津]를 건너 경계(境界)를 지나는 날에, 영송(迎送)하는 의절(儀節)을 어기지 않는다면, 뒤에 분봉(分封)221) 하고 정공(定功)222) 할 때에 어찌 절충(折衝)223) 한 효험이 없으랴? 만일에 혹 다른 생각을 망령되게 일으켜서 스스로 그 허물을 부르게 되면, 비록 궁지에 몰린 호(胡)에게 의뢰(倚賴)하려 하더라도 그 이로움을 보지 못할 것이다. 삼한(三韓)이 대려(大呂)224) 보다 중할 때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며, 9세(九世)의 깊은 원수를 보복할 기회가 이 한 번의 거사(擧事)에 있으리니, 아직도 순마(楯馬)의 여온(餘蘊)을 머물러 두어 사개(使价)가 내조(來朝)하기를 기다리겠노라."
하고는, 말단(末端)에, ‘후홍무(後洪武)225) 3년 2월 일(日)에 천조 대원수(天朝大元帥)는 격(檄)한다.’고 쓰였는데, 종이는 당지(唐紙)를 사용하였고, 글자는 《홍무정운(洪武正韻)》의 서체(書體)를 썼으며, 진홍(眞紅) 빛깔로 ‘천하대원수장(天下大元帥章)’이란 여섯 글자의 전인(篆印)을 어지럽게 찍었다. 날이 밝아지자 길을 가던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다투어 보니, 부관(部官)이 감히 가리어 두지 못하고 이를 취하여 판윤(判尹) 황흠(黃欽)에게 고하였다. 황흠이 이 글을 소매 속에 넣고 예궐(詣闕)하여 장차 청대(請對)하려고 하다가 혹시 곧장 소요(騷擾)를 초치(招致)할까 염려하여, 단지 낭청(郞廳)으로 하여금 정원(政院)에 전하게 하였다. 정원에서 사알(司謁)을 시켜 미품(微稟)226) 하고 봉입(封入)하니, 임금이 특명(特命)으로 시임 대신(時任大臣)·원임 대신(原任大臣)을 패초(牌招)하고는 격문(檄文)을 내보이고 말하기를,
"진위(眞僞)가 어떠한가?"
하니, 영의정(領議政)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글자의 모양과 문체(文體)가 중국 사람의 소위(所爲)는 아닌 것 같습니다. 황명(皇明)의 자손(子孫)으로 강대하기가 과연 이와 같다면 마땅히 서남 해변(西南海邊)으로부터 정당하고 분명하게 상통(相通)할 것이지 하필이면 자취를 감추고 괘서(掛書)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이것이 중조(中朝)의 격문(檄文)이라면 반드시 이를 밤 사이에 몰래 연은문(延恩門)에 걸지는 않았을 것이며, 또 그 조어(措語)가 거짓되고 속인 것이 명백하다. 비록 중조를 가탁(假托)하여 일컬었으나 항로 원수(降虜元帥), 매주 모신(賣主謀臣), 대보 신건(大報新建) 등의 말을 어찌 해외(海外) 사람이 알 것인가?"
하니,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아뢰기를,
"정(鄭)·장(張)이라고 이른 것은 정금(鄭錦)·장비호(張飛虎)의 자손을 가탁(假托)한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명백히 이것은 인심(人心)을 혹란(惑亂)케 하려는 계략이니, 강도(江都)의 투서인(投書人) 이유정(李有湞)의 예에 의하여, 1천 냥(千兩)의 은(銀)과 가선(嘉善)의 품계(品階)를 걸어 구포(購捕)227) 하게 하라."
하고, 이어 포청(捕廳)과 삼군문(三軍門)에서 이를 기찰(譏察)하도록 명하였다. 또 이유(李濡)의 말을 좇아,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그것을 등사(謄寫)하여 전하는 것을 엄금(嚴禁)하게 하였으니, 대개 저 사람들에게 새어 나갈 것을 염려함이었다. 임금이 또 평안 감사(平安監司)의 장계(狀啓)를 내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 장계를 보니, 조사하는 일이 장차 순탄하지 못할 듯하다. 만약 황지(皇旨)가 없다면 시종(始終) 핑계대며 기필코 넘어오려고 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였는데, 서종태가 아뢰기를,
"이미 우리 나라의 일로 경상(境上)까지 왔으니, 정성껏 접대하는 일이 전연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들이 만약 넘어온다면 어찌 전연 접대가 없을 수 있겠는가? 전번의 하교(下敎)에 의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서종태가 또 북한 구관 당상(北漢句管堂上) 민진후(閔鎭厚)를 대신하여 김우항(金宇杭)으로 차하(差下)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註 189]호명(胡命) : 청나라의 운명.
[註 190]청호(淸胡) : 청나라 오랑캐를 이름.
[註 191]종팽(宗祊) : 종묘(宗廟).
[註 192]장성(長星) : 병란(兵亂)의 전조(前兆)를 나타낸다는 별.
[註 193]오기(五紀) : 세(歲)·일(日)·월(月)·성신(星辰)·역수(曆數)의 총칭.
[註 194]부자(父子)가 암컷을 함께 하고도 : 《예기(禮記)》 곡례 상편(曲禮上篇)을 보면, "대저 금수에게는 예(禮)가 없다. 그런 까닭에 아비와 아들이 암컷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夫性禽獸無禮 故父子聚麀]"고 하였음.
[註 195]세주(世胄) : 세가(世家)의 후계자.
[註 196]헌후(軒后) : 헌원제(軒轅帝).
[註 197]의려(義旅) : 의군(義軍).
[註 198]막하(幕下) : 대장(大將)의 휘하.
[註 199]신기(神機) : 헤아릴 수 없는 기략.
[註 200]번도(飜倒) : 거꾸로 함.
[註 201]기함(機緘) : 기운(氣運)의 변화.
[註 202]십란(十亂) : 주(周)나라 무왕(武王) 때 나라를 잘 다스린 신하 10인, 곧 주공 단(周公旦)·소공 석(召公奭)·태공 망(太公望)·필공(畢公)·영공(榮公)·태전(太顚)·굉요(閎夭)·산의생(散宜生)·남궁괄(南宮适)·문모(文母:太任)임.
[註 203]삼걸(三傑) : 소하(蕭何)·장양(張良)·한신(韓信).
[註 204]무수(撫綏) : 어루만져 편안하게 함.
[註 205]포구(逋寇) : 도망간 구적(寇敵).
[註 206]영조(靈祚) : 선복(善福).
[註 207]만력 황제(萬曆皇帝) : 명(明)나라 신종(神宗).
[註 208]삼한(三韓) :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
[註 209]이능(李陵) : 전한(前漢) 때의 무인(武人). 무제(武帝) 때에 흉노(匈奴)와 싸워 고군 분투하다가 항복하니, 선우(單于)가 그를 우교왕(右校王)으로 삼았음.
[註 210]진회(秦檜) : 남송(南宋) 고종(高宗) 때의 재상(宰相). 자(字)는 회지(會之). 악비(岳飛)를 무고(誣告)하여 죽이고 주전파(主戰派)를 탄압하여 금(金)나라와 굴욕적인 화약(和約)을 체결하였으므로, 후세에 대표적인 간신(姦臣)으로 꼽힘.
[註 211]기상(祈常) : 해와 달을 그린 기. 공이 있는 자를 그 위에다 기록하였음.
[註 212]대보단(大報壇) : 명(明)나라 태조(太祖)·신종(神宗)·의종(毅宗)을 제사하는 사당. 조선조 숙종 30년(1704)에 창덕궁(昌德宮) 안에 설치하였음.
[註 213]추로(醜虜) : 더러운 오랑캐.
[註 214]익수(鷁首) : 뱃머리에다 익(鷁)이라는 물새의 형상을 그리거나 새긴 배.
[註 215]제잠(鯷岑) : 조선(朝鮮)의 별칭.
[註 216]황월(黃鉞) : 금으로 장식한 도끼.
[註 217]성전(腥羶) : 더러운 물건.
[註 218]환우(寰宇) : 천하(天下).
[註 219]호궤(犒饋) : 음식을 주어 위로함.
[註 220]호말(犒秣) : 호군(犒軍)과 말속(秣粟).
[註 221]분봉(分封) : 토지를 나누어 주어 제후를 봉하는 일.
[註 222]정공(定功) : 공훈을 정함.
[註 223]절충(折衝) : 쳐들어 오는 적의 예봉(銳鋒)을 꺾음.
[註 224]대려(大呂) : 옛날 중국 주(周)나라 대종(大鍾)의 이름. 주실(周室)의 보기(寶器)임.
[註 225]후홍무(後洪武) : 명나라 태조의 연호.
[註 226]미품(微稟) : 격식을 갖추지 않고 넌지시 아룀.
[註 227]구포(購捕) : 현상 체포(懸賞逮捕).
숙종실록 51권, 숙종 38년 7월 26일 정미 1번째기사 1712년 청 강희(康熙) 51년
사은사 박필성 등이 돌아와 청나라의 정황을 아뢰다
사은사(謝恩使) 박필성(朴弼成)·민진원(閔鎭遠)·유술(柳述)이 들어오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위유(慰諭)하였다. 박필성이 말하기를,
"신 등이 들어갈 때 심양(瀋陽)에 이르러 마침 목극등(穆克登)일행을 만났는데, 말하기를, ‘이번의 방물(方物)은 또한 반드시 제감(除減)될 것이다.’ 하더니, 과연 그 말과 같았습니다. 통관(通官)의 무리가 모두 말하기를, ‘목극등(穆克登)이 우리 나라를 위해 주선하니, 단지 방물의 견면(蠲免)뿐만 아니라, 경계를 정하는 것도 또한 잘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목극등이 우리를 위함은 믿을 수 있을 듯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그 황제(皇帝)가 재물을 탐하여 벼슬 임명을 모두 뇌물로 하는데, 장사꾼으로서 집을 화려하게 꾸미는 자가 있으면 곧 직급(職級)을 주며, 백성이 살기 어려워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다 합니다. 사관(使館)에 왕래하는 자로서 이와 같이 지적하고, 또 말하기를,
"황제의 장자(長子)가 깊은 곳에 갇혀 있는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그 아들이 장성하여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가 재촉하여 성혼(成婚)시킨다고 하며 명년이 곧 황제의 나이 예순이 되는 해라 마땅히 대사(大赦)가 있을 것이며, 칙사의 행차가 조선(朝鮮)으로 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신이 계주(薊州)에 이르렀을 때 행동거지가 다른 오랑캐의 다른 한 노인이 있기에, 신이 불러서 그 성명을 물었더니 ‘주(朱)’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성관(姓貫)을 물었더니, ‘감히 말하지 못하겠다.[不敢言]’란 세 글자를 손바닥에 써 보이며 ‘나는 황친(皇親)이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물어보았더니,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네째 아들의 이름이 의연(毅然)인데 자기의 증조(曾祖)가 되고, 의연의 아들이 사성(思誠)인데 사성의 아들 윤(倫)이 곧 자기의 아버지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이 뒤바뀔때 어떻게 화(禍)를 면하였느냐.’고 물었더니, ‘나의 아버지가 동쪽으로 유적(流賊)을 치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여 이내 이 땅에 살면서 정함장(丁含章)으로 성명을 바꾸었다.’ 하고, 이어 신 등의 의관(衣冠)을 살펴보더니 감창(感愴)한 안색으로 눈물을 떨구며 오열하였습니다. 또 ‘남방(南方)에 경보(警報)가 있다고 하는데 믿는가.’ 하고 물었더니, ‘광동(廣東)의 해적(海賊)은 실지는 황명(皇明)의 후손이요 장비호(張飛虎)·장만종(張萬鍾)은 모두 그 장수이다. 바다에 출몰(出沒)하며 군성(軍聲)이 크게 떨치니, 청나라 장수 네 사람이 싸움에 패하여 항복하고 복건(福建) 땅을 이미 그 절반을 차지하였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호인(胡人)은 한 번 말하면 곧 그 값을 요구하는데, 이 사람은 값을 요구하지 않고 그 감창함이 성심(誠心)에서 나오는 듯하였습니다. 또 주인에게 물은즉 말하기를, ‘그 사람이 바로 정함장이다.’라고 하였으니, 성명을 고쳤다는 말도 또한 믿을 수 있을 듯합니다. 다만 신종(神宗)의 아들은 곧 태창(泰昌)374) 으로 그 휘(諱)가 상락(常洛)인데, 의연이 신종의 아들이라면 이름이 같지 않아 이것이 의심스러웠습니다만, 미처 힐문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북경(北京)에 있을 때 서반(序班)375) 이 전하는 바를 듣건대, ‘장만종의 아들은 산동(山東)에서 소요를 일으키고 있고, 또 정원군(鄭元軍)은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오랑캐를 평정하고 명나라를 세운다.」[定胡扶明]는 네 글자를 기(旗)에 걸어 향하는 곳에 적(敵)이 없다.’고 하였으니, 대략 주(朱)가 전한 바와 서로 같았습니다. 돌아올 때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러 또 교수(敎授)로서 정씨(井氏)성을 가진 자가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외환(外患)은 족히 근심할 것이 없고, 황제의 장자와 태자(太子)의 원수 같은 사이가 갈수록 깊어지니 소장(蕭墻)376) 의 근심이 걱정스럽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서장관(書狀官) 유술이 바야흐로 집의(執義)의 직임을 띠고 연중(筵中)에서 앞서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이날 유술이 유혁연(柳赫然)과 이원정(李元楨)에게 내린 명을 환수(還收)하라는 논계를 정지하였다. 부교리(副校理) 오명항(吳命恒)이 상소하여, ‘갑자기 등대(登對)하여 급급하게 임의로 정계(停啓)한 것은 해괴한 일이다.’고 하면서 속히 견벌(譴罰)을 행할 것을 청하니, ‘혼자 중론(重論)을 정지함은 진실로 놀랍다.’며 특별히 파직(罷職)하라고 명하였다. 수찬(修撰) 홍중휴(洪重休)가 소(疏)를 올려 이를 신구(伸救)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註 374]태창(泰昌) : 명(明) 광종(光宗)의 연호(年號).
[註 375]서반(序班) : 중국 명대(明代)·청대(淸代)의 관직명(官職名). 백관(百官)의 반차(班次)를 관장함.
[註 376]소장(蕭墻) : 내부의 변란(變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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