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운조루, 종손에게 고택은 무엇인가?
지난 100년 동안 우리는 일제 식민지와 6.25, 그리고 근대화의 격동기를 거쳤다. 격동기에는 아픈 댓가도 많이 치렀다.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과 조상들이 후손들에게 남겨 준 값진 전통 등, 특히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반드시 지켜야할 요소들을 많이 잃었다. 구례 운조루는 이런 점에서 그 동안 우리가 잊고 살았던 이웃에 대한 배려와 나눔의 정신들을 일깨우는데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특히, 아름다운 고택 운조루 뿐 만 아니라, 고택에 살고 있는 후손들의 지난한 삶을 통해 우리가 앞으로 어떤 생각과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느끼게 할 수 있는 것 같다. 노블레스 오불리제로 일컫는 가진 자의 배려는 생각만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행동함으로써 더욱 아름답고, 행동할 때에 배려로 인해 부담스러워 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또 하나의 배려라 생각한다. 고택 운조루가 오늘날 다시 각광받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고택, 집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운조루 곳곳에 담겨있는 가슴 따뜻하게 하는 훈훈한 정신이 아닌가 생각한다.
■주요내용 구례 운조루는 1776년 정조때 류이주라는 분이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99칸으로 지은 대저택이다. 류이주라는 분은 조선시대 무관으로서 성곽 건축과 궁궐공사를 담당했던 어른이다. 류이주 어른이 쌓은 성곽은 수원화성, 남한산성, 상담산성, 낙원읍성 등 이름 만 들어도 익히 알 수 있는 건축물들이 많다. 류이주 어른의 능력은 수원화성을 쌓은 후 너무 견고하고 아름답게 쌓아올려 완공기념 낙성연을 임금께서 하사한 것만으로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풍수에도 일가견이 있어 전국 팔도를 두루 돌며 명당터를 보기도 했다. 구례 운조루는 조선의 3대 길지 중 하나인 바로 토지면 오미리에 류이주 어른이 낙안군수로 부임하면서 짓게된다.
운조루에는 몇가지 정신이 있다. 그 중에 타인능해(他人能解)정신을 최고 으뜸으로 들 수 있는데, 운조루 안채와 사랑채에는 곡식이 닷섬 들어가는 커다란 목독(나무로 된 뒤주)가 있고, 곡식을 꺼낼 수 있눈 구멍을 만들어 그 입구에 타인능해라 써 놓은데에서 유래한다. 타인능해 정신은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이 곡식이 떨어졌을 때 언제든지 운조루에서 먹을 만큼 꺼내갈 수 있도록 하였다. 비단 굶는 이웃 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과객이나, 걸인들도 운조루를 자주 찾았다 전한다. 류이주 어른은 아들 유덕호에게 남에게 베풀어야 복을 받는다고 하며, 며느리에게도 항시 타인능해 목독에 쌀이 남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보살피라 일렀다. 만약 살이 남거나 떨어지면 며느리를 혼냈다 할 정도였다고 전한다. 이웃을 생각하는 나눔과 배려의 마음은 단순히 곡식을 나누어 주는데서 그치지 않는다. 운조루의 굴뚝은 굴뚝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낮게 되어 있다. 그것은 가난한 이웃들이 운조루의 굴뚝에서 밥짓는 연기가 높이 솟아 오르면 마음이 상할까 생각해 류이주 어른이 굴뚝을 모두 낮게 하였다. 요새 이웃돕기를 하면 방송에서 누가 얼마를 냈느니 하면서 자기를 알리기 위해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적선이다. 받는 사람이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타인능해 목독이 있는 곳에는 안사람들이 출입을 할 수 없도록 항상 닫아 놓았다고 한다.
233년이 지난 운조루는 지금도 후손들이 고택에 살고 있다. 해방 전까지 만 해도 운조루에는 200여명의 하인들이 있었다. 6.25전쟁으로 시대가 바뀌어 반상이 없어졌을 때도 이미 하인들을 내보냈지만, 많은 하인들이 운조루가 유지되도록 도왔다 한다. 구례 운조루는 지리산 피아골에서 지근거리에 있다. 그 만큼 이념 대립이 치열했던 곳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운조루는 살아남았다. 역사의 격동기를 눈으로 목격한 노종부 이길순 할머니는 그때의 일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아픈 사연도 있다. 전국의 고택들은 도둑이 안든 집이 없을 정도로 문화재 도둑들의 극성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운조루도 비켜갈 수 없었다. 종손 류홍수씨가 문화재 도둑들에게 머리를 크게 다쳐 2년여 동안 병원에서 지내고, 그 후유증으로 사람을 피하기 까지 했다. 단순히 물건만 훔쳐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까지 헤치는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그 이후로 무려 17번이나 더 도둑을 맞았다고 하니 할말이 없다. 형이 도둑들에게 다쳐 운조루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셋째 동생인 류정수씨가 형을 돕기로 작정하고 구례로 내려온다. 류정수씨는 도시에서 대학도 나오고 직장생활을 한 도시사람이었다. 결혼도 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운조루를 지키기 위한 사명감 하나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류정수씨는 형을 도와 묵묵히 운조루를 지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도시생활을 접고 내려올 때 반대했던 아내도 이제는 운조루를 알리는 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운조루 사람들은 운조루가 어떻게 보면 애물단지일 수도 있다. 조상이 남겨주었을 뿐, 고택으로 인해 종손으로 머리를 다쳐 병원신세를 졌고, 형을 돕기 위해 잘 살던 동생은 도시생활을 접고 내려오고, 대저택을 유지하기 위한 삶은 그야말로 전투이다. 230여년이 지나 집은 허물어져 가고, 살림은 나아지지를 않고, 구경오는 사람들은 문화재의 우수성만 이야기 했지 관리하기 위해 노력하는 후손들의 노력은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나마 문화관광부가 발벗고 나서서 집을 보수하고 있다. 다행스런 일이다.
오늘날 문화재는 유리상자 속에 박제되어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운조루를 보면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로 인해 늘 따뜻하고,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박제되지 않은 문화를 접할 수 있다. 그것은 류이주 어른이 운조루를 축조할 때부터 생각하고 행동한 나눔과 배려의 정신이 느껴지기 때문은 아닐까? 구례 운조루를 들르게 되면 노종부 이길순 할머니를 만나길 권한다. 그리고 어렵게 고택 운조루를 지키고 있는 종손 류홍수씨와 류정수씨에게 다뜻한 인사 한마디를 건넸으면 한다. 묵묵히 고택을 지키고 있는 후손들에게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집을 구경하는 관광객이 아닌 따뜻한 정이 느껴지는 사람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 임을.. 그것이 또 하나의 배려임을 이야기 한다. |
첫댓글 나도 몇 번 가봤지만 우리 구례의 자랑거리이자 보물이라 생각합니다 잘 보존되었으면 합니다 담양 창평에 가면 쌈지천 마을이 있는데 그곳에도 고택을 보존하는 곳이 몇 채 있더군요 돌담골목길도 운치있게 보존되어 있어 관광객유치에도 큰 도움이 되더라구요
류 이주 이분은 풍수 지리에도 밝아 이곳은 우리나라 3대 명당 자리라 합니다 .구례읍에서 토지 면사무소 1km 길 못미처 우측에 돌무덤이 커다랗게 쌓여있는곳 을 본 사람이 많을 터.야화에 의하면 류씨 고택이 쇄약 해지면 그곳을 허물라했다는데 많은이가 궁굼해 하지요.
이런 고택들이 구례의 자존심이랄까.
10여년전 광주에서 손님들을 모시고 운조루에 갔었는데 그 때가 하필이면 윗글에 나오는 것처럼 관리인이 도둑맞고 머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라.....여주인으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해 광주손님들 한테 얼굴을 못 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몹슬 0 0 0 들 사람은 해 하지말었어야지 벌받을 끼여.
어렸을 적 할머니 댁이 그 쪽에 있어 더러 다녀왔는데 그 곳이 그렇게 휼륭한 곳 인줄은 몰랐네. 잘 유지 보관 되었으면 좋을 터인데.
친구님 추운 겨울 건강하게 잘지냈는가? 6.25때 도 비켜가고 .여순 반란 사건때도 비켜간 그곳. 얼마전 제1 t.v에서 방영되기도 했던 고택. 이제는 문화 관광부에서 팔 걷어 부치고 대대적으로 개축 및 보수를 실시하던데 가게 되면 한번 둘러 보고 와야 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