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수업39 억념과 정지가 무엇입니까 #메타인지와정지 #향상이불가능
5:23 마음을 지키려고 하는 이들이여!
억념과 정지를
모든 노력을 다해 지키라고
나는 합장하며 당부하고 당부한다네.
#주의력결핍장애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단 하나의 기본기는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마음이 얼빠지지 않도록, 불안하지 않도록 잘 보호하는 것이면 안심할 수 있습니다. 이 안심 하나면 개선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마음 하나를 지키지 못하는 경우에 삶을 지속적으로 개선해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소 뒷걸음질로 쥐를 잡듯이 우연히 개선을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반복되기 어렵습니다. 반복을 넘어 지속적으로 향상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그럼 단 하나의 기본기,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억념과 정지를 써야 합니다. 억념이란 주어진 경험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선사들은 먹을 때는 먹기만 하고, 쌀 때는 싸기만 해야 한다고 교육하십니다. 일 할 때 휴가 생각하고, 휴양지에서 일 할 생각을 하는 방일한 상태로는 삶을 즐길 수 없습니다. 억념의 힘으로 주어진 경험에 전념한다면, 일 할 때는 일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당연히 놀 때는 놀기만 하겠죠?
주의력결핍장애란 이처럼 전념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보다 구체적인 지표로 표현해보자면 스스로 주의력을 두고자 하는 대상에 5초 이상 억념하지 못한다면? 스스로의 주의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단순히 산만한 것을 넘어서 결핍 장애가 시작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주의력결핍장애를 예로 든 이유는 보다 실감이 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이가 지속적으로 삶을 개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실감이 안 될 수 있어서, 표현을 바꿔보겠습니다. 주의력결핍장애를 지닌 사람이 자신의 행동을 지속적으로 개선할 수 있을까요? 약을 먹어도 조절이 안 되는 상황에서? 삶을 개선할 수 있는 확률은 결국 이 억념과 정지의 힘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주의력결핍장애 -> 주의산만 -> 차분함 -> 자각레벨이 높음 -> 집중력이 좋음
5:24 몸에 질병이라는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은
어떤 일도 마음대로 할 힘이 없듯이
마음에 무명이라는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은
어떤 수행에도 힘을 다할 수 없다네.
#메타인지와정지
억념은 념 즉, 사띠를 대상에 묶어두는 것입니다. 정지란 메타인지의 힘으로 스스로의 억념을 체크하는 힘입니다. 더불어 전념하는 방향성이 올바른지를 체크하는 힘입니다. 사띠의 선순환과 연결해보면 정지란 얼빠져 있는지를 종종 체크하는 깨어있음의 힘과 자기인지의 지혜로 올바름을 체크하고, 잘못된 오해와 감정을 정돈하는 마음챙김의 힘입니다. 이렇게 정지로써 경험할 준비가 되면 주의력을 대상에 묶어두고 전념하는 알아차림의 힘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논전에서 억념과 정지를 활용하여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사띠의 선순환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정지의 중요성은 최근 부각되고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자신을 살피는 힘인 메타인지라고 불리는 이 정지는 억념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억념은 자동차에 기름을 넣는 것과 같습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잠재력이 열리는 효능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로 갈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정지입니다. 방향을 선택하고, 종종 올바로 가고 있는지를 점검하며, 잘못되었다면 교정하는 것까지 모두 정지의 몫입니다. 그렇기에 정지가 없는 노력은 효율이 떨어지고, 무용지물에 가까우며, 심지어 거꾸로 가서 부작용만 생기는 경우까지도 있습니다. 정체되어 옴짝달싹 못하는 이에게는 물론 일단 억념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있게 되면 이후에는 분명히 방향의 중요성은 점점 부각됩니다.
#최선을다하지못함 #깨진항아리 #실천부족 #잔고만까먹음 #향상이불가능
억념과 정지가 없는 불이익을 논전에서는 다섯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째,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얼빠져서 산만한 마음이 최선을 다할 수 있을리가 없으니까요. 둘째, 깨진 항아리처럼 마음은 경험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런 경우 아무리 시간을 투자해도 배움이 지식과 지혜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셋째, 삶을 바꾸는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배움이 실천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전념하여 익히고, 이것을 강화하고 기억하는 과정이 충분해져야 합니다. 이런 정보와 지식 그리고 공감이 가득차서 넘치는 순간, 숨 쉬듯 자연스럽게 삶 속에서 배움이 실천되는 것입니다. 억념과 정지가 부족하다면 배움을 기억조차 못할테니 실천을 못하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넷째, 새로운 정진을 하지 않기에 과거의 공덕을 깎아 먹게 됩니다. 위사카 부인이 탁발오신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지 않는 시아버지에게 이런 표현을 합니다. '우리 아버님은 식은 밥만 드시는 분입니다!' 식은 밥을 먹는다는 것은 현재의 생존과 즐거움을 위해 새로운 공덕을 지을 생각이 없이, 오직 과거에 지은 공덕만을 쓴다는 것입니다. 새로 들어오는 입금은 전혀 없이 출금만 반복된다면 잔고를 가지고 있더라도 점점 줄어들 것이고, 결국 마이너스로 나아갈 것입니다. 공덕의 잔고가 줄어들고 사라지면 남은 일은 파멸 뿐입니다. 이것을 복진타락福盡墮落이라고 합니다.
다섯째, 앞의 불이익을 감안한다면 당연히 향상은 불가능합니다. 돈을 벌지도 않고, 탐욕에 사로잡혀 얼빠진 마음으로 빚을 내서라도 쓰기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빚쟁이가 될까요? 아니면 부자가 될까요? 뻔하지요? 자본주의 관점을 지닌 이들에게 이들의 말로가 뻔히 보이듯, 공덕을 중요시여기는 가치관을 지닌 이들에게는 억념과 정지가 없이 얼빠져서 살아가는 이들의 말로가 뻔히 보입니다. 지금 이 순간 얼마나 행복한지, 부자인지, 건강한지... 의미 없습니다. 결국 복진타락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붓다스쿨은 최근 단일 교과서를 <입보살행론>으로 정했습니다. 이를 중심으로 공부하고 연구하며 정진하고 있습니다. 최근 제가 자주 강조하는 말들이 상처가 된다고 말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뼈를 때린다고 표현 하더군요? 그런데 과장 없는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의력결핍장애를 치료하지 않고 집중력이 좋아지는 방법이 있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돈을 벌지 않고 부자가 되는 방법이 있다고 거짓말도 못합니다. 마이너스 통장 신세를 탈출하지 않고 어떻게 빈곤에서 벗어나나요?
진실의 말이 뼈를 때리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스스로를 점검해봐야 합니다. 준비된 이들은 이 진실의 말이 용기가 됩니다. 사띠의 선순환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익히고 있는 이들에게는 응원이 되고, 억념과 정지로 삶을 개선하고자 발버둥 치는 이들에게는 인정 받는 느낌을 선사할 것입니다. 공덕을 짓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는 분명한 희망의 메시지가 될 것인데, 도대체 왜 이 진실이 뼈때리는 말처럼 느껴질까요? 이는 행복의 길과는 반대 방향인 파멸의 길을 걷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 아닐까요?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모든 보살수행자는 부디 명심하시면 좋겠습니다. 인색한 마음에서는 단 하나의 선도 자라나지 못합니다. 그러니 말과 행동 그리고 자신의 소유물과 공덕까지 베풀 수 있는 것을 꼭 베푸는 연습을 해보세요. 이를 통해서 마음이 조금이라도 열려야 삶이 개선될 가능성도 열리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 가능성을 잡으려면 삶을 바꾸는 열쇠인 사띠가 있어야 합니다. 얼빠진 마음으로는 단 하나의 경험도 바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얼빠진 마음을 구원하는 깨어있음을 회복하고, 불안한 마음을 정돈하는 마음챙김을 활용해야 합니다. 안심했다면 다가오는 경험에 전념하는 알아차림을 써야 하고, 여기에 더해 기꺼이, 기쁘게, 환희롭게 경험에 몰입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극락정토를 여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억념과 정지를 배우고 익힌다면, 그 숙련도에 비례하여 삶은 사바에서 극락으로 개선되는 것입니다. 행복의 잔고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안심과 평화의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흐름으로 빨리 좀 바꿔 타시면 좋겠습니다. 이제 복진타락의 롤러코스터에서는 부디 내리시길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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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억념과 정지의 뜻을 잘배웠습니다. 보살로 성공하는 인생의 길잡이로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