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세례 축일: 나해
복음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7-11
그때에 요한은 7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9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10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11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 마르 1,7-11: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오늘 전례의 의미는 예수님의 세례가 바로 그분을 메시아로 축성하고 하느님의 아들로 세상에 선포하는 의미를 가르치고 있다. 나아가 그분이 수행할 구원 사명에 관한 어떤 것을 선포한다. 그리고 부차적으로 우리의 세례의 의미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있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전반부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세례자 요한을 제시하고(7-8절) 후반부는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9-11절).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7-8절). 이것은 바로 예수께서 사탄을 쳐 이기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더 힘센 분으로 제시하는 것이다(마르 3,27; 루카 11,22; 사도 10,38 참조). 그러면서 요한은 자기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을 위한 자리를 준비하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 메시아는 더 큰 능력을 갖추신 분이시기 때문에 요한의 세례보다 더 강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쇄신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8절). 이 성령은 새로워진 하느님 자녀들에게 내적으로 생기를 주는 새로운 생명의 원리가 된다. 성령에 잠기게 하는 일, 이것이 예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믿는 모든 이들에게 베푸실 새로운 세례이다.
예수께서는 다른 유다인들과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다.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의 세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세례를 통해 자신을 낮추신다. 즉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하느님의 무죄 선언을 받게 하려고(갈라 3,13-14; 2코린 5,21 참조) 몸소 저주받은 자, 죄인이 되시는 그 십자가상의 낮추심을 의미하는 행위이다. 이 행위는 예수께서 모든 사람과 동등한 자리를 취하시고, 죄인들인 모든 인간과 연대성을 가지심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와 더불어 계속 펼쳐지는 광경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구원 사명을 세상에 구현시키고자 하는 낮추심의 행위를 하늘이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며, 십자가상의 죽음이 실제로 그 정점을 이루게 될 만큼 그 어려운 사명에 대해 하늘이 확실히 보장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하늘이 열림의 의미이며,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시는 성령의 형상은 마치 비둘기가 새끼들 주위를 이리저리 날며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듯이, 아들에게 기울이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의 정을 표현해 준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1절). 여기서 사랑하는 이라는 형용사는 유일하다는 의미이며, “너는 내 아들이다.”라는 말씀은 시편 2,7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며, 유다 전승은 그것을 메시아적 의미로 해석하였다. 이것을 예수께 적용해 해석하여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와 그분의 메시아적 왕의 품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표현은 바로 야훼의 고통받는 종의 노래에서 따온 것이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이사 42,1).
이 장엄한 천상 소리에는 초대교회의 신앙이 잘 반영되고 있다. 초기 교회는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을 재해석하여 그분의 공적인 사명을 스스로 낮춤과 죄인들과의 연대에서 인식한다. 예수께서는 천국에서 특별한 자리를 달라고 청하는 제배대오의 두 아들에게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마르 10,38)라고 하셨다. 이 비극적인 세례는 바로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던 그 날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서 성령은 이 길고도 극적인 구원의 여정에 예수께 힘을 주셨다. 이 힘은 바로 뒤이어 나오는 유혹 사화에서 사탄이 제시하는 세속적 메시아주의의 유혹을 물리치는 데 필요했던 힘이다.
예수님의 세례는 단순한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분의 세례는 이제 십자가 위에서 죽음과 이어지는 영광스러운 부활로 완성되는 구원의 사명을 담고 있다. 이에 비추어 우리의 세례까지도 연결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 인간들과의 연대성을 표현하는 것에서부터 그러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을 따라 그분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렇게 복음 사가는 예수님의 세례를 기록하면서 우리의 세례도 기억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받은 세례도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면, 우리 자신의 세례 사명 역시 세상의 구원을 위한 세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을 우리도 살 수 있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가야 할 길이다.
출처: 저는 주님의 종 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如山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