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녕 신의 한 수는 없는가
김 상 립
한 평생 사군자를 치고 있는 어느 선배의 화실에 들렸다. 40호 크기의 화선지를 펼쳐놓고 저수지 속의 겨울 연(蓮)을 거의 완성해가고 있었다. 연꽃은 떨어져 흔적도 없고, 초록으로 반짝이던 넓고 큰 잎들마저 흑갈색으로 변해 갈가리 찢겨 물위에 흩어져 있다. 연대도 꺾이고 잘라져서 어떤 것은 손가락 길이만큼만 물위로 보인다.“선배님, 그림이 많이 변했습니다?”했더니“그림이 뭐 별건가? 이제 나는 붓 가는 대로 그리고 있을 뿐이네. 어디 내가 남의 눈치 볼 군번인가?”하신다. 그런데 선배의 붓 가는 대로의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달관한 어느 인생도 보였고, 생자필멸의 법칙을 은유적으로 강조해 놓은 듯도 했다.
누구나 막판에 가면 잡은 것, 누리던 것 다 버려두고 심지어는 몸뚱이마저 내려놓지 않는가? 사실 요즘을 장수시대라고는 해도 너무 많은 노인들이 요양병원에 누워 긴 시간을 천정만 바라보며 지낸다. 선배의 년 세가 미수(米壽)에 들었으니 문병 가서 만난 지인들의 모습을 차마 그대로 그릴 수 없어 연에 빗대어 그렸던 것은 아닐까? 혹은 죽음을 그림으로 형상화하여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허물어보자는 시도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선배의 화실을 나오다 문득 내 그림 선생을 떠올렸다. 코로나 팬데믹이 오기 전까지 20여년간 나는 J선생에게서 한국화를 배웠는데, 그는 수업을 하며“예술의 세계에서는 천재란 없다. 천재라 불리는 그 어떤 사람도 뼈를 깎는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어떤 분야에서던지 최상의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신의 한 수’는 없으니 애당초 기대하지 말라.”했다. 그는 제자들이 전시회를 관람하면서 마음에 드는 그림을 사진 찍어 앞에 놓고 그리는 것을 보면 펄쩍 뛴다.‘남의 그림을 보고 그리면 은연중에 그 사람의 붓질을 흉내 내게 되어 자신은 점차 사라진다’며 절대로 못하게 했다. 심지어는‘선생이라도 그의 흔적을 작품에는 남기지 말라. 설사 그의 가르침이 머리 속에 남아 있더라도, 실제 붓질에서는 선생을 지워야만 자신이 산다’라고 강조했다.
평소 나도‘예술에는 정답이 없다’는 말을 믿고 있었다.‘남 흉내 낼 생각 말고 내 것을 그리자. 작품을 완성해 놓고 내가 만족하면 그게 좋은 그림 아니겠느냐’는 나름의 믿음이 있었다. 또 예술에서는 분야가 다르더라도 배움의 길은 서로 통할 것 같아, J선생의 충고를 글 쓰기에 적용하여 많은 도움을 받았다. 또 선생이 말한 대로‘정말 예술에는 신의 한 수가 없을까’를 오래 두고 생각을 해봤지만 내 결론은 조금 달랐다. 물론 모든 작가에게 통할 수 있는‘신의 한 수’는 없을 지 몰라도, 개개인에게 맞는 한 수는 잘만하면 따로 찾을 수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예술 작품이란 게 서로 우열을 가리기보다는 다름을 표현하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세상이 빠르게 변해가니 일반인들의 예술에 대한 요구도 복잡하고 다양하다. 이런 영향을 받아 그런지 예술계에서도 30년쯤을 주기로 해서 유행이 바뀌는 것을 본다. 한국화 부문에서도 비구상화가 활개를 친다. 여태 나는 내가 관여하는 예술계의 유행에도 무관심한 편이었고, 내가 지금은 수필쓰기 하나만 겨우 붙들고 있지만, 이런 처지에서도 수필의 유행을 따라가야 하지만, 투자할 시간도 아깝고 좋은 결과를 낼 자신도 없어 그냥 가던 대로 가고 있다. 하지만 쓴 작품을 여태까지 발표하고 보니 내 글은 순수 수필이라기보다 에세이 류가 주를 이루고 있어 독자들이 호불호로 갈라지는 것 같다. 수필은 결국 그 사람의 경험과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수필가의 숫자만큼이나 수필이 다양하다 해서 이상할 것 없다고 여겨 왔는데, 좀 당황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흔들림 없이 내 작품 속에서는 나의 주장이 분명하게 있으면서도 독자가 느끼기에는 훈수를 주려는 게 아니고, 가까운 친구가 곁에서 조용히 세상얘기를 해주는 듯한 그런 글을 남기고 싶다. 독자들이 재미가 나서 내 글을 읽는 것 보다는, 삶의 얘기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다가와 주기를 바란다. 그러자면 내 글이 생명의 본질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할 터이다. 비록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해나가더라도 인간이 존재하는 한 누구나 지닐 수 밖에 없는 원초적 고뇌를 성심껏 다룬다면, 당장은 인기가 없더라도 비교적 오래 남을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이라 믿는다. 나는 머리를 굴려 붓을 놀릴 때가 아니고, 영혼을 불러 함께 가야 할 나이에 들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글 앞에서는 옷깃을 다시 여민다. 정말 내게 맞는‘신의 한 수’는 없을까? (2026. 5)
첫댓글 한국수필문학관에 가서 벽에 걸린 큰 한국화를 보게 된다. 너무나 눈에 익은 그림이라 여기저기를 살폈다. 통상 그림에 작가명이 보이는데 잘 찾을 수가 없어 홍 관장님에게 물었다. 남평 선생님 작품이란다. 괜히 반가웠다. 아마 선생님의 초기 작품이라 추측된다. 그 뒤 선생님의 작품은 독특하게 독창적인 화풍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송하야 이 그림 어떻노?" 암만 봐도 우리가 그리는 화풍이 아니었다. 항상 선생님만의 그림을 그리시는 모습을 보면서 늘 부러웠다. 난 독창적인 그림을 그릴 용기가 없었다.
하! 유당선생 그 그림에
분명 낙관 두개가 아랫쪽에 찍혀있는데 못 보셨네요. 예 초기작품이었습니다. 어떤 전국 경진대회
에서 제법 큰 상을 받고
그 쪽의 초대작가가 되었지요. 옛날 일이지요.
수필문학관이 개관 할때
벽면이 빈것같아 기증한
작품입니다.
유당선생도 지금 눈치보지 않고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있으니 나와 통한다고 봐야겠지요.
나는누가 뭐라던 내 가는
길로 갈 것입니다. ㅎ
남평 선생님 연세가 되면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경지"에 이를 것이라 생각 합니다. 독창적이라는 말과는 조금 다른 "내 편한 대로,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것에 순수한 독창은 없습니다. 인생 자체가 모방이고 학습이고 배움으로 만들어 진 것인데 어찌 그걸 지울 수가 있겠는지요. 그저 얽매이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죽고 사는 것에 집착하지 않으면 굳이 얽매일 이유도 없을 것이란 생각도 합니다.
제 나이가 아직은 남평 선생님 연세에 비하면 많이 젊지만 후인들이 어떤 세상에서 살면 좋을까하는 고민은 참 많이 합니다. 오늘 오후는 집에서 영화 "마라톤 전쟁"을 관람했습니다. 시기, 질투, 정복, 그리고 자기 잘난 승부욕, 그런게 삶에서 무슨 소용인가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국사회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살만큼 산 내 삶보다는 미래 후인들의 삶의 모습이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내 글이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함도 알기에 내가 참으로 아무 소용 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울적한 마음 달래려고 군위가면 값싼 한우 고기집이 있는데 근처에 사는 칠십 중반의 처형과 아내와 셋이서 바람 쇠고 소주 반병 마셨습니다.
범몽선생 댓글을 보니
생각이 복잡했겠습니다
그려.
나는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써가지만 혼자서 가는 길,내 가고싶은대로 가는게 자칫 잘못 갈지 몰라
신의 한 수를 가르침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정도지 뭘 유별나게
바라는것이 아니랍니다.유념하겠습니다.
@남평(김상립) 감사합니다. 옛날 고향 마을에는 마을 동구 밖에는 큰 나무가 있었고 그 나무아래 작은 정자 같은게 있었습니다. 여름이면 그 그늘 아래 동네 어른들이 모여 장기도 두면서 이런 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주고 받았지요. 6.25. 전쟁이나 피란 이야기도 거기서 많이 주워들었습니다. 어른들이 이야기 하다 다투기도 하고. 사는게 그렇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글을 쓰고 뭔가를 말한다고 달라 질 것도 없고.^^
@정임표 하아! 각자 믿는대로 나갑시다요. 나는 긴 세월이
흐르고 또 AI가 세상을 차지하고나면 우리들 얘기가 참고가 되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답니다.
그래서라도 붓을 놓지
않습니다. 꼴랑 이름이나
알리자고 그러는게
결코 아닙니다요. ㅎ
@남평(김상립) 사실 이름 석자 알리려고 글을 쓰는 작가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공지능의 힘을 빌려서 글의 대부분을 인공지능이 쓰도록 하는 세상이 올 것입니다만 그걸 분별해 내기도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명예와 효율성을 초월하기가 정말 어렵지만 청년 작가들일수록 노력은 많이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
@정임표 옳은 말씀이 확실한데
어디 청년작가들이 있어야 말이지요
우리 협회에서도 신입회원 왔다고 박수도 치고
환영하지만 현직에서 은퇴한 노병들만 들어오니
어쩌나 싶소이다.
사람이나 무슨 단체나
허리가 튼튼해야 내달릴 수도 있는데 협회는 허리
부분이 너무 약합니다.
어쩌면 좋습니까요?
@남평(김상립) 나라에 정치하는 분들이 인구소멸에 대한 걱정을 선생님 만큼만 해도 이런 꼴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제가 연령별 인구 통계 자료 찾다가 답글을 올립니다. 전부 자기들이 자치단체장 되고 국회의원되고 사회 지도자가 되면 죽어 가는 나라가 살아 날것 처럼 말합니다. 갓바위도 사람이 없고, 골목마다 아이들 울음 소리가 사라진지 오래 입니다. 저도 만12년 만에 두번째 손녀를 보았으니 살아봐도 헛 산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