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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DMZ 평화의길 8코스(임진강역 - 율곡습지공원)
여행일 : ‘25. 3. 1(토)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및 파평면 일원
여행코스 : 임진강역→통일육교→장산1리 마을회관→맨밧골→장산전망대→임진리→화석정→율곡습지공원(거리/시간 : 10.2km, 실제는 11.92km를 3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의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은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년 9월,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길(이하 ’평화의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 11 : 20. 트레킹 들머리는 임진강역(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자유로(국도 77호선)를 타고 북쪽으로 달리면 그 끄트머리에서 ‘임진각국민관광지’를 만난다. 임진각관광의 출발점이랄 수 있는 임진강역이 8코스 및 8-1코스의 시점이다.
▼ ‘완주 인증 QR코드’는 도로 건너에 세워놓은 평화의길 이정표에 붙어있다.
▼ 임진강역을 출발 마정리와 장산리의 드넓은 평야를 횡단하여 파평면의 율곡습지공원으로 가는 10.2km의 여정. 율곡선생의 때가 묻은 화석정과 율곡습지공원이 주요 볼거리로 꼽힌다.
▼ 11 : 20. 자유로의 마정육교 아래를 지나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 탐방로는 ‘자유로’와 함께 간다. 도로 오른쪽 아래로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만한 농로가 나있다.
▼ 11 : 32. 또 다른 4차선 도로인 ‘통일로(1번 국도)’는 굴다리를 통해 횡단한다. 평화누리길 이정표는 이곳을 ‘통일대교’로 적고 있었다.
▼ 굴다리를 빠져나오니 이정표가 왼쪽을 가리킨다. 몇 걸음 떼지 않아 이번에는 평화누리길 쉼터가 잠시 쉬었다가란다.
▼ 평화의길 8코스는 역사와 자연을 아우르는 길이다. 때 묻지 않은 자연환경에서 사는 동물들을 만날 수 있는가하면, 우리의 역사를 아우르는 유적을 품고 있다. 천적이 없는 들녘에서 노닐고 있는 철새 떼를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 길은 ‘장산1리’를 향해 간다. 왼쪽은 ‘자유 IC’, 1번국도인 통일로와 자유로가 만나면서 만들어놓은 곡선을 따라가며 길이 나있다.
▼ 오른쪽으로 엄청나게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민통선 철책이 가른 저 들판에서 나오는 쌀은 ‘파주 임진강 쌀’이란 고유의 브랜드까지 갖고 있단다. 충청도의 예당평야나 전라도의 만경평야 같은 드넓은 곡창지대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북쪽의 파주에도 이렇게 너른 평야지대가 있을 줄은 몰랐다.
▼ 11 : 39. 이정표가 들녘을 가리키고 있었다. 조금 더 가면 민통선이니 이쯤에서 방향을 틀라는 모양이다.
▼ 100m쯤 진행했을까 이번에는 왼쪽으로 가란다. 오른쪽은 ‘마정2리(야미동 : 夜味洞)’로 연결된다는 것도 알아두자. 마정리(馬井里)는 남북분단으로 인해 생긴 민간인통제구역의 임진강 남안지역 첫 마을이다. 마정(馬井)은 말 우물이란 뜻이다.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 짙던 어느 날 새벽 햇살 기둥이 우물에 꽂히자 그 안에서 용마(龍馬)가 뛰어나왔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 탐방로는 마정리 들녘을 횡단한다. 8-1코스의 초반은 이렇듯 마정리와 장산리의 들녘을 헤집으며 나아간다. 둘 모두 널찍하지만 임진강에 맞대고 있는 마정리의 들판이 장산리보다 훨씬 더 넓다.
▼ 11 : 47. 한갓진 들판이 지루해질 즈음 민통선으로 보이는 둑으로 빠져나간다. 옛 토성(土城)을 연상시키는 기다란 둑이 떡하니 앞을 가로막고 있다. 북한의 침략에 대비한 방호시설이 아닐까 싶다. 그 너머는 민간인통제지역이란 얘기일 것이고 말이다.
▼ 평화의길은 이제 그 둑을 따라간다. 둑 아래로 농로가 나있다.
▼ 둑 위에는 윤형철조망이 처져 있었다. 금단의 땅이니 넘어오지 말라는 듯이.
▼ 경기도 권역의 평화의길 대부분은 자전거길인 ‘평화누리길’과 함께 쓴다. 그래선지 곳곳에서 자전거 라이더들을 만나게 된다. 별도의 경보음을 내는 장치가 없어서인지 멀리서부터 ‘미안합니다’을 외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 11 : 55 – 12 : 00. 길은 또 다시 들녘으로 파고든다. 그곳에 평화누리길에서 만든 쉼터가 있었다. 덕분에 우리부부도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며 쉬다 갈 수 있었다.
▼ 텅 빈 들판을 걷는 기분은 겨울여행의 참맛이다. ‘평야는 평화다’란 외침이 절로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
▼ 12 : 10. 또 다른 평화누리길 쉼터. 라이더 한 분이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 그런데 쉼터 옆 굴뚝처럼 생긴 저 시설의 정체는 대체 뭘까? 그동안 등산을 해오면서 만났던 저런 굴뚝 밑에는 어김없이 군의 벙커가 있었는데 말이다.
▼ 탐방로는 농로를 빌려 쓴다. 그러니 농기계라도 마주칠라치면 길을 양보해주는 게 예의라 하겠다.
▼ 12 : 13. 이번에는 아예 석성(石城)이다. 아니 웬만한 산성보다도 더 높고 튼실하게 쌓아올렸다. 함께 걷던 일행이 ‘대전차 방호벽’이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 12 : 15. 그 끄트머리에서 ‘맨박골천’을 만났다. 차마 물길을 끊어놓지 못한 대전차 방호벽은 대신 시멘트덩어리를 매달고 있었다. 유사시에 떨어뜨릴 요량일 것이다.
▼ 방호벽을 통과한 탐방로는 장산1리로 들어간다. 규모가 제법 큰 이 마을은 옛 장산진의 동헌(東軒)이 있었기 때문에 ‘동헌마당’이라고도 부른다. 도안마당, 동안, 동헌안, 동안마당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참고로 장산리(長山里)는 임진강이 휘감아 돌아나가는 마을이다. 장산에서 임진나루까지 약 2km 가량 높이가 같은 산이 임진강 가를 따라 길게 뻗었으므로 진동산 또는 장산(長山)이라 하였다. 1755년(영조 31)에 진(陣)과 보루(堡壘)를 설치하고 별장(別將)을 두어 지켰으므로 장산보 또는 장산진이라고 하다가 진을 폐한 후 다시 장산이라 하였다. 장산진, 장산보, 진동산이라고도 한다.
▼ 장산1리 표석. 행정 동리보다, 위에서 거론했던 자연부락의 이름을 적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요즘은 옛 지명을 찾는 게 대세라고 하지 않았던가.
▼ 12 : 22. 장산1리 마을회관. 이정표(율곡습지공원 5.5km/ 반구정 7.5km)가 절반쯤 왔음을 알려준다. 반구정에서 시작되는 경기둘레길 7코스와는 달리, 임진강역에서 출발하는 평화의길 8코스는 길이가 10.2km이니 말이다.
▼ 12 : 25. 마을을 빠져나온 평화의길은 맨박골천의 둑길을 따라 올라간다.
▼ 12 : 33. 길이 둘로 나뉘고 있었다. 이정표는 오른쪽을 가리킨다. 하지만 특별한 볼거리도 없는 들녘을 일부러 에돌아갈 필요는 없어 보인다. 곧장 직진하면 오히려 거리를 단축시킬 수 있다.
▼ 고지식한 필자는 들녘으로 에둘러 갔다.
▼ 12 : 37. 2차선 도로인 ‘장산로’로 올라섰다. 그리고는 왼쪽으로 보이는 맨밧골을 향해 간다. 오른쪽은 운천리(雲泉里)로 연결된다. 산골짜기로 구름이 돌아가며 여러 곳에서 샘이 솟아난다는 마을이다.
▼ 장산1리의 자연부락인 ‘맨밧골’이다. 마을 부근에 바위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매암밧골, 매음동(梅岩洞)으로도 불린단다.
▼ 12 : 41.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사거리(도로표지판은 삼거리)에서 평화의길은 오른쪽으로 간다. 왼쪽으로 가면 같은 장산1리인 ‘맛개(麻浦)’라는 자연부락이 나온다. ‘제주 고씨’네 열녀문과 ‘거창 신씨’네 정자인 래소정(來蘇亭)이 있었다. 현재는 사라지고 없지만, 대신 조선후기 호곡 남용익 선생이 래소정에서 바라 본 임진강 8경을 노래하며 지은 ‘래소정어(來蘇亭於)’가 전해지고 있다.
▼ 이후부터는 임진리 방향의 임도를 탄다. 무척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이런 오르막길은 ‘장산리’의 뒷산인 ‘장산’ 고갯마루까지 이어진다.
▼ 12 : 49. 고갯마루에는 간이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 탐방로는 임도를 따라 내려간다. 그렇다고 무작정 내려갈 일은 아니다. 다리품을 조금 더 팔면 뛰어난 조망을 자랑하는 ‘장산전망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정표(율곡습지공원 3.6km/ 반구정 9.4km / 장산전망대 0.3km)가 300m쯤 떨어진 곳에 ‘장산전망대’가 있음을 알려준다.
▼ 12 : 53. 잠시 후 도착한 장산전망대. 임진강의 하중도인 초평도와 그 너머의 북녘 땅을 한꺼번에 살펴 볼 수 있는 최고의 조망처이다. 날씨가 좋을 경우에는 개성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 왼쪽은 역사의 아픔을 끌어안은 ‘초평도’이다. 초평도는 임진강의 대표적인 하중도(河中島, 곡류하천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만들어진 삼각주)이다. 민간인 통제구역이라는 금줄 속에 갇힌 또 다른 의미의 ‘섬’이기도 하다. 철저한 이념 검증을 통과한 바람, 빛, 새와 동물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금단의 영역이다. 하지만 6.25전쟁 이전에는 사람이 거주했으며 잘 정리된 논과 밭도 있었다고 한다.
▼ 조망도를 설치해 실물과 대조해가며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푹 빠져있는데, 건너편을 지긋이 응시하던 젊은 연인이 ‘북한 땅’이냐고 물어온다. 우리 땅(파주시 진동면)임을 알려주며 부연설명까지 해주었다.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남북 2km씩 도합 4km를 비무장지대로 규정하는데, 저곳은 그 남방한계선보다도 더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며 말이다. 다만 보안상의 이유로 민간인의 출입은 통제된다는 것도.
▼ 대북전단 살포자들의 출입통제 및 행위금지를 알리는 안내판이 눈길을 끌었다. 누군가에게는 꼭 해야만 하는 사명이겠지만, 접경지 주민들로서는 눈에 가시일 것이다. 혹시라도 위험물이라는 핑계로 북에서 총이라도 쏘아댈 경우 그 피해는 오롯이 주민들에게 돌아갈 것이 뻔할 테니까 말이다. 하긴 남북분쟁을 일부러 조장하려던 몹쓸 인간들도 최근 있었지만.
▼ 임진리를 향해 내려간다. 포장되어 있지 않은 것이 전형적인 임도의 풍경이다.
▼ 이런 심심산골에 웬 낚시터?
▼ ‘임진나루길’을 걷고 있는 당신, 종점인 임진나루터까지 1.3km가 남았답니다.
▼ 임도는 언덕위로 지나가는 ‘도로’를 향해 오름짓을 시작한다. 바로 앞에 두고도, 길이 나있지 않아 오른쪽으로 한참을 에돌아서야 올라설 수 있었다.
▼ 12 : 18. 갈림길 모서리에 파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장종국 시인의 시판(詩板)이 세워져 있었다. ‘들킬까 숨어 핀 꽃 아니외다.’로 시작되는 ‘들꽃이외다’가 적혀있다. 시와 함께 걷는 평화누리길이란 부연설명도 보인다.
▼ 13 : 20. 언덕으로 올라선 길은 ‘임진나루 마을(臨津洞)’로 들어간다. 초입에 마을 표석과 함께 장승을 세워놓았다. 솟대로 구색까지 맞췄으니 ‘솟대공원’ 쯤으로 해두면 어떨까?
▼ 조금 전 저 골짜기를 지나왔다. 흉물스럽게만 보이던(사진도 찍지 않았을 정도로) 흄관과 맨홀이 위에서 바라보니 제법 그럴 듯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 ‘임진동’은 잘 지어진 주택들로 가득했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패키지마을로 조성했기 때문이란다. 참고로 임진(臨津)은 임진나루터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임진강 가에 고려·조선 시대 남북을 오가던 옛길 의주대로의 뱃길인 임진나루터가 남아 있다. 최근에는 임진나루터의 진서문터가 발굴되어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 마을에는 식당이 많이 들어서 있었다. 그 대부분은 쏘가리매운탕 등 임진강의 어족자원을 활용한 메뉴를 내걸고 있다. 마을과 접하고 있는 임진강에서 선단을 이뤄 어업활동을 하는 덕분이란다.
▼ 매운탕전문점인 ‘임진대가’는 TV 프로그램 ‘식객 허영만의 백반 기행’ 81회에 등장하기도 했다. 허영만 선생이 가수 민해경과 함께 방문한 집으로, 밑반찬으로 나온 깻잎장아찌, 시래기 무침과 함께 참게 매운탕이 소개되었다. 채널A의 ‘엄마의 여행, 고두심이 좋아서’에서도 다녀갔던 모양이다.
▼ ‘장단콩’으로 대변되는 장단면을 근거리에 두고 있어서인지 임진나루협동조합(마을기업)에서는 두부를 직접 만들고, 이를 이용한 요리를 팔고 있었다.
▼ 길은 ‘임진나루’로 이어진다(나루터까지 가지는 않는다). 임진동의 가장 큰 특징은 고려·조선 시대 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는 점이다. 영조 때인 1755년 군진인 임진진(臨津鎭)을 설치한 이유다. 나루 안쪽 협곡을 가로지르는 성벽을 쌓고 진서문(鎭西門)을 냈으며, 그 위에 목조 누각인 임벽루(臨壁樓)를 올리기도 했다. 문헌에도 나타난다. 고려사절요에 1045년(정종 11) 행인들이 앞 다투며 임진강을 건너다 빠져 죽는 경우가 많아 왕이 이를 근심하여 특별히 부교(浮梁)를 만들게 함으로써 이때부터 사람과 말이 평지를 다니듯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1418년(태종18) 2월 어가가 임진나루 북쪽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고, 임진왜란 때는 선조가 한양을 떠나 북쪽으로 피신하면서 한밤중 빗속에 임진나루를 건넜다고 적는다.
▼ 13 : 32. 평화의길은 임진나루 초입에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언덕으로 올라 ‘화석정로’를 만난다. 임진강 벼랑 위로 난 화석정로의 가장자리를 따라 보도를 따로 만들어 놓았다.
▼ 임진나루 뱃사공 이야기를 담은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양반으로 변장한 다른 나루 뱃사공의 정체를 밝혀낸 지혜로운 뱃사공 이야기를 담았다.
▼ 이곳은 조망의 명소이기도 하다. 임진강과 그 건너 민간인통제구역을 은밀한 속살까지 들여다 볼 수 있다. 254km 길이의 ‘임진강(臨津江)’은 함경남도 덕원군 마식령산맥에서 발원, 황해북도(판문군)와 경기도(파주시) 사이에서 한강으로 유입되어 황해 바다로 흘러든다. ‘임(臨)’은 ‘더덜’ 즉 ‘다닫다’라는 뜻이며 ‘진(津)’은 ‘나루’라는 뜻으로, 임진강의 옛 이름은 ‘더덜나루’였다고 알려진다. ‘이진매’ 또는 ‘더덜매’(언덕 밑으로 흐르는 강)라고도 불리었단다.
▼ 건너편은 파주시 진동면(津東面)이다. 군사보호지역으로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나 2000년을 전후해 동파리에 실향민 마을인 해마루촌이 조성되어 일부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 왼쪽 모퉁이 너머에는 ‘임진나루’가 있다. 선조실록에는 선조가 임진왜란을 맞아 몽진을 하면서 임진나루를 건넌 뒤 나루를 폐쇄하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이때 임금이 배를 가라앉히고 나루를 끊고 가까운 곳의 인가도 철거시킴으로써 수많은 백성이 피난을 하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발생했단다. 6․25 전쟁 중에도 임진강과 임진나루를 경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었다.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물자를 원활하게 보급하기 위해 임진나루에 부교를 가설하기도 했다. 휴전협정 체결 뒤 민간인의 출입이 제한되었고, 1972년에는 군인들에 의해 완전히 폐쇄되었다.
▼ 13 : 34. 문산읍을 달려온 평화의길은 율곡로(37번 국도) 아래를 지나면서 ‘파평면’에 바톤을 넘겨준다. 필자 문중의 세거지(世居地)이기도 한데, 고구려의 파해평사현(坡害平史縣)이었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파평현(坡平縣)으로 개칭되면서 오늘에 이른다. 파평(坡平)이라는 이름은 파평산(坡平山)과 영평산(鈴平山)의 명칭에서 연유하며 전 지역이 평평한 언덕으로 되어 있다.
▼ 13 : 36. 화석정 입구. 평화의길은 ‘율곡로’로 연결되는 진입로를 건너 보도로 올라간다. 이어서 50m쯤 걷다가 ‘화석정’으로 이어지는 임도(화석정로)를 따라간다.
▼ 화석정 주차장. 화석정을 찾는 관광객들이 많은 듯 널찍하게 만들어 놓았다.
▼ 군의 시설물인 것 같은데, 개조하여 화석정의 홍보판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오른쪽 벽면에는 파주시 관광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 13 : 40 – 13 : 45. 평화의길(8-1코스)의 백미라 할 수 있는 ‘화석정’에 도착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관직에서 물러난 뒤 여생을 제자들과 함께 보내며 시와 학문을 논했다는 장소로, 임진왜란 때는 커다란 횃불이 되어 선조의 도망가는 길을 밝혀주는 역할을 했다는 곳이기도 하다.
▼ 화석정(花石亭)은 1443년(세종 25) 율곡의 5대조인 이명신(李明晨)이 처음 지었고, 1478년(성종 9)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이 중수하고, 이의석의 스승인 이숙함(李淑瑊)이 ‘화석정’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불타고 터만 남아있던 것을 1673년(현종 14) 후손들이 복원했으나 6.25전쟁 때 또 다시 불타고 말았다. 현재의 건물은 1966년 파주의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했다. 팔작지붕 겹처마에 초익공 형태로 조선시대 양식을 따랐다.
▼ 하지만 이게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고증을 거치지 않고 지은 탓에 원래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새로 지어야한다는 주장을 끊임없이 불러일으켰고, 최근에는 율곡의 망실된 유적과 정신을 복원하겠다는 파주시의 발표도 있었다. 복원되는 화석정은 현재와 같은 일반적인 정자 모습이 아니라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내부에 온돌방이 있는 형태라고 한다.
▼ 정자에서의 조망은 매우 뛰어나다. 강가 벼랑 위에 지어진 탓에 발아래로 임진강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지금은 민간인 통제지역으로 변한 장단(長湍)의 들녘(파주시 진동면이지만 옛날엔 장단군에 속한 면이었다)이 드넓게 펼쳐지는가 하면 임진나루의 풍경도 살짝 엿볼 수 있다. 서울의 삼각산과 개성의 오관산(五冠山)까지 보인다는 이도 있었으나, 미세먼지 탓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 언젠가 정자 옆의 저 늙은 느티나무를 두고 다툰 일이 있었다. 일행 중 누군가가 율곡선생이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면서 심었다고 우겼기 때문이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이 나무는 560살을 먹었었다. 1422년에 심어졌다는 얘기다. 하지만 율곡은 1537년에 태어나셨다. 선생이 태어나기 100년도 전에 심어졌다는 얘기다. 뭔가 스토리텔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장삼이사들 때문에 생긴 일화가 아니었을까 싶다.
▼ ‘래소정어(來蘇亭於)’를 소개하는 안내판도 눈에 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조선 숙종 때 문신인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 1628-1692)이 임진강변에 자리한 정자 ‘래소정(6.25전쟁 때 소실됐다)’에 올라 임진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한 시이다.
▼ 누구나 한번쯤은 꼭 살펴보는 빗돌. 앎이 얕으니 잘 지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런 시를, 그것도 여덟 살에 지었다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숲 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어드니/ 시인의 시상이 끝이 없구나/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서리맞은 단풍은 햇빛을 향해 붉구나/ 산위에는 둥근달이 떠오르고/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 변방의 기러기는 어느 곳으로 날아가는고?/ 울고 가는 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 위에서 거론했던 얘기들을 적은 ’화석정 안내판‘. 옆에는 경기옛길 스탬프보관함도 설치되어 있다.
▼ 율곡은 임진왜란에 앞서 국가변란을 대비한 ‘십만양병설’을 주창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율곡이 죽은 후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같은 해 4월29일 밤, 선조는 물밀 듯이 쳐들어오는 왜적을 피해 의주로 도망가면서 화석정 옆 임진강변에 다다른다. 하지만 억수 같은 비로 인해 앞은 강물에 길이 막히고 뒤로는 왜적에 쫓기는 위태로운 상황에 맞닥뜨리게 됐다. 이때 화석정을 불태워 길을 밝혀 임금이 무사히 임진강을 건넜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율곡이 틈날 때마다 들기름을 묻힌 걸레로 정자의 기둥과 마루를 닦게 했고, 어려움이 있을 때 열어보라며 남긴 편지에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고 적었다는 일화도 함께 전해진다.
▼ 13 : 45. 율곡리(栗谷里)로 내려선다. 조선중기의 대학자이자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본향 마을이다. 선생의 호 ‘율곡(栗谷)’은 이 마을에서 비롯된 것이다. ‘율곡’이란 지명은 밤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졌다. 마을에는 ‘나도밤나무’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린 율곡이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지나가는 스님이 율곡을 보고 ‘아이의 운명이 좋지 않으니 뒷산에 밤나무 천 그루를 심으시오.’라고 하여 율곡의 부친이 밤나무 천 그루를 심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한 그루가 자라는 과정에서 죽어 위급한 상황에 처했고, 이때 ‘나도밤나무’가 모라란 것을 채워주어 율곡선생은 훌륭한 인물로 성장했다는 전설이다. 전설은 믿거나 말거나지만 지금도 율곡리 마을에는 유난히 밤나무가 많다.
▼ 예쁜 꽃이 그려진 집, 당호를 ‘율곡마을 꽃 댁(宅)’으로 내걸었다. 뒤로 돌아가면 ‘소희네 외가댁’도 만날 수 있다.
▼ ‘울 엄마네 집’이었는데 ‘지금은 막내딸네 집’이란다. 하지만 그 막내딸도 지금은 타지로 나갔나보다. 문은 굳게 닫혀있고, 마당에는 쓰레기만 한 가득이었다.
▼ ‘화석정, 그곳에 가면’이라는 작은 쉼터도 만날 수 있었다. 율곡 선생의 15대손인 이성룡씨와 어머니 하옥남씨, 소야 하옥이씨가 함께 운영하는 전시장인데, 한국가곡작사가협회 회장을 역임한 하옥이씨는 시집 ‘숨겨진 밤’과 다수의 가곡집을 발표해오고 있다.
▼ 이후부터는 농로를 따라간다. 개울가를 따라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 정도의 길이 나있다.
▼ 농어촌공사의 ‘장산양수장’이 있다는 것은 이 마을이 임진강변에 위치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 현인농원. 토종닭(재래종 닭)의 복원·보존을 연구하는 농장이란다. 입구의 잘 생긴 저 닭을 얘기하는 모양이다.
▼ 14 : 00. 임진강변으로 빠져나가려면 자동차전용도로인 율곡로(37번 국도)를 횡단해야만 한다. 이정표(율곡습지공원 0.5km/ 반구정 12.5km)가 굴다리로 들어갈 것을 지시한다.
▼ 굴다리를 지나자 율곡습지공원이 다 왔다며 반긴다. 진행방향에는 종점인 주차장도 놓여있다. 그러나 호수가 가로막고 있어서 한참을 더 걸어가야만 한다.
▼ 이정표는 왼쪽으로 가란다. 하지만 우린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가 가리키는 오른쪽(율곡2리 방향)으로 진행했다.
▼ 14 : 07. 장승이 맞아주는 율곡습지공원 입구. 율곡습지공원은 주민들의 노력이 빚어낸 멋진 결과물이다. 재해예방시설(저류지)에 꽃을 심고 가꾸어 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봄이면 유채꽃이 피고,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피는 아름다운 곳으로 정평이 나있다.
▼ 공사 현장(겨울철을 맞아 시설 보수를 하는 듯)을 지나자 ‘율곡 숲’이 나온다. 호숫가에 숲을 조성하고 이 지역이 낳은 큰 인물인 ‘이이’의 호를 이름으로 삼았다. 정자나 전망대, 벤치 같은 편의시설들을 배치했음은 물론이다. 여름철에는 저 호수에서 분수까지 품어져 나온단다.
▼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였던 것은 ‘그네’가 아니었을까 싶다. 나이 지긋한 집사람을 동심으로 돌아가게 만들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 공원은 고향의 정겨운 시골풍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넓은 꽃밭과 습지에 피어있는 연꽃 군락지, 억새, 옛 농기구가 걸려있는 초가집, 높이 솟아 있는 솟대들, 삐뚤빼뚤 재미난 모양의 장승, 물레방아 등이 정감을 자아낸다.
▼ ‘천국의 문’도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평화 계단’으로 이름을 바꿔달았다. ‘평화로 한 걸음’ 나가듯이 계단을 올라라보라는 모양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는 ‘비둘기’를 희롱하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말이다.
▼ 14 : 20. 임진강변 생태탐방안내소에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평화의길 안내판(완주 인증 QR코드 부착)은 평화누리길 9코스(율곡길)의 아치형 대문 옆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번 8코스는 11.92km를 3시간에 걸었다. 화석정과 율곡습지공원을 돌아보느라 조금 지체되었던 모양이다.
▼ 오늘도 집사람과 떨어져서 출발했다. 반구정(황희선생 유적지)에서 시작한 나와는 달리 집사람은 3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임진강관광지를 출발지로 삼았다. 일종의 ‘반보기’ 풍습을 따른 셈이다. ‘반보기’란 시집간 딸과 친정어머니가 양가 중간 지점에서 만나 그리움과 정담을 나누던 옛 풍습을 말한다. 친정으로 가지 않아 시댁 가사에 큰 지장을 주지 않고, 친정에 드릴 정받이 음식을 장만하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거기다 최대한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으니 이 아니 좋았겠는가. 하지만 JTBC의 ‘사건반장’을 보던 집사람이 앞으로는 사양하겠단다. 세상이 하수상한데 어떻게 혼자서 걸을 수 있느냐면서 말이다. 걷기 여행조차 두려워지는 세상은 언제쯤 사라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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