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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7 : 23. 불법을 행하는 자
마 7 : 23. 불법을 행하는 자 -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그러나 거짓 목사들의 위선은 그들이 불법을 행하는 데서 드러났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했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도무지’라는 원어(우데포테)는 “내가 너희를 안 적이 없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그들이 기적을 행했던 행위들이 주님과 상관없이 행해졌음을 뜻한다.
거짓 목사들이 주님께 거절당한 까닭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위가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하실 것이다.
1]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거짓 목사들의 이중성, 곧 위선은 그들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에서 결정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주님과 함께 거할 수 없다.
참된 믿음은 회개의 열매를 동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과 마귀의 종은 그의 열매로 판별된다.
누구든지 악을 행하면서 구원받은 줄로 생각하고 마지막 심판대에서 주께 인정받을 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께서는 악인을 구원하시지만, 그를 악에서 건져 선한 사람을 만드시는 것이지 악한 그대로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다.
행위는 사람의 구원을 판별할 수 있는 표가 된다. 아직도 악을 떠나지 않은 자들은 구원받지 못한 자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가 참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는 모든 죄를 버리고 주 앞에 복종하고 말씀의 교훈대로 사는 자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의롭고 선한 행실로 우리의 믿음의 진실함을 나타내어야 한다.
2]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원어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했으니'이다.
이 말은 그들의 기적 행위가 주님과 상관없이 행해졌음을 의미한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능한 일을 하였다고 했다.
주님은 어떤 때에 악인들도 이용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에게 일시 이용된 일이 구원 받을 조건은 아니다.
오직 주님은 나를 사랑으로 알아주시고 나는 주님을 아는 신앙의 관계가 구원받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라고 하셨다. (눅 10: 22)
3]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거짓 목사들이 마지막 날 주께 거절당한 까닭은 그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위가 문제이다. 하나님은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 누구든지 악을 행하면서 주께 인정받은 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께서는 악인을 구원하신다. 그를 그 악에서 건져 선한 사람을 만드시지 악한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다.
행위는 사람의 구원을 판별할 수 있는 표다.
아직도 악을 떠나지 않은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가 참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모든 불법을 버리고 주 앞에 복종하는 자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의롭고 선한 행실로 우리의 믿음의 진실함을 나타내어야 한다.
주께서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의 마지막 심판대에서 버림받은 이유는 불법을 행하는 데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들이었고 천국과 영생과 상관없는 자들이었고 마귀와 상관된 자들이었고 지옥과 상관된 자들이었다.
4] 불법을 행하는 자들 ( 마 7: 22-23 )
본문에서 예수님이 교훈하시고자 하는 뜻은 분명하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자 하는 목적이 선하다고 해서 우리가 취하는 방법이 모두 선하게 인정될 수 없다.
불법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본문의 거짓 선지자들이 바로 이러한 자들이었다. 본문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주여! 주여!'라고 불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저들이 예수님을 열심히 믿는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결코 외모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감추어 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 그들도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할 수 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선지자란 어원적으로 보면 예언자와 같은 뜻인데 여기에서는 앞을 미리 내다본다는 뜻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사람들에게 전달한다'라는 뜻이 더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거짓 선지자의 노릇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만이 가장 진실 된 복음을 전하는 자로 가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러한 자들을 향해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 8)
(2) 귀신을 내어 쫓을 수도 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우리는 분명히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었음에도 주님으로부터 불법을 행하는 자들로 판정받았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를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주시는 능력 이외에 다른 힘을 입어 귀신을 내어쫓은 후에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행하는 것인양 가장했을 수도 있다.
둘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을 내어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은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의 영광을 채우는 데 사용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신이 그러한 은사를 받든지 아니면 그러한 은사를 지닌 사람을 보든지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3) 권능을 행할 수도 있다.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때로 하나님께서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게 권능을 주실 때도 있다. 이 권능이란 말은 비단 초자연적인 힘뿐만 아니라 통치권, 능력, 권세, 세력 등의 의미가 있는데 이렇듯 불법을 행하는 자들의 능력은 대부분 구조적 폭력이나 권력남용을 이용한 폭력 등으로 표출된다.
비록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사회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어떤 지위를 획득한 경우에 우리는 얼마든지 이러한 불법을 행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또한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마귀가 이 세상을 통치할 수 있는 권세를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처럼 허세를 떨었다가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 앞에서 꼼짝없이 굴복하고 말았다는 사실에서 좋은 교훈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권세를 주님 앞에서 올바로 행사하여야 할 것이며, 옳지 못한 권세 앞에서는 예수님의 경우와 같이 비굴하지 않고 담대해야 한다.
(4) 심판 날에는 그들의 행위가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날에…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때로 진실된 성도들은 예수의 이름을 도용하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로 말미암아 선의의 피해를 보는 경우가 있다.
또한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들도 교회 안에 있는 불법자들로 말미암아 세상의 지탄을 받는 경우가 있다. 무엇보다도 억울한 것은 그처럼 예수의 이름을 도용하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과 진실한 성도가 세상 사람의 눈에는 물론 심지어 교회 안의 성도 간에도 서로가 구분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교회의 심각한 문제가 되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 교회가 분열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흔들리지 아니하고 열심히 신앙 생활할 수 있는 것은 본문의 말씀과 같이 심판 날에 주님 앞에서 옥석이 밝히 구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는 다른 사람의 행동에 구애됨이 없이 항상 하나님 앞에서 옳고 바르게 행동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5) 예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불신자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예수를 열심히 믿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버림받은 사람이다.
저들은 예수를 열심히 믿었지만 불법으로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받을 것을 이미 다 받았기 때문에 하늘나라에서 받을 것이 없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에게 성경은 저들이 이를 갈며 심히 슬퍼할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에서 쾌락을 얻을 생각을 하지 말고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 3)는 사도 바울의 권면과 같이 더욱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예수님의 상급을 받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5] 행하는 자가 들어가리라 ( 마 7: 20-23 )
옛날 어떤 마을에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한 고명하신 스승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어떤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와서 하소연하였다. "선생님, 이 아이는 사탕을 너무 좋아해서 이가 다 썩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먹지 말라고 해도 내 말은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선생님을 무척이나 존경합니다. 선생님께서 말 한마디만 하시면 들을 것입니다. 사탕을 먹지 말라고 제발 타일러 주세요."
그러자 그 스승이 아들을 살펴보더니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얘야, 한 달 뒤에 다시 오너라." 아이의 어머니는 의아스럽게 생각하였다. 까짓것 그 자리에서 사탕을 먹지 말라고 한마디만 해주면 될 텐데, 왜 한 달 뒤에 다시 오라고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명하신 스승이 그리 말씀하시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어머니는 한 달 뒤에 다시 찾아갔다. 뜻밖에도 스승은 또 이렇게 말했다. "얘야, 한 달만 더 기다려라." 도무지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 달을 기다렸다가 다시 갔다. 그제야 스승은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얘야, 지금부터 사탕을 먹지 말아라."
그 아이는 대답을 했다. "잘 알겠습니다. 선생님, 이제부터는 제가 사탕을 절대로 먹지 않겠습니다." 아이의 어머니가 스승에게 물었다. "선생님, 질문이 있습니다. 사탕을 먹지 말라는 말을 하는데 왜 두 달이나 걸렸습니까?" 그때 스승은 이렇게 대답했다. "부인, 실상 나도 사탕을 참 좋아한답니다. 내가 사탕을 먹으면서 어떻게 저 아이에게 사탕을 먹지 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한 달을 기한으로 정하고 사탕을 끊으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한 달을 연장하여 다시 시도 했습니다. 이제는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참 양심적이고 훌륭한 스승의 이야기다.
이처럼 우리 신앙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구별하는 법이 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냐는 것이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살았지만 행함이 없으면 죽은 믿음이다. 본문에 예수님께서 그것을 말씀해 주셨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이다. 즉 말씀대로 살면 진짜이고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가짜다. 교회에 출석을 잘하고 세례받고 직분 받고 주의 이름을 잘 부른다 해도 그 자체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라 할 수 없다.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삼고 부른다면 그 분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잘못된 것 아니다. 행 2: 21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가지고 문제 삼는다. 주의 이름을 부르면 잘못입니까? 지옥 갑니까?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이 말씀은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그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을 지적하신 것이지 주님을 부르는 그 자체를 말씀한 것이 아니다.
그럼 거짓된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1) 입술로만 사랑하는 것이다.
마 15: 8-9에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좋아했고 명예와 권세를 더 사랑했다.
(2) 직분과 은사가 믿음을 대신하지 못한다.
22절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선지자 노릇은 주의 종을 비롯한 여러 직분을 의미한다. 그러나 직분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직분은 하나님께서 내신 것이다.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행했다는 것은 은사를 말한다. 은사 역시 잘못된 것 아니다. 사람들이 이 본문을 읽고 은사를 부정하는 교훈으로 사용하는데 이 말씀은 은사를 부정한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 역시 귀한 직분을 받고 귀한 은사를 받아 실천했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면 주님께서 모른다고 하시겠다는 말씀이지 직분과 은사를 부정한 말씀이 아니다. 여기서 의문은 은사를 받아도 버림받을 수 있느냐는 것인데 버림받을 수 있다. 사울을 보라. 큰 직분과 은사를 받았지만 교만하다가 버림을 받았다.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도 다른 제자들처럼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고 귀신도 쫓아내고 권능도 행하였지만, 예수님을 팔고 말았다.
(3) 예수를 만난 체험이 없다.
23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예수님이 알지 못하신다는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그들 역시 예수를 알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안다는 것은 체험을 말한다. 우리는 영혼으로 예수를 받아들이고 체험해야 한다. 생명 체험과 은사체험은 다니다. 생명 체험을 한 자는 영원히 버림을 받지 않는 씨를 가지고 있다.
사도 바울은 고후 13: 5에서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림 받은 자니라.” 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거짓은 통하지 않는다. 이 예수님의 교훈은 종말론적 말씀이지만 현재적 관점에서 보면 은혜에 관한 교훈이다. 즉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절대 은혜를 받지 못한다는 교훈이다. 마음의 천국을 누릴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입으로만 주의 이름을 부르지 말고 말씀대로 순종하여 진실로 은혜를 받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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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원한 천국에 들어갑시다.
설교 감사합니다.
오늘도 남은 시간 행복이 넘쳐 나시길 기원 드립니다.
영원한 천국에 들어갑시다.
강해 설교 감사합니다.
영원한 천국에 들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