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17
10월21일[연중 제29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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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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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R87ZWQnGnJk
[서울대교구 신주환 안셀모(창5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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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돈 외에도 소중한 가치들이 참 많답니다!>
연피정 하시는 신부님 수사님들을 일주일 내내 동반해드리고 왔습니다. 수도회 이름은 다르지만 같은 길을 걸어가는 형제들이라 남 같지 않았습니다. 때로 존경스럽기도 하고, 때로 측은하기도 하고, 많은 것을 서로 공유하며 참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왔습니다.
청빈의 삶을 서약한 수도자로서, 이 어려운 시대 어떻게 가난을 살수 있겠는지? 이토록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시대에 가난의 가치를 어떻게 세상에 설명할 것인지 고민도 참 많이 했습니다.
복음서 전반을 살펴볼 때 부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시선은 그리 매끄럽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 당신의 인생 전체가 일관되게 가난했기 때문에 그런가 싶습니다.
탄생부터 시작해서, 유년기, 청소년기, 장년기, 그리고 공생활 기간 내내 가난하셨습니다. 마지막 운명하실 때는 더 이상 가난할 수 없는 가난의 끝판왕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표현을 하시며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유랑생활을 계속하셨습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고 오늘 복음을 통한 예수님의 부자들을 향한 질책과 경고는 아주 매섭습니다.
그래서 때로 부자로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좀 더 심사숙고해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직하고 성실한 부자, 열심히 일해서 벌은 돈을 아낌없이 ‘살아계신 하느님’이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봉헌하는 부자들은 예수님께서 아낌없이 칭찬하시는 부자입니다.
매서운 질타의 대상이 되는 부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돈이라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돈의 위치를 하느님보다 위쪽에 설정해놓은 사람들입니다. 죽어도 자선 한번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돈 많다고 함부로 가난한 사람들 업신여기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 무서운 말씀, 섬뜩한 말씀입니다. 개념 없는 부자가 강한 경고를 받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또 다른 한 가지 반성을 해보게 됩니다.
돈이라고는 땡전 한 푼 없는 수도자들, 그리고 가진 바가 없어 나눌게 없는 분들에게 오늘 말씀은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 하는 묵상입니다.
재물 외에도 ‘부’라고 칭할 수 있는 대상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매일 주어지는 24시간이라는 시간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긍정적인 측면들입니다. 장점들, 경쟁력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좋은 재능들, 어떻게 보면 재물보다 훨씬 가치 있는 ‘부’입니다.
이런 ‘부’를 공동체와 이웃들을 위해, 세상을 위해 기쁘게 내어놓는 노력, 그것이야말로 칭찬받는 부자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다시 한번 설레는 마음으로 공동체와 이웃, 그리고 세상과 하느님을 위해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부귀영화도 중요하지만, 저 너머 세상, 하느님 나라에서의 성공과 부귀영화는 몇천 배, 몇만 배 더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수도자들에게 주어진 중차대한 과제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님을 알리는 것입니다.
돈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난을 결핍과 궁핍함으로, 비참함으로 느끼게 사회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 바로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부자들을 멀리해서도 안됩니다. 부자들에게 자신들의 재물이 여러분 것이 아님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들을 잘 영적으로 인도하고 설득해야 됩니다. 감동을 줘서 많이 내어놓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일입니다.
부자는 크게 두 가지 부자로 나눠집니다. 안하무인의 부자들과 착한 부자들로 나눠집니다. 절대로 모든 부자들을 싸잡아 경멸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평생 땀흘리고 정직하게 모아서 일어선 부자들, 박수받아야 하고 축복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우리는 부자로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설명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관대한 나눔을 통한 구원의 길을 선포하도록 도와줘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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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UheSMGW7hM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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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 받은 돈도 축복이 되게 하시는 분>
복권이 당첨되었으면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우리나라 돈으로 3억 원 상당의 복권에 당첨된 사나이의 가족이 벌이던 자축 파티가 살인극으로 돌변하여 일가족이 패가망신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93년 9월 25일 스페인에서 있었습니다.
스페인 바로셀로나 경찰은 이날 현지의 한 청년이 복권이 당첨돼 4천 9백만 페세타(약 3억 원)를 타게 되자 지난 23일 가족과 함께 잔치를 벌이고 즐기던 중 가족에게 나눠 줄 액수를 놓고 17세의 여동생과 심하게 말다툼하다가 그만 칼로 동생을 살해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자기 형에게 자신에게도 유산을 나누어 달라고 말해달라고 청합니다. 유산이라면 형제에게 모두 주었을 테지만 형이 모두 가로채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전혀 돈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예수님은 돈이 공평하게 분배되게 하시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돈보다는 사랑에 신경 쓰도록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불행은 돈 때문에 깨지는 관계 때문입니다.
월간잡지 'MONEY'의 통계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82%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이 돈이라고 합니다. 동시에 미국인의 53%가 최고로 걱정하는 것도 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돈보다 관계에 집중하라고 하십니다.
안식일에 유태인 세 명이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당시에는 은행이 없었기 때문에 세 사람은 가지고 있던 돈을 함께 파묻었었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몰래 그곳에 되돌아와서 돈을 꺼내 가지고 가 버렸습니다.
다음날 세 사람은 현자로 알려져 있던 솔로몬왕에게 가서, 세 사람 중에서 누가 돈을 가져갔는가를 알아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왕은 “당신들 세 분은 매우 현명한 분들이니까 우선 내가 지금 곤란을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당신들 세 분의 문제는 내가 해결해 주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젊은 아가씨가 한 남자와 결혼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얼마 후 아가씨는 다른 남자와 사랑하게 되어, 처음의 남자를 만나 헤어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위자료도 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위자료는 필요 없다고 하면서, 그녀에게 파혼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노인에게 유괴되었습니다. 그녀는 ‘나는 결혼할 것을 약속했었던 남자에게 파혼하자고 요구했는데도 위자료도 내지 않고 허락받았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해주셔야 합니다.’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돈을 빼앗지 않고 그녀를 그냥 놓아주었습니다.”
솔로몬 왕은 이 사람들 중에서 누가 가장 칭찬받을 사람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첫째 번 남자는 “그녀와의 파혼을 허락해 주면서도 위자료를 받지 않았던 남자가 가장 훌륭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도 첫 번째 남자의 말에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남자는 “이 이야기는 앞뒤가 맞지 않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첫째, 유괴라고 하는 것은 돈을 얻으려고 하는 짓인데, 돈도 받지 않고 놓아주었다는 것은 조리가 없는 이야기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솔로몬은 큰소리로, “그대가 돈을 훔친 범인이렷다! 다른 두 사람은 사랑이나 처녀와 약혼자 사이의 인간관계, 혹은 그사이의 긴장에 주목하는데, 그대는 오로지 돈만을 생각하고 있다. 그대가 범인임이 틀림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솔로몬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면 돈보다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복권 당첨금 때문에 형제끼리 싸울 때 부모가 마음 아파함을 느꼈다면 그러한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 남매에게 부모는 어떤 역할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부모가 있다면 형제는 싸우지 못합니다. 그러면 돈이 관계를 깨지 못합니다. 돈 때문에 관계가 깨진다면 이는 예수님의 현존이 그 사람들에게는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나온 ‘마이다스의 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손만 대면 다 금으로 변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이 신화는 좋은 의미의 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미다스라는 왕이 신으로부터 자신이 만지는 모든 것이 금으로 변하는 축복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만지는 모든 것을 금으로 만들어버렸고 음식도 그래서 먹을 수 없었으며 나중에는 외동딸도 금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신이 인간에게 황금을 제어할 능력을 갖지 못하게 한다면 신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역할을 하려고 하십니다. 돈을 나누는 게 문제가 아니라 돈 때문에 관계가 깨지는 일이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부모가 죽으며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라고 하는 마지막 말을 하듯,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을 믿으면 그래서 돈이 아무리 많아도 돈 때문에 안 좋은 일이 발생하는 일은 없습니다.
신학자 팀 켈러(Tim Keller)는 “진정한 자유는 ‘구속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올바른 구속을 찾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당신 멍에를 메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 멍에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십시오. 그러면 돈과 관계의 행복을 다 얻을 수 있습니다. 돈을 제어할 능력과 그릇이 된다면 하느님은 얼마든지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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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축성을 다녀왔습니다. 1,000명이 입장할 수 있는 식당이었습니다. 투자된 비용도 많았고, 직원도 많아서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식당에 가서 축성하였고, 직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였습니다. 바쁘고, 지친 형제님에게 수호천사가 있었습니다. 수호천사는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자매였습니다. 자매는 형제님의 종교를 따라서 천주교를 택하였고, 예비자 교리를 받고 있습니다. 자매님을 만나기 전에 형제님의 눈빛은 피곤해 보였고, 힘들어 보였습니다. 자매님을 만나면서 형제님의 눈빛은 밝아졌고, 생기가 있었습니다. 자매님의 권유로 좋아하던 술도 끊었다고 합니다. 술을 끊으니, 정신도 맑아지고 사업의 전략도 새롭게 만들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자매님을 만나기 전에는 재물이 목적이었는데, 자매님을 만나면서 신앙심도 깊어졌고, 봉사하는 기쁨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내년에 자매님이 세례를 받으면 두 분이 혼인성사를 받고, 신앙 안에서 살고 싶다고 합니다. 내년에는 가게 축성이 아니라, 혼인의 축복을 할 것 같습니다.
면담도 있었습니다. 부산에서 태어난 자매님은 수도자가 되고 싶었다고 합니다.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았는지, 목사님과 결혼해서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편 목사님을 따라서 미국으로 왔다고 합니다. 어려서 성당에 다녔기 때문인지 목사님의 아내로 사는 것이 늘 어딘가 불편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런 불편함을 아시고 자녀들을 축복해 주었다고 합니다. 자녀들이 모두 건강하게 잘 자랐다고 합니다. 한국에 있는 아들과 며느리가 모두 성당에 다닌다고 하기에 말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쁜 손자가 성호경을 하면서 기도하는 영상도 보았다고 합니다. 아들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어릴 적 생각도 났다고 합니다. 남편이 투병 끝에 하느님의 품으로 갔고, 이제는 자유로워지고 싶다면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자매님은 한국에 다녀오면 성당 옆으로 이사 와서 앞으로는 성당에 다니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건 개신교와 천주교라는 건물이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중요한 건 ‘누구의 아내’라는 직분이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자매님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수호천사를 만난 형제님을 생각합니다. 재물을 많이 얻기 위해서 노력할수록 고달프고 힘들었다고 합니다. 자매님과 함께 성당에 다니면서 사업을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고 합니다. 재물보다 더 소중한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자매님을 생각합니다. 누구의 아내라는 직책을 떠나서 하느님과 대면하면서 신앙의 기쁨을 찾을 겁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선행은 잘못 전달되는 경우가 없습니다. 선행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선행은 누가 빼앗아 갈 수도 없습니다. 선행은 연옥에 있는 분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습니다.
식당 탁자 위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사람들은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을 하면서 마치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산다.’ 분명 우리는 우리에게 정해진 시간과 삶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끝이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주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아무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착실하게 다가올 죽음을 준비합니다. 어떤 사람은 시간이 없어서, 여유가 없어서, 가난해서, 몸이 아파서 선행을 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선행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기도, 자선, 희생, 봉사, 나눔, 친절, 온유, 겸손도 선행입니다. 시간이 없어도, 여유가 없어도, 가난해도, 몸이 아파도 우리는 충분히 선행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영원히 썩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곳에 우리의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것들은 사라지고, 좀이 생기고, 남이 와서 빼앗아 가기도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신뢰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갖는 사람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곳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길이와 순서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갈 곳을 모르는 우리에게,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일까요? 가장 믿을 만한 분은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죽음 이후에도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입니다. 세상의 곳간에 쌓아 놓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믿고,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며 선행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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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13-21: 어리석은 자야!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15절) 하신다. 주님께서는 조심하여 크고 작은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고 하신다. 어리석은 부자는 엄청난 소출을 거두고 근심에 빠져 한심한 말을 한다.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17절) 그는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19절) 미래를 내다보지 않았다.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지도 않았고, 괴로워하는 이들을 동정하지도 않았다. 그는 땅에서 소출을 거두듯이 자기 목숨의 길이를 정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한다. 그러나 부자는 그것으로 끝나고 만다. 그는 최후의 심판 날에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마태 25,42)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는 가난한 이들의 굶주린 배가 자신의 곳간보다 더 안전한 창고라는 것을 몰랐다. 그 재산을 가난한 이들의 배에 쌓았더라면, 세상에서는 모두 없어졌겠지만, 하늘에는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재물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재물을 쌓아 둔다.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은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다. 사는 동안 모은 재물은 유산으로 상속된다. 선행, 덕행만이 죽은 사람의 동반자가 된다. 자비만이 우리를 따라온다. 그것이 우리를 하늘나라와 첫 번째 거처로 인도한다. 그래서 주님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 말씀하셨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이며, 영광스러운 희망을 지닌 사람이다. 누가 그런 사람일까? 재물보다 덕을 사랑하는 사람, 그의 손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며, 모든 힘을 다해 없는 이들의 슬픔을 달래 주는 사람이다. 그는 하늘에 있는 곳간에 보화를 쌓는다. 그는 덕행과 바른 삶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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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복음에서는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루카 복음서 12장의 본문에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의 부자는 곳간을 크게 짓고 재산을 쌓아 두면 안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언제 다가올지 알 수 없고, 쌓아 둔 재물은 그를 죽음에서 구하여 주지 못합니다. 죽음을 걱정하거나 스스로 노력한다고 해서 죽음을 미루고 자기 수명을 늘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12,25 참조) 복음을 약간 뒤집어서 읽는다면, 오늘 들에 서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풀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러니 수명을 늘리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12,31 참조)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아버지께서 알고 계시고 아버지께서 돌보십니다. 오늘 밤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나게 되더라도, 그것이 하느님께서 모르시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나라를 찾을 따름입니다.
그러면 재물은 어떻게 할까요? 같은 장에서,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푸는 것이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12,33 참조) 곳간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자선으로 베푸는 것이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이고, 그렇게 쌓아 둔 재물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12,34) 자선을 베풀어 하늘에 보물을 쌓을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이 이미 하늘에 있습니다. 그는 지금 죽어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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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탐욕을 조심하여라.>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3-15)
지금 이 상황은, 형제간에 유산 상속 문제로 다툼이 생겨서 예수님께 그것을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는 상황인데, 예수님께서는 그 요청을 들어주기를 거절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이 듣는 앞에서 ‘탐욕’에 대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사람의 형뿐만 아니라 그 사람 자신도 탐욕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라는 말씀은, 세속의 일에 개입하기를 거절하시는 말씀입니다.
1) 이 말씀에서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라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유산 상속 문제로 형제가 다투는 것은 ‘죽은 이들의 다툼’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런 다툼을 해결하는 것도 ‘죽은 이들’이 할 일입니다.
2) 예수님 말씀을, “나는 너희의 탐욕을 채워주려고 온 것이 아니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속의 부귀영화를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께 청해야 할 것도 세속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3) 뒤의 말씀을(탐욕에 관한 가르침을) 그 사람의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즉 형제간의 다툼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신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형제 사이에 유산 상속 문제에 관한 다툼이 생긴 원인은 ‘탐욕’이기 때문에, 둘 다 탐욕을 버리면, 또는 한쪽이라도 탐욕을 버리면 그 다툼은 바로 해결됩니다. (만일에 둘 다 끝까지 탐욕을 버리지 않으면, 그 다툼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라는 말씀은,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5)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신앙인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고, 그 생명만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돈을 다 가진다고 하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돈이 많으면 그 돈으로 선행과 사랑 실천을 많이 할 수 있고, 그러면 그것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만일에 그렇게 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면 그것은 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선행과 사랑 실천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바로 그 부분을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선행과 사랑 실천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마음과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점도 잊으면 안 됩니다. 마음속에 선도 없고 사랑도 없이 돈으로만 한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위선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고,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 없습니다. (돈이 많아서 그 돈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서 더 유리하다면,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다는 뜻이고, 그러면 그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차별이 없는 나라입니다.)
어떤 부자가 진심으로 선행과 사랑을 실천한다면, 언젠가는 ‘빈손’이 될 것이고, ‘빈손’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어차피 돈이라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성인 성녀들 가운데에는 ‘부자였던’ 사람이 많지만, ‘부자인 채로’ 생을 마친 사람은 없습니다.
탐욕에 관한 가르침 뒤에 이어지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많이 가진 자들이 잘난 체 하지만, 그것은 결코 지혜가 아니고, 어리석은 탐욕일 뿐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16-21)
이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자기가 모은 재산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첫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또 그는 자기의 목숨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두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또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세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세상 만물은 주님이신 하느님의 것입니다. 재산도, 목숨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맡겨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관리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시간의 주인이신 분입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고, 그래서 하느님께 봉헌하려는 생각도 없고, 또 이웃에게 고마워하지도 않고, 그래서 이웃에게 ‘나눔’을 실천하려는 생각도 없습니다.
그것이 그의 첫 번째 죄 - ‘탐욕’입니다. 또 그는 혼자서 먹고 마시며 즐길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두 번째 죄 - ‘방탕’입니다. 또 그는 내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고,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세 번째 죄 - 교만입니다. 여기서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라는 말씀은, “누구의 차지도 되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지금 당장’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오늘 밤에’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그에게 몇 시간의 여유는 주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몇 시간은 회개하라고 주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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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세상에 ‘돈’보다 더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가 있을까요?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돈 문제만큼은 확실히 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 말씀도 가족 간에 벌어진 재산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어지는 돈의 마력을 우리 모두 경험합니다. 그저 돈 많이 버는 직업을, 돈 많이 주는 직장을 최고로 칩니다. 손해 보지 않는 방법이나 큰 이익을 거두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똑똑한 사람으로 칭송받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는 일이 생기면 분하고 억울해서 잠을 못 이루기도 합니다.
루카 복음은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도 부와 재산에 대한 탐욕을 강하게 경고합니다. 예를 들어 마태오 복음은 산상 설교에서 행복에 대한 선언들만 쭉 나열하고 있다면(5,3-12 참조), 루카 복음은 부자들을 향한 불행 선언들도 함께 소개합니다.(6,24-26 참조) 우리가 잘 아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이야기도 루카 복음에만 나옵니다.(16,19-31 참조)
그리고 오늘 복음 말씀도 그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이어지는 비유에 등장하는 부유한 사람은 자기가 거두어들인 많은 소출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 쌓아 놓을지에 대해서만 고민합니다. 그저 모아 둘 생각만 하는 그의 고민은, 기존의 곳간을 허물고 더 큰 곳간을 짓겠다는 결심으로 끝나 버립니다.
혹시 우리에게도 비슷한 모습이 있지는 않습니까? 가진 재산을 어떻게 하면 가치 있게 사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보다는, 일단 모으고 보자는 마음으로 재산을 축적하는 데만 급급하여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통장에 찍힌 잔고에 흐뭇해하기보다, 그것을 어떻게 의미 있는 일에 사용해서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될 것인지를 더 고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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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어느 선배 신부님이 성지 순례를 간다고 하니 교우 분들이 쌈짓돈을 챙겨 주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그분들께 드릴 선물을 사려고 성지 주변의 성물 가게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영어를 통 몰라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시도하였는데, 주인이 잠깐만 기다리라더니 자기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하여 영어를 조금 할 줄 아는 아들의 친절한 도움으로 성물들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선배 신부님은 ‘돈이 언어구나! 돈만 있으면 외국어를 몰라도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사실 돈이 있으면 참 편하고 당당해지는 세상입니다. 배짱이 두둑하려면 우선 지갑이 두둑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삶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 말씀처럼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은 돈이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린이 미사 때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무엇인지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이들은 마음, 세월, 예수님, 우정, 부모님, 사랑, 하늘 나라, 믿음 등 의외로 많은 것들을 대답하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현실에 부대끼며 살다 보면 우리는 이러한 가치들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제가 지도하는 제주교구 신학생들은 해마다 설이 되면 교구의 모든 신부님을 찾아가 세배하고, 이때 받은 세뱃돈을 모아 일 년 살림을 마련합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적어도 십 분의 일 이상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 쓰고 있습니다.
탐욕에서 자유로워지고, 돈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과, 나눔의 가치를 깨우치기 위해서입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않는 법을 이렇게 신학생 때부터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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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12,20)
우리 가운데 어떤 누구도 미래를 미리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매 순간 감사하며 주어진 곳에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실 때 바라시는 것이 있었다면 당신의 자녀인 우리가 세상사는 동안 삶의 수많은 어렵고 힘든 고통을 겪으면서 살겠지만, 그래도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를 간절히 바라신다고 믿습니다. 다만 그 행복을 어떻게 찾고 사느냐는 문제는 각자가 자기 삶에서 끊임없이 찾고 노력해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에 나오는 구두장이 시몬의 가게에서 구두 수선공으로 일하는 미하일, 그는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땅으로 쫓겨난 천사인데 그가 풀어야 할 세 가지 수수께끼가 있었습니다. 그 수수께끼는 바로, ‘사람의 가슴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이며, 이 세 가지 문제를 풀고 나면 미하일은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직접 한번 이 문제를 풀어 보시고, 발견한 해답대로 산다면 여러분은 분명 하늘나라로 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직접 한 번 풀어 보시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자신의 생애 동안 이런 질문을 받은 기회가 없었는지,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전혀 모른 채 큰 창고를 다시 짓고 곡식과 재산을 쌓아 둘 궁리를 하면서 이렇게 자신에게 말합니다. 아마도 자기 위로이며 최면인지도 모릅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루12,9) 하지만 그의 바람은 아침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해 뜨는 광경을 보지 못한 채 저승으로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살아가면서 깨닫지만,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저와 여러분들에게 허락된 시간과 장소는 ‘지금, 여기’ 뿐입니다. 한 시간 후 저와 여러분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사랑하기도 충분하지 않은 세상에서 미워하며 살렵니까? 행복하기도 힘든데 불행하며 살아가렵니까? 행복한 삶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사랑하며 사는 삶이고, 이런 삶은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가장 짧은 지름길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네요. 『아주 큰 부자가 죽어서 하느님 앞에 가게 되었는데 그래도 생전에 선행을 한 것이 있어서 천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천사가 앞장서서 천국을 안내하고 부자가 살게 될 집을 찾아갑니다. 역시 천국은 천국이었지요. 으리으리한 저택들이 즐비한 것을 보고 부자는 연신 벙글거렸습니다. ‘역시, 천국은 다르군. 아, 여기서 살게 되었다니 정말 좋구나.’ 그런데 천사는 그 으리으리한 저택들을 계속 지나쳐 가기만 하였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부자는 더 좋은 집을 기대하며 천사를 따라갔습니다. 둘은 다음 마을로 들어섰는데 이 마을에는 50평, 100평이 넘는 최고급 아파트들이 즐비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여기도 살 만하겠군.’ 부자는 이렇게 생각하며 자기 자신의 집을 찾고 있는데 이번에도 천사는 그 마을을 휙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 보니 저만큼 달동네가 나왔습니다. ‘설마 저곳은 아니겠지.’ 이렇게 생각하며 가는 부자에게 천사는 달동네 중에서도 가장 꼭대기에 세워진 어느 쓰러져 가는 판잣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여기가 당신이 살 집입니다.’ 화가 치민 부자가 따졌습니다. ‘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지상에서 살 때 호화주택에서 떵떵거리며 살았는데, 아니 천국에 와서 이렇게 다 쓰러져 가는 판잣집에서 살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러자 천사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지상에 살면서 보내 준 건축 자재로 지은 집이 바로 이 집이니까요.’』
혹여 어리석은 부자처럼 불량 자재를 하늘로 배송하지 마세요. 그리고 여유 자본이 있으시다면, 제발 은행의 DLF(파생결합펀드), DLS(파생결합증권)와 같은 상품에 절대 투자하시지 말길 바랍니다. 사실 은행이나 보험 회사의 상품도 안전하지 않으니 조심하십시오. 그리스도인 우리에게 가장 위험 부담도 낮고 이자율도 높은 보험 상품은 미래가 아닌 지금 자신의 가진 것을 “자신을 위해서만 재화를 모으지 말고”(12,21 참조),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하는 하늘에 보물을 쌓은 것”입니다.(마태 6,20) 그것은 선행을 베풀고 가진 것을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는 삶입니다. 그래서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12,20)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이지 않나요. 물론 자기 죽을지 모르는 채 뼈 빠지게 고생해서 모아 둔 돈이야 배우자나 자식들이 차지하긴 하겠지요. 결국 그렇게 죽자살자고 돈을 축적하는 게 인생의 전부가 아니지 않나요. 한 번뿐인 인생살이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자식들에게 남기는 게 전부라면 그렇게 살다 죽으시지요,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한번 진솔하게 물어보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게 참으로 행복하게 사는 길인지 말입니다. 부디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느님 앞에 부유한 사람으로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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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몇 년 전, 강원도에서의 강의를 마치고 영동 고속도로를 통해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앞 차가 조금 이상했습니다. 좌우로 흔들리더니 차선을 벗어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졸음운전인 것 같아서 경적을 울렸습니다. 하지만 경적이 들리지 않는지 계속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뒤에서 경적을 울려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차선을 옮겼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옆 차선을 달리던 트럭과 추돌했습니다. 정말로 큰 소리와 함께 문제의 승용차는 몇 차례 굴러서 보호난간에 부딪힌 뒤에 멈췄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혹시 몰라서 차간 거리를 두었고, 또 옆 차선으로 옮겼기에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갓길에 차를 대고 119에 사고 신고를 한 뒤에, 사고 차량으로 다가가니 다행히 운전자가 별 이상 없이 창문을 통해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섬뜩합니다. 만약 차간 거리를 지키지 않았다면, 또 차선을 옮기지 않았다면 저 역시 사고 당사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불과 몇 초의 차이로 말이지요.
순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최악의 시간도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항상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은 이 정도면 괜찮다는 안일한 마음으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매 순간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유산 분배에서 불합리한 부분을, 형의 정의롭지 못함을 고발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라고 하시면서, 세상의 것들이 전혀 중요하지 않음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이어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해주십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것이 전부이고 영원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삶을 마친 뒤에는 아무런 쓸모없는 것임을 이야기하십니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 삶을 찰나(刹那)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매우 짧은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짧은 시간을 어떻게 소비하고 있을까요? 이 세상 삶 안에서만 필요한 것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통해 하느님 앞에서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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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된 부자가 되십시오>
부자가 되고 싶은 바람을 하느님께서 꼭 들어주시길 기도합니다. 많은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만 참된 부자가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부자는 얼마만큼 돈을 버느냐, 재물을 가진 것에 달려 있지 않고, 얼마만큼 잘 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결코, 많이 가졌다고 해서 부자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부자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닫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다 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느님께 달려 있고, 하느님의 뜻을 얼마나 잘 실행하는가에 영원 생명에 가까이 갑니다. 그중 물질에 대한 성경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주님을 경외하며 가진 적은 것이, 불안 속의 많은 보화보다 낫다.”(잠언 15,16) “돈을 좋아하는 자는 돈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큰 재물을 사랑하는 자는 수확으로 만족하지 못하니 이 또한 허무이다.”(코헬 5,9) “참으로 재물은 믿을 수 없다. 거만한 사람은 견디어 낼 수 없다.”(하바 2,5) “큰 재산은 소심한 사람에게 걸맞지 않다. 구두쇠에게 재물이 무슨 이익을 주겠느냐.”(집회 14,3)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예지를 포기하지 마라.(잠언 23,4) “진실한 기도와 의로운 자선은 부정한 재물보다 낫다. 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토비12,8) 인간에게 주어진 욕구는 정당한 영역이나, 이미 충분한데도 욕심을 내는 것은 탐욕입니다. 모든 탐욕은 우리를 생명이 아니라 멸망으로 이끌어 갑니다.
사실 생명은 지상의 재물이나 넘치는 부의 산물이 아닙니다. 생명을 안배하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현대의 의학이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일시적으로 연장할 수 있을지언정 영원 생명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재물의 소유를 통해서 생명의 안전을 생각하는 그릇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결코 부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느님 안에서 만족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큰 부자입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는 마음이 부유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자가 되십시오. 석가모니도 말했습니다. “만족함을 모르는 사람은 부유하더라도 가난하고, 만족함을 아는 사람은 가난하더라도 부유하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하느님께 의탁하게 됩니다. 자기의 능력만 믿고 자신이 옳고,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때로는 욕심을 부려야 하겠지만, 정당한 욕구의 수준을 넘어 욕심을 부리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신명기(8,17-18)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너희는 마음속으로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이 재산을 마련하였다,’(이 재산은 내 손으로 뼛골이 빠지게 일해서 모은 것이다.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거든’)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기억해야 한다. 바로 그분은 오늘 이처럼, 너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계약을 이루시려고, 너희가 재산을 모으도록 너희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시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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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무 좋다 그치>
루카 12,13-21 (탐욕을 조심하여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그때에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너무 좋다 그치>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 12,15)
나의 것을
벗어버리니
나만 남았네
너의 것을
벗겨버리니
너만 남았네
이렇게 나
이렇게 너
참으로 만나니
너무 좋다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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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루카 12, 13)
이 사람은 겉으로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듯하지만, 속셈은 손해보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니, 마음속에 탐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말은 우리 자신들의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형제에게 손해보고 싶어 하지 않고 있다면, 말입니다. 나의 편리와 이익을 계산하며 형제에게 시간과 노고를 내어주는데 인색할 때가 바로 그럴 때일 것입니다.
또한 나의 뜻과 나의 계산으로 이해타산을 따지고 있을 때가 바로 그럴 때일 것입니다. 만약에, 내 마음 안에 탐욕과 이해타산이 아닌, 사랑이 가득 차 있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손해 보는 길을 택할 것입니다.
진정 사랑에 가득 찬 아우였다면,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고, “스승님, 제 형더러 저의 유산을 가지라고 일러 주십시오”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루카 12, 15)
그렇습니다. 재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재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명이 무엇에 달려 있는가? 당연히 주인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인께 달려 있는 이는 탐욕을 버리는 것만이 아니라, 그 탐욕의 온상지인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떠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재산의 주인도 아니요 자기 생명의 주인도 아님을 알고,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떠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탐욕으로부터 떠나지 못함은 아직 진정한 값진 것을 찾지 못해서 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값진 것을 찾게 되면, 일체의 다른 것들로부터는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이 그 값진 것 앞에서는 상대화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마저도 말입니다.
그러니 탐욕은 자기 자신을 채우는 것으로, 자신을 가장 값지고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데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탐욕으로부터 떠난 사람은 자신에게 소유당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입니다.
묘한 것은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진 것이 됩니다.”(안토니오 더블유) 예수님을 가지게 되면, 다른 무엇들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됩니다.
데레사 성녀는 말합니다.
“나에게는 하느님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 20)
하오니, 주님,
제 마음의 곳간에 탐욕이 아니라 사랑을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채우게 하소서.
당신께 온전히 소유당한 자 되게 하소서! 전부인 당신이 저를 차지하소서.
제 자신에게 부유한 자가 아니라, 당신께 부유한 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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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의 예술가藝術家>
-예술작품藝術作品 인생을 만듭시다-
“기쁨으로 주님 섬겨 드려라. 춤추며 당신앞에 나아가라.”(시편100,2)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읽은 교황님 강론 내용의 소제목이 마음에 와닿아 나눕니다.
“섬김은 그리스도교 신자의 생명의 길이다.”
(Service is Christian way of life)
“스포츠는 생명의 찬가다”
(Sports are the hymn to life)
얼마나 적확하고 멋진 표현인지요!
요즘의 우리나라 가을은 참 아름답습니다. 곳곳이 모두가 아름답기에 아예 요즘은 사진찍기를 접었습니다. 어제도 전형적인 아름다운 가을이었습니다. 밤하늘의 별도 유난히 밝고 맑습니다. 엊그제 자캐오의 집, 피정집 3층 제의방에서 바라보는 불암산은 참 장관이었습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2024.9.29.>
여전히 저를 행복하게 하는 이 시가 새삼 떠올랐습니다. 집무실 문을 열때마다 한눈 가득, 가슴 가득 안겨 오는 산앞에 서도 주님앞에 서듯 행복합니다. 어제 찾아온 "가을산"이라는 시입니다.
“단풍 물든 장엄한 가을산
끝이 아니다
겨울후
생명의 봄이듯
죽음후
새생명의 부활이다
이 희망에 산다”<2024.10.20.>
바로 '하느님 희망에 산다'는 고백입니다. 겨울이, 죽음이 끝이 아니요 봄이, 새생명의 부활이 우리 믿는 이들의 궁극의 희망이라는 것이며 이런 깨달음 역시 하느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바로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에게는 탐욕만 있었지 이런 살아계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희망은, 사랑은 전무했습니다. 탐욕의 어리석은 부자는 바로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탐욕에 눈멀면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주님의 충고가 참 적절합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참으로 지당한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모든 불행과 재앙의 진원지가 무지의 탐욕입니다. 돈이 하느님이 된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냐? 하느님이냐?”는 참 힘든 선택입니다. 돈이 현실이라면 하느님은 이상입니다. 하늘의 하느님이라면 땅의 돈같습니다. 이래서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다"란,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란 고백에 공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우선순위입니다.
“노년의 품위 유지를 위한 우선 순위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이다.”
제 지론입니다. 또 하나 자주 드는 극단적 예도 있습니다.
“물보다 진한 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 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 게 하느님 믿음이다.”
하느님 믿음이야말로 탐욕에 대한 근본적 대책입니다. 인간 누구나의 내적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온갖 두려움속에 포위되어 불안중에 살아가는 참 허약한 사람들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수도원 십자로 예수성심상을 떠받치고 있는 바위판에 새겨진 성구는 여전히 "지혜의 빛"을 발하며 수도원을 찾는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바로 이런 근원적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소유욕에 탐욕입니다. 바로 탐욕의 뿌리에는 이렇듯 두려움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입니다. 두렵기에 돈을 모으고 재산을 축적하는 것입니다. 바로 어리석은 부자가 택한 길이요 땅에 보물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거대한 착각입니다. 생명을 보장하는 것은 재물이, 돈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이심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아무리 모으고 쌓아도 기쁨은, 평화는, 행복은 오지 않습니다. 모으고 쌓아도 두려움과 불안은 여전할 것입니다. 재물이 아닌 살아계신 하느님으로부터의 은총의 선물이 희망, 기쁨, 평화, 행복임을 어리석은 부자는 까맣게 잊었습니다. 아무리 모든 것을 지녔어도 그 마음에 희망이, 기쁨이, 평화가 없다면 결코 행복하다 할 수 없습니다. 부자의 독백과 하느님의 응대가 실감나게 표현됩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어리석은 자야, 오늘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아무리 부자도 세끼면 족하고 화장하면 한줌의 재만 남고 죽어도 가지고 갈 것은 빈손일 뿐입니다. 땅에 싸놓은 보물은 전혀 쓸모없을 뿐, 참으로 이때 빛을 발하는 꾸준한 선행과 자선으로 하늘에 쌓은 보물들입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Ama et fac quod vis)”는 성 아우구스티노가 바로 하늘에 보물 쌓은 첩경의 길을 제시합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도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참 어리석은 사람의 실상입니다. 이 또한 우리의 무지의 탐욕을 일깨우는 회개를 촉구하는 예화입니다. 무지의 탐욕에 눈멀어 땅에 보물을 쌓다보니 온통 관계가 차단되어 스스로 자초한, 고립단절된 자기감옥에 갇힌, 닫힌 수인이 된 부자입니다. 도대체 좌우사방 문들은 없고 온통 벽뿐이니, 도대체 빛이, 희망의 빛, 기쁨의 빛, 평화의 빛, 행복의 빛이 전무한 어둠뿐이니 바로 이게 지옥입니다.
새삼 행복은 발견이자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의 탐욕에 눈멀면 어리석게도 행복을 앞에 놔누고도 불행을 삽니다. 진정 행복한 부자는 가진 것이 많은 자가 아니라 필요한 것이 적은 자입니다. 복음의 부자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제1독서 에페소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답을 줍니다. 참으로 우리를 자기감옥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합니다.
육의 욕망에서 벗어나, 육과 감각이 원하는 바를 따르지 않고, 하느님 은총의 성령에 따라 자유롭게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바오로가 제시하는 이런 차원을 까맣게 몰랐지만 우리는 이렇게 알게 됐으니 우리는 행운아들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치명적 과오는 주님 없이 혼자 자기인생작품을 설계했다는 것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이 참 고맙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누구나 자기 삶의 예술가들입니다. 사랑과 지혜의 예술가들입니다. 하느님 은총의 선물에 온갖 선행과 자선의 노력으로 협조해드리며 각자 주님과 함께 완성해가야할 예술작품인생들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각자 예술작품 완성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 좋으시다, 영원하신 그 사랑, 당신의 진실하심, 세세에 미치리라.”(시편100,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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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작품인 것 맞나?>
“우리도 다 한때 육의 욕망에 이끌려 살면서 육과 감각이 원하는 것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 가운데서 유독 ‘한때’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때 육의 욕망에 이끌리고 육과 감각이 원하는 것을 따른 우리라고 합니다.
‘한때’라는 말은 과거를 지칭하는 말이고 그 후에 달라졌을 경우 쓰이는 말이지요.
예를 들어 ‘한때 우리는 잘 지냈다.’라고 하면 지금은 안 그렇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한때 우리는 원수지간이었다.’라고 하면 지금은 사이가 좋은 거지요.
아무튼 ‘한때’라는 말은 인생 반전을 뜻하는 말인데 오늘 저는 어떤 반전을 살아야 하는지 보려 합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야 할 반전은 은총을 받는 반전이고, 저는 진정 은총을 받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한때 저는 일부러 죄에 빠져 살려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20세를 전후해서 악마적인 꼬드김이 있었습니다.
아오스딩 성인처럼 한때 방황과 방탕한 삶의 그 쓰라림을 겪어야지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생기며 반전이 일어날 거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옛날에 예비고사를 보러 갈 때 부러 술을 마시고 갔고, 그래서 시험에 부러 떨어졌으며 죄의 구렁텅이에 빠져 살고 싶었고, 그렇게 신물이 날 정도로 죄의 어둠에 있다 보면 빛을 찾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용기가 없어서 실제로 그러지는 못했지만 한때 그리고 한동안 저는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성했다는 바오로의 말씀을 잘못 신봉하며 일탈하고 싶어 했고 은총을 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옛날의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이긴 해도 은총을 받고 싶어 했던 것은 잘못이 아니기에 그렇게라도 은총을 받고 싶어 했던 그때가 아름답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는 현재의 저에 대한 반성입니다. 현재 저는 은총을 받고 싶은 갈망이 그때만큼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가 이미 은총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은총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현재의 은총에 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은총에 안주한다는 것은 현재의 은총에 만족하며 더 큰 은총 또는 더 많은 은총에 더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죄를 뭉개고 있으면서도 은총에 안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털고 일어나서 은총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런 죄인인데도 나를 사랑하실 것이라는 그 하느님 은총만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의 사랑에 기대어 일도 안 하고 마냥 방탕하게 사는 것만 같지요.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바오로의 말씀을 가지고 반성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라고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데 우리는 은총으로 구원받고 있습니까? 은총으로 구원을 향해 한걸음 또 한걸음 나아 가느냐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하느님의 작품입니다.”라고 또 말하는데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인 것이 맞습니까? 훼손된 작품은 아닙니까?
하느님 은총 중에 있는 것 맞나?
하느님 작품인 것 맞나?
이런 반성을 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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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루카 12,20ㄴ)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오늘 복음(루카,12,13-21)은 '탐욕을 조심하여라.'는 말씀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탐욕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그리고 이어서 큰 탐욕과 욕심을 드러내는 어리석은 부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도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더 큰 곳간을 만들어 놓고 자신을 위해 많은 재산을 쌓아둔 어리석은 부자가 자신에게 말합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루카 12,19)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루카12,20)
'탐욕(욕심)'은 그 자체로 죄이면서 또한 죄의 뿌리가 되는 칠죄종(七罪宗/교만.인색.음욕.분노.탐욕.질투.나태) 중에 하나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에 대한 열망이 큰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큰 사람입니다. 곧 '죽음 저 너머에서 누리게 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큰 사람'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에페2,10)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는 '참 선행'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하느님 나라의 큰 장애물인 탐욕을 내려놓고, 날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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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 20)
벌써 단풍이
떨어져
내립니다.
빠르게
떨어져 내리는
깊은 생명의
깨우침을
만납니다.
흉내만 내는
생명이 아니라
생명다운 생명을
살아야 할
우리의
오늘입니다.
생명이란
기쁜
생명이 진짜
생명입니다.
진짜 생명은
욕심에 매이지
않는 삶의
기쁨을
살아갑니다.
우리모두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목숨의
나그네들입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하느님께로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나의 것이란
찾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입니다.
경계해야 할
탐욕이며
내려놓아야 할
탐욕입니다.
아쉬움과
미련도
내려놓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삶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목숨으로
더 깊어지는
감사이며
진심어린
감사로
더 깊어지는
우리의
생명입니다.
뜨거운 심장의
울림이
탐욕이 아닌
하느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의
기도이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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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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