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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산, 물은 물/6가지 설명
1. "산은 산, 물은 물"의 어원
오래전에 조계종 성철 스님이 종정 취임식에서 발표한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법어는 세간에 신선한 충격과 신비감을 안겨준 화두였습니다.
그런데 이 화두는 성철 대종사의 법어가 아니라 옛날부터 있었던 것으로, 그 중 중국 송나라 때 청원산 정거사에 주석했던 임제종 황룡파의 고승 청원유신 선사의 상당법어가 가장 유명하다고 합니다.
필자도 당시 성철스님의 이 법어를 대하고 이렇게 쉬운 문제를 취임법문으로 발표 하시다니 하는 철없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바로 범부들이 사물을 보는 근기의 차이지요.
원래 이 화두는 일상생활이 바로 진리임을 설파한 중국 선림의 손꼽히는 공안인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존재계 전체가 공으로 보이는 법인데, 내가 없어졌으니 상대도 존재하지 않고, 선이 추구하는 일원즉사은(一圓卽四恩), 곧 나와 만물이 혼연일체로 하나가 되기 때문에 세상만물이 우주적인 허공과 같은 공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확철대오 하는 것이 깨침이요 견성으로 바로 생사가 일여이고, 원불교 출가 수행자들이 지향하는 사무여한(死無餘恨)의 정신 일 것입니다.
그럼 이 공안의 원문을 한 번 볼까요?
'이 늙은이가 중생일 때는 산을 보면 곧 산이요 물을 보면 곧 물이었고,
진리를 좀 알게 되니 눈이 차츰 열려 산을 보아도 산이 아 니고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었네
이제 불법의 도리를 크게 깨닫고 보니 산을 보면 산이요 물을 보면 물이더라
저 산 너머에 바다가 있다고 합시다. 철부지 아이들에게 이를 가르쳐주면 아이들은 그대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라나면 이를 그대로 믿지 않고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른이 되면 직접 산을 넘어 바다로 달려가 이를 확인하고는 다시는 바다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청원 유신선사의 산시산수시수(山是山水是水)는 절대부정을 통해 절대긍정을 얻는 선종 특유의 사유방식입니다. 주체와 객체를 다 버리는 절대부정으로 자신이 참나와 합일한 도인의 단계로 진입하면, 부정이 긍정이고 긍정이 부정인 무분별의 경지가 찾아와 마침내 산은 산으로 보이고 물은 물로 보이는 경지가 온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마음을 비운다'는 말은 우리의 본래 모습이 완전한 공이 되고, 공마저도 공 그 자체에 머물기를 거부하는 초시간적 절대공을 말하는 것이 아 닐런지요?
우주만유가 한 몸이라는 깨달음에서 본다면, 이미 우리 안에 자연성이 들어와 있고 자연 안에 인간성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왔다가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연이고 자연은 이미 인간이 아닐런지요.
깨닫지 못하면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남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한다는 것은 이렇게 우주의 진리를 깨닫자는 것 입니다. 깨달음은 그냥 되는대로 어영부영해서 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온 몸에 적(?)이 들정도로 죽음을 불사하고 허공에 몸을 던져 마침내 '청풍을 노래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적공 적공 대적공하여 중생의 탈을 벗고 '견산의 경지에 오르는 일원인이 될 것을 염원을 해 봅니다.
여의도교당, 원불교문인협회장의 <김덕권 교도의 청한 심성4>
* 출처: 한울안신문(http://www.hanulan.or.kr).
2. '산은 산, 물은 물이로다' 책 내용
정휴스님이 종정 스님인 성철 스님께 여쭙기를.
큰스님께서 종정 추대식에 보냈던 법어가
세상의 화제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하신 귀절이 많은 사람 들의 주목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성철 스님 말씀!
선이란 자성에 이르는 통로에 불과해,
우주 만물의 근원을 파악하고 일여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선이지
그래서 선은 교수하는 것이 아니고 적시하고 스스로 체험하도록 해야 해.
이것을 육조 혜능은 자성이라 해도 좋고 본래면목이라 해도 좋다고 했어.
누구나 중생은 내면적으로 이 진아를 구족하고 있는데...
그리고 이 진아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따위의 것이 아니라서 죽지도 아니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으면서 우주적 바탕이 되어 있는 근원적 자아야.
그렇다면 마음을 제외한 부처는 존재치 않지.
우리 모두가 하나의 큰 생명체야.
그렇다면 <산은 산 물은 물>이 이상 더 할 말이 없지
그런데 중생들은 이상해.
자기의 마음 속에 불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부처를 밖에서 찾으려고 밖으로만 헤매고 있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대우주라면
나의 개체는 인간의 슬픔과 번뇌가 공존해 있는 소우주인 동시에 생사해탈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터인데...
'인간은 철저히 고독해보아야만 본질 훈련을 통해서 생명의 실상에 접근 할 수 있어
마음 속에 자기 확인의 고요를 잃고서는 자기 면목은 보여지지 않아.
특히 사문은 자연과 마음을 섞으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야?
곧 자기 자신이 자연이 되었을 때 하나의 생명체에 돌아 갈수 있어.
이것이 불성회귀 이지....
3. 경봉 스님이 본 '산은 산 물은 물'
삼십년 전엔 '마음이 곧 부처'임을 깨닫고 천성산에 들어오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더라
이십년 전엔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 천성산을 바라보니 '산은 산이 아니요 물도 물이 아 니더라'
오늘 마음과 부처엔 관심없이 떡과 밥을 배불리 먹고 천성산을 바라보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더라'
이 셋 가운데 정말 어떤 것이 옳은가? 비로소 주장자를 한 번 치다. (경봉 스님)
<명정 스님 설명>
천성산은 지금 양산군 하북면 용원리에 있는 내원사에 있는 산 이름이다. 원래는 원적산이라 하였는데 원효스님이 원적산의 너른 나무 판을 중국의 담운사에 날려 보내자 무너진 절 때문에 죽을 뻔한 천 명의 대중을 구원했다하여 천성산으로 불렀다.
경봉스님은 삼십년 전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생각으로 천성산을 바라보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임을 깨달았으나 한때는 부처도 마음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산을 바라 보니 '산도 산이 아니고 물도 물이 아님'을 괴로워했다 그러나 마음과 부처조차 버리고 산을 바라보니 '산은 정말 산이고 물은 물'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마음을 비우면 부처가 보이고 부처를 버리면 마음이 보인다' 라는 이 기막힌 화두를 마침내 경봉스님은 깨달았던 것이다.
( 명정/정성욱 편집, (꽃은 져도 향기는 그대로 일세) , 예문, 2002) 중에서 [출처] 경봉 스님이 본 '산은 산 물은 물'|작성자 묘광월
4. 성철스님의 '산은 산 물은 물'
-1) 산은 산, 물은 물,
2)산은 산이 아니다. 물은 물이 아니다,
3) 산은 물, 물은 산,
4) 산은 산, 물은 물
산과 물은 원소(원자)들이 뭉친 것(분자). 산(복합적 분자)은 세월이 흘러 흐트져 본래의 원소들로 돌아갔다가 다시 분자 또는 복합적 분자를 이루고, 물(H2O 분자)은 증발하여 수증기로 되었다가 다시 지상에 내려와 물이 되기도 하고 다른 원소들과 결합하여 분자를 이루거나 분자들과 결합 하여 복합적 분자를 만든다. 즉 산에 들어 있는 물분자가 산이 흐트짐에 물로 돌아가고, 물분자는 증발했다가 다시 지상에 내려와 산의 한 구성 요소가 된다. 원소들이 순환함으로 결합된 형체는 세월에 따라 변하지만, 본질(원소)은 변함이 없다는 말이다. 또는 본질(원소)들의 양과 전체 양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네번째 구절의 '산은 산 물은 물은 물'은 '현재 산은 산일 뿐이고 물은 물일 뿐이다.란 말로 여겨진다.
눈에 산은 산으로 보이고 물은 물로 보인다.
그런데 본래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은 물이 될 수도 있고 물은 산이 될 수도 있다.
현재 산은 산일 뿐이고 물은 물일 뿐인 것이다.
- 변한다(無常). 애착을 가지지 말라(애착을 가질만 한 게 없다).
단지 지금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보라! 관하라! 산은 산, 물 은물.
선악, 시비는 인간이 느끼고 판단하는 분별인데 어리석은 중생의 분별심은 탐진치에서 나와 더한 탐진치를 만들고 지혜로운 중생의 분별심은 본질을 봄에 평등하고 차별이 없어서 악( 惡)과 비(非)의 어리석은 중생들을 선도(善道)와 정법으로 제도(교화)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철스님의 말씀은 무상(無常)한 본질의 순환을 말함이고, 선악과 시비의 분별은 번뇌망상과 지혜와의 관계에 놓은 의식의 재료들이다.
[출처] 산은 산 물은 물|작성자 비로자나
5. 시공 불교사전의 사법계(四法界)
모든 존재를 현상과 본체의 두 측면에서 관찰하여 네가지로 파악하는 화엄학의 관점.
(1) 사법계(事法界). 낱낱의 차별 현상
(2) 이법계(理法界). 모든 현상의 본체는 동일함
(3)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본체와 현상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서로 걸림 없는 관계 속에서 의존하고 있으므로 모든 존재는 평등 속에서 차별을 보이고, 차별 속에서 평등을 나타내고 있음
(4) 사사무애법계( (事事無礙法界). 모든 현상은 걸림 없이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서로가 서로를 비추면서 융합하고 있음.
이것을 화엄의 법계연기(法界緣起)라고 함
6. 탄허스님의 방산굴 법어집
우주의 주체성은 무엇인가? 우주 주체성은 곧 우리의 한 생각이다.
만일 우리의 한생각이 없다면 육체는 송장일 뿐이고, 이 우주는 공각(:빈껍질) 일 뿐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핵심만 안다면 이 한생각에서 일어난 지엽적인 문제는 설명할 것도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법 효하시고 또 6년 동안 고 행을 통하여 우주관 인생관을 타파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화엄경#째의 도리이다.화엄경의 도리이다.
사법계(四法界)란 이법계(理法界), 사법계(事法界)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89XX76000026
먼저 이법계라는 것은 공(空)적인 면을 가지고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이 우주만유는 환이고 가상으로 있는 것이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즉 공인 것이다. 모든 것을 이렇게 공한 것으로 보는 것, 이것을 이법계라고 하는 것이다.법계란 진리의 대명사이다.
다음 사법계(事法界)라는 것은 우주만유가 그대로 진리 라는 뜻이다.
또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란 이와 사가 거리낌이 없는 법계, 다시 말해 공과 유가 둘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공즉시색으로서 색공이 둘이 아닌 것이 이사무애 법계인 것이다.
다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란 사(事)와 사(事)
가 거리낌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사무애법계까지는 이해할 수 있고 인식 할 수가 있지만 사사무애라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태산을 자기 콧구멍 속으로 집어넣는다고 할 경우 콧구멍이 넓어지는 것고 아니고 그렇다고 태산이 축소되는 것도 아닌데도 태산이 콧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태산이 콧구멍 속으로 들락날락 하면서도 하나도 거리낌이 없는 것,그것이 사사무애법 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인들은 사사무애도리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오직 이 우주만유가 일진법계화(一塵法界化)된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되지를 못하는 것이다.
출처: https://stmarysclinic.tistory.com/508 [화엄 삼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