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10권
제4부 전쟁과 분단
33. 오이년 오 이오 결정 / 219쪽
「참말로, 아무도 못 당할 일이여.
나가 영웅자리 게줘야 할 판인디?」
이태식이 조원제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댔다.
진달래꽃이 지천으로 피어났다.
나뭇가지마다 새움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있었다.
들녘이며 산들은 싱그러운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햇발은 날로 두터워져갔다.
그 햇발 속에서 아지랑이의 아롱거리는 춤도
날마다 현란해지고 있었다.
아지랑이의 춤은 천지에 가득 차
숨이 막힐 지경이고,
무엇이든 아른아른 어지럽게 보이게 만들었다.
그런데 짙은 초록빛이 유난스러워
아지랑이의 아롱거림을
삭아내리게 하는 데가 있었다.
그건 보리밭들이었다.
보리는 이제 패고 있었다.
진달래꽃들은 산줄기를 타고오르며 피어나고,
아지랑이는 신들린 혼춤인 양
어지러이 아롱거리고,
진초록 물감을 들어부은 듯한 보리밭들은
싱싱하게 넘실거리고,
보리밭에 깃을 친 종달새들은
아지랑이 가득한 창공으로 날아오르며
간드러지는 목청을 뽑아들이고 있었다.
사월은 그렇게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사월은 그리도 시적 정서로 충만해 있었지만,
농촌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마저 끓일 것이 없어서
누르팅팅하게 부황이 들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의 뼈마디 앙상한 삐쩍 마른 손에는
삐비가 한 움큼씩 들려 있었고,
어쩌다 보이는 개들도 굶주릴 대로 굶주려
꼬리를 축 늘어뜨린채 고샅을 비실비실 걸었다.
아직 양식으로 거둬들일 수 없는 보리를 바라본 채
끼니를 끓일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사월은 온갖 꽃들이 피어나고,
온갖 새들이 우짖는 춘삼월 호시절이 아니라
배꼽이 등가죽에 달라붙는 굶어죽기 직전의 달이었다.
그런 영향이 산에 있는 빨치산들에게도
그대로 미쳤다.
해마다 그랬던 것처럼 빨치산들도
어려운 식량난을 겪고 있었다.
그들이 그나마 견딜 수 있는 것은
군토벌대에 비해 경찰토벌대의 공세가
산발적이고 미온적인 때문이었다.
그들도 부황이 들어가며
사월의 투쟁을 넘기고었다.
오월로 접어들면서
산마다 신록의 가지가지 초록색깔들이
풋풋하게 돋아올랐다.
그 싱그러운 초록빛들 속에서
야산이 아닌 백운산이며 조계산이며
백아산 같은 데도 진달래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끝물로 피어난 진달래꽃들과 함께
소쩍새의 목쉰 울음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키큰 나무들의 그늘 아래서
작은 산꽃들도 다투어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조계산지구에서는
뜻하지 않은 경사가 벌어지게 되어
모든 대원들이 어리둥절해져 있었다.
지구정치위원 안창민과 여맹위원장
이지숙의 결혼이 그것이었다.
동지들간의 이성관계는
철저하게 금지시켜온 상태에서
그들 두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뜻밖의 사실이었고,
더구나 당에서 결혼식을 올려준다는 것에
대원들의 놀라움은 더욱컸다.
도당위원장 박영발은
그 동안의 방침을 바꾼 것이었다.
당성이 투철하고, 투쟁경력이 뛰어난 전사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경우
당이 그들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그들의 소망이 이루어지게 함과 동시에
혁명부부로서의 결속력을 갖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부부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혼 첫날밤을 보낸 다음
부부는 해방의 그날까지
부대 소속을 달리해야 하는 제한이 따르고 있었다.
그런 제한조건이 따른다고 하더라도
그건 모든 대원들이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획기적인 조처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뜻밖의 조처는 모든 대원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렇다고 애인을 가진 대원들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맺고 있는 대원들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전체 대원들이
그 조처를 환영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일종의 심리적 반응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 조처를 당의 관대함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새로운 자유를 갖게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결혼이라는 흥겨운 구경거리를
산중에서도 갖게 되었다는 즐거움이었다.
외서댁은 산꽃들을 정성스럽게 따 모으고 있었다.
그러면서 천점바구와 김혜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지기랄, 죽드라도 쪼깐 더 있다가 죽제.
요런 존 법이 생겼구마.
김혜자가 살었드라먼
요 법얼 을매나 좋아라 혔으까이.
머리꼭지가 하늘에 닿게 뛰고 또 뛰었을 것잉마.
그리도 속맘 보타감서 천점바구 각시 되기럴 바랬는다.
그 원 풀고 갔음사 을매나 좋았을랑고,
여학교꺼정 댕긴 김혜자가 무학인 천점바구럴
그리 좋아헌 것도 다 팔자여.
음마, 이리 말허먼 안되겠제?
학벌로 사람 가치 저울질하는 것이야
반동덜 시상에서나 써묵는 법이제.
나 대그빡도 안직 반동시상에서 찐 땟국물이
다 빠지덜 않은 것이여.
김혜자가 천점 바구럴 서방삼기로 허고 좋아헌 것이야
사람이 사람얼 좋아헌 것이제.
니나 나나 차등 옳이 다 동무로 사는 시상에서나
볼 수 있는 기맥힌 일이제.
백정 아덜하고 족보 내세우는 집안 딸허고……
참말로 기맥힌 일이여.
김혜자가 그 총알 퍼붓는 너덜겅
위럴 천점바구 들쳐미고 뛴 것얼 생각허먼……
여자 맘이란 것이 그리 기맥힌 것이여.
항꾼에 죽자 헌맘이었겠제.
죽음스로 기연시 서로 손잡고 죽었이니
김혜자가 원풀이럴 헌 것이제.
그려도 맺힌 맘이야 따로 또 지니고 갔을 것인다.
넘덜 앞에서 당당허니 혼례식얼 못 올렸응께로,
사람 정이란 것이 눈으로만 왔다갔다하는 것이 달브고,
손잡음서 '가심 찌릿거리는 것이 달브고,
잠자리서 살 섞는 것이 달븐 법인다.
그리 치자먼 김혜자 맘에 풀린 원보담
안 풀린 원이 더 많겠제. 그려도 워쩔 것이여.
항꾼에 묻힌 것으로 다행 삼아야제. 근디!
외서댁은 증오심이 파르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개잡눔에 새끼덜, 무신 철천지 웬수가 졌다고
그 소나무럴 짤라뿌렀을 것이여.
징헌 눔덜, 송장꺼정 안 파내기 다행이제.
그 사삭시런 놈덜이 송장 파내먼
즈그눔덜이 해꼬지 당할랑가 무서바 손 안 댄 것이었제.
외서댁은 얼마 전에 중대원들을 이끌고
천점바구가 묻혀 있는 근방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녀는 마음이 쓰여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천점바구가 묻혀 있는 곳을 찾아갔다.
그런데 비목을 겸한 표적물인 소나무가 간 곳이 없었다.
그건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소나무는 밑동이 도끼로 찍히고 톱질을 당해 잘려 있었다.
그것이 토벌대의 소행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첫댓글 사월은 그리도 시적 정서로 충만해 있었지만,
농촌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마저 끓일 것이 없어서
누르팅팅하게 부황이 들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의 뼈마디 앙상한 삐쩍 마른 손에는
삐비가 한 움큼씩 들려 있었고,..(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