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나
원제 : The King and I
1956년 미국영화
원작 : 마가렛 랜든
감독 : 월터 랭
음악 : 리처드 로저스(작곡) & 오스카 해머슈타인(작사)
출연 : 율 브리너, 데보라 커, 리타 모레노
마틴 벤슨, 테리 사운더스, 렉스 톰슨
카를로스 리바스, 제프리 툰
아카데미 5개부문 수상작
'왕과 나'는 마가렛 랜든 이라는 작가가 1944년에 발표한 소설이 토대가 되는 작품입니다. 원작의 제목은 '안나와 샴왕(Anna and the King of Siam)' 입니다. Siam 이라는 명칭은 현재의 태국의 옛 이름입다. 태국에 가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태국 민족의 독립성과 자주성은 무척 강합니다.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정책에서 지배를 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보기 드문 국가였으니까요. 그만큼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과의 외교를 잘했던 것이지요. 이 소설의 내용은 1862년, 즉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영국 시절이었습니다. 남편을 잃고 일찍 돌싱이 된 여주인공 안나가 왕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샴의 왕실에 오게 되고 거기서 왕과의 인연을 다룬 내용입니다.
소설 발표 후 2년뒤인 1946년 원작의 제목 그대로 영화화 되었고, 좀 크롬웰 감독, 렉스 해리슨, 아이린 던 주연이었습니다. 이후 1951년에 뮤지컬로 초연되었고, 이 뮤지컬은 상당한 인기를 누리는 장수 뮤지컬이 되었습니다. 유랑극단 출신의 배우 율 브리너가 왕 역을 연기하여 토니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이 뮤지컬 왕과 나는 30년이 넘게 4,000회가 넘는 공연을 할 정도였는데 율 브리너는 1951년부터 거의 평생을 그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런 와중에 1956년에 영화화 되었는데 무대공연에서 왕 역을 연기한 율 브리너가 영화에서도 그대로 그 역할을 연기했습니다.
율 브리너는 이렇듯 원래 무대배우였는데 그 전까지 영화경력이라고는 1951년에 비중있는 조연으로 출연한 '뉴욕항(Port of New York)' 단 한편이었습니다. 데뷔작 '뉴욕항' 에서는 머리를 기르고 특유의 부리부리한 눈매를 보여준 필름 느와르 장르의 악역이었는데, 5년만에 영화에 복귀한 것입니다. 그리고 뮤지컬 영화 '왕과 나'는 크게 히트하였고, 율 브리너는 일약 스타덤에 올라 헐리웃 주연급 배우로 본격 활약하게 됩니다.
1862년 군인이었던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된 안나(데보라 커)는 샴(현재의 태국)의 왕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배를 타고 샴에 내립니다. 아직 어린 아들과 함께. 그곳에서 왕(율 브리너)을 만나게 되는데, 왕이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분위기가 낯섭니다. 근처에 집을 지어 주겠다는 약속을 헌신짝처럼 어기고 왕실에서 지내라는 왕의 강압적 명령에 거부감을 일으킨 안나는 왕의 수십명의 자녀들을 만나보고 아이들이 너무 귀여워 그곳에서 지내기로 합니다. 서로 완전히 다른 동서양의 문화, 남녀간의 차이 때문에 왕과 안나는 사사건건 부딫치며 충돌하지만 그런 와중에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심도 생깁니다. 이렇게 서로의 다른 점을 극복해 나가면서 장점을 보게 되는 두 사람은 겉으로는 으르렁 거리면서 서로 돕게 되고, 안나도 왕실에 점차 잘 적응하게 됩니다. 안나의 도움으로 영국 귀빈들을 초대한 연회를 성공적으로 마쳐 기분이 좋은 왕, 그런 좋은 분위기를 깨는 소식이 들리는데 왕의 후궁으로 들어오게 된 텀팀(리타 모레노)이 룬타 라는 남자와 눈이 맞아서 도망치다가 붙잡혀오고 왕은 룬타를 벌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야만스런 짓을 만류하는 안나때문에 왕은 차마 룬타를 때리지 못하고... 자존심이 상한 왕은 식음을 전폐하게 됩니다.
평소 율 브리너라는 배우는 부리부리한 눈매와 빡빡깎은 대머리의 강한 카리스마, 그리고 우뚝한 콧날 등 굉장히 강한 인상을 주는 배우였고, 그 인상을 그대로 살린 개성있는 연기가 특징입니다. 그런 본인의 이미지를 가장 잘 살린 영화가 '황야의 7인' '십계'같은 대표작입니다. 그 외에도 '대장 부리바' '카라마조프의 형제' '태양의 제왕' '더블맨' 등에서 보여준 냉철한 연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이름을 드높여준 작품인 '왕과 나'에서는 의외로 허세가 가득하고 장난스럽기도 한 코믹 연기였습니다. 이 영화 자체가 진지함 보다는 코믹하고 위트있는 장면이 많은 코믹 뮤지컬 형식입니다. 제법 진지한 척 하는 데보라 커와 문명을 덜 탄 아시아 국가의 엉뚱한 왕과의 대립과 우정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이 영화가 발표되고 나서 태국에서는 상영금지가 되었다는데 이해가 갑니다. 대부분의 서구 영화에서 아시아를 다루는 방식은 아시아에 호의적인 듯 하면서도 은근 문명에서 뒤지고 문화에서 처진 곳으로 비하하는 느낌이 곳곳에서 듭니다. ('레모'라는 국가에서 한국을 다루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지요. 동양의 신비한 국가라고 띄우는 듯 하지만 은근 미개한 국가처럼 비하하지요) '왕과 나'에서 보여지는 상반된 캐릭터, 안나와 왕을 비교해보면
1. 문명인과 야만인
2.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과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람
3. 합리적이고 소통이 가능한 사람과 독재적이고 일방적인 사람
4. 여성으로서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과 여성을 남성의 즐거움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5. 많이 배우고 학식이 풍부한 사람과 허세만 가득하고 실상은 별로 아는게 없는 사람
뭐 이렇게 다루고 있습니다. 즉 영국과 태국, 더 넓게는 서구와 동양국가의 차이와 우열을 은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 내면을 감추고 겉으로는 '우린 이렇게 미개한 아시아 너희들에게 관대하다' 뭐 이런 척 하고 있는 것이지요. 더구나 영국의 평범한 한 여성과 무려 한 국가를 지배하는 '왕'이라는 동등하지 않은 존재를 비교해서 디스하고 있으니 태국에서 불쾌한게 당연한 영화지요. (율 브리너가 태국 사람이 아니니 이런 연기가 가능했지요) 즉 태국왕을 상당히 희화화 해서 재미있게 만든 영화입니다.
뭐 그럼에도 사실 영화가 대단히 재미있지요. 웃기고. 웃기는 장면의 대부분을 율 브리너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자존심 강하고 허세가 강하지만 실상은 본인도 스스로 많이 아는 것이 없고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고, 자존심 때문에 그걸 숨기고 있고. 그런 왕에게 배려심 깊은 안나는 잘난척 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면서 슬쩍 슬쩍 도움을 주고.
안나와 왕의 많은 차이중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여성에 대한 사고방식입니다. 부인만 수십명이 있고 자녀만 100여명이나 되는 왕, 매달 몇 명씩 새 아이가 태어날 정도인데 그런 왕은 여자라는 존재는 남자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남자는 꽃을 찾아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꿀벌이고 여자는 벌을 맞이하는 꽃과 같다고 합니다. 이런 왕에게 1부 1처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여성과 남성은 동등하다고 설파하는 안나.... 뭐 이런 장면을 보면서도 영국이나 서구사회의 위선이 느껴집니다.(21세기니까 그럴 수 있지요) 영국만해도 19세기 초반까지도 여성은 부모의 상속을 받지 못하는 제도 때문에 딸만 있는 집은 어떻게든 부모가 죽기 전에 딸을 시집보내서 살길을 찾게 만들어주어야 했고, 미국만해도 여성의 투표권이 생긴지가 100년도 안되었습니다. 똑같이 차별을 해놓고 마치 엄청난 남녀평등이라도 시행하라는 양 왕을 가르치는 장면은 지금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좀 우습습니다.
결론적으로 무식하고 독재적이고 야만적인 태국 왕을 잘나고 많이 배운 영국 여자가 가서 가르치고 도와주고 사람이 되게 만든다 뭐 이런 이야기를 나름 순화하고 각색하여 만든 이야기인 셈입니다. 그래서 왕이 실제로는 내면이 순수하고 따뜻한 부분이 있는 사람처럼 나름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잘 이끌면 어린아이처럼 말을 잘 듣는 인물처럼.....당시의 시대상이 영화속에서도 반영되는데 프랑스 등 열강의 식민지 정책에 맞서기 위해서 영국을 끌여들여 외교전을 벌이는 모습도 담겨 있습니다. 물론 그런 지혜조차도 영국여인인 안나의 머리에서 나오는 방식이고. 아무튼 영국 여자 한 명이 태국의 왕실과 외교, 교육을 모두 좌지우지하는 전능한 능력이 있고, 왕은 그에 비하면 참 보잘것 없는 존재로 다루고 있는 셈인데, 결국 왕의 갑작스럽고 쌩뚱맞은 죽음도 그 까다로운 영국 여자가 제공한 셈입니다.
1950년대에 만든 1800년대를 다룬 영화, 율 브리너가 연기하는 왕의 행동, 대사 등을 통해서 그를 희화화해서 여러가지 코믹하고 웃기는 내용으로 재미를 준 영화입니다. 재미있고, 음악도 경쾌하고 무엇보다 의상과 무대배경 등은 아주 멋집니다. 꽤 예쁘장한 화면과 아기자기하고 화려함을 주고 있고, 후반부 제법 긴 공연장면을 통하여 동양적인 미학과 부처의 존재 등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기술적으로 참 잘 만든 영화입니다. 세계적으로 흥행에 크게 성공했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입니다. 율 브리너는 우리나라에서도 무척 인기가 높은 배우였는데, 이 작품 외에도 그가 출연한 상당수 영화가 국내에 개봉되었습니다.
율 브리너, 데보라 커 모두 나란히 아카데미 주연상 후보에 올랐는데 율 브리너는 두 번째 영화로 주연상 후보에 올라서 대뜸 아카데미 트로피를 움켜쥐는 기염을 토합니다. 그 해 율 브리너는 '십계' '추상' 등 메이저 영화에만 세 편을 출연했고, '왕과 나'와 '십계' 모두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으니 가히 1956년에 신데렐라 같은 배우가 된 셈입니다. 반면 데보라 커는 심기가 많이 불편했을 것 같은데 영화에 두 번째 출연인 율 브리너와 달리 이미 40년대부터 영국의 스타배우였고, 헐리웃에도 성공적으로 진출하여 톱 스타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지만 '왕과 나'로 세 번째 아카데미 주연상 후보지명을 받았는데 '추상'의 잉그리드 버그만에 밀려 수상하지 못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추상'에도 율 브리너가 출연했고, 율 브리너와 공연한 여배우들이 아카데미 주연상 경합을 벌인 셈입니다 데보라 커는 이후 2년 더 주연상 후보에 오르면서 3년연속 아카데미 주연상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고, 결국 평생 6번의 후보에만 올랐고 주연상 트로피는 받지 못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습니다.
율 브리너의 재미난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인데, 특히 그가 안나를 향해서 '모세는 바보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서 슬며시 웃음이 나옵니다. 그냥 평범한 대사라고 할 수 있지만 같은 해 율 브리너는 '십계'라는 영화에서 모세의 연적인 람세스 왕으로 출연해서 모세 역의 찰톤 헤스톤과 불꽃튀는 대립을 보여줍니다. 그런 상황을 생각하면 '왕과 나'에서 '모세는 바보요'라고 하는 대사가 좀 의미있게(?) 다가옵니다. '왕과 나'의 왕역 뿐만 아니라 '십계'에서의 람세스 왕, 그리고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에서의 솔로몬 왕 등 역대 왕 역을 가장 잘 연기한 배우가 율 브리너 입니다.
율 브리너와 데보라 커가 춤을 추면서 흘러나오는 셀 위 댄스 라는 곡이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하며 음악은 '남태평양' '오클라호마' '사운드 오브 뮤직' 등에서도 좋은 콤비를 보인 리처드 로저스(작곡), 오스카 해머슈타인(작사) 콤비의 작품입니다. 도리스 데이나 레슬리 캐론 등 전문 뮤지컬 배우를 캐스팅하지 않고 데보라 커를 출연시켰다는 것이 특징인데 아마도 영국의 톱 여배우를 출연시키다 보니 그랬던 것 같습니다. 원래 노래를 잘하는 율 브리너는 직접 노래하지만 데보라 커는 마니 닉슨 이라는 뮤지컬 배우의 음성으로 따로 더빙을 했습니다.
아카데미 8개부문 후보에 올라 남우주연상을 비롯해서 미술상, 의상상, 녹음상, 음악상 등 총 5개 부문을 수상하는 성과를 거두었는데 같은 해 경합한 작품들이 '십계' 자이언트' '80일간의 세계일주' '우정있는 설복' 등 역대급으로 쟁쟁하고 치열했습니다. 흥행과 비평, 수상내역까지 '왕과 나'는 50년대 가장 성공한 뮤지컬 영화중 한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앞서 영화화 된 1946년 작품 '안나와 샴왕'을 잊게 만들고 일종의 뮤지컬 버전으로 리메이크 한 이 영화의 인지도가 훨씬 높습니다.
ps1 : 가장 율 브리너 스럽지 않은 연기를 한 작품이 율 브리너의 대표작이 된 셈입니다.
ps2 : 율 브리너는 이 역할 때문에 일부러 머리를 빡빡 깎은 것이지만 이후에도 계속 대머리로 출연한 것은 유명합니다. 그가 머리를 기르고 출연한 영화도 몇 편 되는데 데뷔작인 '뉴욕항'을 비롯해서 '대해적' '몸부림치는 젊은이들'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 '풍운아 판초빌라' 등입니다. 아무래도 머리를 깎았을때가 더 카리스마가 있고 매력적입니다. 가장 젊은 나이에 출연한 영화 '뉴욕항'에서의 모습은 너무나 평범한 악역배우 같은 느낌이거든요.
ps3 : 율 브리너가 죽기 직전에도 너무 생생한 것이 아무리 코믹 뮤지컬이라도 좀....하긴 율 브리너가 약한 연기를 한 적 자체가 없지요.
ps4 : 이게 주윤발과 조디 포스터 버전으로도 리메이크가 되었지요.
ps5 : 율 브리너가 담배피는 장면이 아예 안나오는 보기 드문 영화지요. 그는 영화속에서도 시종 담배를 피워대는 것으로 유명한데.
ps6 : 율 브리너와 데보라 커는 3년뒤 '여로'라는 영화에서도 다시 공연합니다. 그 영화에서도 율 브리너는 노래하는 장면이 있지요.
[출처] 왕과 나(The King and I 56년) 율 브리너의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작|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