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의 힘을 아느냐
2주 만에 종영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젊은 관객들 열띤 호응에 재개봉 결정
관객이 이겼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Bonnie and Clyde)를 다시 볼 수 있게 됐다. 개봉 당시 불과 2주 만에 <우리에게…>를 종영시켰던 워너브러더스는 1967년 12월 관객과 소수 평론가의 열광에 밀려 재개봉을 결정했다. 메이저 영화사가 ‘몰라보고’ 버린 영화를 관객이 ‘알아보고’ 살려낸 것이다.
싸구려 슬랩스틱’ ‘한정 개봉’ 등 언론과 제작사 모 두에게 찬밥신세였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가 예상외로 관객의 호응을 얻자 평론가들은 애초의 리뷰를 뒤집고 워너브러더스는 재개봉을 결정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1967년 여름 첫 공개된 <우리에게…>는 제작사인 워너브러더스한텐 그저 골칫덩어리에 불과했다. 완성된 영화를 보고 아무도 이 영화를 이해하지도, 좋아하지도, 보러오지도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워너 수뇌부는 뉴욕, 그리고 다른 오락거리가 별로 없었던 미국 남부, 중서부에 한정해 <우리에게…>를 개봉했다. 언론의 리뷰도 워너 수뇌부의 판단과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언론들은 이 영화를 가혹하게 깎아내렸다. <뉴스위크>는 이 영화를 “멍청이들을 위한 너저분한 총싸움”이라고 공격했고, <뉴욕타임스>는 “지저분하고 멍청한 한쌍의 약탈행위를 장난스럽게 다룬 뻔뻔스러운 싸구려 슬랩스틱”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개봉 뒤 관객의 반응은 달랐다. 젊은 관객은 새로운 감수성으로 무장한 영화에 흥분하기 시작했고, 개봉관마다 이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이 대열에 소수의 평론가들이 합세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폴린 카엘로, 그는 <우리에게…>가 “<만주인 포로> 이후 가장 흥미로운 미국영화”라고 극찬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살리기 운동에 나섰다.
예상치 못했던 관객의 ‘반격’에 제일 놀란 건 평론가들이었다. 이들은 이례적으로 애초의 리뷰를 뒤집는 새로운 시각의 글들을 내놓았다. <뉴스위크>는 이전의 리뷰가 “매우 불공정했다”라고 인정했다. 재평가의 절정은 <타임>이었다. 애초 “어처구니없고, 저속하고, 목표도 없는 영화”라고 썼던 <타임>은 1967년 12월8일치 표지에 이 영화를 올리고, ‘뉴시네마, 폭력과 섹스, 예술’이라는 카피를 달았다. 이어 본문에서는 “실험적인 유럽영화들이 미국의 주류영화에 진입하기 시작했다”면서 이 영화를 “올해 최고의 영화”로 선정함은 물론, “<국가의 탄생> <시민 케인>에 버금가는 분수령이 될 만한 영화”라고 추어올렸다. 이렇듯 상황이 뜻하지 않게 돌아가자 워너는 재개봉을 결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베니스, 반(反)식민을 위하여
<알제리 전투>에 황금사자상 수상, 프랑스대표단 수상소식에 ‘발끈’ 출국
1966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질로 폰테코르보의 <알제리 전투>(la bataille d’alger)가 황금사자상을 수상하자, 이에 대한 항의 표시로 프랑스 공식대표단이 베니스를 떠났다. 프랑스에 대한 알제리인들의 해방 투쟁을 다룬 영화가 그랑프리를 차지했다는 것이 프랑스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흡사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알제리 전투>는, 1962년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해방되기까지의 투쟁을 그린 극영화다. 알제리 정부의 지원 아래 만들어진 이 영화는 모두 알제리의 실제장소에서 촬영됐으며, 전투에 참여했던 알제리 민중이 직접 출연했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은 투쟁의 격정을 한껏 고무시켰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에 <알제리 전투> 같은 영화는 눈엣가시일 뿐이다. 프랑스 정부는 그동안 알제리에 관한 영화를 엄격하게 검열해왔다. 당연히 <알제리 전투>도 프랑스에서는 상영이 금지됐다. 또 다른 예는 장 뤽 고다르의 <작은 병정>으로, 이 영화는 1960년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1963년에 상영이 허가됐다.
알제리만이 아니라 식민지 문제를 다룬 영화는 예외없이 감시의 대상이 되어왔다. 단적인 예로 1952년과 1959년 사이에는 식민지를 다룬 영화 105편의 상영이 금지됐다. 그런 상황에서 1960년 9월, 프랑수아 트뤼포와 알랭 레네를 포함한 예술가들은 성명을 발표해 “알제리 민중에게 가해지는 공격행위에 반대하고 프랑스 민중의 이름으로 억압받는 알제리인을 돕자”고 제안했지만, 정부의 태도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프랑스 <수녀> 상영 논란 언제까지
1966년 3월, 프랑스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가 “자크 리베트의 <수녀>가 오는 칸영화제에서 상영되는 것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수녀>의 상영을 금지시킨 공보부 장관 이본 부르주의 결정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라서 귀추가 주목된다. 디드로가 1760년에 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자크 리베트의 <수녀>는 결혼 지참금이 없어 수녀원에 들어간 여주인공이 겪는 고통을 그린 영화. 그녀는 체벌과 굶주림은 물론 원장 수녀에게 유혹당하고 신부에게 강간당할 뻔하는 등의 수난을 겪는다. 리베트는 3년간의 시나리오 수정 끝에 가까스로 검열위원회의 승인을 받아냈지만, 영화가 완성되기도 전 종교계와 학부모들로부터 격렬한 항의를 받았다. 이에 이본 부르주 장관은 <수녀>의 상영을 금지시킴으로써 논란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했다.
자크 타티 ‘위대한 파산’
와이드스크린 · 세트장건설 미학적 야심작 <플레이타임> 관객들 “추상회화같다” 외면
자크 타티는 <플레이타임>의 미학적 야심을 위해 도로정비 계획에 묶여 결국은 철거되는데도 자체 발전소와 아스팔트 대로, 대형 건물 2채로 된 타 티빌을 만들었다.
위대한 파산이다. 프랑스 감독 자크 타티가 <플레이타임>(playtime)의 실패로 거리에 나앉게 생겼다. 1967년 말, 법원은 타티의 파산을 선고하고 <축제일> <윌로씨의 휴가> <나의 아저씨>의 배급권, 저작권, 프린트 심지어 네거티브 필름까지 압수해갔다. 살길이 막막해진 타티는 주위 사람들에게 SOS를 긴급 타전했다. 그의 고교 시절 럭비 코치인 알프레드 소비가 옛 럭비팀에 거둔 돈을 타티의 아내에게 보내준 덕에 타티 가족은 당장은 먹고살 수 있게 됐다.
미학적 야심이 너무 장대했던 것이 문제였을까? 오랫동안 묵혀왔던 <플레이타임> 프로젝트에 돌입한 뒤 그는 완전히 이 영화에 빠져버렸다. <플레이타임>의 세트인, 이른바 ‘타티빌’은 그런 맹목적인 열정의 절정체였다. 예컨대 타티는 ‘흘러가는 구름이 비치는’ 공항의 유리창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했다. 하지만 공항을 통째로 빌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해서 ‘가짜인’ 통상의 세트장은 성이 차지 않았다. 고민하는 그에게 주위의 누군가가 아예 철근과 유리로 된 건물을 지어 영화를 찍고, 촬영이 끝나면 리모델링해서 되팔라고 조언했다. 타티는 이 조언을 받았들였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촬영이 끝난 건물을 스튜디오로 활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건축 허가를 받은 부지가 파리의 도로정비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어떤 건물을 짓건 그 건물은 철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트장 건설은 무모한 짓이었다. 하지만 타티는 멈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체 발전소와 아스팔트 대로, 대형 건물 2채로 된 타티빌을 완성했다.
촬영에 들어간 뒤에도 타티의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그는 현대 세계를 70mm 카메라에 담고 싶어했다. 할리우드영화처럼 장대한 스펙터클을 원해서가 아니다. “내가 와이드스크린을 원한 건 군중신이나 결투장면을 위해서가 아니다. 커다란 빈 방에 작은 핀이 떨어지고 있다는 걸 관객이 제대로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는 어느 장면도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러느라 촬영일수는 365일에 이르렀고 제작비 부족으로 영화는 촬영과 중단을 반복했다.
꼬박 9개월에 걸쳐 편집을 마친 타티는 1967년 11월 <플레이타임>을 첫 공개한다. 평론가들은 이 영화의 매력을 알아봤다. 하지만 흥행에서 재앙이 예고된다는 ‘사족’을 잊지 않았다. 타티는 이런 언론의 태도에 분개했지만, 이들의 예언은 틀리지 않았다. 관객은, 줄거리도 없고, 그들이 사랑하는 윌로씨가 잘 보이지도 않고, 추상회화처럼 한번 보아서는 의미를 알아차리기 어려운 이 영화를 외면했다. “나는 돈키호테가 된 것 같다. 이번 모험에서 나는 건강을 망쳤고, 모든 사람들이 내게 등을 돌렸다. 그만 멈추고 싶다.” 그는 1967년 여름 <로로리>(L’Aurore)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그 말은 ‘타의’에 의해 현실이 될 것 같다.
할리우드는 미남만 사랑? 무슨 소리!
키 작고 평범한 더스틴 호프먼 주연 <졸업> 대성공
1967년,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졸업>(the graduate)이 흥행에 대성공했다. 더스틴 호프먼이라는 무명의, 평범한 배우를 주인공으로 기용하고도 말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더스틴 호프먼의 성공은 할리우드의 스타군단에 급격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960년대 들어 할리우드를 주름잡고 있는 스타들로는 폴 뉴먼, 스티브 매퀸, 로버트 레드퍼드, 워런 비티가 대표적이다. 스튜디오 시대 스타들, 존 웨인, 캐리 그랜트, 그레고리 펙, 찰턴 헤스턴 등이 스크린에서 물러나 주로 프로듀서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동안 새로운 유형의 배우들이 스타로 성장했다. 이들은 어둡고, 자의식적이고, 복잡한 내면을 표현해냈다. 옛날 배우들이 영웅이라면 이들은 반영웅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스튜디오 시대 배우들 못지않게 ‘잘생겼다’는 점만은 다르지 않았다.
더스틴 호프머의 등장이 새롭게 주목받은 건, 바로 이 대목이다. 그의 얼굴은 어떻게 봐도 잘생겼다고 말하기 힘들다. 게다가 키도 작다. 그런 그를 연극무대에서 발탁해 <졸업>의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것은 파격이었다. 마이크 니콜스는 전작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드려워하나>가 성공한 덕에 스튜디오의 반대를 물리치고 호프먼을 캐스팅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호프먼이 스타로까지 성장할는지는 더 두고볼 일이다. <졸업>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에겐 후속작이 없다. 현재 그는 공식적으로 ‘무직자’라서 실업 급여를 받아 먹고살고 있다.
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