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 좋은시 다시 읽기
시인의 마음가짐을 되새기게 하는
독특한 서정의 결들
박완호
전염병이 창궐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시인의 눈은 바깥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바라보는 것과 더불어 자신의 내부를 끊임없이 파고들며 자아의 내면에 깃든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시인은 자기가 속한 세계의 안과 밖을 동시에 꿰뚫어 보려는 욕망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와산문』 여름호에서는 깊이 있는 자아 성찰을 바탕으로 시인의 마음가짐을 되새기는 한편, 서정시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일깨워줄 만큼 번뜩이는 시적 사유가 담긴 여러 편의 작품을 만날 수 있어 즐거웠다.
시인이 마지막 순간까지 서 있고 싶어 하는, 서 있어야 할 어떤 자리를 생각해본다. 생을 끝마치는 찰나에 나는 어느 지점에 서 있을 것인가? 이충이 시인의 「누구든 다 살아서 갈 수 있는 나라」를 비롯한 미발표작들을 읽으며, 언제부터인가 나는 한 시인이 생의 막바지에 서 있던 자리를 찾아 시의 행간을 찬찬히 되짚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곳은 서정시가 가 닿을 수 있는 가장 먼 지점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게 할 만큼, 그가 남긴 마지막 시편들은 서정시의 남다른 경지를 펼쳐 보인다.
저녁 강가에 서면 갇혀 있는,
갇혀 있는 물이 아니고
흐르는 물이고 싶어지네
더 가난해지고 가벼워서 따뜻한 삶
마지막 겨울 햇살처럼 분명하게,
분명하게 남고 싶네
언제든지 다 갈 수 있는 나라, 그곳
거듭되는 물음표를 달고 있어
그 누구도 우리를 위로할 수는 없네
이제 하루가 저물고, 또
강 건너 저쪽에서 불빛이 걸어오고
하늘에는 별빛이 돋아나네
넘어지고 넘어지는 우리들의 생애
다 벗어버리고, 양파처럼
양파처럼 껍질을 벗고 나서도
당당할 수 있다면
누구든 살아갈 수 있는 나라
무릎을 바로 세우고
새벽길을 나서서 알몸으로,
알몸으로 태어난 당신의 나라에 가야 하리
가야 하리 새벽 별 하나 바라보며
따뜻이 살 수 있는 땅, 그곳에
누가 알리, 아침이 되면 그를,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을는지
나는 오늘도 바람이 되어
바람이 되어 아침 강을 건너가리
- 이충이, 「누구든 다 살아서 갈 수 있는 나라」 전문
‘저녁 강가’는 “마지막 겨울 햇살처럼 분명하게,/ 분명하게 남고 싶네”라는 시구와 연관 지어 ‘자기의 죽음을 직감하는 한 인간 존재의 마지막 순간’과 맞닿은 곳이라 볼 수 있다. 시인이 평생을 통해 추구해온 시 정신과 맞닿은 서정시의 지평이 바라보이는 바로 그 지점에서 그는 아름다운 역설로 가득한 시를 단말마처럼 펼쳐 보이는 것이다. 시의 제목인 「누구든 다 살아서 갈 수 있는 나라」는 “거듭되는 물음표를 달고 있어/ 그 누구도 우리를 위로할 수는 없네”라는 시적 진술과 연결되어 ‘아무도 살아서는 가지 못하는 곳’이라는 역설적인 의미를 띠고 독자의 마음속을 파고든다. “넘어지고 넘어지는 우리들의 생애”라는 표현처럼 이곳에서의 삶은 고달프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인간의 삶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더 가난해지고 가벼워서 따뜻”해지는 또 다른 본질을 지니고 있음을 그는 깨닫는 것이다. “양파처럼 껍질을 벗고 나서도/ 당당할 수 있다면” 누구든 살아갈 수 있는 “알몸으로 태어난 당신의 나라”에 다다르기 위해 “무릎을 바로 세우고”는 알몸으로 새벽길을 나서는 화자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더없이 ‘단단하고 순도 높은’ 시인의 정신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된다. 그것은 지녀온 모든 것을 다 벗어버리고 ‘저녁 강가’에 서서 어둠 너머 다가올 아침 강을 건너는 꿈을 꾸며 새벽길을 나서는 존재만이 가닿을 수 있는 곳이며, 죽음이 지닌 절망과 비관, 소멸의 맥락을 뛰어넘어 쌓아 올린 시적 생성의 탁월한 경지라 평가할 만하다.
겨울이 다 가도록 가지 끝에서 아직 뛰어내리지 못한 마른 이파리들이 있다. 여위고 메말라 뛰어내릴 힘도 생각도 없어 보이는 이파리들을 위해 햇살이 포근히 감싸주고 있다. 햇살에 반짝 빛나는 이파리, 모든 나무가 부싯돌처럼 불꽃을 품고 있듯 불씨를 되살리려 살랑거리는 이파리, 이파리에게 가지 끝과 지상 사이는 아스라한 몇 광년 높이의 절벽이리라. 오, 아직도 뛰어내리지 못한 나의 언어여.
- 허형만, 「나의 언어」 전문
허형만 시인의 「나의 언어」는 모든 순간 언어의 결핍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시인의 운명을 바탕에 깔고 있다. 세계를 고스란히 담아내지 못하는 시의 언어는 결핍이라는 본질을 벗어날 수 없으며,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해 펜을 들 때마다 결핍으로 인한 절망을 겪을 수밖에 없는 고독한 존재이다. 이 시에서는 ‘뛰어내림’이라는 표현에 주목하게 되는데 이는 ‘떨어져 내림’이라는 표현과 비교하여 시의 언어가 지니는 주체성에 대한 인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타자의 힘으로 인해 가지에서 떨어져 내리는 게 아니라 가지 끝에서 스스로 뛰어내리는 시의 언어는 무언가를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주체성을 지닌 특별한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그러한 시의 언어를 통해 세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시인은 자연의 생명 원리에 대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자기가 속한 세계의 본질을 한순간에 꿰뚫어 보는 눈을 지닌 존재로서, 우리는 이 시를 통해 오랫동안 시를 써오면서도 시를 향한 고독하면서도 순결한 마음가짐을 잃지 않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시인의 말(95쪽)마따나 “순간순간이 신비롭고 놀랍기만 한 시간의 무늬 속에서/ 블랑쇼처럼 시 쓰기의 실천은 또 얼마나 고독한 일인가.” 그것은 텅 빈 속내를 가린 채 허세를 부려가며 아무것도 아닌 걸 대단한 것인 양 뻐겨대는 헛것들의 틈바구니에서 시인 본연의 태도를 놓치지 않으려 싸워오는 과정에서 맺어진 뜻깊은 결실이다. 그 지점에 이르러서도 시인은 여전히 “아직도 뛰어내리지 못한 나의 언어여.”라는, 자신에게 던지는 겸허한 고백을 그치지 않는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온 날
아픈 곳이 없어진 아버지는
발목이 부러진 줄도 모르고 걸어 다녔다.
자신의 이불이 없어진 것을 보고 화를 내는 동안에도
손목이 부러졌다.
치매가 심해진 엄마가 물었다.
옆방 영감 어디 갔다니?
우리는 안방의 문갑처럼 입을 꼭 다물었다.
아버지는 눈알이 빠지는 줄도 모르고
그런 우리를 노려보았다.
날마다 위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 말이 상갓집 파리 모양 앵앵거릴 때면
일어나 밥을 지어 먹었다.
환지통처럼 아버지가 집안 여기저기 걸어 다녔지만
우리는 몰랐다.
아파서 죽는 사람도 있지만
아픔을 몰라서 죽는 사람도 있다는 걸.
우리는 너무 아프지 않아서 위험했다.
- 조연희, 「그 시절 난 선천성 무통각증 환자였다」 전문
조연희 시인의 「그 시절 난 선천성 무통각증 환자였다」는 사랑하는 누군가의 부재로 인한 슬픔과 불행이 너무나 크고 절실할 때 우리가 겪게 되는 감당하기 힘든 아픔의 감각을 탁월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오랫동안 아픔에 시달렸을 화자의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나서야 비로소 아픈 곳이 없어졌지만, 그는 죽고 나서도 발목과 손목이 부러지고 눈알이 빠져나가는 줄도 모르면서 아직 자신의 부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족들 곁에 여전히 머무르는 것이다. 치매가 심해진 엄마의 “옆방 영감 어디 갔다니?”라는 한마디에 “안방의 문갑처럼 입을 꼭” 다물고, 위로 전화로 건네는 말이 “상갓집 파리모양 앵앵거릴 때면/ 일어나 밥을 지어” 먹는 가족들의 모습은 화자가 겪는 슬픔과 상실감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돌아가시고 나서도 ‘환지통처럼 집안 여기저기를 걸어 다니는’ 아버지를 여기저기서 마주치면서도 “우리는 너무 아프지 않아서 위험했다.”라고 말하는 화자의 목소리는 역설적으로 그가 겪는 커다란 아픔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시를 읽는 사람의 마음속 깊이 깃들어 있던 오래된 슬픔의 감각을 한순간에 일깨워낸다.
울면 안 되는 병이 있다 서울 A병원 간호사 H양은 울면 안 되는 천사들을 위해 까르륵 웃으며 주사를 놓는다 이게 뭐야뭐야를 외치면서 아기의 혼을 쏙 빼놓으면 웃다가 울 틈을 놓친 아기는 모야모야병도 잊은 채 의문의 패배를 당한다 울면 안 되는 아기는 울면 안 되기에 H양은 웃는 산타가 되어 일 년 내내 크리스마스를 산다 뭐야 뭐야 코끼리도 되었다가 귀 쫑긋 토끼도 되었다가 코맹맹 펭수도 되었다가 아무도 모르게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낸다
- 신은숙, 「웃는 산타」 전문
뇌에 피를 공급하는 내경동맥이 막히는 원인불명의 만성 진행형 뇌혈관질환인 모야모야병은 발병 시기에 따라 증상의 차이가 있지만, 소아의 경우에는 주로 울거나 감정이 격해졌을 때 호흡이 가빠지면서 뇌혈관 폐색이 심해지고 순간적으로 한쪽 팔다리에 힘이 빠지는 증상이 나타난다고 한다(‘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에서 발췌). 신은숙 시인의 「웃는 산타」는 울면 안 되는 병인 모야모야병을 앓는 어린 천사들을 위해 ‘웃는 산타’가 되어 일 년 내내 크리스마스를 살아가는 ‘간호사 H양’을 통해 비극적 현실을 감당해내는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을 펼쳐 보인다. 상처가 너무나 큰 탓에 아픔의 감각이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 것(조연희)과 마찬가지로 울면 안 되는 병을 앓는 까닭에 아무리 아프거나 슬프더라도 억지로 웃어야만 하는 것 또한 우리가 처한 부조리하고 비극적인 삶의 현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일 년 내내 크리스마스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누군가의 웃음을 통해 시인은 희극적 표현 속에 숨어 있는 비극적인 삶의 본질을 매력적인 방식으로 끄집어낸다. 그렇듯 시인은 자아가 겪는 슬픔과 타자가 겪는 슬픔 사이에 난 길을 끊임없이 오가며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슬픔의 원류를 찾아내려 애쓰는 특별한 존재이다.
시인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가 유난히도 잦았던 지난 계절. 세상을 떠난 시인의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예전에 읽은 작품들을 다시 찾아 읽어가며 시인의 삶과 시 쓰는 일이 지닌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은 나 혼자만이 겪은 일은 아니었으리라.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름다운 시의 지평을 꿈꾸고( 이충이 시인),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읽고 쓰는 것”이라는 자각으로 매 순간을 고독한 시 쓰기에 매달리며(허형만 시인), 통증을 느끼지 못할 만큼의 커다란 아픔을 역설의 언어로 꽃 피워내고(조연희 시인), 타자가 겪는 슬픔 속에서 생의 비극적 본질을 간파해가며(신은숙 시인) 각자가 지닌 서정의 결을 바탕으로 독특하고도 깊이 있는 시 세계를 열어나가는 시인들을 정면에서 마주치는 즐거움을 부럽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되새김해 본다.
첫댓글 시인의 마음가짐을 되새기게 하는 독특한 서정의 결들
참으로 독특한 서정의 결을
어찌 찾아내고 추스르는지
읽으며 많은 공감을 했 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