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수업40 스승을 알아보는 힘 #신독 #선넘으면지옥 #세상이곧붓다
2) 정지(正知)를 보호하는 방편 – 호념(護念)
(1) 정념이 생기게 하는 방법
5:29 그러므로 억념이 마음의 문에서 결코 떠나게 해서는 안 되나니,
가령 잠시라도 억념을 놓치게 되면
악도에서 받을 고통을 생각하며
억념을 되찾아야 한다네.
#줄다리기
인간 몸을 지키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왜 한 번 인간 몸을 잃으면 다시는 이 기회를 잡기 어려울까요? 흐름을 탔기 때문입니다. 파멸의 흐름을.
항상 강조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는 것이 아니라 파멸로 쓸려간다고. 그렇기에 수행이란 결국 방일하게 쓸려가는 힘과 불방일하게 개선하는 노력의 줄다리기입니다. 이를 인식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각된 의식과 자각되지 못한 무의식의 시소게임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줄다리기와 시소게임이라? 놀이터의 비유는 낭만이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상상해보세요. 억념을 놓치면 얼빠집니다. 그럼 파멸로 쓸려 갑니다. 반대로 억념하며 개선의 발버둥을 치면 파멸의 길에 저항하게 됩니다. 인간이 반드시 죽는 이유는 이 흐름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요, 한 번 잃으면 이 기회를 영영 잡지 못하는 이유도 이 줄다리기에 졌기 때문입니다. 중생이 숨만 쉬어도 악업이 늘어나는 이유도 무의식에 의식이 잡아 먹혔기 때문입니다. 줄다리기, 시소게임이라는 이 놀이만 잘한다면, 우리는 삶을 행복의 길로 이끌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놀이를 잘 하려면 수행해야겠죠?
#선넘으면지옥
줄다리기는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놀이입니다. 이를 스릴러로 묘사한 작품이 <오징어 게임>이죠. 선을 넘어 패배한 이들에게는 죽음이 기다리니, 줄다리기는 일종의 생명과 죽음의 갈림길입니다. 방일함과 억념의 줄다리기도 거시적 관점에서 본다면 마찬가지입니다. 방일은 곧 지옥의 길입니다. 억념은 곧 천상과 극락 그리고 열반의 길입니다. 그럼 왜 우리는 이런 지옥의 줄다리기를 하면서도 마음이 급하지 않을까요? 선이 멀리 있어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송덕사는 얼리어답터입니다. 각종 최신 기계들을 구비하고 있죠. 개인적으로 가장 유용한 도구 중 하나는 뇌파측정기입니다. 대학병원에서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기계를 사용하는데, 이를 통해 스트레스 소화 능력과 번뇌레벨 그리고 인지 속도 측정을 통한 치매 위험도 등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 지표를 활용하여 인터뷰를 하면, 말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두뇌와 신체의 상태에 대한 직접 정보로 조금 더 정확한 판단과 해결책을 공유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뇌파에 대한 언급을 한 것은 다름 아니라 사람에게는 고유 뇌파가 있고, 이 뇌파가 반영되는 최소 기간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뇌파를 측정하러 오신 분들은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요즘 스트레스가 많아서 치매 위험군으로 나오면 어떻게 하죠?'
그럼 답변합니다.
'고유 뇌파는 지문과 같아서 변화가 반영되는데 최소 반년 이상이 소요됩니다.'
이 시점의 차이를 사람들은 간과합니다. 지금 시점의 고유 뇌파는 최소 6개월 전 행위들이 반영된 결과물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의 노력 역시 반영되어 나타나는데 최소한 반년 이상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이 반년이라는 세월이 바로 뇌파의 기준에서는 선을 넘어 파멸하는 기간이 되는 것입니다.
뇌파가 이러하다면, 삶의 경험이 지옥과 같아지는데는 조금 더 시간이 소요됩니다. 파멸의 씨앗인 탐진치를 파종하면, 이것이 발아하여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데 세월이 필요하니까요. 그렇기에 사람들은 얼빠져서 마음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근자감이 넘칩니다.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은 단 하나도 만들지 않으면서도 그저 '나는 행복할꺼야! 나는 성공할꺼야!'라며 허망한 망상만을 반복합니다. 이러한 어리석은 낙관주의는 파멸의 길로 나아가는 촉매일 뿐입니다. 수행자는 인과에 맞지 않는 낙관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긍정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낙관과 긍정의 차이는 다들 아시죠?
파멸로 쓸려가는 흐름을 바꾸지 못한다면, 분명히 기억하세요. 언제 선을 넘을지 모릅니다. 알아도 자각 못 할 가능성이 높죠. 얼빠져 있으니.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선을 넘는 순간, 어느새 이렇게 삶이 지옥으로 변화했는지 자각하지도 못한 채 삶은 지옥이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기에 얼빠진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머리에 불이 붙은 듯 급박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깨어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지옥행 열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입니다. 번뇌의 꿈에서 깨어나세요!
5:30 스승과 함께 하고
법을 설하는 이의 가르침을 배우며
악도를 두려워하고 선연을 받드는 사람들에게는
억념이 쉽게 일어난다네.
5:31 부처님과 보살들께서는
항상 어디에도 걸림 없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시므로
‘나는 항상 그 모든 분들 눈앞에 있다’라고,
#스승과제자
올바른 스승은 활용할 수 있는 모든 방편으로 제자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냅니다.
"꿈깨!"
바람직한 스승의 덕목을 공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멀리서 보면 위엄이 있고, 가까이 다가가면 자비로운데, 그 지혜로운 말을 들으면 정신이 번쩍 든다."
사람들은 흔히 스승의 지혜로운 말에 주목합니다. 물론 이 꿈깨라는 메시지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승의 말을 자주 접하는 성문의 길을 걷고자 노력하는 이유는 바로 이 이익 때문일 것입니다. 자주 꿈깨라는 말을 들으면 경각심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꿈깨려는 노력을 할테니까요.
하지만 정작 본받아야 할 것은 바로 멀리서 보면 위엄이 있다는 이 부분입니다. 멀리서 본다는 의미가 무엇인가요? 스승이 홀로 있는 시간이라는 의미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관계 속에서 항상 가면을 씁니다. 이 가면은 홀로 있을 때 벗어던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혼자 있는 시간의 눈빛이 그 사람의 진면목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조차 위엄이 있다면? 이는 스승의 무의식의 흐름이 이미 도덕적으로 변화했고, 고요하며, 지혜롭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계정혜 삼학의 흐름이 습관화된 것이고, 원행보리심의 실천이 자동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밝은 깨어있음의 의식이 무의식과의 시소게임에서 승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독愼獨
현 시대의 성인들은 철이 없습니다. 철 없다는 것은 의존성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정신적으로 타인에게 의지하며, 경제적으로 입벌이를 해결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경우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경향이 커지기 마련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누군가는 반문할 것입니다.
'스님, 저는 타인은 지옥이라고 느껴서 혼자 있는게 좋은데요?'
착각하지 마세요. 정말 혼자 있나요? 아니면 스마트폰과 함께 있나요?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내 뜻대로 안 되는 타인들과 함께 있는 것보다 더 재미있다고 느끼겠죠. 스마트폰 속 경험들은 어느 정도 내 통제하에 있으니까요. 하지만 진정으로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딜 수 있을까요? 타인도 스마트폰도 없이 혼자 있는 그 시간을?
<대학>에서는 신독愼獨을 매우 강조합니다. 스마트폰이라는 질병이 탄생하기 전에는 과거의 시점으로 거슬러갈수록 혼자 있는 시간이 참 많았습니다. 하루 24시간 중 비율로 따졌을 때 함께보다는 홀로 있는 비율이 높았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홀로 있으면서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활동하는 그 시간의 중요성이 높았습니다. 그 순간의 경험을 바꾼다면 삶이 바뀌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치관에서 나타난 수행법이 바로 신독입니다.
보살의 신독은 신앙의 요소가 더해집니다. 혼자 있는 그 순간, 불보살님이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바로 보살의 신독입니다. 스승님이 지켜보고 계신다면 우리가 얼빠져서 마음대로 할 수 있나요? 아니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나요? 스승님에게도 그러한데 하물며 큰스승이신 부처님과 함께 있다면 그 깨어있음의 질이 어떠할까요? 이 신독의 마음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파멸의 줄다리기에서 큰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얼빠진 순간을 줄여갈 수 있으니.
5:32 이와 같이 생각하면
부끄러움과 존경심과 두려움이 생기고
부처님에 대한 억념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된다네.
#세상이곧붓다
'붓다의 마음을 세상에 전하다'
붓다스쿨의 공통서원을 자주 강조하는 이유는 깨어있음의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홀로 있는 시간이 없습니다. 혼자 있다고 착각하지만 벽 너머에는 누군가 있습니다. 벽이 혼자 있다는 착각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 분리된 공간에 사람이 없더라도 허공이 있고, 미생물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있고, 스마트폰 등으로 연결된 인연의 끈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세상은 어떤 순간에도 함께 있습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신독의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합니다.
여기에 더해볼까요? 세상이 곧 붓다입니다. 세상의 만물이 곧 붓다입니다. 만물을 담고 있는 기세간도 곧 붓다입니다. 당신도 붓다이고, 당신의 눈동자에 비친 모든 사람들도 붓다입니다. 우리는 하루 24시간 365일 평생을, 무한한 윤회가 이어지는 동안 단 한 순간의 예외도 없이 붓다와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얼빠진 무의식으로 도망가 이 진실에 눈을 감았을 뿐입니다. 세상이 곧 붓다인데, 얼빠져도 되는 순간이 과연 있을까요?
정리하겠습니다. 중생의 삶이 파멸에 쓸려가고 있는 것은 디폴트입니다. 이 기본조건에 저항하고 싶다면, 얼빠짐을 경계하고 자각의 힘을 갈고 닦아야 합니다. 절대로 얼빠짐을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경각심을 가지고 머리카락이 불타고 있다는 마음으로 펄쩍 뛰어 불을 끄려고 발버둥쳐야 합니다. 스승과 붓다가 언제나 함께 있다는 진실을 기억한다면, 깨어있음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띠를 위해 애를 쓰면 스트레스를 받겠지만, 줄다리기에 딸려가 선을 넘어 삶이 지옥으로 변화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경험 아닌가요? 부디 꿈깨시길_()_
첫댓글 무의식의 흐름이 도덕적이게 되기
계정혜 삼학의 흐름이 습관화되기
원행보리심의 실천이 자동화 되기
나무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