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화현상
이태 전 세상에 얼굴을 내민 <춘화의 춘화>란 수필집이 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어릴 때 고향에서 성장하면서 맞닥뜨린 굴곡진 춘화 누나의 생을 식물이 겪는 ‘춘화현상’으로 풀어 놓는다. 그러면서 결국 젊은 날 누나가 피할 수 없었던 인고의 세월은 어느덧 황혼에 이른 지금의 누나에게 따뜻한 봄날을 선물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수필에선 인생의 희망은 늘 괴로움의 언덕 그 너머에 기다리고 있다는 몽테뉴의 말도 들려준다. 콧등을 시큰하게 만드는 남매간의 사랑도 이어지지만 책 소개는 여기까지로 한다.
사전에서는 ‘춘화’를 봄에 피는 꽃春花부터 알려준다. 인생 그때가 봄날이었다는 말도 행복이 끝난 사람의 넋두리에 다름 아닐 것이니 이럴 때의 봄날은 곧 행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우리 조상들은 꽃도 곧잘 행복으로 바라봤다. 꽃방석 꽃마차 꽃놀이란 말들이 그러하다. 결국 춘화란 이름은 봄날에다 꽃까지 보태어졌으니 '복덩어리' 이름이 아닐 수 없겠다. 보릿고개 때문에 초근목피로밖에 연명할 수 없었던 시절엔 무척 고단했을 봄이긴 하다. 5월생을 두고 '계절의 여왕'에 태어난 걸 축하한다는 인사를 해오는 이들도 가끔 있다.
우리가 좀 살게 되고부터 지자체마다 공원을 경쟁적으로 잘 가꾸었다. 그렇게 명품공원에서 피는 장미를 보노라면 5월을 예찬하는 인사가 빈말이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지금 맞이한 5월은 3년 전 칠순기념으로 다녀온 북유럽 5개국 중 노르웨이도 떠오르게 한다. 지금까지 비교적 바깥을 많이 쏘다닌 편인데도 노르웨이는 잊지 못할 선물을 안겨주었다. 만년설 빙하가 만들어내는 피요르드도 5월이 연중의 하이라이트라 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그 풍광은 남은 생에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애잔함이 남는다.
사전은 또 다른 춘화로 ‘봄의 화사한 경치春華’도 말해준다. 이 또한 다른 계절에서 맛볼 수 없는 봄만의 독특한 선물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 춘화는 ‘남녀 간에 성교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春畵’으로 사이버 세상으로 바뀌고 나서부턴 포르노가 독버섯처럼 퍼져 그 해악을 우려하고들 있다. 이제 본론으로 춘화가 아닌 춘화현상을 말해야겠다. 농사에서 가을에 심는 품종의 씨앗을 일정기간 저온상태에 두었다가 봄에 심어야 정상적으로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현상을 이르는 것으로 일전에 지하철 승강장에서 ‘춘화현상’ 액자를 만났다.
성직자가 쓴 글로 해외 교민까지 예화를 들어가면서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장기간 지속되고 있는 세계적인 불황 여파로 취업 등 길이 막혀 힘들어하는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심어주고자 춘화현상을 알려준다. 비교적 짤막한 글이라 전문을 소개한다.「호주 시드니에 사는 교민이 고국을 다녀가는 길에 개나리 가지를 꺾어다가 자기 집 앞마당에 심었다. 이듬해 봄이 되었다. 맑은 공기와 좋은 햇볕 덕에 가지와 잎은 한국에서보다 무성했지만 꽃은 피지 않았다.
그러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한국처럼 혹한의 겨울이 없는 호주에서는 개나리꽃이 아예 피지 않는다는 것을. 저온을 거쳐야 꽃이 피는 현상을 전문용어로 ‘춘화현상’이라 하는데 튤립 히아신스 백합 라일락 철쭉 진달래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인생도 마치 춘화현상의 꽃과 같다. 눈부신 인생의 꽃은 인생의 혹한을 거친 뒤에야 꽃망울이 맺는 법이다. 그런가 하면 봄에 뿌리는 봄보리에 비해 가을에 파종하여 겨울을 나는 가을보리의 수확이 훨씬 더 많다.
인생의 열매는 마치 가을보리와 같아 인생 겨울을 거치면서 그 열매는 더욱 풍성하고 견실해진다. 현실이 매우 어렵다. 노력을 해도 성공할 확신은 없으며 시간이 갈수록 미래는 더욱 어렵게 보일 뿐이다. 그러나 좌절하지 마라. 인생의 꽃과 열매가 맺히는 인생의 봄은 추운 겨울을 지나야 맞이할 수 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얼어붙은 동토를 녹이는 따뜻한 마음과 희망으로 땅을 깨고 나오는 어린 새싹의 몸부림이다.」
원폭과 동란으로 얼룩진 삶에 어찌 춘화현상인들 비켜갈 수 있었으랴. 육이오의 포성은 멎었지만 동란이 앗아간 아버지로 인하여 삶은 당시 유행했던 노랫말처럼 ‘한 많고 설움 많은 과거’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 갇혀 절망하고 또 좌절했다. 그때도 ‘어릴 때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말은 들을 수 있었지만 배부른 사람들이 그냥 입버릇으로 내뱉는 말인 줄 알았다. 북의 불법남침이 촉발한 사변으로 입학했던 초등학교는 서너 달을 채 넘기지 못하고 끝이 났다.
소도시 고향집을 떠나 외갓집이 있는 시골에서 소 먹이고 꼴 뜯으며 야학서당을 다니고 있을 때에 어떤 위로인들 제대로 귀에 들렸겠는가. 생후 1년 3개월 유아 때 살았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그곳 이웃에 함께 살았던 친척 어른들은 원폭 현장에서 살아난 것을 기적에 가까운 천운이라며 스스로를 자주 위로하고 있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어린 마음에도 창피해서 나라 잃었던 식민지 백성의 수치심이 느껴졌고 바다 건너 섬나라에 대한 적개심은 쌓여갔다.
당시는 나라의 슬로건마저도 ‘반공’과 ‘방일’이었다. 당장 휴전선으로 대치하고 있는 동족상잔의 6.25동란을 일으킨 공산당을 쳐부수어야 했고 35년간 갖가지 만행을 저지른 왜놈들을 막아내면서 우선 나라의 힘을 길러야 했다. 반공과 방일은 오랜 세월 해외를 넘나들며 대한민국 독립에 헌신해온 건국 대통령의 철학이기도 했다. 매사에 우둔한 사람이 늘그막에야 깨닫게 된다. 그토록 절박했던 성장기의 수난들이야말로 그나마 이 정도라도 지금의 날 만든 춘화현상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