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만의 가족사진
언제나 학생
가족의 의미
"절망"과 "희망"
장례식과 졸업식
지난 토요일 2024년 2월 24일 토요일 10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전. 충남지역 대학 졸업식이 대전광역시 유성구 대강당에서 있었다. 가족 모두 캠퍼스로 모였다. 뉴욕(New York)에서 내과를 하는 막냇동생가족들이 먼 길을 와서 특히 고마웠다. 수십 년 만에 찍은 가족사진이라 더 의미가 깊다. 블로거에 올리는 순간, 순식간에 삭제해도 글은 어딘가에 남아있다. 우리가 원하던 안 원하던 불멸로 간다. 미래의 누군가가 찾기 시작하면 어딘가에 반드시 별자리처럼 남아있다.
나 자신에게 그리고 누군가에게 희망이고 싶어서 공부를 시작했다. 정신과 약쟁이로 4년 넘게 살아서 하루 일과를 마치고 10시부터 매일 새벽 2시까지 공부했고 주말엔 10시간씩 공부했지만 약을 먹고 한 공부는 신께 바치는 모래에 그린 그림 만다라처럼 사라졌다. 삶의 모든 희망을 잃고 무지렁이처럼 살다가 다시 시작한 삶이 여기까지 왔다. 어디가 삶이고 어디가 꿈인지 방황 중이다.
의대 공부하다 폭삭 늙은 한때 예뻤던 내 동생은 모포 수천 개를 사서 어르신들과 홈리스들에게 나눔도 했다. 멋진 동생! 내가 사랑하는 전부인 나의 가족들이다. 삶에서 흉측한 몰골의 사내지만 그의 벌린 외투 속으로 숨고 싶은 시간들로부터 나를 지켜준 건 나의 가족들이었다. 언제나 철없는 나를 침묵의 신성함으로 가르치시는 아버지! 신발 끈 조이고 달려야 할 시간에 가족이 함께했다.
한때 질타와 비난의 땅에서 용케 살아남았다. 코로나로 고발당하고 탄원서를 써준 제자들을 VIP뷔페로 불렀다. 오랜만에 만난 28살 제자에게 말했다. " J야, 다시 공부해 봐! 넌 재능도 있고 끈기도 있잖아! 원래의 네 꿈처럼 로스쿨 가는 건 어떨까? "
그러나 돌아온 답은 "제가 나이가 많아서요."였다.
"내 동생은 28살에 미국에서 명문 학교에 들어갔어. 공부는 널 지켜주는 보호막이 될 거야. 힘든 시기들이 오면 그땐 자격증이랑 전문지식이 널 막아줄 거야!"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지만 선생으로서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오로지 이것뿐이다. "Never too late" "늦는 건 없어!" 육포를 씹으면서 공부했다. 미국에서 동생이 겪은 코로나는 가을날의 소슬바람이라면 한국의 것은 시베리아 기단에서부터 날아온 삭풍이었다. 뼛속까지 때리고 갔다.
언제든 제자가 다시 공부를 시작하길 바라면서 내가 모범이 되고 싶어서 오십 대에 여대생이 되었다. 하루는 천년처럼 길고도 먼데 일 년은 금방 지나간다. 삶의 신비로움이다. 지독하게 힘들었던 과목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던 수업도 있었다.
내가 찢고 나온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었다. "봉주르 (Bonjour [bɔ̃ʒu ːʀ], "좋은 날"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인사말)과 "빠리바케트" 밖에 모르는 내가 교양과목인 프랑스 문화를 공부하려니까 눈물 날 만큼 단어들이 생소하고 어려웠다. 이제는 얼떨결에 시작한 공부가 일상이 되어버렸다. 몸과 꿈의 실사판 레슬링이었다. 77세 희수(喜壽)에 졸업하신 어르신도 계셨다.
임현주 영문과 대표님과 홍주희 회장님께서 꽃다발을 안고 오셨다. 사랑받은 기억을 선물 받았다. 관심받고 싶어 하는 내 불치병의 치유제를 들고 왔다. (우리 모두의 유전병일 것이다.) 푸른 용처럼 솟구치는 몽유 병이다. 아름다운 흙들을 모아 잘 구운 도자기처럼 기억은 기적을 낳는다.
추억하는 사랑과 감사함은 시간이 흐름과 함께 자란다. 물을 주지 않아도 거름 한번 안 줘도 쑥쑥 자라 삶의 곳곳에서 꽃을 피운다. 수시로 징징거리는 청맹과니 같은 마누라를 도와주고 졸업선물도 준 나의 남편과 시대적인 암울함으로 처음으로 학사모를 처음 써본다는 김용복 어르신( 중앙대학교 문예 창작과 졸업)과 순자 엄마와 호위 무사 아빠, 설동호 교육감님, 근엄함과 상냥함의 멋진 풍모를 동시에 지닌 장호준 학장님, 언제나 예쁜 동생 선영이, 나의 영원한 의리의 사나이 김수복 사장님, 제자, 민혁, 세훈, 민석, 수빈, 수지, 재훈, 웅, 언제나 응원하는 멋진 준선, 형태 수십 명의 지인들에게 그리고 코로나 때문에 얼굴도 못 본 39명의 영문과 학우들, 우린 모두 무의식 중 하나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초원을 떠돌며 다 같이 새운 게르에서 첫밤을 함께 보내고 맞이하는 아침 같은 날이었다. 나 때문에 잠도 못 자고 아침 길을 나선 조카들, 올케 현미와 동생 호원, 용, 제부 모두에게 고마운 마음을 꿈의 계단을 올라가면 글로써 대신한다.
오늘은 사랑하는 지인 장윤희의 친정아버지 "장영두" 님께서 돌아가신 날이다. 나의 3번째 대학의 졸업과 어르신의 긴 여정이 아름다운 끝매듭을 지었다. 윤희가 같이 못해서 미안하다고 울면서 전화를 했다. 내가 더 미안했다. 가신분의 펄럭이는 옷자락이 바람으로 화해 스치고 지나갔다. 언제나 같은 색이지만 환경에 따라 색깔을 바꾸는 카멜레온처럼 인생이 그렇다. 우린 영원히 같지만 다른 경험을 공유하고 살아갈 것이다. 축제와 장례는 살면서 언제 올지 예측이 불가능해서 매력적이다. 마음은 언제나 축제여야 한다.
수자의 "행진곡"은 축제 때도 나 자신이 죽을 때도 듣고 싶은 곡이다. 로시니의 "윌리엄 텔의 서곡" 도 마찬가지이다. 기쁨과 슬픔과 비장함은 어쩌면 행복할 때와 극한의 불행에도 눈물 흘리게 만드는 절묘한 음악과도 같다. 삶의 속도가 Vivace(비바체, 화려하게 빠르게)가 아니라 Grave (그라베, 장중하게 아주 느리길) 이길 바랐던 오늘 하루는 몽블랑 펜에 각인된 내 이름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다.
영문과 졸업을 하고 국문과에 다시 들어갔다. 나는 또다시 나의 신화를 쓸 것이다. 약쟁이의 공부법이 가성비가 떨어지지만 "절망"에 빠진 누군가에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의 이중언어이길 기대해 본다. 언제나 여대생! 다시 시작이다. 아직은 삶의 동아줄을 잡아야 할 순간이다. 비록 썩은 동아줄이라 할지라도 절대적인 정적들로 가득 찬 숲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믿고 싶다!! 고통과 미움과 증오를 다 끌어안고 줄을 잡아야 한다. 밑도 끝도 없이 떨어지더라도 오늘도 난 오르고 또 오른다. 꿈인듯 현실인듯 하늘로 가신 어르신을 기억하며 레퀴엠으로 바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부가 되는 새벽, 진정한 학문이란 삶에 대한 이해이다!
첫댓글 우리 온이는 무서운 천재.
그 재능을 후진들 위해 바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