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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6. 묵상글 ( 연중 제6주일. -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등 )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06:33 추가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06:34 아직 /
* 키엣 대주교님. : 06:36 아직 / 06:44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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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6. 연중 제6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으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이 다르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이 시간 참된 행복에 눈뜨기를 기도합니다.
오래 전입니다만, 제가 꽃동네에 있을 때 만난 사람 중에 배영희 엘리사벳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19살에 뇌막염을 앓고 나서 앞 못 보는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신 분입니다. 그는 온몸이 마비된 채 누워계셨는데 얼굴이 항상 맑고 밝은 모습이었습니다. 미소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서른아홉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장애인이 된 후 ‘나는 행복합니다’, ‘소라의 꿈’, ‘당신이 머무는 곳’등 많은 영혼의 시를 쓰셨습니다. 그중에 ‘나는 행복합니다’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아무것도 아는 것 없고
건강조차 없는 작은 몸이지만
나는 행복합니다.
세상에서 지을 수 있는 죄악
피해 갈 수 있도록 이 몸 묶어 주시고
외롭지 않도록 당신 느낌 주시니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세 가지 남은 것은
천상을 위해서만 쓰여질 것입니다.
그래도 소담스레
웃을 수 있는 여유는
그런 사랑에 쓰여진 때문입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이 자매님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전신마비 장애인이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서 아주 행복한 삶을 사셨습니다. 사람들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는 데서 행복을 찾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원한 행복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시적인 행복감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 뿐입니다.”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사실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남들은 말할 것도 없고 스스로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미움을 사고, 쫓겨나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쓴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누가 봐도 행복한 사람들, 부요하고 배부르고, 웃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사람을 오히려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이는 세상의 논리와 복음의 논리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지만 주님께 신뢰를 두는 이는 복되다.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내치시고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욕심으로 자기 파멸을 가져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의지하면,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큽니다.” 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이 세상이 아니라 천상의 행복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15,19).
한번 마음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하늘나라에 속해 있는지? 아니면 세상에 속해 있는지? 주님을 위해 살고 있는지? 자신을 위해 살고 있는지? 영원한 행복을 위해 살고 있는가? 아니면 현재의 만족을 위해 살고 있는가? 분명한 것은, 지금의 상태가 나의 신앙의 현주소입니다. 예수님은 선언하십니다.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결국, 행복한 사람은 지금 배부르고 잘 지내는 사람이 아니라 “은총의 상태 안에 있으며,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정진하고, 하느님의 길을 따라 나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인내와 가난, 다른 이들에 대한 섬김, 사랑으로 위로의 길을 걷는 사람은 기쁘고 행복할 것입니다. “참 행복은 그리스도인의 신분증”(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참된 행복은 물질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잠언 30장 8절에서 9절의 말씀을 보면“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약속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주님께 신뢰를 두고 그분을 차지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화답송의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 되리라”(시편 1,1-3).
여러분은 진정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믿는다면 말씀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리하면 반드시 행복해질 것입니다. 주님을 차지하십시오. 성모님께서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5)으로서 행복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사물의 거죽만 보고 그것이 전부인 줄 압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우리에게 약속된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이 있고, 웃게 될 날이 있고, 받을 상이 크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곡식 단 들고 춤추게 될 날을 알기에 지금 눈물로 씨를 뿌릴 줄 압니다.
사실 오늘날의 불행은 모자람이 아니라 오히려 넘침에 있습니다. 넘치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며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따뜻한 가슴을 잃어가고 남에게 행복해 보이려고 포장하다가 불행해 집니다. 여러분은 제가 행복해 보입니까? 예. 왜 행복할까요? 여러분을 만나서 행복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여러분도 저 때문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보내신 하느님 때문에, 아니, 하느님을 차지해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한번 옆 사람 좀 바라보세요! 그분 때문에 행복하십니까? 예, 행복하시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한번 쥐어박고 싶은 분도 계시고 때로는 밥맛이 떨어질 때도 있을 것이고, 안 봤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은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 사람을 통해서 나를 단련시키시고 다듬어 주셔서 행복하게 만드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어렵고 고달프고 힘들더라도 부디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시길 기도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5,12).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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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6. 연중 제6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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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6. 연중 제6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925.02.16 06:25
요즘이냐 많은 이가 현금보다 신용카드를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현금의 가치는 없어진 것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현금도 그 가치는 변함없습니다. 여기에 만 원짜리 지폐가 있습니다. 이 지폐가 매우 더럽다면 어떨까요? 또 구겨져 있다면? 만 원의 가치가 아니라 9천 원의 가치가 될까요? 구겨지고 찢어지고 또 더러워도 똑같이 만 원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스스로 포기하고 좌절한다면, 구겨지고 찢어지고 또 더럽다면서 만 원 지폐를 버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자기 가치는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만 원이 만 원인 것처럼, 나의 가치도 변함없이 그대로입니다. 그 가치를 알아야 잘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만 원이 구천 원이라고 단정하지 않아야 만 원으로 쓸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떻게 자기 가치를 이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만드신 나의 가치가 쓸모없을 리가 없습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강조하신 것을 보면 ‘사랑’에 의해 나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과 일치해야 하느님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받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들다 보면 자기 가치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께서 주신 나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행복 선언은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 지금 굶주리는 사람, 지금 우는 사람, 또 사람의 아들 때문에 모욕과 중상을 당하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봤을 때는 불행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오히려 그 반대인 부유한 사람, 배부른 사람, 웃는 사람, 남에게 좋은 말을 듣는 사람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바로 하느님께 의지하느냐, 세상에 의지하느냐에 따라 행복의 기준이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모욕과 중상을 당하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는 지금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과 함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니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고, 그래서 하늘 나라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재물과 사람들의 인정 속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하느님을 잊게 됩니다. 하늘 나라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가치는 하느님 안에서만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기 가치를 부정하는 삶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자기 가치를 높여야 합니다. 특히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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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가장 적은 것으로도 만족하는 사람이 가장 부유한 사람이다(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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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6. 연중 제6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6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참 행복의 길’과 ‘불행의 길’을 제시해줍니다.
오늘 <제1독서>인 <예레미아서>에서는 말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예레 17,5)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예레 17,7)
이를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이처럼, 축복과 행복의 길은 하느님께 신뢰와 희망을 두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행복”은 하늘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강령입니다.
“행복”은 한마디로, 하느님의 은총이며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행복”으로 제시되고 있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신 당신이 다스리는 나라이기에, “행복”은 곧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 자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의 ‘여덟 가지 행복’을 네 가지로 함축시켜 말하면서, 동시에 ‘네 가지의 불행’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선언은 제자들에게 직접 2인칭(너희)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은 부유한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고, 배부른 사람들과는 반대로 굶주리는 사람들이며, 웃는 사람들과는 반대로 우는 사람들이고, 좋은 대우를 받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온갖 잔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이는 겉으로 보기에, 마치 모순처럼 보입니다. 만약 우리가 현실의 세속정신에서 본다면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행복선언은 현실을 넘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현실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더 깊은 의미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시해주는 동시에, 삶에 대한 태도의 방향전환을 요청합니다.
한 마디로, 모든 축복은 첫 번째 축복, 곧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자신들의 약함과 죄스러움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주님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자신들이 가진 것은 무엇이든 자신들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임을 인정하는 이들입니다. 생명도, 건강도, 힘도, 돈도, 그 어떤 선이든 모두가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에 행복해 하고, 감사하고, 나누는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특히 마지막 것,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루카 6,26)에 대해서만 잠깐 머물러 봅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누군가가 칭찬해주고 호의적으로 말해주고 좋게 말해주면 기뻐하고 행복해 하고, 반면에 꾸중하고 질책하며 나쁘게 말해주면 우울해하고 불행해 합니다. 그토록 우리는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고, 비위맞추며 눈치보고 타인의 말 한마디에 우지좌지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눈이 하늘을 보고 있지 않는 까닭일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을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혹은 인간적인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 곧 ‘하느님의 뜻 안에서 관계 맺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단지 인간관계를 개선하여 좋은 관계를 맺고, 단순히 공동선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도, 단지 인간적인 아름다운 세상이나 복지사회를 위해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오손도손 재미나고 즐겁게 살고자 하는 것도, 그저 열심히 사랑하며 미워하지 않고 살고자 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미움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 속에서도 사랑하는 일입니다. 고통과 슬픔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고통과 슬픔 안에서 사랑하고, 바로 그것을 통하여 사랑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하는 일이요, ‘먼저 하늘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마태 6,33) 일 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곧고 좁은 길을 걷는 이들이 모든 사람에게 칭송과 존경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어둠의 유혹과 은총에 대한 저항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만 듣는 사람이 아니라,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이 있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그러한 말이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인지는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루카 6,22).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루카 6,20)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다 내려놓고, 당신만을 차지할 것입니다.
굶주릴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 외에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도 마음을 두지도 않을 것입니다.
울 줄을 알게 하소서!
죄를 슬퍼하되, 자비 안에서 위로받고 기쁠 것입니다.
진정, 저는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오로지 당신의 것이오니,
배척받고 모욕 받으면서도 기뻐할 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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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6. 연중 제6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재미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뱀이 길을 가다가 ‘톱’에 약간 상처를 입었습니다. 화가 난 뱀은 톱을 노려보다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입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기력을 회복한 뱀은 톱을 몸으로 칭칭 감았습니다. 톱이 숨을 멎도록 하였습니다. 결국 뱀은 톱에 몸이 잘려 죽고 말았습니다.” 뱀이 참 어리석은 것 같습니다. 만일 뱀이 처음 상처를 받아들이고 톱을 무시했다면 입에 상처를 입지 않았을 겁니다. 입에 상처를 입었어도 톱을 무시했다면 죽지는 않았을 겁니다. 뱀만 그럴까요? 저도 어릴 때 뱀처럼 행동한 적이 있습니다. 친한 친구와 장난하다가 친구가 저의 공책을 찢었습니다. 화가 난 저는 친구의 책을 찢었습니다. 친구도 화가 나서 제 연필을 부러트렸습니다. 저도 화가 나서 친구의 가방을 찢었습니다. 결국 선생님이 아셨고, 친구와 저는 무척 혼이 났습니다. 그냥 공책이 찢어진 걸 무시하고 친구에게 그러지 말라고 했으면 연필이 부러지는 일도, 책이 찢어지는 일도, 가방이 찢어지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선생님에게 혼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욱하는 성격 때문에,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서 본인은 물론 가족에게도 큰 피해를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속담은 이렇게 말합니다.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다 태운다.”
장자는 화를 참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아주 좋은 글을 남겨 주었습니다. 제목은 ‘빈 배’입니다. “배로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다가와 부딪치면 비록 성급한 사람일지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비키라 소리친다. 한 번 소리쳐 묻지 못하면, 다시 소리쳐 묻고 그래서 안되면 세 번 소리쳐 묻는다. 또 그래도 안 되면 나쁜 소리가 나오기 마련이다. 아까는 화내지 않고 지금은 화내는 까닭은 아까는 빈 배였고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을 비우고 생의 강을 흐른다면 누가 해하겠는가.” 멀리 미국에 있지만 한국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뉴스는 연일 정치에 관한 소식을 전합니다. 법과 원칙에 의해서 시비가 가려질 겁니다. 물이 흘러 바다로 가듯이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안정을 찾을 겁니다. 그럼에도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저의 마음을, 빈 배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뉴스를 보는 시간에 성경 말씀을 듣고, 음악을 들으니, 마음이 한결 편해집니다. 본당에서도 그렇습니다.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감정이 생기면 일이 복잡해지곤 합니다. 작은 상처를 무시할 수 있다면, 나의 마음을, 빈 배로 만들 수 있다면 폭풍우 속에서도 평온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신앙은 먼저 행하면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먼저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면서 자라는 겁니다. 오늘 성서 말씀에서 우리는 행복의 기준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원하는 것을 채우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고통과 슬픔은 먹구름처럼 다가오지만 그것이 하늘의 태양을 없애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고통과 슬픔 뒤에 밝게 드러나는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걸어간 길입니다. 예언자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성인과 성녀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 고통,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였던 이 시대의 신앙인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행복은 소유함에 있지 않다고 선포하십니다. 가난할지라도, 슬픔 속에 있을지라도,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박해를 받을지라도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슬픔, 고통, 아픔을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부유할지라도, 성공했을지라도, 권력을 가졌을지라도,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지라도 하느님께 신뢰를 두지 않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갈 것은 재물, 권력, 명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아야 할 것은 사랑, 헌신, 나눔이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멀리 있는 길을 항해하는 배가 폭풍을 만나지 않고 조용한 바다로만 갈 수는 없다. 멀리 있는 길을 항해하는 배에서 폭풍은 벗과 같은 것이다.” 어떤 분은 어쩌면 지금 삶의 먼 항해 길에 폭풍을 만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지금 삶이라는 배가 험한 파도에 몹시 흔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삶의 여정에서 다가오는 폭풍우를 피하고, 그 폭풍우 벗어나기를 기도하기보다는 그 폭풍우를 이겨내고 그 폭풍우와 맞서 싸울 힘과 용기를 청할 수 있기를 기도하였으면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폭풍우의 한가운데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고, 그 주님의 힘을 느낄 때 우리는 어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참된 삶의 기쁨과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입니다.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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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6. 연중 제6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은총을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고유의 특별한 은총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하느님을 만나고 알 수 있도록, 또 기도 안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특별한 은총을 주셨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상상력입니다. 상상력이라는 우리의 은총은 주님 곁으로 우리를 데려다주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제부터 우리에게 주신 상상력을 써 보려 합니다. 천천히 글을 읽으며 주님과 함께 걸으십시오.
이른 아침, 아침 이슬도 사라지기 전에 주님을 따라 언덕을 내려오고 있습니다. 새들의 소리가 귀를 즐겁게 합니다. 아침 이슬이 우리의 발을 적셔 상쾌함을 더해 줍니다. 저기 수많은 군중이 보입니다. 푸른 풀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히 모여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시던 걸음을 멈추십니다. 바람이 그분의 옷을 스치며 지나갑니다. 주님께서 천천히 그러나 힘주어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행복하다. 굶주리고 울고 있으니, 너희는 행복하다. 모욕과 중상 때문에 너희는 행복하다.”
“아~ 너희는 불행하다. 세상에서 부유하고 웃고 있으니, 그리고 배부르니 너희는 불행하다.”
주님의 말씀에서 이제야 알았습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주님을 갈망하고 있으니 행복하고 슬픔에 눈물 흘릴 줄 알기에 나는 행복합니다. 그러나 나는 불행하기도 합니다. 주님보다 가끔 세상 것을 좋아하고, 그것이 전부인 양 웃고 있으니 나는 불행합니다. 그런데도 내 마음은 행복으로 가득 차고 있습니다. 나는 행복하기도 불행하기도 하지만 지금 주님과 함께 있기에 마냥 행복하다는 것을 가슴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언덕 밑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행복해합니다. 순식간에 행복이라는 바이러스가 수많은 사람의 마음에 퍼져 모두가 행복에 가득 차 있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으십니까? 진정한 불행과 행복은 주님과 함께 사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따뜻한 가슴을 가졌으면서 가끔은 싸늘한 독선을 드러냅니다. 그렇게 행복하기도 불행하기도 한 우리에게 주님은 천천히 아침의 신선한 공기처럼 다가오십니다. 아침의 희망처럼 말입니다.
⭐하늘의 뜻은 무엇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우리는 많은 우연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가끔 이런 우연들 안에서 우연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우연이라고 여겼던 필연
우연이라고 생각됐던 인연
우연 안에서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듣기도 하고
치유를 얻기도 하며 희망을 찾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정말 우연일까요?
어쩌면….
하늘의 뜻은 ‘목적이 있는 우연’들로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요….
우연이라고 말하지만, 그 안에 내게 필요한 선물을 담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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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6. 연중 제6주일. 키엣 대주교님.
아낌없이 내어드릴 때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이 구절을 이해하려면 그 앞의 내용을 먼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여덟 가지 축복의 첫 번째 대상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풍요로운 바다에서 그물질하며 물고기를 잡았기에 굶주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배와 그물, 집, 심지어 가족까지도 뒤로하고 빈손으로 예수님께 와서 이곳 저곳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는 동안 배고픔과 부족함을 겪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해진 사람들이기에 그들에게 하늘의 큰 상을 약속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지금 굶주리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느님께서 너희를 배부르게 해 주실 것이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같은 맥락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멀리하며, 모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지워버릴 때 너희는 복이 있다. 그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제자들은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을 위해 가난과 희생, 손해를 감수했기에 하느님께서 크나큰 은총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희생하고, 손해와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하느님께서는 넘치도록 풍성한 상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하나를 바치면, 하느님께서는 백 배, 천 배로 갚아 주십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복되다’는 진리에 대해 인도의 타고르의 글을 소개합니다.
나는 마을 길을 따라 이 집 저 집 문을 두드리며 구걸하며 다녔다. 그때 저 멀리 황금빛 마차가 꿈결처럼 찬란히 나타났다. ‘저 위엄 있는 왕은 누구일까?’ 내 마음은 떨리기 시작했고 희망이 내 안에서 날개를 펴며 솟아올랐다. ‘이제 불운한 날은 끝나겠구나.’ 나는 숨죽이며 기다렸다. 은과 금이 길가에 쏟아지기를. 드디어 마차가 내 앞에서 멈추었다. 그가 나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이제 내 인생에 행운이 찾아왔구나’ 나는 속으로 외쳤다. 그러나, 그는 망설임 없이 오른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느냐?” ‘아, 이게 웬일인가!’ 위대한 임금께서 한낱 보잘것없는 거지에게 손을 내밀고 마음을 떠보다니! 나는 당황하여 한동안 망설이며 서 있다 마지못해 주머니 속에서 가장 작은 쌀 한 톨을 꺼내어 그분께 드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해 질 녘 주머니를 털어 바닥에 쏟아보니, 그 초라한 보시더미 속에 작디작은 황금 쌀알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통곡하며 후회했다. ‘아, 내가 어찌하여 그분께 가진 것을 모두 드리지 않았던가!’
우리는 하느님께 무언가를 드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분은 우리가 드린 것보다 훨씬 큰 은총으로 돌려주십니다. 하느님께 작은 희생 하나를 바치면, 그분은 백 배, 천 배의 축복으로 우리를 채워 주십니다.
그 옛날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의 전 생애를 예수님과 복음 선포를 위해 바쳤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 가난해지고, 모든 것을 비워냈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넘치는 은총을 부어 주셨고, 하늘 나라의 행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거지처럼 인색하지 않고, 우리의 재능과 시간, 능력, 지혜를 하느님과 복음 전파를 위해 아낌없이, 주저없이 내어놓는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하느님의 큰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축복의 대상은 그때 그 제자들 만이 아니라 오늘 이 순간, 내가 가진 것들을 아낌없이 바치는 우리 또한 그 축복의 주인공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사도행전 20,35)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 6,33)
아낌없이 내어드릴 때, 하느님의 축복은 더욱 풍성하게 우리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을 실제로 느끼고 있습니까?
2. 내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줘 본 적이 있습니까?
3.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과연 나는 내가 가진 것들을 주님의 사업을 위해 망설임없이 내어 줄 준비가 되어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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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6. 연중 제6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행복은 선택이자 훈련이요, 발견이자 은총이다
“믿음, 희망, 사랑”
여기 요셉 수도원 수도자들은 늘 행복합니다. 누구나 행복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선택이자 훈련이요 발견이자 은총입니다. 타고난 부정적인 것들에 절망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왜 짧은 인생 절망하며 불행하게 삽니까? 너무 억울하고 허무하지 않습니까? 선물로 주어진 한 번뿐인 인생의 유일한 목표는 행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 모두의 권리요 의무요 책임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거룩한 주일 미사전례를 선택하여 하늘 나라 행복 잔치에 참여하고 있는 여러분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정확히 작년 9.29일부터 저를 행복하게 만든 시가 선물처럼 찾아왔습니다. 하두 많이 인용해서 미안한 생각도 들지만 늘 나눠도 새롭고 좋아 또 나눕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2024.9.29.>
여기 불암산 기슭에 자리잡은 요셉수도원에 37년째 정주하면서 하루하루 날마다 늘 바라보며 행복해 한 것이 불암산입니다. 또 지금도 여전히 많이 나누는 <행복기도> 다음 대목도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꽃자리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행복을 곁에 놔두고 왜 어리석게 불행하게 삽니까? 행복은 선택임과 동시에 발견임을 깨닫습니다. 눈만 열리면 무수히 발견되는 행복의 선물입니다. 어제 오후도 참 행복했습니다. 오늘 이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순수한 사랑으로 빛나는 임마누엘 본당 청년회원들의 피정 지도 덕분입니다. 강의 내용도 청년회의 요청에 따라, “천국, 연옥, 지옥, 천사, 악마”를 주제로 하여 나눴습니다.
“천국은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며, 가장 간절한 열망의 실현이고, 가장 행복한 결정적 상태다. 천국에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생명이 있고 하늘 나라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천국을 열어 주셨다.”
이런 요지의 천국에 대한 강의였고, 천국은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천국을 살아야 함을 강조했고, 모두가 면담고백 성사를 볼 때 보속도 동일했습니다. 피정 마치고 떠나는 동안 지상 천국 수도원에서 “주님과 함께 기쁘고 평화롭게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속으로 주었고 모두가 웃음으로 화답했습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무엇보다 행복의 원천인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시편 한 구절,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라는 내용도 생각납니다. 구체적으로 하느님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선택하여 훈련하는 것입니다. 영성생활의 승패는 훈련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선택 훈련하여 습관화할 때 비로소 영적승리의 행복한 삶입니다.
첫째, 믿음을 선택하여 훈련할 때 참행복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가르침이 참 신선하고 명쾌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도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없이, 줄곧 열매를 맺으리라.”
바로 미사에 참석한 여러분을 두고 하는 말씀같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전반부 행복한 사람들의 내면 상태를 말해 줍니다. 이런 행복한 이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이들이 사람에게, 자기 몸에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는 사막의 덩굴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그대로 하느님이 아닌 자기를 선택하여 믿은 이들이 스스로 자초한 결과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후반부 불행한 사람들의 내면 상태를 말해줍니다.
둘째, 희망을 선택하여 훈련할 때 참행복입니다.
희망이, 꿈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그리스도 예수님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믿음과 희망의 고백에 100% 공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의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사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나셨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늘 우리와 함께 계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요, 이런 희망의 주님을 선택할 때 참행복입니다.
셋째, 사랑을 선택하여 훈련할 때 참행복입니다.
오늘 복음의 전반부 행복한 사람들이 바로 하느님 사랑을 선택한 이들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되리라.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사랑을 선택할 때 궁극의 승리가, 참행복이 있습니다. 반면 외관상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 불행을 선언하시는 주님입니다. 세상 것들 사랑에 빠지다 보니 하느님 사랑이 없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불행한 이들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탄식이요 회개에의 촉구이자 호소입니다. 하느님 없는 행복은 얼마 못갑니다. 삶의 허무와 무지를, 시련과 고난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지금 가난한 이들, 지금 굶주린 이들, 우는 이들을 돕고 함께 나누며 살라는 회개에의 촉구이자 호소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가난도, 정결도, 순종도 그리고 일상의 삶 모두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 다 지녔어도 그 내면에 믿음이, 희망이, 사랑이, 기쁨이, 평화가 없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 모두를 일거에 충족시켜주는 분이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을 선택하여 하느님께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두고 살 때 참행복이요, 이런 주님을 모시는 미사은총이 참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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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6. 연중 제6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행복과 불행>
내가 있으니
나는 행복합니다
내가 없으면
나는 불행합니다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으니
나는 행복합니다
당신을 없애면
나도 없으니
나는 불행합니다
당신이 있으니
나는 행복합니다
당신이 없으면
나는 불행합니다
당신과 함께
나는 행복합니다
나 홀로
나는 불행합니다
당신을 믿기에
나는 행복합니다
나만을 믿으면
나는 불행합니다
당신을 바라기에
나는 행복합니다
나만을 바라면
나는 불행합니다
당신을 사랑하기에
나는 행복합니다
나만을 사랑하면
나는 불행합니다
내가
당신의 행복이기에
나는 행복합니다
내가
나만의 행복이라면
나는 불행합니다
당신이
나의 행복이기에
나는 행복합니다
당신이
나의 불행이라면
나는 불행합니다
나 있음이
행복이요
나 없음이
불행일지니
당신이 있어야
비로소 내가 있고
당신을 없애면
나 또한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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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6. 연중 제6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참된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행복을 지향하는데 참된 행복은 먼저 하느님에 대한 대한 갈망안에서 옵니다.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으로 말미암아 현실적으로 참된 행복을 맛볼 수 없기에 그 참된 행복을 채워줄 수 있는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을 찾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은 본능적으로 참된 행복을 갈망하며 이를 위해 하느님을 찾도록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진정한 행복은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하느님의 평화와 선이 우리의 마음안에 활동하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낄 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참된 행복은 지상의 성공의 기쁨들을 누리기보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고통을 감수함으로써 더 쉽게 얻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사랑과 고통이 담긴 십자가를 품어 안을 때 느낄 수 있습니다.
비안네 성인의 말처럼 십자가가 없을 때 우리는 메말라집니다. 십자가를 끈기있게 지면 우리는 거기서 영혼의 감미로움과 행복을 맛보게됩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고통을 받아도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고통을 견디어 내고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는 상태를 성 프란치스코는 참되고 완전한 기쁨이요 영적인 행복의 상태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행복의 가장 올바른 정의는 마음의 평화입니다. 마음의 평화는 완전한 자기실현의 결과이며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먼저 인식하지 않고는 완전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느님을 떠나서 참된 행복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부족하고 결점이 많은 존재이기에 하느님께 은총과 자비를 청하는 겸손의 삶을 살 때, 이런 겸손이 바탕이 되어 있을 때에만 온유하고 자비를 베풀 수 있고 깨끗한 마음을 지니게 됨으로서 참된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운명을 보호하려 하고 그 사람을 위해 책임을 지려 하며 다른 사람의 약점을 참아주려 하고, 특히 그와 함께 행복과 불행을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하나임을 체험하는 것이고 더 없는 행복과 사랑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이 가난한 겸손한 사람에게는 세속이 없는 것 같고, 올바른 생각을 하며 자신 안에서 갖가지 행복을 맛보고, 자신이 비천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아오스딩 성인은 삶의 참된 행복은 진심으로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가장 완전하고 가장 행복한 구원의 길은 사랑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관대하고 사랑어린 마음으로 자기 일에 헌신하고 사람들에게 헌신할 줄 안다면 거의 어떤 환경에서든 행복을 발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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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합스부르크(Habsburg) 가의 백작
프리드리히 쉴러(Friedrich Schiller)
아아헨(Aachen) 의 호화로운 궁전,
고풍스런 홀에
루돌프 대공천하께서 화려한
대관식 향연에 참석하고 있었다.
팔쯔 선제후가 음식을 나르고
뵈메(Böhme) 사람이 진주 거품이 이는 포도주를 선물한다.
별들이 태양 주위를 둘러서 있듯이,
일곱 명의 선택받은 사람들이
직책의 권위를 행사하는
세계의 지배자를 에워싸고 있었다.
둘레 높은 발코니에는
기쁘게 몰려 드는 군중들로 가득차 있었고
군중의 환호하는 소리가
트럼펫소리와 섞여 떠들썩했다.
오랫동안의 허망한 싸움이 끝나니
황제부재(不在l)의, 공포의 시대는 끝나고
기사가 다시 세상에 도래했다.
철창이 더 이상 활개하지 못하니,
약자와 평화를 사랑하는 자들이
더 이상 강자의 희생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황제께서 금잔을 들어
만족한 시선으로 말하노니
“이 왕의 마음을 즐거이 할 만큼
훌륭한 축제에, 성대한 만찬이로다.
그러나 달콤한 목소리와 더할 나위 없는
고귀한 가르침으로 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이, 가수가 없음이 애석하도다.
내 기사로서 행하였던 일을
젊어서부터 행해왔으니,
황제로서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도다."(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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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6. 연중 제6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생활묵상 : 꽃보다 아름다운 수녀님
강만연 [fisherpeter] 250216. 01:37 ㅣNo.180100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안치환 가수의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 제목처럼 정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있을까요? 어떻게 생겨야 그럴까요? 저는 인생을 그렇게 오래 살지 않았지만 그런 사람을 여럿 봤습니다. 근대 그 대상이 대개 여자분이십니다. 제가 남자라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처음에 뵌 분인데 20대 때 서울 지하철에서 뵌 아주머니였습니다. 아마 25살 때쯤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분은 뭐라고 할까 아름답다라는 표현보다는 후덕한 이미지를 담고 있으면서도 우아한 그런 느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나이에 이런 분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니 웃으실 분도 계실 겁니다. 뭐 웃으셔도 됩니다. 사람은 다 눈으로 뭔가 사물을 봐도 그 보는 눈이 다 다릅니다. 마치 시인의 눈은 똑같은 산을 봐도 시인이 보는 산과 일반 사람이 보는 산의 모습이 다르듯이 말입니다.
어제 운동을 하러 짐에 가기 전에 대구시는 아니고 변두리에 있는 어떤 성당 카페에 가입했습니다. 제가 전에 가끔 미사를 봤던 본당에 계셨던 수녀님의 소식을 그 본당 카페에 올라온 공지를 보고 이동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사실 그 수녀님에 대한 글도 저번에 한번 올렸습니다. 저는 그 수녀님과 대화를 해봤다고 해봐야 불과 몇 분 정도였습니다. 그 수녀님에 대한 감사함이나마 잠시 전하려고 카페에 가입을 했는데 생각보다 어떤 조건도 없고 간편했고 가입하자마자 바로 가입승인 절차가 나와 왜 가입을 했는지 이유와 가입인사란에 수녀님에 대한 인사를 짧게 올렸습니다. 올리고 난 후에 바로 댓글이 달렸습니다. 미카엘이라는 어떤 형제님이 수녀님께 전해드리겠다고 하는 댓글에 제가 감사함을 전했습니다.
카페에 보니 저희 본당에 계셨던 수녀님 두 분이 거쳐가셨던 본당이었습니다. 한 수녀님은 제가 영세를 받았을 때 작은 수녀님이셨고 그 수녀님이 대구 본원으로 가실 때 제가 본원까지 모셔드렸던 수녀님이고 다른 수녀님은 여수인지 광주인지 아무튼 전라도가 고향이신 수녀님이셨습니다. 이 두 분 수녀님에 대한 짧은 이야기와 함께 옆 본당 수녀님에 대한 찬사 아닌 찬사를 올렸습니다. 사실 보내고 난 후 운동을 하고 와서 조금 걱정이 됐습니다. 좋은 내용의 글이라도 이게 혹시 수녀님께 누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수요일 날 이동하시고 오늘이 첫 부임 후 첫 주일인데 제가 여자 자매라면 별 문제가 없는데 제가 형제라 그것도 다른 본당에 적을 둔 사람이라 그 본당 식구들이 보셨을 때 좀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문해력이 없지 않은 이상 그 글을 보면 그냥 수도자로서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어 남긴 글이라는 걸 알 수 있겠지만 그래도 몰라 또 수녀님께 불편을 혹시라도 끼쳐드리면 안 될 것 같아 댓글에 전혀 그런 생각을 하시지 못하시도록 안전장치 같은 댓글을 달았습니다. 아마 그 댓글을 보고는 그런 오해는 절대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아마 모르긴 몰라도 수녀님이 그 카페에 제가 올린 글을 보시면 흐뭇해하시고 수도자로 사는 게 이런 행복감도 가질 수 있겠구나 하고 그런 생각을 분명히 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글에서 표현한 것 하나만 말씀드리면 사실 이게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수녀님의 따뜻한 미소가 저한테는 백만불짜리라고 했습니다. 제가 멋지게 표현했습니다. 저는 사실 그랬습니다. 제가 미사를 드리기 위해 갔지만 멀리서나마 수녀님을 잠시 뵐 때마다 항상 밝게 웃으시는 미소를 보면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진 힘든 일을 그 순간만큼은 잊을 수 있게 해 주시는 그런 미소였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 수녀님의 미소가 제 눈에는 꽃보다도 아름답게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추측하건데 모르긴 몰라도 지금 계시는 본당에서 소임을 마치시고 한 본당 정도만 더 하시면 본당 수녀님으로서는 마지막이지 않을까 하는 그런 연배의 수녀님이십니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요. 왜 제가 이런 표현을 했느냐면 그럼 대충 수녀님이 어느 정도의 연세인지 가늠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름다움은 젊다고만 아름다움이 있는 게 아닐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나이와 전혀 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절대적인 비례관계에 있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이 수녀님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고자 이렇게 서술이 길었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도 제가 언급한 수녀님처럼 저는 그 수녀님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그 어떤 누군가에게 나라는 존재 때문에 그 어떤 누군가가 마음에 위로를 받고 또 행복한 느낌을 줄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삶이 이 세상에서 어떤 힘든 삶이 있었든, 행복했든 간에 참으로 가치 있고 아름다운 한 생애를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묵상을 해봅니다. 그런 삶을 살았다면 그에 대한 하느님의 평가는 어떨까 하는 묵상을 해봅니다. "딸아 이리 오렴. 참으로 고생 많았구나" 하시고 나중에 하느님께서 따뜻하게 안아주실 것 같다는 상상도 해봅니다. 우리도 이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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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6. 연중 제6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재물보다 말씀과 함께하는 삶을 /
박윤식 [big-llight] 250215. 18:22 ㅣNo.180095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이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이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우는 이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나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너희가 하늘에서의 상이 크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이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다 받았다. 불행하여라, 지금 배부른 이들! 너희는 굶주리게 된다. 불행하여라, 웃는 이들! 너희는 울게 될게다. 모든 이가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 미움 받고 누명 쓴 이들은 행복하다 하시고, 반대로 지금 부유한 이, 배부른 이, 웃는 이, 칭찬받는 이들은 끝내 불행하단다. 사실 우리 모두는 정녕 행복하기를 바란다. 더군다나 스스로 행복하다 느끼려면 가난대신 재물, 슬픔대신 기쁨, 굶주림보다 풍요로움이 당연해 보이는데 그분께서는 이것들을 다 뒤집어 보신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가난이나 굶주림 그 자체가 부유하고 나름으로 잘 챙겨 먹는 것보다 좋다고는 하지 않으셨다. 가난이 행복의 조건이기에, 가난을 행복으로 알고 참으라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도움을 바랄 수 있어, 더 쉽게 하느님 나라에 마음을 열게다. 그러나 부유한 이들은 재물을 믿고 의지해 부족한 것이 없기에, 하느님께 그리 쉽게 기대려 하지 않을 게다.
가난의 대칭은 재물이 많은 부자이다. 그런데 재물은 또 다른 재물마저 보이는 족족 연관 지어가며 막 끌어당긴다. 이게 부자들이 소유에 집착하는 이유다. 심한 경우 사람이 재물을 소유한 게 아닌, 재물이 사람을 소유한다. 주님 때문에 받아들인 가난은 이 끝없는 욕망에서 절제된다. 소유욕 앞에서 멈출 줄을 안다. 그러니 부와 가난을 물질의 량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부자는 소유 앞에서 자유로운 이다. 그런 이는 언제든지 주님을 만난다. 행복한 이다.
이렇게 우리가 굶주릴 때 배부름에 대한 고마움을 깨닫기에,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마음을 가진다. 그럴 때에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발견할 게다. 또 우리가 울고 있을 때 이웃의 슬픔을 내 슬픔마냥 공감할 수 있어, 그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을 그나마 지닐 게다. 우리가 박해받을 때 우리는 기본권을 침해당하는 수많은 약자들의 마음을 이해함으로써, 그들과 함께 하느님께 의탁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게다. 이처럼 행복은 내세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현실을 참되이 살아가게 하는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라도 행복에 대해서 조금씩은 안다. 그리고 ‘이것이 행복이구나!’ 하고 스스로 만족하면서 느낀다. 그렇지만 정녕 그 확신을 갖지 못한다. 행복의 본질이 은총인 것을 모르기에. 행복은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가난한 이들이 행복한 것은 주님께서 함께하시기에. 그러므로 주님 때문에 받아들이는 가난이 되어야만 할게다. 그래야 그분께서 늘 함께하시어 행복해질 테니까.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바랍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행복을 안길까요? 많은 이는 재물이라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행복도 실은 돈과 연관됩니다. 그런데 그 논리가 우리 상식과는 정반대입니다. 가난하고 굶주리면 행복하고 부유하고 배부르면 불행하답니다. 재물 소유보다 하느님 말씀과 함께하는 삶이랍니다. 이렇게 행복불행의 길은 우리의 선택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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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6. 연중 제6주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오늘 복음은 이른바 평지 설교의 시작입니다. 이 본문에서 대조되는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은 세상의 가치를 완전히 뒤엎습니다. 전반부의 행복 선언은 마태오 복음서 5장의 참행복 선언과 비슷한 구조이지만 여기서는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을 향하여 직접 이인칭으로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불행 선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불행 선언에 근거하여 이 세상에서 누리는 부유함과 즐거움은 바랄 것이 못 되고 오직 내세에만 희망을 두라는 식의 해석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가난과 슬픔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불필요하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서도 안 됩니다.
‘사목 헌장’은 “사회 질서와 그 발전은 언제나 인간의 행복을 지향하여야 한다.”(26항)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선포하는 구원은 영적이고 종말론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전인적이고 현실적인 인간 존재의 모든 차원을 아우릅니다.
행복과 불행의 궁극적인 기준은 바로 하느님 나라, 사람의 아들입니다.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들은 오직 영원한 행복이신 하느님께만 의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합니다.
지금 배부르고 부유하고 웃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찾지 않기에 불행합니다.
그런 사람들이라도 자기들이 가진 것을 나누면서 하느님을 찾는다면 행복할 것입니다.
현세에서 끝나는 가치들을 하느님 자리에 둘 때 참행복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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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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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6. 연중 제6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대로 부유한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함은 무엇이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무엇이 없다는 것은
그것을 가진 사람이 있을 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연필이 없다는 것은
옆사람이 연필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알게 됩니다.
옆사람에게도 연필이 없다면
인간은 원래 연필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보다 생각해서
연필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크게 문제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옆사람과 비교해서
나는 가지고 있지 않기에
나도 갖고 싶습니다.
인간 안에 없는 것 가운데 가장 궁극적인 것은
영원한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느님과 비교했을 때
우리가 느끼게 되는 가난입니다.
그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가난이 해결된 것이 부유함이라면
여기에서의 부유함은
영원한 생명을 얻은 상태를 말할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노력으로 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끊임없이 죽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부유한 사람이 불행하다는 것은
이러한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은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을
마치 가능한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 노력하지 않는 사람의 행복을
말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고
그것은 우리 신앙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함에서 얻는 영원한 생명과
부유함에서 얻는 영원한 생명은 다릅니다.
가난함에서 얻는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과 함께 그것을 얻으려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은
하느님과 함께할 때
우리가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가난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채워주려 하십니다.
나만의 노력으로 결국 얻지 못하는 것보다
하느님과 함께하면서
주시는 그것을 받는 것이
더 현명한 길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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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6. 연중 제6주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 21)
우리의 삶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참된
행복입니다.
우리 삶 안에
계신
하느님의
참된 행복을
예수님께서
일깨워 주십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알아주십니다.
우리의 불행을
아파하시며
우리의 불행을
행복으로
되돌려놓으시는
하느님의
행복입니다.
우리에게는
행복의
원천이신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주십니다.
울고 있는
우리의
슬픔 속에서도
우리의 슬픔을
위로하시며
행복한 삶을
우리 삶 안에서
당신과 함께
시작하십니다.
행복하게
살아갈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모든 불행은
우리가
하느님을 떠난
교만한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기에
우리가 겪는
가난도
굶주림도
울음도
추방과 모욕과
중상도
행복의
여정일 수
있습니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참된
행복입니다.
불행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함께
참된 행복을
체험하는
행복한 주일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을
우리 삶으로
기쁘게
받습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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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6. 연중 제6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참된 행복은 축척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옵니다!
얼굴을 보아하니 ‘이 세상에서 나처럼 불행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는 표정으로 살아가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하시는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니, 그 정도면 이 혹독한 세상에서 꽤 괜찮은 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기에 그리도 불행한 삶을 살아가며, 살아생전 연옥체험을 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대로 제가 보기에도 ‘정말이지 하느님께서도 너무하시지?
정말 하느님이 계시긴 한 건가?’ 할 정도로 힘겹고 참담한 삶을 살아가시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그 얼굴은 ‘이 세상에서 나처럼 행복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하는 얼굴이었습니다.
저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참으로 상대적인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떠오른 한 가지 생각, 그리 길지도 않은 우리 인생, 너무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살아가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너무 그렇게 사소한 일에 핏대까지 올리며 아등바등 살아가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어쩔 수 없이 제한된 우리네 인생 안에서 하루하루 가급적 만족하고 살려고 노력하며
작은 것에서 기쁨을 찾아야겠습니다.
사실 우리네 인간의 삶, 뭐 그리 대단히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
기를 쓰고 올라가 봐야 그 끝에 대체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있겠습니까?
수백 수천억을 모아봐야 그것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겠습니다.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족들, 동료들, 친구들과 일상 안에서 나누는 사소한 기쁨, 사실 그것보다 큰 행복은 찾기가 힘듭니다.
함께 걸어가는 이웃이 자신의 상처와 한계를 극복하고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 그것처럼 제게 있어 큰 행복은 다시 또 없었습니다.
행복과 관련해서 지금에야 깨닫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네 삶 가운데 행복의 순간은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씨앗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행복은 결핍 가운데, 부족함 가운데, 시련이나 역경 가운데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공동체를 방문할 때였습니다. 감사하지만 부담스러운 극진한 환대가 매일 계속되었습니다.
매 끼니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였습니다.
매일 저녁 밤늦은 시간까지 성대한 파티가 계속되었습니다.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시고...그 대신 운동량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한 일주일 정도 반복되니 세상에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반대로 바쁜 일이 있어 본의 아니게 몇 끼니를 건너뛰었습니다.
이윽고 촉각을 다투는 일들을 대충 마무리 짓고 나니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가까운 순대국밥 집에 가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8천원짜리 순대국밥 한 그릇을 마주 대하니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이 다 나왔습니다.
우리가 매일 느끼는 결핍, 갈증, 배고픔, 부족함, 피곤함, 외로움, 슬픔...이런 요소들이 사실은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니고있는 행복에 대한 개념, 곰곰이 한번 되새김질해보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곁들여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향해 장엄한 어조로 행복의 길을 선포하십니다.
천국에 오르는 길을 아주 쉽고도 명료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소유가 아니라 가난임을, 창이나 칼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임을 선포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축척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온다는 것, 참된 기쁨은 올라감이 아니라
내려섬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설파하십니다.
비록 죄인이고 너무나 보잘 것 없고 비참한 우리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언제나 굳건히 내 안에 자리하시고 내 인생을 동반해주시니 깊이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부족하고 부끄럽더라도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내 인생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매 순간을 감사하면서 충만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어느새 행복은 우리 손안에 들어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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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6. 연중 제6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6,17.20-26: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마태오 복음(5,1-12)에서는 산상설교로, 루카 복음에서는 평지설교로 전해주고 있다. 마태오 복음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 신앙인들은 구원의 말씀을 생활화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올라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루카 복음은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내려오신다. 즉, 우리가 당신을 향해 올라갈 수 있도록 당신을 낮추어 내려오신다는 의미이다. 루카 복음에서는 4개의 축복이 나온 다음 4개의 저주가 나오는데 이렇게 축복과 저주가 쌍을 이루게 한 것은 축복의 의미와 효과를 더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 내용은 예레미야서에 나타나는데 복음 내용을 잘 조명해주고 있다. “사람이 힘이 되어주려니 하고 믿는 자들은 천벌을 받으리라. 그러나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5-8절).
성경에서 축복이란 미래에 얻게 될 기쁨을 선포하거나(이사 30,18; 32,20; 다니12,12), 현재의 기쁨에 감사를 드리거나(시편 32,1-2; 33,12; 85,5-6.13) 보상에 대한 약속을 표현하는데(잠언 3,13; 8,32.34; 시편 1,1; 2,12) 사용된다. 따라서 축복은 항상 하느님께서 당신께 충실한 사람들에게 주실 기쁨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축복이란 어떤 희망 사항이나 원의의 표현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상황을 뒤집고 그 나라를 실현하실 것을 장엄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축복이 현재 상황이 뒤바뀌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어떻게 바뀐다는 것인가? 가난한 이들이 부유하게 되고, 배고픈 이들이 배불리 먹게 되는 그런 상황으로 된다는 말은 아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의 축복은 불행한 사람들과 행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처지만 바뀔 뿐 여전히 세상에 불의는 존속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예수께서 계속해서 부유한 사람들과 배부른 사람들을 저주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해지고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면 그 때문에 다시 저주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뒤집어엎는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일어난다. 정신적 내면 상태의 변화와 또한 마음의 회개로 말미암은 외적 변화를 통해 일어나게 된다.
사람들의 이기심으로 이 사회에 가난한 이들, 배고픈 이들, 고통받고 박해받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아직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미 그리스도와 더불어 역사 속에 이미 활동하고 있고 이러한 상황을 끊임없이 고발하고, 여기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인 면이 충분치 못할 뿐이다. 그들이 영적인 배부름과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밝은 생활을 할 때는 부유하다. 이같이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생활이 감추어진 차원 즉, 세상이 간단히 알아챌 수 없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지상의 부와 외적으로 드러나는 성공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가난은 단순한 빈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우리 마음의 개방이다. 가난한 사람은 구하는 사람이다. 즉 하느님께 자신을 열고 청하는 사람이다.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법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며 구체적으로 가난한 이들과 자신의 삶을 그리고 물질을 나누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용서와 참된 재화와 풍요로움과 즐거움의 형태로 모든 이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회적 현실에 대한 축복이나 저주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의 도움이 필요한 참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며, 그래서 다 함께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육체적 정신적 굶주림을 채울 수 있는 것들을 하느님과 사람들로부터 채워야 하는 그 배고픔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영적, 물질적인 악에 대해 회개하는 용기를 가짐으로써 하느님께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나 자신의 마음의 비움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가난을 가질 때에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23절).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알아듣기 힘든 역설적이지만, 사도 바오로는 그 보증으로서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 가장 심한 박해를 당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다. 고통과 부활의 신비 안에서 우리는 오늘 복음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에 배고프고 고통당하고 가난하게 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끊고 살도록 노력한다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그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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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6. 연중 제6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행복은 사랑해서 고생하는 것
오늘은 루카 복음의 행복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행복 선언은 좀처러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니 말이 됩니까? 아무리 봐도 세상에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또는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배고픈 게 행복하다면 음식은 왜 먹어야 할까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러면 도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우느냐면, 예수님의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라는 말씀대로 박해받고 모욕과 중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 말씀은 ‘사랑’을 개입시키면 아주 잘 이해가 됩니다.
사랑하면 가난해지고, 굶주리게 되고, 겸손해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해서 고생하는 게 행복’이란 뜻입니다.
100세를 넘기고도 활발한 활동을 하신 김형석 전 연세대 교수가 내린 행복론의 결론입니다.
‘어린 왕자’는 작은 자신의 별에 꽃이 한 송이 피어난 것을 발견합니다.
어린 왕자는 그것을 위해서 가난해집니다.
자기 모든 에너지를 그 꽃을 보호하기 위해 쏟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먹이려고 배고파지고, 그것의 짜증을 다 받아내며 슬프고 겸손해져야 했습니다.
그러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그 꽃이 피어있는 자기 별을 떠납니다.
여행하던 중에 각자 행복을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자기 별에서 혼자 왕 노릇을 하는 사람, 자신에게 칭찬해 주고 손뼉 쳐 주기를 바라는 허풍쟁이, 세상 고통을 잊으려 온종일 술만 마시는 술꾼, 돈만 아는 사업가, 의미 없이 혼자 사는 별에서 일만 하는 가로등 켜는 사람, 지식을 뽐내는 지리학자 등입니다.
이들은 부자이고 배부르고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외로워 보입니다.
지구에 내려온 어린 왕자는 비행기 조종사와 사막여우를 만나 우정을 싹틔웁니다.
사막여우는 관계를 위해 큰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깊어질 때 그 노력이 무색할 정도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경험을 통해 자신의 별에 있는 자기를 괴롭혔던, 그 사랑스러운 꽃 한 송이를 다시 기억합니다.
어린 왕자는 비록 가난해지고, 배고프고, 멸시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참 행복은 그것을 쏟을 수 있는 사랑하는 누군가가 존재함임을 깨닫고 다시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니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안다면 참행복은 ‘사랑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가난해지셨습니다. 하느님의 지위를 내려놓으시고 한 인간으로서
사시기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으로 변화됩니다.
안젤로라는 의사 선생님은 학생 때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해 힘들어했습니다.
성령 안수 기도를 받는 중에 가난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의 뚫어진 손과 찔린 가시관이 곧 자신 때문에 가난해진 예수님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예수님은 저의 배를 불리시는 분이셨습니다.
말씀을 깨닫고 싶었고 하느님이 저를 사랑하심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하느님은 어쩔 수 없이 양식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어머니의 배를 채워야 할 젖을 아기에게 주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그 양식을 먹으며 배가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이런 행복을 추구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셨고, 그 행복에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배불리려면 배고파져야 합니다.
마더 데레사는 수많은 배를 곯는 사람들 앞에서 항상 배가 고플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행복임을 알았기에 행복하셨습니다.
김희아 씨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어떠실까요? 희아 씨는 모반 때문에 부모에게 버려지고 친구들에게 괴물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손이 지우개가 되게 해 달라며 자기 얼굴이 까지도록 문지르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자신보다 더 슬피 우시는 예수님을. 그분이 나의 처지를 위해 울어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분이 우리를 덮어주기 위해 세상에 오셨음을 믿게 될 수 있을까요?
모든 순교자들은 이 세상의 지위를 버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고통과 멸시를 선택하신 분들이었습니다.
어떤 강의에서 이런 내용을 들었습니다.
사랑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작은 십자가를 질 줄 아는 것부터 배우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단 어린아이에게 햄스터를 한 마리 선물해 줍니다.
그 햄스터는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정성을 다해 먹를 주고 아프지 않도록 보살펴 주었습니다.
사랑하면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햄스터의 평균 수명은 2~3년입니다.
금방 죽습니다.
이때 아이는 큰 상처를 받습니다.
부모는 “또 햄스터 키울 거니?”라고 묻습니다. 아이는 울면서 절대 안 키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1~2년 지나면 또 키우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번에 아이가 햄스터를 대하는 방식은 조금
다릅니다.
이제 내가 열심히 해 주어도 햄스터가 곧 죽을 것을 압니다.
그래도 열심히 행복하게 살게 해 줍니다.
사랑을 위한 자기희생만이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행복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추적 60’분이란 프로그램에서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한 사제의 이야기가 방영된 적이 있었습니다.
오토바이를 탄 한 학생이 건널목을 건너는 신부님을 치어 사망하게 했습니다.
교구에서는 신부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그 학생을 용서했을 것이라며 학생이 감옥에 가지 않도록 배려했습니다.
그 신부님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찾아낸 물건이라고는 낡은 라디오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통장에도 적은 돈이 있었지만, 그것은 안 받으려던 강의료를 억지로 받아서 나중에 학생들에게 한꺼번에 선물하려고 모아놓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실제로 당신을 위한 재산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매스컴에 보도되었고 세상 사람들은 사제의 그런 가난한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왜일까요? 느닷없이 준비도 못 하고 돌아가셨는데도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가난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베풀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행복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에 섭니다. 사랑해서 고생하는 행복을 추구할 것인지, 사랑 없이 편한 삶을 선택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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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6. 연중 제6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행복론’이 아니라 ‘구원론’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 6,20-26).”
1) 이 말씀의 ‘행복’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게 될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행복을 가리키는 말이고, ‘불행’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당하게 될 심판과 멸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행복론’이 아니라 ‘구원론’입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을 얻는가?’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가?’에 관한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2) 루카복음 16장에 있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이 말씀을 생생하게 설명해 주는 비유입니다.
그 비유에 나오는 ‘라자로’는 아주 가난했고, 날마다 굶주렸고,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날마다 울었을 것이고, 사람들로부터(나쁜 부자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모욕당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습니다(루카 16,19).
그는 배고픔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것이고, 날마다 웃으면서 살았고, 주변 사람들의 아첨에 취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처지는 저승에서 정반대로 바뀌게 됩니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23-26)”
3) 저승에 있는 ‘큰 구렁’은, 한 번 심판이 이루어지면 번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변경과 취소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큰 구렁’은 이승에서 이미 부자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를 막고 있는 ‘큰 구렁’은, 가난한 사람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건너갈 수도 없고 극복할 수도 없는 ‘현실적인 장벽’입니다.
이승에 있는 그 장벽은, 또는 그 ‘큰 구렁’은 부자들이 만든 것이고, 그것을 없애는 것은 부자들 자신들이 할 일입니다.
4) ‘가난’과 ‘굶주림’이 행복의 원인이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라는 말씀은, “지금 가난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또 재물에 눈을 돌리지 않고 하느님 나라만 추구하는 사람은
그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라자로’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나라에 들어간 것처럼, 단순히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고,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의롭게 살아야 그 나라에 들어갑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더 탐욕에 사로잡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5) ‘부유함’은 그 자체가 ‘구원’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됩니다.
사람들 중에는 “부자로 사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다.
착한 부자도 많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주장을 하기 전에 먼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루카 18,25).” 라는
예수님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성인 성녀들 가운데에는 ‘부자였던’ 분들이 분명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인 채로’ 성인품에 오른 분들은 없습니다.
인간적으로만 보면 ‘착한 부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긴 한데, 예수님의 기준으로도 과연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착한 부자’ 라는 칭찬과 존경을 받는 것에 취하면
금방 교만해지고 위선자가 됩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부유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부유함을 유지하려고 애쓸 때, 그것이 악한 일이 아니고, 죄가 되는 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마음이 이미 재물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태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만큼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는 방법’을 묻는 부자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루카 18,22).”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지금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간에, 누구든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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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6. 연중 제6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6,17.20-26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 아무것도 아는 것 없고 / 건강조차 없는 작은 몸이지만 / 나는 행복합니다.
세상에서 지을 수 있는 죄악 / 피해갈 수 있도록 이 몸 묶어 주시고 / 외롭지 않도록 당신 느낌 주시니
말할 수 있고 / 들을 수 있고 / 생각할 수 있는 / 세가지 남은 것은 / 천상을 위해서만 쓰여질 것입니다.
그래도 소담스레 / 웃을 수 있는 여유는 / 그런 사랑에 쓰여진 때문입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배영희 엘리사벳 자매님이 쓰신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시입니다. 자매님은 19살에 뇌막염을 앓고 난 후유증으로 앞을 못보는 전신마비 장애우가 되셨지요. 온 몸이 마비된 채 침상에 누워있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항상 맑고 밝은 모습으로 행복하게 지내셨다고 합니다. 그런 자매님의 모습을 보며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는 남들보다 더 나은 조건을 풍족하게 갖춰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 행복의 조건을 채우기 위해 애쓰고 있는데, 정작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이들은 찾아보기 힘든 것을 보면 말이지요.
오늘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결정하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기준에 대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남들이 다 부러워할만한 조건들을 풍족하게 갖추고 있음에도 불행하게 사는 이들을 보면 행복은 ‘소유’에 달린 문제가 아니지요. 예레미야는 그 점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돈, 명예, 권력을 얻기 위해 자신의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능력을 키우는데에만 신경쓰는 이들, 행복의 조건들을 채우는데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이들과의 관계맺음에 집착하며 그들 눈치를 보는 이들은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주님 사랑의 섭리를 굳게 믿고 그분 자비를 신뢰하며 그분께 온전히 의탁하는 이들은 ‘복되다’고 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물가에 심긴 나무가 시냇가를 향해 뿌리를 뻗듯이, 주님의 축복 속에 사는 이들은 그분을 향해 믿음과 순명의 뿌리를 뻗음으로써 고통을 마주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맡은 바 소명을 다하며, 시련을 겪더라도 걱정하지 않고 신앙생활의 열매인 참된 기쁨을 충만하게 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행복의 조건’을 갖추겠다며 스스로를 좁디 좁은 세상의 화분 속에 가둘 게 아니라, 믿음과 순명의 뿌리를 주님께 뻗어 그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은총의 강물이 내 안에 스며들게 해야겠지요.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두고 “행복하다”고 선언하시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입니다. 재물은 우리에게 행복할 기회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행복은 아니지요. 우리로하여금 삶의 참된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게 하는 진짜 행복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만 나옵니다. 하느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다음, 당신 모습대로 인간을 만드시고 ‘복’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만드신 피조물들을 ‘다스리라’는 소명을 맡기셨습니다. 즉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손에 맡기신 피조물들을 그분 뜻에 맞게 잘 사용하여 선을 이루는 한편, 그것들을 도구로 활용하여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내리신 ‘축복’을 완성해야 하는 임무를 받은 겁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재물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 재물에 마음과 영혼이 온통 사로잡힌 ‘노예’로 살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면서 이미 내려주신 축복을 완성함으로써만 누릴 수 있고, 그 축복을 완성하는 방법은 그분의 뜻을 충실히 실천하는 것 뿐인데, 엉뚱한데서 행복의 조건들을 찾고 있으니 예수님은 그런 우리가 올바른 방향을 바라보도록 이끌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조건의 행복이 아니라 인간 존재로서 받은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그 축복을 가득히 받기 위해서는 ‘가난’, 즉 세속적인 것들의 결핍을 견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마음에 하느님을 모시기 위한 ‘빈 자리’를 마련해야 그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어 큰 은총과 복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로소 우리 마음은 삶의 참된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난’은 ‘참된 행복’에 대한 각각의 내용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개념입니다. 여기서 ‘가난한 이’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프토코이’는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어 생존하려면 하느님의 자비에 철저히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즉 그들은 하느님만을 의지한 채 그분 손을 꼭 붙들고 있는 이들로써, 하느님께서 그들 곁에 함께 계시며 보호하시고 보살피시지요. 그들은 세상의 것들에 마음이 갈라지지 않고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되어 있기에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누리게 되는데,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즉 그들은 자신이 살면서 겪는 모든 일들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에 굶주려도 슬퍼도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아도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그 어떤 난관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구원과 참된 행복으로 이끄시려는 당신 뜻을 이루실 것을 알기에 그 믿음과 희망으로 언제나 기쁘게 살 수 있는 것이지요. 반대로 부유한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계셔야 할 자리를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로 ‘이미’ 채워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주는 일시적이고 유한한 만족감이 그들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의 ‘최대치’로 이미 정해져있는 탓에, 그들의 앞에는 ‘내리막길’만이, 실망과 좌절만이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배부르고, 웃으며, 인기와 명예를 누려도 늘 마음 한 구석이 찝찝하고 불안하지요. 다른 이들에 비해 행복할 수 있는 조건들을 더 갖추고 있는 유리한 상황임에도 삶의 참된 기쁨을 맘껏 누리지 못하고 마음이 주눅든 채 살아가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이것이 행복선언에 숨어있는 ‘역설’입니다. 그리고 우리 삶은 그런 역설들로 가득하지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행복했던 순간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고생하고 고통받으며 슬픔을 겪던 순간이었습니다. 고생이 컸던 만큼 그 일을 통해 느낀 보람도 컸기 때문입니다. 고통스러웠던 만큼 그것을 잘 극복하고 얻은 결실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슬픔이 깊었던만큼 내가 힘들 때 곁에 있어주고 위로해주며 힘을 주는 이들이 있음에 더 감사할 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행복의 역설’을 깨닫기 위해 필요한 것이 주님께 대한 깊고 단단한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누구보다 나를 깊이 사랑하시며, 그분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나를 구원과 참된 행복으로 이끌기 위한 것임을 믿어야 그분께서 우리 삶 구석구석에 숨겨두신 ‘행복의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자라 기쁨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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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6. 연중 제6주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예레미야 예언자는 사람에게 의지하는 사람과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 신뢰를 주님께 두는 사람의
행복과 불행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불
행한 사람은 세상이 전하는 행복, 다시 말해서 사람에게 의지하거나 스러질 몸을 자신의 발판으로
삼고 있지만 그것은 다 스러지게 되어 있어서 얼마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세상의 행복을 넘어 하느님께 뜻을 두고 희망을 거는 사람은 시편의 저자도 표현했지만
‘물가의 심어진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전합니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예레 17,8)
오늘 미사전례에서 화답송으로 시편의 노래도 같은 내용입니다. 시편저자는 세상에 뿌리를
둔 사람은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신세라고 노래합니다.
이와 다르게 하느님의 법과 그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노래를 합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시편 1,3)
루카 복음사가가 전해주는 ‘행복’과 ‘불행’선언(루카 6,20-26)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해 주는
산상설교 중에 ‘행복’선언(마태 5,3-12)과는 내용이 비숫하면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오는 ‘진복판단(眞福八端)’이라고 여덟 가지의 행복에 대한 것인데, 루카는 네 가지 행복과
네 가지 불행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오의 행복에서 루카는 네 가지로 생략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루카는 행복에서 ‘가난한 사람들’(6,20), ‘굶주리는 사람들’(6,21), ‘우는 사람들’(6,21),
‘미움을 받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쫓겨나고 모욕과 중상을 당하는 사람들’(6,22)이 대상이 됩니다.
반대로 불행에서 ‘부유한 사람들’(6,24), ‘배부른 사람들’(6,25), ‘웃는 사람들’(6,25), ‘모든 사람이
좋게 말하는 사람들’(6,26)이 또한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의 기준으로 조상들이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들 대했던 사실을 들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 그리고 사람들이 비난하고 외면하는 것을 겪어야 하는
사람에게 그런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되는 무엇일까요?
사도 바오로는 이런 말씀을 전합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1코린 15,16-17)
부활에 대한 믿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이론으로 이해했다고 해서 주님께 대한 신뢰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신앙인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의 욥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욥 42,5-6)
하느님께서도 인정했던 흠 없는 의인이 바로 욥(욥 1,8)이었습니다. 그가 하느님의 허락을 받고
사탄이 첫 번째 시련을 주었을 때도 그는 견디어 냈습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욥 1,21)
그러나 그는 두 번째 사탄의 내린 병으로 시련을 겪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 그는 자신의 태어난 날도 저주하며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차라리 업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날 날,”(욥 3,3)
“하느님께서 사방을 에워싸 버리시고는 생명을 주시는가?”(3,23)
그리고 그의 절친했던 엘리파즈, 빌다스 초파르도 그를 떠납니다.
그는 가난하고 굶주리는 사람, 울어야 하는 사람, 가장 가까웠던 이웃으로 부터 비난과 모욕을
겪어야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느님께 대한 희망만큼은 버리지 않고 간직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그를 의인으로 축복을 내리십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이론이나 무지개 빛 속에서 거니는 존재가 아닙니다.
신앙인으로서 이웃에게 그리고 하느님에게서 고통과 절망을 겪으며 가난한 사람, 눈물을 뿌리는
사람이 되더라도 욥처럼 끝까지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간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지요.
시편저자가 무더위와 가뭄 속에서 견디는 나무처럼 우리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희망을
지킬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물가에 심긴 나무가 되는 것이입니다.
우리가 바라고 믿는 하느님 나라와 부활은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예언자의 말씀을 되새기며 더 큰 신앙, 더 깊은 희망을 주시도록 주님께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예레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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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6. 연중 제6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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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6. 연중 제6주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라반의 말씀사랑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비결에 대해 논합니다. 예수님도 참행복을 선언하셨다고 루카와 마태오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의 행복선언은 산에서 이루어져 '산상설교'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루카복음의 행복선언은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서"(루카 6,17) 말씀하셨다 해서 '평지설교'라 불리기도 합니다.
"산"이 하느님 현존의 장소를 상징한다면, "평지"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 죄인들이 사는 현장, 기쁨과 눈물과 다툼과 애증이 엉킨 실질적 공간을 상징합니다. 비슷한 가르침 일화에 서로 다른 공간적 배경을 설정한 데는 두 복음사가의 목적과 의도가 나름대로 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행복하다고 하는 이들을 보면, 하나같이 현세에서 무겁고 힘겨운 짐을 지고 있는 이들입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미움, 내쫓김, 모욕, 중상에 시달리니 얼마나 고단하고 서러운 삶인지 체험이나 짐작을 통해 가늠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이 복음 내용에 실마리를 던지듯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위로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1코린 15,19)이라고.
그렇다면 가난한 이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내세만을 기다려야 할까요? 현세와 내세가 영 다른 양상일까요? 현세에서 힘들게 살면 내세에서 복 받고, 반대로 현세에서 누리고 살면 내세에서 불행할까요?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이런 이분법적 결과론이 아닐 겁니다
가난해도, 울고 있어도, 미움받고 쫓겨나고 모욕과 중상에 시달려도, 그런 힘에게 자신의 행복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고, 반대로 배부르고 웃고 모두에게 칭송받아도 무엇이 행복인지 모르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카 6,20)
가난이 행복을 부르는 신비에 대해 예레미야 예언자는 제1독서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여레 17,7)
그렇습니다. 행복의 조건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제 힘과 사람에 기대기보다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신뢰를 두는 것. 이 온전한 의탁이 부족하고 약하고 죄인인 가난한 이를 행복에로 이끕니다. 그러니 행복의 조건에서 가난이 차지하는 비중은 참으로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 하느님께 의탁하고 신뢰하는 삶을 사는 데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재물과 권력 명예가 오히려 방해거리도 될 수 있습니다. 내 주머니에 돈이 있고 내 말 한 마디면 움직이는 이들이 있고 내게 찬사를 보내는 이들에 둘러싸여 있다면, 그래서 감사를 모르고 내 힘만 믿고 산다면 내 삶에서 과연 하느님을 떠올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먼저 걸으셨고, 안토니오, 프란치스코, 글라라, 엘리사벳, 그밖의 많은 성인들이 따랐고, 지금도 무수한 이들을 매혹시키는 길입니다. 가난의 길, 주님을 소유하는 길, 행복의 길...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카 6,20)
행복과 불행은 어디에 의지하고 있는가에 판가름난다고 성경은 역설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느냐 아니면 하느님께 의지하느냐. 육에 의지하느냐 아니면 영에 의지하느냐. 능력에 의지하느냐 아니면 섭리에 의지하느냐.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예레 17,5)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예레 17,7) 여러분은 누구에게 의지하고 무엇에게 의지하시는지요? 우리는 화답송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시편 1,1) 시편의 시작이 "행복하여라!"로 시작하고 있다는 것 놀랍지 않으세요.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루카 6,24)
여러분은 재산이 많습니까? 그래서 행복하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찢어지게 가난합니까? 그래서 불행합니까? 대다수의 우리들은 대단한 부자도 아니요, 그렇다고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을 겁니다. 먹고살만은 한데 조금 더 넉넉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지금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주님의 말씀은 크게 수긍이 안 가지만, 지금 부유한 사람은 받을 위로를 충분히 받았으니 더 큰 위로는 필요없지 않겠느냐는 말씀은 토를 달고싶지 않을 정도로 수긍이 갑니다.
그렇다면 지금 조금 부족하게 느끼는 것이 나을까요, 아니면 지금 더 넉넉하고 나중엔 더 못받아도 상관없을까요? 퇴직금을 일시불로 지금 다 받는 것을 원하시나요? 아니면 조금씩 연금으로 죽을 때까지 받기를 원하시나요? 하느님 나라의 큰 행복을 위해서 지금 조금 부족하다시피 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언론매체를 통해 억만장자들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비참하게 되는 꼴을 한번씩 접할 때마다 오늘 예수님 말씀이 딱 맞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그런 부자들이 결코 불쌍하지 않고 통쾌하기까지 하니 그런 부자로 살기보단 조금 부족함을 느끼는 서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복되구나 생각듭니다.
여러분도 그렇지요? 그러니 내가 좀 부자다 싶으면 얼른 다른 가난한 사람들에게 좀 나누십시오. 그리하여 항상 조금 아쉽다 할 정도로 만든다면 그게 바로 하느님 나라를 얻는 비법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루카 6,20) 아멘.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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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6. 연중 제6주일.
말씀으로 영적 싸움에서 이기는 삶
<2025.2.16> 아침을 여는 묵상 (눅 4:1~13절)
❝말씀으로 영적 싸움에서 이기는 삶❞
❚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생에 유혹해 오는 사탄의 교묘한 유혹을 꺾을 수 있습니다.
✔ 말씀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물질의 유혹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1~4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에도 불구하고 사십일을 광야에서 머물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철저하게 의도된 계획 속에서 예수님은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십니다.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인간 예수이시기에 하나님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게 하심으로 마귀의 시험을 이길 힘을 주셨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3절).. 40일을 굶어 허기질 때로 허기진 예수님의 약점을 교묘하게 파고들었습니다.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4절)..
배고픔에 있어서 눈앞에 보이는 떡의 유혹을 뿌리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떡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삶의 전부가 아님을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손으로 쥘 수 있는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물질로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은 현실적으로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으로 이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마귀는 오늘 우리의 취약한 부분을 교묘하게 파고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도를 거스르도록 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그 약점을, 우리의 취약한 곳을 말씀으로 메꾸어야 합니다.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오히려 우리가 진정으로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삶입니다. 물질의 유혹 즉 먹고 사는 문제로 유혹해 오는 마귀의 유혹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도록 성령 안에서 말씀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권력의 유혹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5~8절).
마귀가 천하만국을 보여 주면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라고 유혹합니다. 마귀는 마치 자신이 이 세상의 권력과 영광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마귀의 세력에 굴복하여 마귀의 방식대로 이 땅의 권력을 추구하며 살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8절)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에게나 권력에 대한 욕망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노회 산하부서에서 임원을 하면서 목사나 장로들이 노회 정치에 대하여 쉽게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유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라고 큰 소리 쳤던 나 역시도 그 안에 들어가서 보니 노회 정치를 즐기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정치를 하시는 분들이 있어야 노회라고 하는 큰 바퀴가 굴러가는 것입니다. 어느 단체이든 사람들은 끊임없이 주도권 다툼을 하고 결정권과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더 높은 자리, 더 힘이 막강한 권력을 가지려고 합니다. 높은 자리에 앉든, 막강한 권력의 힘을 가지든 기억해야 할 것은 사탄의 앞잡이 역할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통치권을 인정하며 살아가므로 권력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권력 앞에서 비굴하게 살지 않고,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힘을 얻어 교묘한 마귀의 유혹으로부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명예의 유혹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9~13절).
마귀는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의 예언대로 천사들이 받들어 다치지 않게 할 것이라고 시험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12절)라고 선언하십니다. 온갖 시험을 마친 마귀는 더 좋은 기회를 노리려고 잠시 동안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13절,쉬운성경)..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눈앞에 보이는 안일함을 위하여 마귀와 타협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요, 우상 숭배로 나아가는 길이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당신을 믿고 신뢰하는 자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피하심으로써가 아니라 죽음에 직면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완성해 나가셨습니다. 잠시 물러간 마귀는 우리 자신의 삶과 교회와 가정을 향해서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무너뜨리려고 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헛된 욕망을 품도록 유혹해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유혹해 들어오는 명예의 유혹, 영광의 유혹을 이기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밖에는 없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말씀이 우리 자신의 인생을 승리의 길로 이끌어 간다는 이 확실한 진리를 마음에 늘 새겨 명예의 유혹으로부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진리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삶으로 실천함으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살아갈 뿐 아니라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세상의 안락함과 타협하지 않는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눅 4:1~13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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