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18
10월22일[연중 제29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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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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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SJEHKZs7ncY
[성 바오로수도회 조용준 니콜라오(가톨릭영화인협회 담당)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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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평화로운 세상 건설을 위한 순교자로서 삶의 주인공,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평화의 사도 성(聖)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1920-2005, 재위 1978-2005)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분은 발길 닿는 곳 마다 목소리를 높여,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평화! 평화!”를 외쳤습니다. 전쟁은 가장 무거운 죄임을 천명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나라들을 직접 찾아가 화해와 중재를 시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자행된 전쟁에 대해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평생토록 ‘전쟁과의 전쟁’을 주도하셨던 그분의 평화와 관련된 메시지를 요약해보니 오늘 우리 모두가 마음 깊이 새길 내용이더군요.
“나는 전쟁과 폭력을 직접 겪어본 사람으로서 선언합니다. 폭력은 악입니다. 폭력은 결코 건설의 도구가 아닙니다. 폭력만이 문제의 해결의 열쇠라는 외침을 절대 수용할 수 없습니다. 폭력은 인간의 품위에 맞지 않음을 선언합니다. 폭력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무릎을 꿇고 호소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애원합니다. 길을 바꾸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외칩니다. 폭력의 샛길을 멀리 하십시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부 드립니다. 평화의 길로 돌아오십시오! 자비로우신 주님께 청합니다. 극단의 야만에까지 떨어진 우리 인류를 불쌍히 여기소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과 한국 교회의 인연은 각별합니다. 그분은 순교자들의 땅이자 분단국가, ‘전쟁 발생 고위험군’ 국가로 분류되는 한국을 각별히 마음에 두셨습니다. 당신도 어린 시절 나치 독일과 소련 치하에서 큰 고통을 겪으셨기에 분단된 한국의 아픔을 당신의 고통처럼 느끼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한국을 사랑하셨던지 교황 재위 시절 두 차례나 방한하셨습니다. 1984년 여의도광장에서 거행된 103위 순교자 시성식은 로마 밖에서 실시된 최초의 시성식이었습니다. 1989년에는 세계성체 대회 참석차 방한하셨는데, 당시 주제는 한반도 평화를 염두에 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였습니다. 분단으로 고통 받고 있는 우리 민족을 향한 연민으로 가득한 메시지를 잊을 수 없습니다.
“아직도 평화와 정의 속에 하나 되지 못하고 있는 이 나라의 비극적 분단을 가슴아파합니다. 분단된 대한민국의 고난은 분열된 이 세계의 상징입니다.”
2011년 5월 1일 바티칸 광장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시복 미사를 주례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강론이 아직도 귀에 생생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어떤 분이신지 감동 깊게 묘사하셨습니다.
“저의 전임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1982년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저를 로마에 부르셨습니다. 저는 23년 동안 그분 바로 옆에서, 매일 그분을 뵈면서, 그분의 인격을 더욱 더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기도하는 모습은 언제나 저를 감동시켰고 든든히 세워주셨습니다. 그분은 복잡다단한 직무 가운데서도 하느님과의 만남 속으로 빨려들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고통 속의 증거를 보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하나 그분의 모든 것을 벗기셨지만, 그분은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원하셨던 것처럼, 바위로 남아 계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26년 5개월이란 긴 교황 재위 기간 동안 총 104회, 129개국을 방문하셔서 역사상 가장 여행을 많이 하신 세계 지도자로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지구를 서른 바퀴 도는 것에 해당하는 엄청난 거리입니다.
그분께서 그토록 기록적인 순례를 거듭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갈라진 이 세상에 보다 많은 다리를 놓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다리는 다름 아닌 평화의 다리, 반전(反戰)의 다리, 사랑의 다리, 화해의 다리였습니다.
교황님께서는 겹겹이 둘러쳐져 있던 나라와 나라, 인종과 인종, 부자와 빈자 사리의 수많은 벽을 허물기 위해 평생토록 동분서주하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세상의 평화와 정의의 실천, 가난한 이웃들의 권익 증진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당신의 위로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라면 ‘블랙리스트’에 오른 국가라 할지라도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여행 위험 지역이라며 측근들이 만류할 때조차도 사랑의 행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한 평생은 평화로운 세상 건설을 위한 중단 없는 긴 순교자의 삶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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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보잘것없는 종이요 죄인인 우리 각자를 위해 시중을 드시겠답니다!>
피정센터에 와서 형제들과 함께 주로 하게 되는 일이 시중드는 일입니다. 픽업해 드리는 일, 잠자리를 준비하는 일, 식탁을 준비하는 일, 서빙에다 뒷정리...해도 해도 끝이 없습니다.
최고참 어르신 신부님께서도 예외 없이 바비큐 담당으로서 기쁘게 장작을 패시고, 화부 역할에 최선을 다하십니다.
오랜 세월동안 어디가나 늘 대접받고 살다가 시중드는 일을 해보니, 시중드는 일에 종사하는 분들의 고달픔이나 애환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집니다. 저야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이 가족들의 생계를 위한 일이 될 때, 견뎌내야 할 몫이 얼마나 큰 것이겠는가, 하는 생각도 자주 합니다.
그런데 시중드는 일아 만만치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때로 이 일을 통해 느끼는 보람과 기쁨도 의외로 큽니다. 존중받고 환대받는 느낌을 받은 분들이 집으로 돌아가서, 그 감동을 주변 사람들에게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것도 작지만 사목의 한 부분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읽고 묵상하다가 개인적으로 화들짝 놀랐습니다. 언젠가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시중을 드신다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복음 12장 37절)
이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 일입니까? 창조주시면서 삼라만상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보잘것 없는 죄인인 우리 한명 한명을 위해 식탁에서 시중을 드시겠답니다. 우리를 위해 직접 식탁보를 펼치시고, 손수 수저를 놓으시고, 서빙을 하신답니다.
우리를 위해 시중을 드시는 하느님의 모습 앞에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라며, 어이없어 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 땅에 육화하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성목요일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지친 제자들을 위해 아침상을 차려놓고 그들을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가장 구체적인 사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 식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겸손한 섬김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식탁의 특징 역시 겸손한 섬김이어야 마땅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시중을 드시겠다는데, 아무에게나 시중을 드시지는 않습니다. 시중의 대상은 오직 깨어있는 종들입니다.
언젠가 하느님께서는 평생토록 허리끈을 단단히 매고 환하게 등불을 밝히며 살아온 우리를 보시고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앞에 풍성한 선물과 영적 잔칫상을 차려주심으로써, 우리가 수고한 만큼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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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9ykxiBTKw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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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있게 하시는 이유와 깨어있는 방법>
스페인 베니돔에 건설 중인 47층 높이 고층빌딩에 엘리베이터를 설계하지 않은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고 스페인 매체 에코노미아가 보도했습니다. 처음에는 20층 높이의 건물을 설계하고 건설을 시작했지만, 개발자가 욕심을 부려 47층 269개의 방으로 변경해 공사를 계속했습니다.
최초의 설계에서는 20층 건물에 적절한 크기의 엘리베이터가 포함되었습니다. 하지만 더 높은 건물로 바꾸며 엘리베이터를 추가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공간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갑자기 변경된 계획으로 인해 비용 문제도 발생했습니다.
결국 이 건물의 설계를 담당한 건축가는 사임했으며, 재정적인 문제로 부실 자산이 되어버린 이 빌딩에 대한 권한은 2012년 갈릭시아에서 스페인 배드뱅크로 넘어갔습니다.
설령 건축디자이너가 잘못 설계했다고 하더라도 투자한 사람들이나 승인하고 관리 감독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건축을 하는 사람들도 분명 이상하다고 여겼을 텐데 왜 수많은 사람이 설계를 보고 거의 다 짓고 나서야 엘리베이터가 없는 것을 알게 되었을까요? 돈과 명예라는 욕망에 사로잡히면 눈이 멉니다. 욕망이 우리 영적 감각을 잠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엔 주인이 돌아올 때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가 곧바로 문을 열어주는 하인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하인이 주인이 돌아오기까지 긴장을 풀지 않고 준비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주인이 매우 무섭거나, 혹은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인이 무섭다고 여겨질 때는 주인이 나가 있을 때 주인이 없을 때 하지 못하던 것들을 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주인을 사랑할 때는 일상이 더 개인의 욕망에 치우치지 않게 됩니다. 사람은 개인적인 욕망에 눈이 멀면 엘리베이터가 없이 고층 빌딩을 지어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결국 인간의 욕망이 이웃에 대한 사랑의 부족으로 나타납니다. 성모님은 술도 드시지 않으셨겠지만,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술이 떨어진 것을 가장 먼저 눈치채셨습니다. 욕망은 타인은 신경 쓰지 않게 만듭니다.
인간의 욕망은 왜 강해지는 것일까요? 두 원숭이를 대상으로 하는 실험이 있습니다. 두 원숭이를 서로 격리해 우리 안에 넣어놓습니다. 실험자 한 사람이 한 원숭이에게 자그마한 돌을 줍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손을 펴고 있으면 그 원숭이가 돌을 다시 사람에게 줍니다. 돌을 받은 사람은 돌 대신 오이를 원숭이에게 줍니다. 원숭이는 매우 만족한 듯이 오이를 먹습니다.
그런 다음 다른 원숭이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이 대신 포도 한 알을 줍니다. 원숭이는 포도를 맛있게 먹습니다. 물론 옆에 오이를 먹은 원숭이가 이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다시 사람은 처음 원숭이에게 조약돌을 주고 돌려받습니다. 아마도 이 원숭이는 자신에게도 포도를 주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원숭이에게 또 맹맹한 오이 조각을 줍니다. 이 원숭이는 약간 시큰둥합니다. 그러나 어쨌건 오이를 먹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옆의 원숭이에게 똑같이 조약돌을 주고받고는 포도를 줍니다. 또 처음 원숭이에게 똑같이 하고 오이를 주었더니 그 원숭이가 오이를 먹지 않고 실험자에게 집어던집니다. 실험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옆의 원숭이에게 똑같이 포도를 줍니다. 그런 다음 처음 원숭이에게 조약돌을 주었더니 이번엔 조약돌을 사람 얼굴로 던져 버립니다. 옆의 원숭이에게도 위협을 가합니다. 주인도 싫고 옆의 원숭이도 밉습니다. 인간도 이렇게 욕망이란 것이 하느님과 이웃들에 대한 원망이 되게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마치 하느님께서 없는 것처럼 욕망에 물들지 않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욕망은 사람은 모기로 만들어서 자기만 생각하고 하느님과 이웃을 미워하게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에서 살 자격을 잃습니다. 누가 모기와 함께 살고 싶겠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항상 함께 계심을 믿고 깨어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나에게 주어진 은총에 집중해야 합니다. 오이도 먹지 못하는 다른 원숭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꿈에서 좋아했던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한 신혼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려고 하는 데 정말 정성스럽게 아침밥을 해 주는 아내가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잔소리하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돈이 더 필요하다느니, 양말 좀 뒤집어 벗지 말라느니 갖은 잔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일하러 가는 것도 힘든데 아침부터 잔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평생 아내의 종으로 살아야 하는 것 같아, 괜히 결혼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을 떴을 때 사제관이었습니다. 제가 아침에 일어나서 그렇게 감사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사제가 된 것에 대해 이전에는 그만큼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더욱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하니까 조금 더 깨어있게 되었습니다.
혼자 있을 때 나의 불만을 욕망으로 채우려 하는 게 줄어들고 감사하는 분을 위해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깨어있기 위해서는 나에게 오이를 주는 주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것만이 세상의 욕망으로 이기적으로 되고 타인을 미워하는 삶에서 해방해줍니다. 사랑하면 그분이 올 것 같아 환청도 들릴 수 있습니다.
저도 샤워하다가 사랑하는 이의 전화인 줄 알고 물이 흐르는 채 전화기로 왔지만, 환청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면 기다리게 되고 기다리면 세상 욕망에서 벗어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내가 감사하려는 노력의 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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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행복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폭력과 전쟁을 일삼은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제자들은 두려움과 근심 때문에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근심과 두려움을 간직한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미사 중에 ‘평화의 인사’를 나눕니다. 예수님의 성체를 모시기 전에 우리의 몸과 마음은 평화의 감실이 되어야 합니다. 평화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죽음을 통해서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희생으로 유대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도(道)라고 항상 말하는 도(道)는 없다.” 현상과 본질이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선과 악이 하나라고 합니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부분을 보면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를 보면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지금은 남한과 북한이 둘로 나뉘었지만, 원래는 하나였습니다. 이념과 사상의 대립으로 분단의 벽을 높이 쌓고 있지만 언젠가는 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어야 하는 한민족입니다. 과학자들은 ‘미토콘트리아’를 분석하면서 인류는 한 사람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피부색은 달라도, 사는 곳은 달라도, 종교가 달라도, 문화가 달라도 결국 우리는 하나에서 시작되었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양자역학은 노자의 도덕경을 과학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빛은 파동과 입자의 성격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빛에는 파동과 입자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미시 세계에서는 관찰자의 의지에 따라서 물질이 존재하기도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물질이 있어서 관찰자가 보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의지에 따라서 물질이 생기는 겁니다. 우주는 에너지와 기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차별과 구별이 아니라 성실함과 겸손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신비로 고백하는 ‘삼위일체 교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위격으로는 구별되지만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는 항상 같은 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다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꼴찌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 우는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우리가 하나였음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도라고 항상 말하는 도는 없다.’라는 말을 자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저희가 언제나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정성껏 섬기게 하소서.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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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35-38: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35절) 이는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다. 주님의 뜻에 대해 깨어 있는 것이다. 절제로 허리띠를 매고 선행으로 등불을 밝히는 것이 언제 오실지 알지 못하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지 일러 주신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36절) 주님께서 오시면 사랑의 명령에 순종한 사람들에게 합당한 상을 주실 것이다. 항상 깨어 있고, 우리의 등불을 밝히고 허리에 띠를 띠고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마태 24,42)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38절) 그분께서 오셔서 그렇게 사는 우리를 보신다면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37절) 그분은 우리가 수고한 만큼 풍성하게 갚아주실 것이다.
오늘 말씀은 죽음에 대한 대비를 잘하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으므로 주님께서 우리의 곁을 그냥 지나치시지 않도록 우리가 깨어 있어 그분을 알아보고 맞이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나의 이웃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사랑받으시기를 원하신다. 이웃을 통해서 그분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하여 깨어 있지 못한 것이다. 이웃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무엇인가? 주님께서 예기치 않을 때 오실 줄 알고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며 항상 깨어 있는 것이다. 참으로 행복하다는 것은 깨어 있는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언제나 오시는 그분을 만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을 만나 뵙고 사랑해드릴 수 있는 삶이 바로 종말론적 삶이며, 이 삶을 통하여 우리는 언제나 주님 앞에 올바로 서 있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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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피와 십자가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희생양은 필요한가?』(부제: 성경에 나타난 폭력과 구원)라는 책 제목이 떠오릅니다. 읽은 지 오래되어 자세한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의 줄거리를 말한다면 그 출발점은 사람들은 자신들 안에 있는 폭력성을 분출시킬 대상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 흔히는 어떤 약함이 있고 자신을 함부로 하여도 저항할 수 없는 이들이 희생양이 됩니다. 구약에서는 제사 때에 바치는 양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사람들은 타자를, 나의 밖에 있는 무엇을 그 대상으로 삼아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몸소 희생양이 되시고, 그래서 끊임없이 희생양을 찾는 이 사슬을 끊으십니다. 밖에서 희생양을 찾으시지 않고 스스로 희생양이 되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몸으로 받으시어 멈추게 하십니다. 이 정도가 제가 기억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고, 잔인하지 않은 방식으로 평화가 이루어졌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부질없는 일입니다. 구약에서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보내셨을 때 하느님께서는 이미 다른 방법들을 다 써 보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예언자들도 죽이고 그들의 말을 없애 버리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느님께서는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에페 2,16)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화가 되셨으니, 이제는 더 이상 우리 안에서 희생양을 찾고 미움을 쏟아 내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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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깨어 있어라>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5-38)
“시중을 들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7)
원래 이 말씀은, 당신을 본받아서 서로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인데, “예수님은 지상에서도 사람들을 섬기시고, 하느님 나라에서도 사람들을 섬기시는 분”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사람들을 섬기시는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사람들을 섬기시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상입니다. (예수님의 시중을 받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받게 될 최고의 상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시중을 들어 주시는 것과 같은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12ㄱ.13) 그때 제자들은 아마도 하느님 나라의 행복과 평화를 체험했을 것입니다.
‘깨어 있는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심판을 의식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심판 때에 받게 될 ‘벌’이 아니라, 그날 받게 될 ‘상’과 ‘복’을 더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심판 때에 벌을 안 받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 하느님께서 주실 ‘상’과 ‘복’을 받으려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같은 것 같지만 완전히 다릅니다.) 만일에 벌을 안 받는 것만을 바라면서(지옥에 가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죄를 안 짓기만 하면 된다는 소극적인 신앙생활이 됩니다. 그런 신앙생활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억지로 하는 강제노동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생명과 평화와 행복을 얻어 누리는 것을 희망하는 신앙생활은 기쁨이 가득한 생활이 됩니다. 그 신앙생활은 의무감으로 계명을 지키면서 투덜거리는 생활이 아닌,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면서 기뻐하는 생활이고, 누가 시켜서 하는 생활이 아니라 자기가 원해서(좋아서) 하는 생활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은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미리 체험하는 생활입니다. (그 행복은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어서 그곳에서 완성됩니다.) 따라서 심판을 의식하면서 ‘깨어 있는 생활’을 하는 것도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과 기쁨으로 하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라는 말씀은, ‘나중’이 아니라 ‘지금’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말은, 일을 할 때의 복장을 가리키는 말인데, 예수님께서는 허리에 띠를 맬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띠를 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주인을 맞이하고 주인의 시중을 드는 일은, 주인이 도착한 다음이 아니라 ‘지금’부터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등불을 켤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 때’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를, “‘어둠 속에’ 있지 말고, ‘빛 속에’ 있어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즉 죄 속에서 살던 삶을 청산하고, 회개하고, 신앙인답게 사는 것은 ‘그 때’가 닥친 다음에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주인이 ‘혼인 잔치’에서 돌아온다는 말은 특별한 의미가 없고,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일 뿐입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주인이 일찍 올 수도 있고, 늦게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늦게 올 것이라고 마음대로 예상하고서 방심하면 안 되고, 지금 곧 온다고 생각하면서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말은, 각 개인의 수명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행복하여라.”라는 말씀은 “복을(상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뜻인데, 지금은 불행한 상태에 있지만 나중에는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희망과 기쁨과 사랑으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의 상태도 복 받은 상태, 또는 행복한 상태입니다. (만일에 벌을 주려고 오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종이라면, 그 종은 두려움 때문에 기다림 자체를 고통스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상을 주려고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생활이기 때문에 기다림 자체가 행복이 됩니다. 신앙생활은 행복하고 기쁜 생활입니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라는 말씀은, 주인과 종의 위치가 바뀐다는 뜻이 아니라, 주인이 종에게 ‘큰 행복’을 주려고 애쓴다는 뜻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본 아버지는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고”, 가장 좋은 옷을 입혀 주었고, 손에 반지를 끼워 주었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었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였습니다.(루카 15,20-24) 아마도 아버지는 아들을 옆자리에 앉히고 이것저것 음식을 집어 주면서 마치 시중을 드는 것처럼 행동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그렇게 대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고, 사랑하는 그 아들이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니,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씁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1테살 5,8-10)
(예수님은 우리가 이쪽 세상에서나 저쪽 세상에서나 행복을 누리면서 살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여기서나 거기서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시중을 들어 주시는 것은 당신이 원하셔서 하시는 일이고, 당신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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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이 평화는 민족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일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사람들이 적개심을 버리고 화해하는 방법을 보여 주십니다.
성령 안에서 모든 사람이 한 몸을 이루는 신비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사람들의 몸은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어지고 모든 민족들이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고 이웃을 섬기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주인을 기다리는 종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갈구해야 합니다. 그 평화는 진리에 눈을 뜨고 있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하느님의 현존 속에 들어가 그분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사람에게 영원한 평화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악과 불의에 대항하려는 사람은 온유한 마음을 가짐으로써 그리스도의 평화 안에 머물며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온 인생은 하느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하늘 나라의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날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상급을 주님께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의 기쁨과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의 영혼을 넘치도록 채울 것입니다. 그날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하느님의 종, 하느님의 자녀들은 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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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 복음은 ‘주인을 사랑하는 종’의 이야기입니다. ‘종’이 ‘주인’을 존경하고 사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종업원이나 사원이 고용주를 마음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열에 하나, 고용주가 자신을 가족처럼 대하고 자식처럼 아껴 준다면 고용된 이들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종은 주인을 무척이나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자신을 자식처럼 아껴 주기 때문입니다. 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다음 구절에서 이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어떤 주인이 허리에 띠를 두르고 종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시중을 들겠습니까? 오히려 종이 주인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혼인 잔치에 다녀와 피곤할 터인데 종을 위하여 시중을 듭니다.
그렇습니다. 종은 자신을 자식처럼 아껴 주는 주인을 사랑합니다. 종은 늘 주인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주인을 깨어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복음을 들으며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깨어 있을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우리를 귀하게 대하시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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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12,35)
젊은 날 사뮈엘 베게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1952년 쓴 작품으로 1969년 노벨문학상 작품)를 산울림 소극장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아직도 그 장면들이 생생하게 기억됩니다. 그런데 젊은 날 이 연극을 보면서,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는 도대체 누구이며, 도대체 고도가 누구이기에 그토록 가엾은 두 남자인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는 허무와 고통, 부조리 속에서 끊임없이 고도를 기다렸을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이 연극을 보신 분이나 책을 읽으신 분이 있다면 여러분에게 있어서 고도는 누구이며, 왜 기다림 속에서 고도를 기다려야 하는 걸까요? 재미있는 사실은 이 연극을 미국에서 초연할 당시 연출자였던 ‘알랭 슈냐이더’는 ‘베게트’에게 질문했답니다. “고도는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합니까?”라고, 그러자 베게트가 대답하기를 “내가 그것을 알았다면 작품 속에 썼을 것입니다.”라고 말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인생은 길며 그것도 아주 깁니다. 이 긴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존재이고 삶입니다. 이처럼 인생은 기다림이며, 이로써 인간은 기다림의 존재입니다. 그런데 삶의 혼돈과 부조리, 무질서 속에서 누구를 기다려야 하는지 그리고 왜 기다려야 하는지를 모르는 채 희망 없이 기다려야 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정말 무료하고 불쾌하고 허무하게 느껴지며 너무나 힘들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허리에 따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오실 주인은 “사람의 아들”(21,36 참조)이시며, 기다리는 사람은 인간 존재 곧 그리스도인인 우리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에게 오실 분은 예수님이시며, 기다리는 존재는 바로 우리 자신들이기에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21,36 참조)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단지 막연히 알 수 없는 존재를 기다리는 실존이 아닙니다. 다만 그 시간과 그날을 알지 못할 뿐, 우리는 누구를 기다려야 하고 왜 기다려야 하며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 가를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길고 긴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무료하고 불쾌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희망으로 깨어 준비한 채 기다려야 합니다.
시장 보러 나간 엄마를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에도 정말 엄마를 곧 다시 만난다는 기쁨으로 넘쳐났었던 기억이 저에게는 생생합니다. 이렇듯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은 만남을 앞당겨 상상하면서 기쁨과 환희, 행복과 사랑으로 넘쳐나는 기다림의 마음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준비와 기다림은 손등과 손바닥과의 관계라고 봅니다. 준비는 미리 마련하여 갖추어 두는 것이고, 기다림은 늦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다림의 목적에 부합하고 필요한 것을 미리 마련하여 잘 갖추고 있으면 기다리는 분이 언제 오시든 아무런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으리라 봅니다. 준비를 소홀히 하거나 게을리했다, 낭패를 본 일이 있었잖아요. 이와 마찬가지로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기다려야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늘 복음에서 언급한 것처럼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12,35) 그래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마치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에 빗대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다른 복음서에서도 발견되기도 합니다.(마태 24,43-51; 마르 13,34-36)
비록 잠시뿐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여러 이유로 만나지 못했다가 다시 만났을 때의 기쁨과 행복은 충분히 기다림에 대한 충분한 보상과 보답이듯이, 하물며 주인을 깨어 준비하고 기다렸다가 주님(=주인)께서 이런 우리의 충실함과 그 노고를 잘 알아주신다면 이보다 더 큰 기쁨과 영광이 없으리라 봅니다. 복음에 의하면, 이런 우리의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우리의 성실함을 주님께서는 인정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 곧 “주님께서 띠를 매고 저희를 식탁에 앉게 한 다음에 시중을 들 것이다.”(12,37)라고 말씀하시니 이 얼마나 큰 영광이며 축복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분명 이렇게 길고 긴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주님의 오심을 늘 깨어 준비하며 살아 온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천상에서 오늘 복음 말씀처럼 해 주실 것임을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운데 이를 알면서도 이렇게 주인을 기다리는 종처럼 늘 깨어 준비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될까요? 어쩌면 저 자신부터가 때론 삶이 힘들고 지칠 때 온전히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면 살지 않았기에 그럴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복음을 다시금 새롭게 들으면서, 길고 긴 인생을 무료하고 불쾌하게, 허무하게 보내지 않고 의미와 보람으로 채우기 위해서 영적으로 이 기다림의 신비를 살아가는 게 우리 인생임을 다시 자각하고, ‘늘 깨어 살아가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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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저는 조카가 많습니다. 갓난아이 때부터 봐왔던 이 조카들이 이제는 하나둘씩 결혼을 합니다. 그러면서 저도 ‘나이가 들어가는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 조카들이 아이를 낳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자라면서 제게 “할아버지 신부님!”이라는 호칭을 씁니다. 그 순간 ‘나도 늙었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거울을 봅니다. 아직 검은 머리가 훨씬 많지만, 흰 머리카락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습니다. 또 얼굴의 주름도 많아지고, 깊어져 있음을 발견합니다. 외모만 봐도 분명 늙었습니다. 하지만 이 나이 듦의 결정적 표지가 있다고 하더군요. 삶에서 설렘이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소풍이나 수학여행 전날의 설렘이 생각납니다. 신학교 입학할 때의 설렘, 사제가 되었을 때의 설렘, 인사이동 되어 새 부임지에 갔을 때의 설렘. 그런데 이제 그 설렘을 잘 느끼지 못하는 나이가 된 것입니다. 설렘 대신 커진 것이 있다면 걱정이 아닐까요?
주님의 기쁜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설레십니까? 사실 25년째 묵상 글을 쓰면서 매번 새로움을 느낍니다. 똑같은 복음 말씀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지금 상황에 따라 새로워집니다. 세상 것에 대한 설렘은 사라지고 있는데, 주님 말씀에 대해서는 여전히 설렙니다. 하긴 주님 나이에 비한다면, 지금 나는 ‘점’에 불과하니 설레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까요?
설렘을 느끼려면 더 알아야 하고, 더 자세히 봐야 했습니다.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알려고 하지 않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서 설렘을 사라지고 걱정만 늘어납니다.
젊게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설렘을 갖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더 알려고 노력하고, 더 자세히 보면서 보다 젊게 사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에 대한 말씀을 해주십니다. 어떤 종이 충실한 종이라면서 주인에게 칭찬받겠습니까?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인에게 인정받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고 하시지요.
깨어 있는 이 종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시려면 아직도 멀었다면서 다른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는 엄청난 반전이 있습니다. 주인이 띠를 매고 그 종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는 것은 종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설렘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종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친구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단, 당신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당신을 자세히 보기 위해 시선을 마주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진정으로 행복한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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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행복하여라, 깨어있는 종들!>
베드로의 편지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5,8-9)
‘깨어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감지하는 영적인 감각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안 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의 몫이 있는데 그 몫에 충실하지 않으면 생각지도 않은 어둠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이만하면 됐다’는 안일함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이 다하여 하느님 안에 편히 쉬기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 자체가 ‘깨어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깨어 있는 사람은 미래를 준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인을 충실히 기다리는 종에게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종이 주인처럼 대접받으며 주인이 그의 종처럼 처신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축복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영원히 살 것처럼, 그러면서도 내일 당장 떠날 것처럼!’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음이 행복입니다. 한결같은 모습이 중요합니다.
요즘은 가정방문을 하기 어려운 시대이지만, 본당신부를 할 때 가끔 예고 없는 방문을 했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44)는 예수님의 말씀을 핑계로 말입니다. 그러면 행복해하는 분도 있지만 당황하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집 정리를 잘해 놓으신 분은 더없이 기뻐했고, 그렇지 못한 분은 신부에게 자기 속을 다 보인 것 같아서 무안해했습니다. 그러나 소위 ‘열심하다’는 분의 가정에서 그 모습을 보면 제가 오히려 미안하고 죄송스러웠습니다.
물론, 집 정리가 잘 되었다고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것도, 마음이 맑은 것도 아닙니다만 열심히 활동하는 만큼 가족 구성원 누구에게도 짐을 지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늘 준비된 모습이 가정 안에 화목함과 평화를 이루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에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사실, 집 정리를 하지 못해 부끄러운 건 그래도 다행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마음이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잠시라도 악의 세력에게 틈을 주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깨어있어 행복한 오늘입니다. 항상 깨어서 안밖으로 정리 정돈을 하며 주인을 잘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종은 그 신분상 겸손할 수밖에 없고 순종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에게는 참으로 겸손하고 순종적이면서 바로 이웃에겐 그토록 교만하고 억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우리는 위선자입니다." 깨어있는 종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깨어, 기다리던 주인을 반갑게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니 서둘러 그분을 뵈러 가면 어떨지요? 오늘은 청주교구 사제 전체 회의가 있습니다. 모든 사제가 주님 앞에 깨어있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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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늘 설렘으로>
루카 12,35-38 (깨어 있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늘 설렘으로>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루카 12,35)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8)
그때
몰라도
그곳
몰라도
나를
섬기러
임께서
오신다니
그때
어디든
그곳
어디든
임을
모시러
나는
설렌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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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가을이 저물어 갑니다. 오늘 <복음>은 종말의 준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루카 12,35)
여기에서, 깨어있음의 표시는 두 가지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있는 것’과 ‘등불을 켜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탈출기>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파스카 음식에 대해 하신 말씀, 곧 “그것을 먹을 때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탈출 12,11)는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있어라”는 것은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이 허리에 띠를 매듯이 ‘일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고 경계하고 있는 것’(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 혹은 ‘사나운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 허리에 띠를 매고 있는 것’(아우구스티누스)을 말해줍니다. 곧 ‘임을 맞아들여 시중 들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라’는 말씀입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루카 12,39) 모르듯, “생각하지도 않을 때 사람의 아들이 올 것”(루카 12,40)이기 때문입니다.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는 것은 ‘마음과 지성에 등불을 밝히고 기운차게 깨어 있으라는 것’(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 혹은 ‘선의 행실로 등불을 밝힘’(아우구스티누스)을 의미합니다. 곧 ‘임이 잘 찾아올 수 있도록 불을 밝혀두고, 빛 속에 있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빛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 ‘빛 속에 있는 것’이 “깨어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시편>에서 “말씀은 발의 등불”(시 119,105)이라 말하고 있듯, ‘말씀의 등불’을 밝히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를 통해 “깨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
여기서 ‘깨어있음’은 단지 잠들어 있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기다리고” 있음을 말합니다. 잠들지 않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인이 돌아오면 문을 “곧바로 열어 주려고” 뜨거운 열망으로 기다리는 것, 곧 ‘사랑의 열망으로 임을 그리워하고 희망하는 것’이 ‘깨어있음’입니다.
정리해 보면, ‘깨어있음’은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주인이 오기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다림’은 이미 ‘축복’입니다. 그 안에 이미 ‘임’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기다리는 이 안에서 ‘임’이 이미 빛을 밝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깨어 기다리는 이는 이미 빛 속에 있는 이요, 이미 등불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깨어있을 수 있음”은 이미 품고 있는 ‘임’으로 말미암아 것, 곧 깨어 계시는 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편> 말씀처럼 “당신 빛으로 당신을 보는”(시 36,10 참조)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주인은 참으로 묘하신 분이십니다. 주인이 돌아오면 종이 주인의 시중을 드는 일이 당연하거늘, 오히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인님은 그러신 분이십니다.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복된 사람으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이 미사를 통해, 몸소 당신 몸과 피로 성찬을 차려주시고 우리의 양식이 되어 섬기시니, 그저 주님 사랑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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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
주님!
깨어 희망하게 하소서!
희망하여 그리워하게 하소서.
그리움 속, 제가 이미 행복한 것은 이미 임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임이 나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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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언제나 핑계가 준비되어 있지만>
+찬미예수님
어린 시절, 아니 어쩌면 성인이 되고 나서도 제가 어머니께 가장 많이 들었던 잔소리는, “너는 왜 미리미리 준비하지 않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많은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공통적으로 하는 잔소리가 바로 이것일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어디를 외출할 때 마다, 혹은 무언가를 시간에 맞춰 할 때마다 어머니에게 이러한 잔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는 확실히 부지런한 성격이 아니고 심지어 마감이 코앞에 닥쳐야 능률이 오른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요즘 하루하루도 그렇습니다. 이번 달은 유난히 외부 강의가 많은 날인데 절대 미리 준비를 끝내놓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저의 성격이 우유부단한 것도 아닙니다. 은근히 완벽주의적자인 면모가 있어서 무슨 일을 하던지 대충 끝내는 편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루 전날 새벽이 돼서야 가까스로 강의 준비를 하고 몇 시간 자지 못하는 날이 허다합니다. 결국 이러한 제 생활 사이클의 손해는 저에게 온전히 돌아옵니다. 다음 날 말할 수 없이 피곤한 것도 제 손해고 조금 더 준비하지 못해 아쉬운 것도 그렇습니다.
사실 미리미리 준비하기만 하면 전부 해결되는 일인데 매번 같은 일이 반복되니 참으로 난감한 일입니다. 물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미루고 미루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전날 피곤하게 일을 했으니 좀 더 쉬고 싶고, 빡빡하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합니다. 지금 쉬면 능률이 더 오를 것 같고 아직 준비를 시작하기에는 시간이 충분한 것 같기도 합니다.
소설책을 보거나 인터넷을 하는 사소한 휴식이 강의를 하거나 강론을 하는데 좋은 소재가 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이런 저런 핑계를 대다 결국 또 후회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 모습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리석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목적으로 걸어가고 있는 제 삶 역시 혹시라도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긴장 됩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나도 모르게 선행을 미루고 있지는 않은지, 누군가를 마음껏 미워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러다 나중에 후회하게 되지는 않을지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등불을 켜놓고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의 비유를 통해 이러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끔 하십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하느님을, 종들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의미합니다. 이 중에서도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깨어 있는 종은 하느님을 만날 준비가 미리 되어 있는 신앙인을 뜻합니다. 즉, 하느님께 시선을 두고 선을 실천하며 악의 기회를 최대한 줄이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깨어있지 않고 잠들어 버린 종은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신앙인입니다. 선을 실천하기 보다는 의식의 흐름에 맞추어, 혹은 당장의 감정에 따라 이런저런 자기 정당화와 함께 악을 저지르는 사람입니다.
주인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종들은 행복한 종들입니다. 그들을 주인이 보게 되면 그만큼 더욱 큰 신뢰와 인정을 받을 것이며 그에 따르는 상급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시간이 언제일지 모른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준비를 조금 천천히 해도 될 것 같고 조금 더 쉬면 능률이 더 오를 것 같고. 아직 준비를 시작하기에는 시간이 충분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깨어있기만 하면 될 간단한 일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준비하지 않음으로 인해 벌을 받게 될 이 어리석은 종의 죄목은, “악행”도 “불신”도 아닙니다. 이 종의 죄목은 다름 아닌 “태만”입니다. 실제로 우리 역시 바쁜 일상생활 안에서,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태만하곤 합니다. 기쁠 때보다는 필요에 따라서만 하느님께 기도하게 되고, 사랑과 희생이 필요한 순간에는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느라 하느님의 가르침을 떠올리는 일을 잊어버립니다.
이에 여러 가지 핑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먹고 살기 바빠서, 자녀들을 돌보느라, 저 사람이 잘못해서 등등 우리가 게으를 수 있는 이유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핑계는 결코 합리화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며 그 때가 언제일지는 몰라도 충분히 주어져 있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우리도 각자 자신에게 질문을 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하느님 앞에서 나 자신은 얼마나 깨어있습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하느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저 막연한 생각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용서할 기회를 뒤로 미루고 있지는 않은지요. 언젠가 해결되겠지 생각하며 사랑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일어나 마음을 다시 잡고 분주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비록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깨어있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 사실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고 그에 합당한 은혜를 베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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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깨어 있음의 예찬禮讚, 깨어 있음의 축복祝福>
자식 자랑은 팔불출에 속한다는데 저는 제자들 자랑을 하고 싶습니다. 판단이나 비난보다 자랑이 백배는 나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감사의 마음을 깨어 길이 기억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올해도 맛있는 햅쌀 드시구 건강하게 오래오래 만수무강하세요. 제자들 10명이 쌀 140kg, 10kg 14부대 보냅니다.”
47년전 13세 초등학교 6학년때 제 나이 29살 초등학교 교사시절 제자들이, 지금은 60세 환갑을 맞이한 제자들이,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쌀 선물을 보내기 10년째이니 이 또한 사랑의 기적입니다. 그래서 깨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따뜻한 미담을 나누면서 시작하는 강론입니다. 오늘 10명의 제자들 가정을 위해 생미사 봉헌합니다.
지금도 수년전에 집무실 게시판에 붙여 놓은 “늘 깨어 있어라!”는 글귀입니다. 아마 여러분에게도 붓펜으로 이 글귀를 써드렸을 것입니다. 끊임없는 기도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깨어 있는 삶입니다. 요즘 널리 보급되고 있는 향심기도를 비롯한 온갖 비움기도나 명상기도가 목표하는 바도 깨어 있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 역시 “깨어 있어라”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제자들에게 내리는 주님의 권고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이 보다 더 좋은 환대도 없습니다. 발목까지 늘어지는 겉옷 자락을 올려 띠로 묶은 것은, 즉시 일할 수 있게 준비를 갖춘 모습이자 이스라엘인들이 파스카 축제를 지닐 때 취하는 여행자의 자세요 메시아를 기다리는 몸가짐입니다. 한마디로 늘 준비되어 기다리는 깨어 있는 삶의 자세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도입니다.
깨어 있음은 관상입니다.
깨어 있음은 침묵입니다.
깨어 있음은 행복입니다.
깨어 있음은 자유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쁨입니다.
깨어 있음은 일치입니다.
깨어 있음은 지혜입니다.
깨어 있음은 진리입니다.
깨어 있음은 화해입니다.
깨어 있음은 치유입니다.
깨어 있음은 영원입니다.
깨어 있음은 만남입니다.
깨어 있음은 환대입니다.
깨어 있음은 그리움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다림입니다.
깨어 있음은 깨달음입니다
깨어 있음은 은총입니다.
깨어 있음은 빛입니다.
깨어 있음은 체험입니다.
깨어 있음은 살아 있음입니다.
깨어 있음은 아름다움입니다.
깨어 있음은 새로움입니다.
깨어 있음은 순수입니다.
깨어 있음은 사랑입니다.
깨어 있음은 경청입니다.
깨어 있음은 겸손입니다
깨어 있음은 순종입니다.
깨어 있음은 온유입니다.
깨어 있음은 희망입니다.
깨어 있음은 주님의 현존입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깨어 있음의 은혜들입니다. 말그대로 깨어 있음의 예찬입니다. 깨어 있음의 축복입니다. 깨어 있음의 관상입니다. 깨어 있음의 중심에 바로 주님이 계십니다. 깨어 있음의 영성은 얼마나 풍요로운지요! 모든 문제는 깨어 있지 못함에서 기인함을 봅니다. 깨어 있지 못해 외로움이요 쓸쓸함입니다. 깨어 있지 못해 쉽게 유혹에 떨어집니다. 참으로 깨어 있음은 영성생활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깨어 있음은 인생 허무나 무지의 대한 답임도 깨닫습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니라 참으로 깨어 있는 이들이 참으로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아있는 참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깨어 있음의 성소에 불림 받고 있습니다. 깨어 있지 못할 때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괴물도 악마도 야수도 폐인도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사람아닌 어느 피조물이 깨어 있을 수 있겠는지요! '깨어 나다'. '깨어 있다', '깨끗하다', '깨닫다' 모두가 “깨”자 돌림입니다. 깨어 나 깨어 있을 때 깨끗한 마음에 뒤따르는 깨달음의 진리들입니다.
막연한 깨어 있음은 얼마 못갑니다. 한결같이, 끊임없이 사랑하는 주님을 일편단심 그리워 기다릴 때 비로소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래서 깨어 있음의 영적훈련을 통한 깨어 있음을 습관화가 절실합니다. 제가 평생 지도해온 명상기도도 이에 근거합니다. 일정한 성구를 호흡에 맞춰 되뇌이며 마음을 모으는 기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한결같은 끊임없는 깨어 있음의 수행이자 훈련이요 깨어 있음의 습관화입니다. 깨어 준비하여 기다리며 기도할 수 있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요! 다음 ‘주인’은 ‘주님’으로 바꿔 읽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이런 주님을 기다리는 깨어 있음의 행복을 능가할 수 있는 그런 깨끗한 행복은 없습니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 주님이 아니라 우리를 섬기러 오신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우리를 섬기러 오시는 겸손한 사랑의 주님을 모시는 행복을 우리는 날마다 깨어 있다 미사전례를 통해 체험하지 않습니까!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의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을 통해 확연히 감지되는 바 바오로 사도의 깨어 있음입니다.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늘 깨어 있는 삶을 살았던 각자(覺者) 바오로 사도의 깊은 영적 체험이 그대로 녹아 있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통하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깨어 있는 바오로에게 계시된 풍요한 진리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깨어 있는, 깨달은 자들의 교회론은 얼마나 깊고 풍요롭고 아름다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그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살아 있는, 깨어 있는 자들의 역동적 유기체의 교회공동체요, 끊임없이 내외적으로 성장하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중인 교회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신자들의 깨어 있는 삶을 위한 영성훈련을 통한 습관화는 얼마나 중요한지 요! 우리 수도자들이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거행하는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가 참 좋은 깨어 있는 영성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깨어 있음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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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허물어야 할 적개심>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현 정권이 잘못하는 것이 참으로 많지만 그중에서도 외교를 잘못하고 북한과의 관계에서 잘못합니다.
평화를 지향하지 않고 대결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북한과의 관계뿐 아닙니다.
미국과 일본 편에 서려고 나머지는 적으로 만들고, 주님께서 그토록 허무시려는 적개심을 조장합니다.
그리하여 우크라이나-러시아, 이스라엘-팔레스티나뿐 아니라 우리 한반도의 평화도 위협을 받는 형국이 되었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가 되지 못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화가 되려면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평화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모두가 그렇지는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마저도 그렇지 않을 때가 많지 않습니까?
우리 관계와 우리 공동체는 그리스도 때문에 평화롭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 안에서 적개심을 허물었습니까?
우리 안에서 갈등이 있을 때 우리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그리스도의 말씀과 가르침을 생각하며 갈등을 해소하려 합니까? 내 안에 그리고 우리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안 계시고 적개심만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적개심과 주님과의 관계, 적개심과 행복과의 관계를 오늘 생각해봅니다.
우리 안에서 적개심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님으로 안 계시고, 그래서 우리가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사람에게는 적개심이란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적개심이 있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고, 불행한 사람은 자기를 불행에 빠트린 원수뿐 아니라 불특정 다수 아니 모든 사람에게 적개심이 있습니다.
근자에 아무에게나 칼부림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런 예입니다. 적개심은 복수심이나 앙심과 마찬가지로 주머니 속의 비수 같은 것입니다.
적개심이나 복수심이나 앙심은 그것을 가지고 있을 때
주머니 속의 비수처럼 남을 찌르기 전에 나를 계속 찌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적개심이나 분노 같은 것이 있을 때 그것을 발산할 것이 아니라 즉시 내 안에 있는 불행을 들여다보고, 신앙인인 우리는 내 안에 주님께서 안 계셔 적개심이 있음을 먼저 들여다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인이시며 주님이시라면
내 안의 적개심을 허무시는 우리의 평화십니다.
그 주님을 우리 마음에 모셔 들이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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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37ㄱ)
'깨어 있는 종들!'
오늘 복음(루카 12,35-38)은 '깨어있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5-37ㄱ.38)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면서도 확실합니다. 오늘 복음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깨어 준비하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
"신앙을 청합니다."
"신앙이 그대에게 무엇을 줍니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영원한 생명은 참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 대화는 세례 예식 때 주례 사제와 예비 신자가 주고받는 대화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향해 나아가고 있는 곳은 '죽음 저 너머에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다시오심)'입니다.
'깨어있음의 모습'은 바로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늘 잊지 않고 기억하면서, 그분의 뒤를 잘 따라가는 것'입니다.
정말로 나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영원한 생명을 기다리고 있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그분의 뒤를 잘 따라가고 있는가?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는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불편함과 고통 앞에서 드러납니다. 정말로 믿고 희망하고 있고, 나의 사랑 실천이 '목적하는 두 곳을 향해' 있는, 깨어있는 모습인지가 나를 찾아오는 불편함과 고통 앞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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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 들!"(루카 12, 37)
내려오는
단풍은
내려오시는
주님을
닮았습니다.
깨어있음이
비추어 내는
맑은
행복입니다.
깨어있음은
더 좋은
사랑을 위한
비워내는
행복입니다.
깨어있음의
시선으로
십자가와
이웃을
바라봅니다.
진실한 기다림은
충실한
깨어있음으로
드러납니다.
기다림이
행복이고
깨어있음이
기쁨입니다.
기다림의 무게가
진정
사랑의 무게입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기다림과
깨어있음의
행복입니다.
깨어있음이
물들여놓는
지극한
찬미입니다.
그래서
깨어있음이
주님을 향하는
기도의
길이 됩니다.
깨어있음의
평화입니다.
깨어있음의
회개가
용기와 희망이
됩니다.
주님을 향한
깨어있음은
우리의
행복이고
우리의 진실한
실천입니다.
그래서
행복의 출발점은
깨어있음의
마음이고
실천입니다.
깨어있는
맑은 행복의
날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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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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