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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멍이 들도록 필사해보고 싶은 텍스트 30-송수권
석어(石魚) / 윤의섭
계곡을 돌아나온 바람 끝에 폭포 소리가 묻어 있다
예민해진 귀는 푸른 물빛을 느낀다
느지막한 휴일 오후에 걸려온 전화의 목소리는 울고 있었다
언제부터 외로웠냐고 묻자 이번 생부턴 아니었을 거라며
수화기를 일세기에 걸쳐 내려놓는다
물소리는 점점 커졌다
용케도 폭포가 메마를 철을 피해 찾아온 것이다
지난 가뭄에 다 말라붙었어도 물길은 지워지지 않아
사막의 와디 같은 산객들이 여기저기서 합류하고 있었다
그들은 계류를 따라 세워진 돌무더기에
돌멩이를 쌓으며 소원을 빈다
자신들의 운명을 타고난 별을 옮기는 중이다
사자자리 황소자리 처녀자리 물고기자리 물병자리가 지상에 그려지고
돌탑이 높아질수록 소원은 하도 간절하여
별을 얹는 동안 한 생애가 흘러간다
그후로 전화는 다시 오지 않았다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는 알리는 것과 알리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십년을 헤어져 있다가도 한 번 보고 나면 다시 십년을 견딜 수 있는 세속의 정리를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아침마다 얼굴을 봐도 외롭기는 마찬가지니까 그럴 때가 있다 그런 날이면 나는 달을 주워 온다 달을 손바닥에 얹어 놓고 조금씩 사그라져 감쪽같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바라본다 가끔은 엄한 자리에 달을 놓아주기도 한다 미끄러져 달아나는 눈썹 달의 지느러미가 흐릿하다 달을 들고 나는 울고 있었던 것이다
폭포 아래 용소에 석어가 산다는 소문은 내게 간신히 전해졌다
실은 물속에 시퍼런 돌덩이가 잠겨있을 뿐이지만
흐르는 물살을 거슬러 석어는 상류로 상류로 헤엄치고 있었다
수세기를 거슬러 기원전으로
다시 제 나이만큼의 세월 건너 저 자리로 돌아와 외로운 회항을 거듭하는
석어
온퉁 푸른 눈물에 잠겨 있는
석어
육탁肉鐸/ 배한봉
새벽 어판장 어선에서 막 쏟아낸 고기들이 파닥파닥 바
닥을 치고 있다
육탁肉鐸 같다
더 이상 칠 것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
생애에서 재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
나도 한 때 바닥을 친 뒤 바닥보다 더 깊고 어두운 바닥을
만난 적이 있다
도다리 광어 우럭들도 바다가 다 제 세상이었던 때 있었
을 것이다
내가 무덤 속 같은 검은 비닐봉지의 입을 열자
고기의 눈 속으로 어판장 알전구 빛이 심해처럼 캄캄하
게 스며들었다
아직도 바다 냄새 싱싱한,
공포 앞에서도, 아니 죽어서도 닫을 수 없는 작고 둥근 창문
늘 열려 있어서 눈물 고일 시간도 없었으리라
고이지 못한 그 시간들이 염분을 풀어 바닷물을 저토록
짜게 만들었을 것이다
지하도에서 역 대합실에서 칠 바닥도 없이 하얗게 소금
에 절이는 악몽을 꾸다 잠깬
그의 작고 둥근 창문도 소금보다 눈부신 그 불빛 그리워
할 것이다
집에 도착하면 캄캄한 방문을 열고
나보다 손에 들린 검은 비닐봉지부터 마중할 새끼들 같
은, 새끼들 눈빛 같은
맨발 /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팔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으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읽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품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가재미 /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개밥바라기 / 박형준
노인은 먹은 것이 없다고 혼잣말을 하다
고개만 돌린 채 창문을 바라본다.
개밥바라기, 오래전에 빠져버린 어금니처럼 반짝인다.
노인은 시골집에 혼자 버려두고 온 개를 생각한다.
툇마루 밑의 흙을 파내다
베고픔 뉘일 구덩이에 몸을 웅크린 채
앞다리를 모으고 있을 개, 저녁밥 때가 되어도 집은 조용하다
매일 누워 운신을 못하는 노인의 침대는
가운데가 푹 꺼져 있다.
초저녁 창문에 먼 데 낑낑대는 소리,
노인은 툇마루 속 구덩이에서 귀를 쫑긋대며
자신의 발소리를 기다리는
배고픈 개의 밥바라기 별을 올려다본다.
까실한 개의 혓바닥이 금이 간 허리에 느껴진다.
깨진 토기 같은 피부
초저녁 맑은 허기가 핥고 지나간다.
자미원 간다 / 조용미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
오늘 하루 이 시간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은
저 바위가 서 있는 것과 나무의자가 놓여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나를 태운 기차는 청령포 영월 탄부 연하 예미를 지나
자미원으로 간다
그 큰 별에 다다라서도 성에 차지 않는지
무한의 너머를 향해 증산 사북 고한 추전으로 또 달린다
명왕성 너머에까지 가려 한다
검은 탄광 지대에 펼쳐진 하늘,
태백선을 타면 원상결 같은 작자와 시대 미상의 천문서를 탐하지 않아도
紫薇垣에 닿을 수 있다
탄광 속에는 백일흔 개의 별이 깊숙이 묻혀 있을 것이다
그 별에 이르는 길은 송학 연당 청령포 영월 예미……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
북두칠성과 자미원의 운행을 짚어보는 것은
저 엄나무가 우뚝 서 있는 것과 새털구름이 지나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토파즈빌 통신 / 강인한
주방의 쪽창에 비치는 풍경이 덜컹거린다
토파즈빌 114동과 토파즈빌 115동
저 두 개의 건물 사이 옹색한 얼굴로 산이 끼여 있고
직사각형으로 잘려진 사계가 지나간다
나는 설거지하는 아내의 어깨 너머로
눈 내리는 겨울을 보았고
색맹검사표같이 어지러운 눈발 속
모든 새의 이륙과 착륙이 금지된 것을 알았다
비가 오는 날에는 느티나무가 내려다보는 놀이터
그네가 매 맞은 나무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빗속에 승용차에서 내려 얼른 아파트 현관으로 뛰어가는
여자의 품안에 개가 안겨있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토파즈빌 114동에서도 115동에서도
비가 오거나 말거나 열심히
고가사다리차가 이삿짐을 실어 내리고, 실어 올렸다
오고 가는 것이 무상하고 유수와 같았다
절뚝거리며 벚꽃이 날리는 것이 보였고 그래서
설거지하는 아내의 등뒤에서
푸짐한 허리를 가만히 안아보다가
저리 비켜, 발부리에 채인 강아지처럼 나는
유순하게 비켜날 수밖에 없었다
황사와 함께 돼지독감이 입국하는 건 시간 문제라는데
내가 사는 토파즈빌 113동의 주방 쪽창으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린 뒤 유유히 외출하는 여자가 보였다
하릴없이 나는 풍경을 갈아 끼운다, 잔뜩 근엄한
최고통치자의 지당한 유시가 웬일로 코미디 대본으로
착각되는 때가 많은 환절기였다
정비공장 장미꽃 / 엄재국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의
정미공장 담장에 장미가 피어있다
가시로 기둥을 죄고 있다
지난 밤
몇 잔 소주에 눈 풀려진 정비공 하나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점심 먹으러 간다
자동차 하체가 내려놓은
정오의 골목을 돌아 밥집에 앉아 있다
수저로 입을 죄고 국물로 목을 풀고 있다
냅킨으로 어물쩡 입을 닦고
돌아오는 길 위에 튕겨져 나온 나사 하나
발로 걷어차고 있다
세상이 이렇게 느슨하게 조여져 있다니
태양이 풀어놓은 한 낮을 점검하고
머리 헝큰 아내의 달이
저녁을 죄고 있는 퇴근 무렵
길 건너 불야성의 네온빛에 서성이는
마음은 더욱 헐겁다
세상을 한 바퀴 다 돌아도
언제나 한 발자국 비켜서는 생
조여진 너트가 풀려지듯 정문을 나서다
장미 꽃잎에 코를 박고 향기를 흠흠거리는 순간
누구인가?
몽키도 스패너도 없이
나를 죄었다 풀었다 하는 이
국제열쇠 / 김난수
까치산 가는 길에 열쇠집이 있습니다
사거리 신호등 여닫힐 때마다 `1급 기능사의 집` 펄럭이는 입간판이
혼자 분주한 국제열쇠 허리끈 같은 도로를 오토바이에 걸쳐 놓고 강씨가 공구함을 집어 듭니다
벽면 주렁 주렁 열린 눈 없는 열쇠들 지루 하게 늙어 가고 `잠시 외출 중 입니다`
아크릴 간판이 오후 세시를 잠금니다
덜덜거리는 오토바이가 `30초 복제 완성` 국제열쇠를 꽁무니에 싣고 구름 놀이터로 올라 갑니다
산번지 골목들이 차례로 열립니다
야근 서두르는 달맞이꽃 하나 둘 제 몸여는 언덕 아래 대추나무집, 몇년째 소식 끊긴
아들 기다리던 어머니는세상 문을 닫았습니다
이웃들 마저 빗장을 잠갔습니다
지도가 외면한 골목들 철컥 철컥 여는 사내, 만능 국제열쇠도 벼락 맞은 대추나무집
녹슨 어미 가슴을 열지 못했습니다
가오리 날아오르다 / 장옥관
경주 남산 달밤에 가오리들이 날아다닌다
아닌 밤중에 웬 가오리라니
뒤틀리고 꼬여 자라는 것이 남산 소나무들이어서
그 나무들 무릎뼈 펴 둥싯, 만월이다
그럴 즈음은 잡티 하나 없는 고요의 대낮이 되어서는 꽃, 새, 바위의 내부가 훤히 다 들여다보이고 당신은 고요히 자신의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때 귀 먹먹하고 숨 갑갑하다면 남산 일대가
바다로 바뀐 탓일 게다
항아리에 차오르는 달빛이 봉우리까지 담겨들면 산꼭대기에 납작 엎드려 있던 삼층석탑 옥개석이 주욱, 지느러미 펼치면서 저런, 저런 소리치며 등짝 검은 가오리 솟구친다
무겁게 어둠 눌러 덮은 오랜 자국이 저 희디흰 배때기여서
그 빛은 참 아뜩한 기쁨이 아닐 수 없겠다
달밤에 천 마리 가오리들이 날아다닌다
골짜기마다 코 떨어지고 목 사라진 돌부처
앉음새 고쳐앉은 몸에
금강소나무 같은 굵은 팔뚝이 툭, 툭 불거진다
방심 / 손택수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뒷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앞뒷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 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 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 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유리새 / 유홍준
시뻘건 뜨거움이 하얀 차가움에 가 닿을 때까지
유리공은
긴 막대파이프 끝에 붉은 유리액체를 매달고
제 입김을 모조리 쏟아 불어넣는다 그 입김으로
유리그릇을 만들고 유리새를 만들고
유리꽃을 만든다
저 유리새 뱃속엔
창자도 없고 똥도 없다 저 유리꽃의 봉오리엔
수술도 없고 암술도 없고
단 한방울의 꿀도
없다
한 생의 시뻘건 뜨거움이
제 입김을 모조리 쏟아내고 흰색의 차가움에 가 닿을 때까지
막대파이프를 물고 입김을 불어대는
유리공은 새처럼
주둥이가
길다
문맹 / 유홍준
펄프를 물에 풀어, 백지를 만드는 제지공들은 하느님 같다
흰 눈을 내려
세상을 문자 이전으로 되돌려놓는 조물주 같다
티 없는 , 죄 없는
순백
無化의 길 ……
더욱 완전한 백지에 이르고자
없애고 없애고 또 없애는 것이 제지공의 길이다, 제지공의
삶이다, 마치 거지의 길이며 성자의 삶 같다
그러므로,
오늘도 백지를 만드는 제지공들은 자꾸만 문자를 잃어
간다, 문맹이 되어간다
문명에서ㅡ문맹으로
휴일 없이
3교대 종이공장 제지공들은 출근을 한다
사람을 쬐다 / 유홍준
사람이란 그렇다
사람은 사람을 쬐어야지만 산다
독거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 사람이 사람을 쬘 수 없기 때문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을 쬐지 않으면
그 사람의 손등에 검버섯이 핀다 얼굴에 저승꽃이 핀다
인기척 없는 독거
노인의 집
군데군데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피었다
시멘트 마당 갈라진 틈새에 핀 이끼를
노인은 지팡이 끝으로 아무렇게나 긁어보다가 만다
냄새가 난다, 삭아
허름한 대문간에
다 늙은 할머니 한 사람 지팡이 내려놓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바라보고 있다
깊고 먼 눈빛으로 사람을 쬐고 있다
접시라는 이름의 여자 / 송찬호
한때는 저 여자도 불의 딸이었다
불꽃이 그녀의 일생일 줄만 알았고
사랑만이 오직 불순물처럼
그녀의 일생에 끼어들 것으로 알았다
여자는 언제나 열심히 접시를 닦는다
거품 속에서 여자는 잠시 행복해진다
거품 속에서 잃어버린 반지를 찾은 것처럼,
접시의 당초무늬가 퉁퉁 불은 그녀의 손을 어루만진다
그런 그녀가 잠시 외출 나와 창가의
내가 즐겨 앉는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을 보았다 잠시 나는 점잖게 미소만 띄워보냈다
여자의 손톱 밑에서 양파 냄새가 배어나오고
설사 그녀가 읽는 책 속에서 내가 싫어하는 카레 요리가
쏟아져나온다 했을지라도 그렇게 나는 미소만 띄워보냈을 것이다
여느 성미 급한 손님처럼
종업원을 불러 이렇게 소리치지도 않았다
여기 이 먹다 버린 지저분한 접시 좀 빨리 치워주시지 않겠습니까?
단지 나는 맞은편에 조용히 다가가
넌지시 이렇게 속삭였을 뿐이다
부인, 지금 집에서는 위급 상황이 발생했답니다
오후 여섯시, 마요네즈 군대가 쳐들어온다
토마토 군대가 쳐들어온다
그 끔찍한 아이들이 쳐들어온다
베이비 디자이너
-배아복제1
양해열
당신 머릿속에 자궁이 있어요
넌 어디에서 태어났니? 침대 위에서? 보리밭 샛길에서? 자동차 속에서? 아니 시험관에서...... 아이 진부해, 이 자판기는 아기를 팔아요 투입구에 30캐럿 다이아몬드 넣고 스타트버튼을 누르세요 반죽에 소스, 토핑 얹고 피자 한 판 굽듯 3분이면 돼요 흰 피부 검은 머리 붉은 입술 백설공주도 맞춤형 아기의 원조예요
벤자민 버튼의 거꾸로 가는 시간*을 보았나요 늙은이로 태어나 나이 들수록 젊어지고 어린 아이가 되어 핏덩이로 죽어가는 악성 바이러스에 감염된 미스터 버튼, 아이도 하나 낳았는데 혹, 자기 닮지 않았나 갓난애 손가락 발가락을 지폐 세듯 넘기더군요
아아 내 아이는 나를 닮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손오공의 키 삼장법사의 귀 저팔계의 코와 머리통을 물려주긴 싫어요 버튼을 누를 거예요 랄랄랄라 어서오세요 원하시는 대로 고르세요 랄랄랄라 아이큐 190 키도 190 그래 푸른 눈의 장동건이 좋겠어요 하버드 거쳐 신밧드 담요 타고 할리우드로 가는 내 아들, 신나잖아요
나오미 캠벨처럼 늘씬한 당신, 뱃속에 아기를 키우다니요 주문하면 돼요 아이보리 글러브를 낀 지 십년이 넘었어요 권투하는 느낌의 섹스, 나 이제 지겨워요 처음부터 오랏줄로 묶었어야 했어요 21세기 탄생의 정관(定款), 내 죄 많은 호스 말이예요 하하하하 저기 죄 짓지 않은 아이가 있어요 사이보그처럼 뭐든지 알아서 척척, 저 유전자를 사올 거예요 아기자판기 버튼을 힘차게 눌러요 우리,
당신은 머릿속에 자궁이 있어요
*벤자민 버튼의 거꾸로 가는 시간: F. 스콧 피츠제럴드 원작 단편소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을 개작하여 만든 데이빗 핀처 감독 브래드 피트 주연의 영화.
살아 있는 장례식 / 양해열
고열과 기침이 난무하는 신종인플루엔자의 계절,
살아 있을 때 내 장례식을 치르고 싶었다
움직이는 시신들 영안실로 몰려와 두 번 절하고
부의함에 봉투 넣고 소음 속으로 섞여간다
아케론의 뱃사공 카론에게 건넬 여비가 생기면
3일장은 즐겁다
흰 국화꽃 한 송이 영정사진 옆에 놓고 기도하는 약혼녀
어제 종교를 바꿨으므로 오늘은 울지 않는다
빈 오동나무 관 속에서 시퍼런 번갯불 일고
천둥벼락 치는 소리 들려온다
종이컵에 부딪히는 전생의 내 이야기들
독한 소주 빛으로 방울져 은박매트에 똑똑 떨어진다
땅바닥에 깔린 은하수 속 목동 전갈 물병 사냥개 사수 고래......
이승의 별명들이 별 무리로 흐르더니 별안간
밤하늘로 떠올라 다시 탯자리를 잡는다
자정이 오자 어제의 시신들 죽음의 방을 모두 빠져나가고
죽은 나만이 방명록을 펼쳐들고 운다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과 나타샤와 흰 당나귀, 악의 꽃
선암사 600년 묵은 홍매까지 조문객으로 다 왔는데
작년에 황천 가신 어머니만 오지 않았다
레테의 쇠가죽 북소리 둥둥 목구멍에 차온다
태양의 혼불이 탈 때 보고 싶은 사람 정령이 보인다 했지
해바라기 씨 기름에 무명심지 꽂고 성냥불을 댕긴다
저기, 내가 건너오지 못하도록 꼬박 일 년 째
망각의 강물을 바가지로 퍼내고 있는 어머니
꽃불 흔들며 환하게 웃고 있다
침묵의 옷을 입은 밤하늘의 관객들 눈만 껌벅인다
장례식 도중에 뛰쳐나와 옥상에 서서
밤새도록 쿨럭이며 우는
뜨거운 시신 하나
토마토 / 최정란
어머니가 내 머리 위에 물을 뿌리네
어서 자라라 착한 아가야
네가 자라야 내가 떠나지
텃밭에 토마토가 자라고
줄기에 주렁주렁 언니들이 매달리고
꽃이 겨우 떨어진
나는 연못 쪽으로 뿌리를 뻗네
사람은 집 한 채를 지어봐야
세상물리를 안단다
지붕이 낮은 아버지가 말씀하시네
곧 빨간 기와를 올릴 거야
일기장에 토마토만 한 무덤이 생기네
11월의 비 / 박장호
이 비가 내리길 정확하게 11개월을 기다렸다.
훨씬 전에 권총은 녹슬었고 장미는 시들었다.
액슬은 녹슬, 슬래시는 시들, 밴드는 권총과 장미.
나는 전쟁과 평화를 말했고 남들은 남녀의 성기를 말했다.
나는 남북전쟁을 말했고 남들은 시가전을 말했다.
나는 인내를 말했고 남들은 환자를 말했다.
객석으로 술병을 던지던 지구상에서 가장 난폭한 밴드.
나는 정당방위라고 말했고 남들은 폭행이라고 말했다.
나는 미치고 싶었고 남들은 정신 차리라고 말했다.
나는 안다. 권총과 장미가 사막을 건넜다는 것을.
희망을 절망적으로, 절망도 절망적으로.
나는 11개월 동안 미친 듯이 정신 차렸다.
흰국화행려술병여관젖은휴지갈라진철길죽은가수끊어진기타짧은손가락말더듬이
내 맞은편에 두었던 모든 것들.
건방지게도 잠시 열망을 품었었노라. 이에 깊이 사과한다.
그래, 11월의 신부와 관 속에 들어가련다.
11개월 동안 죽자고 나는 애드립만 쳤다. 죽자고 나는 기우제만 지냈다.
11개월 동안 한 번도 11월의 비는 내리지 않았다.
11개월 동안 나는 정신 차린 듯 미쳤다.
젠장 뮤직비디오와 라이브클립은 항상 혼동된다.
이제 녹슬고 시든, 죽은 그들의 라이브클립을 나는 본다.
내가 미치고 싶은 것도 당연하다. 정신 차리고 싶은 것도 당연하다.
시간이 필요하다고 죽은 엑슬과 슬래쉬가 살아 있는 연주를 한다.
녹슬고 시들고 죽고 살고, 이 문장은 이상하다. 처음부터 이상했다.
괜찮다. 나는 취했으니까. 항상 애매모호했으니까.
이 비가 11개월 동안 내리길 바랐다.
이 비가 내리길 11개월 동안 바랐다.
빌어먹을 그 때 왜 관 속에 들어가지 못했을까?
신부가 없어서가 아니다. 나도 모른다.
나는 지금 전쟁과 평화의 죽은 삶을 본다.
러닝 타임이 15분만 됐어도 나는 벌써 죽었을 거다.
시도 아닌 이런 거 쓰지 않았을 거다.
이건 정당방위일까 폭행일까?
나는 인내라고 말하고 남들은 환자라고 말한다.
그들은 사막을 건너갔다. 각주를 달면 알까?
오늘 내가 얼마나 흔들렸는지. 얼마나 천박했는지.
왜 내게선 항상 비린내가 나는지.
남들은 정상적으로 살라고 내게 말했다.
권총과 장미는 노래한다. 어둠은 신경 쓰지 말라고.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영원한 것은 없다고. 11월의 비조차도.
그래서 미치겠다.
구름에 관한 몇 가지 오해 / 김륭
1.
실직 한 달 만에 알았지 구름이 콜택시처럼 집 앞에 와 기다리고 있다는 걸
2.
구름을 몰아본 적 있나, 당신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내 머리에 총구멍을 낼 거라는 확신만 선다면 얼마든지 운전이 가능하지
총각이나 처녀 딱지를 떼지 않은 초보들은 오줌부터 지릴지 몰라
해와 달, 새떼들과 충돌할지 모른다며 추락할지 모른다며 울상을 짓겠지만
당신과 당신 애인의 배꼽이 하나인 것처럼 하늘과 땅의 경계를 가위질하는 것은 주차딱지를 끊는 말단공무원들이나 할 짓이지
하늘에 뜬 새들은 나무들이 가래침처럼 뱉어놓은 거추장스런 문장일 뿐이야
쉼표가 너무 많아 탈이지 브레이크만 살짝, 밟아주면 물고기로 변하지
3.
구름을 몇 번 몰아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해나 달을 로터리로 낀 사거리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핸들만 꺾으면 집이 나오지
붉은 신호등에 걸린 당신의 내일과 고층아파트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보다 깊은 어머니 한숨소리에 눈과 귀를 깜빡거리거나 성냥불을 긋진 마
운전 중에 담배는 금물이야
차라리 손목과 발목 몇 개 더 피우는 건 어때? 당신
꽃 피우지 않고도 살아남는 건 세상에 단 하나, 사람뿐이지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 새가 아니라 벌레야
구름이란 눈이나 귀가 아니라 발가락을 담아내는 그릇이란 얘기지 잘 익은 포도송이처럼 말이야 그걸 아는 나무들은 새를 신발로 사용하지
종종 물구나무도 서고 말이야 생각만 해도 끔찍해
구름이 없으면 세상이 얼마나 소란스러울까
4.
아주 드문 일이지만 콜택시처럼 와 있는 구름의 트렁크를 열어보면
죽은 애인의 머리통이나 쩍, 금간 수박이 발견되기도 해
초보들은 그걸 태양이라고 난리법석을 떨지
새 떼들에게로의 망명/ 장석남
1
찌르라기 떼가 왔다
쌀 씻어 안치는 소리처럼 우는
검은 새 떼들
찌르라기 떼가 몰고 온 봄 하늘은
햇빛 속인데도 저물었다
저문 하늘을 업고 제 울음 속을 떠도는
찌르라기 떼 속에
환한 봉분이 하나 보인다
2
누군가 찌르라기 울음 속에 누워 있단 말인가
봄 햇빛 나무 빽빽해
오래 생각할 수 없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나는 저 새 떼들이 나를 메고 어디론가 가리라
저 햇빛 속인데도 캄캄한 세월 넘어서 자기 울음 가파른 어느 기슭엔가로
데리고 가리라는 것을 안다
찌르라기 떼 가고 마음엔 늘
누군가 쌀을 안친다
아무도 없는데
아궁이 앞이 환하다.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 송찬호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꽃의 향기를 구부려 꿀을 만들고
잎을 구부려 지붕을 만들고
물을 구부려 물방울 보석을 만들고
머나먼 비단길을 구부려 낙타등을 만들어 타고 가고
입 벌린 나팔꽃을 구부려 비비꼬인 숨통과 식도를 만들고
검게 익어가는 포도의 혀끝을 구부려 죽음의 단맛을 내게 하고
여자가 몸을 구부려 아이를 만들 동안
굳은 약속을 구부려 반지를 만들고
오랜 회유의 시간으로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놓았다
말을 구부려 상징을 만들고
달을 구부려 상징의 감옥을 만들고
이 세계를 둥글게 완성시켜 놓았다
달이 둥글게 보인다
달이 빛나는 순간 세계는 없어져 버린다
세계는 환한 달빛 속에 감추어져 있다
달이 옆으로 조금씩 움직이듯
정교한 말의 장치가 조금씩 풀리고 있다
오랫동안 말의 길을 걸어와
처음 만난 것이 인간이다
말은 이 세계를 찾아온 낯선 이방인이다
말을 할 때마다 말은
이 세계를 더욱 낯설게 한다
날아오르는 산 / 정일근
영축산은 영락없는 독수리 형상이다.
날개 크게 펼쳐 하늘 허공을 돌며
먹이를 낚아채기 직전, 저 거침없는 몰입의 긴장을
나는 느낀다. 무진장 무진장 눈이라도 퍼붓는 날이면
흰 날개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이고
산의 들숨 날숨 따라가다 나도 함께 숨을 멈추고 만다.
명창의 한 호흡과 고수의 북 치는 소리 사이
그 사이의 짧은 침묵 같은, 잠시라도 방심한다면
세상 꽉 붙들고 있는 모든 쇠줄들
한순간에 끊어져 세차게 퉁겨 나가버릴 것 같은,
팽팽한 율에 그만 숨이 자지러지는 것이다.
겨울산을 면벽 삼아 수좌들 동안거에 들고
생각 놓으면 섬광처럼 날아와 눈알 뽑아버릴
독수리 한 마리 제 앞에 날려놓고
그도 물잔 속의 물처럼 수평으로 앉았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잔 속의 물 다 쏟고 마는
그 자리에 내 시를 들이밀고, 이놈 독수리야!
용맹스럽게 두 눈 부릅뜨고 싶을 때가 있다.
나도 그들처럼 죽기를 살기처럼 생각한다면
마주하는 산이 언젠가는 문짝처럼 가까워지고
영축산은 또 문짝의 문풍지처럼 얇아지려니
그날이 오면 타는 손가락으로 산을 뻥 찔러보고 싶다.
날아라 독수리야 날아라 독수리야
산에 구멍 하나 내고 입바람을 훅 불어넣고 싶다.
산 뒤에 앉아 계신 이 누구인지 몰라도
냉큼 고수의 북채 뺏어 들고
딱! 소리 나게 산의 정수리 때려
맹금이 날개로 제 몸을 때려서 하늘로 날아가는 소리
마침내 우주로 날아오르는 산을 보고 싶은 것이다.
쇠재두루미 떼를 따라 날다/이수익
쇠재두루미 떼가 히말라야산맥 가파른
직립의 고도를 넘어가고 있다
계절을 나기 위해 이동해야 하는 습성,
떼는 대오를 지어 날며 생명의 상형문자를 저 높은
하늘벼랑에 찍고 있다
연회색 날개가 퍼덕이며 소리 내어 읽는 일련의 문장들이
점점의 약호(略號)가 되어 뿌려지는,
시퍼런 장천(長天)
운명은 이런 것이다 결연함만이 우리를 살게 하거나
혹은, 깨끗이 죽게 할 수 있다
따뜻한 상승기류를 타고 쇠재두루미 떼가 날아오르는 동안에도
어느 순간 폭풍과 난기류가 유령처럼 와락 나타날 수 있으므로
검독수리의 날카로운 주둥이와 발톱이 그들을 덮칠 수도 있으므로
날갯짓 하나하나는 운명을 건 약속, 물러설 수 없는 길을
바로 지금, 시간의 바퀴에 굴리며 가야 한다
만년의 침묵 하얗게 내뿜는 히말라야산맥
고산준봉 너머로
쇠재두루미 떼 행렬이 유랑의 무리처럼 까마득히 물결치며 날고 있다
새들과 산맥 사이의 공간에, 생사를 건 팽팽한 대치가
서로를 긴밀하게 빨아들이고 있다, 아니, 밀어내고 있다
가깝게, 때로는 멀리 파도치는 그들의 윤무가, 바로 생이다!
50인치 모니터 화면을 덮고 있는 장대한 백색 풍경
속에서 나는, 멀어져 가는 쇠재두루미 떼의 날갯짓을 떠받치고 싶어
기를 쓴다
탁자 위 유리컵이 굴러 떨어지며 소리친다
붉은 호수에 흰 병 하나 / 유병록
딱, 뚜껑을 따듯
오리의 목을 자르자 붉은 고무 대야에 더 붉은 피가 고인다
목이 잘린 줄도 모르고 두 발이 물칼퀴를 젓는다
습관의 힘으로 버티는 고통
곧 바닥날 안간힘
오리는 고무 대야의 벽을 타고 돈다
피를 밀어내는 저 피의 힘으로 한때 오리는 구름보다 높이 날았다
죽은 바람의 뼈를 고향으로 운구하거나
노을을 끌고 둔드라 지대를 횡단하기도 하였다
그런 날로 돌아가자고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더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피
날고 헤엄치고 걷게 하던 힘이 쏟아진다
아니, 벌써 따듯한 호수에 도착했나
발아래가 방금 전까지 제 안쪽을 흘러 다니던 뜨거운 기운인 줄 모르고
두 발은 계속 물갈퀴를 젓는데
조금씩 느려지는데
오래 쓴 연필처럼 뭉뚝한 부리가 붉은 호수에 떠 있는 흰 병을 바라본다
한때는 제 몸통이었던 물체를
붉은 잉크처럼 쏟아지는 내용물을 본다
길고 길었던 여정이 이처럼 간단히 요약된다니!
목 아래에서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발 담갔던 호수들을 차례로 떠올리는 오리는
목이 마르다
흰 병은 바닥난 듯 잠잠하지만
가을이면 그래도 몇 모금의 붉은 잉크가 더 쏟아질 것이다
f / 이근화
그가 프랑크푸르트에 갔다
프랑크푸르트는 f가 두 개나 들어가서
발음할 때마다 불편하다
두 개의 f를 발음하다가
다섯 시 오십오 분을 놓칠 수도 있다
루프트한자를 타고 갔을까
하나의 f를 매달고 한 번의 화장실
두 번의 식사 세 번의 기지개를 켜고
신문을 꼼꼼히 읽고
창밖의 구름으로 아무것도
아무것도 만들지 않고
적금을 적립식 펀드로 바꾸라고
은행 직원이 전화를 했다
펀드의 f는 불안하다
네시 반까지 은행 시간도 불편하다
보도블록같은 f
아파트 난간에 서서
날아가는 빨래를 본다
f같이 서서 죽은 새들을 향해
손을 뻗어본다
새 같지만 f같은 마음에 도달한다
이팝나무에 비 내리면 / 황종권
당신은 육지를 떠나기 전이면 뒤뜰에 있는 이팝나무 아래로 불러내곤 했지요. 이팝나무 한 뼘 위를 회칼로 그으며, 그만큼 자라면 온다고 무슨 굳센 다짐처럼 말하곤 했지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이팝나무 아래에서 키를 재어 보았는데요. 키 대신 등짝에 파도소리가 자라곤 했었지요. 해가 기울수록 길어지는 그늘은 내가 미리 살아버린 주름이었을까요. 이팝나무는 꽃을 버릴 때마다 나이테가 늘어갔던 거예요.
먼 바다에서 당신배가 물결을 가를 때마다 일어나는 물살이, 제가 엉덩이 깔고 앉아 있는 포구 끝에도 닿는 것일까요. 하얗게 터지는 물살에선 목욕탕 스킨냄새가 나네요. 바다가 물결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물결이 바다를 그물처럼 가두고 있단 생각을 했어요. 바다가 당신의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다의 것이었거든요.
어둠이 달을 꽉 가두고 있는 밤은 비가 내렸지요. 어김없이 부엌은 생선 굽는 냄새에 몸살을 앓았고요. 저녁상에 올라 온 민어를 뒤집다가 손등을 얻어맞기도 했어요. 하늘에서도 물고기가 튀는 것일까요. 유리창에 맺히는 빗소리에선 심한 비린내가 나요. 그런 날은 이불속에서 뒤척거리는 일도 조심스러워요. 나는 당신에게 수평선을 그어 주던 아이였을까요.
당신의 주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던 달의 인력이 오늘밤은 시린 손가락으로 내 발목을 잡는 걸요. 밀물 든 바닷가에선 빗소리가 주저 앉고요. 잃어버린 당신의 키는 언제쯤 만조를 이룰 수 있을까요. 사리*와 같은 당신과 나와의 거리에선 빗소리가 쌓이지요. 비가 오는 밤은 달이 이빨이 아픈 꿈을 꾸는 건가 봐요. 이팝나무에 빗소리를 그어놓으면 우린 한 뼘 지워질 수 있을는지요.
*사리 : 달은 음력 한 달을 주기로 지구 주위를 공전하면서 보름과 그믐에 태양, 지구, 달이 일직선 위에 있게 되는데 이때는 태양의 인력이 합쳐지면서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가장 크게 되며 ‘사리’라고 한다.
스트랜딩 증후군 / 김초영
(strand : 좌초하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되다, 사람을 무일푼이 되게 하다)
파일럿 고래들이
피아노의 검은 건반처럼 일렬로 누워 있다.
그들은 바다가 아닌 육지에서 자살을 시도하려고 했다.
중앙병원 307호실,
누워있는 엄마의 팔뚝에 옅은 햇빛이 스며든다.
오늘도 멍이 하나 더 늘었다.
의사는 건조한 표정으로 엄마의 굳어가는
관절들을 만져보곤 했다.
스스로 돌아오려 하지 않는 겁니다.
일종의 무의식 상태의 자살이죠.
의사는 녹음테이프를 재생하듯 또박또박 말한다.
녹색 페인트칠이 벗겨진 산소통이
조용한 병실의 오후를 조금씩 갉아 먹고 있다.
결국 대부분의 고래떼는 죽고 말았다, 고 보도 되었다.
중장비를 동원해 바다로 돌려보내는 작업을
감행했지만 전부 살려 내지는 못했단다.
파일럿 고래들은 하늘로 날려던 것이었을까.
자살하기 위해 육지까지 올라온 고래들처럼
엄마가 가는 물줄기를 내뿜는다.
밀린 병원비가 불어나듯
투명한 오줌비닐이 노랗게 부풀어 올랐다.
신문에 죽어있는 고래들의 사진이 실렸다.
죽은 고래들의 미약한 주파수가 좁은
병실 안을 맴돌다 사라진다.
엄마도 저 주파수를 쫓아 육지로 가고 있을지 몰라.
흑백의 고래 사진을 오려 엄마의 머리맡에 붙여두었다.
고래의 순한 눈이 감기고 있다.
눈알이 오랫동안 따끔거렸다.
맞배지붕/최정란
어떤 큰 손이 잠시 내려놓았을까
반쯤 읽다 만 한 권, 법당을 덮고 있다
맞붙은 앞 뒤 겉장이 하늘을 향하는 동안
읽은 페이지와 읽지 않은 페이지가
서로의 아픈 이마를 받쳐주며
사람 인人자를 이루었다
펼친 책을 엎어 놓은 주인은 어디에
고즈넉이 배흘림기둥으로 서서
계곡 물소리를 읽고 있는지 종적이 없고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서 만나
반쯤 멈춘 독서의 한 순간은
선정에 명상이 젖지 않게 비를 그어주고
단청의 이마 얼룩을 막아주는가
두 사람이 책을 읽으면 어질다
사람이 책을 읽으면 지붕이 된다
세상의 지붕이 되어야 비로소 책이다
책에게 지붕을 강요하지 마라
책은 책이요 지붕은 지붕이다
갈피갈피 어떤 말씀들이 부르는지
심우도의 휴식이 끝나는 처마 끝, 바람이
나직나직 책 읽는 소리, 지붕의 독서
비린내 또렷하게 살아나는 풍경소리
맞배지붕에서 슬쩍 빠져나온 활자들
지느러미를 흔들며 하늘로 헤엄쳐 간다
가랑잎 한 장
-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둥지가 있다.
그러나 인자(仁者)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황진성
가랑잎 한 장, 생쥐처럼 눈을 반짝이며 살곰살곰 기어 나온다. 두리번거리다 달리는 차에 놀라 뒷걸음친다. 가드레일에 등을 바짝 붙인 채 놀란 숨 몰아쉰다. 바람이 휙 불어오자 마른 몸 중심을 못 잡고 펄럭인다. 신호가 바뀌고 차들 멈추어 선다. 꼬리를 내린 가랑잎 한 장 움찔움찔하며 건너간다.
그를 다시 만난 곳은 여의도 잉카라 공원, 벤치에 때 절은 이불을 널어 말리고 있다. 더듬이마냥 뻗은 몇 가닥 수염과 노랗게 바랜 세모난 얼굴, 지난밤 골목길에서 뒤를 밟아오던 작은 눈이 반짝 나를 본다. 내가 들고 있는 커피를 본다. 커피를 건네고 뛰어 달아난다. 등 뒤에서 펄펄 웃음이 날린다.
자정이 넘은 영등포 역, 박스는 인자(人子)가 겨울을 나기에 좋은 둥지다. 박스 안의 가랑잎 한 장 구겨진 채 잠들었다. 귀가를 서두르는 구두 발자국 소리 컹컹 역사를 울릴 때, 굽은 등 더 웅크린다. 시멘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섬뜩한 냉기를 끌어안으면 미치든 죽든 조만간 그림자는 찾아오리라. 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아니다. 늘 어둠 쪽에서 손짓하는 운명을 향해 기지개 활짝 펴 보이는 박스 위로 삐죽이 나온 가랑잎 한 장
* 성경 누가복음 9장 58절
도마뱀/안채영
퇴화된 뒷다리가 앞다리를 따라가고 있다
가만히 보니 앞다리에는 돌기처럼 바퀴가 달려 있다
새로운 진화다
차양 안으로 오일장의 정오가 그늘로 진열되고 있다
모두 꼭지를 뚝, 하고 떠난 것들
제 살던 곳에서 떨어진 것들만이 진열돼 있다
잘려진 뒷다리가 성한 앞다리를 먹여 살리는 일
누군가 돌을 지듯 쨍그랑 소리와
작은 그늘 같은 푸른 지폐 몇 장이 바구니 안에 들어 있다
그 누구도 저 고무주부 안의 끊겨진 꼬리를 확인한 이는 없다
뜨거운 순대를 지나고 취객의 기울어진 트림을 지나고 옥수수찜통을 지나고
버려진 말들만 바닥에 뒹글고 있다
앞가슴에 비늘이 있다는 듯
고무판에는 긁힌 비늘무늬가 가득하다
길의 입구를 당겨 천천히 기어가는 도마뱀
사람들 많아 빨리 도망가지도 못한다
냉혈동물인 도마뱀
땀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면
이곳에 완전히 적응한 것 같다
쨍그랑 소리가 짧은 끈처럼 끊어지고 있다
찬송가를 참 잘 부르는 어느 신이 도마뱀의 모습으로 기어가고 있다
파장의 오일장은 다시 오일 후면 돋아 날 것이고
잘려진 꼬리는 도마뱀을 오래 먹여 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