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미첼의 군사재판
원제 : The Court-Martial of Billy Mitchell
1955년 미국영화
감독 : 오토 프레밍거
음악 : 디미트리 티옴킨
출연 : 게리 쿠퍼, 찰스 빅포드, 랄프 벨라미
로드 스타이거, 잭 로드, 엘리자베스 몽고메리
피터 그레이브스, 프레드 클락, 대런 맥거빈
예전에 제가 어느 리뷰에서 제임스 스튜어트가 미 공군 소속으로 2차대전에 참전하여 전투기를 몰았다고 쓴 적이 있습니다. 제 블로그에 자주 오시는 이웃분이 오류를 지적했지요. 그 분의 말씀은 '당시 미국에는 공군이 없었기 때문에, 제임스 스튜어트는 육군 소속이다'라는 설명이었습니다.
당연히 저는 군대 하면 육, 해, 공 이렇게 3군으로 분류되어 있는게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전투기를 모는 것은 당연히 공군일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미국에서 정식 공군, 즉 Air Force 가 생긴 것은 무려 1947년이었습니다. 이미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였죠. 즉 1차대전에서는 물론이고 2차대전에서조차도 독립된 공군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항공부대는 육군 산하였던 것입니다.
게리 쿠퍼가 주연한 영화 '빌리 미첼의 군사재판' 을 보면 이 내용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비행기는 20세기의 발명품 중 하나입니다. 공식적으로 비행기의 발명은 1903년 미국의 라이트 형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은 1914년에 일어났지요. 거기서도 군 항공기가 많은 활약을 했다고 합니다. 게리 쿠퍼가 연기한 윌리암 미첼(빌리 미첼이라고 더 많이 부릅니다.)은 1차 대전의 항공 영웅이었습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1920년대 미국 경제 호황기 시절, 전쟁은 잊혀져가고 있었고 미국에서는 대부분 낡은 전투기들이 고물 박물관 기증품처럼 존재했다고 합니다. 항공 영웅 빌리 미첼은 향후 전쟁은 공중전이 될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공군의 별도 독립운영을 주장한 인물입니다.
너무 당연한 주장같지만 이 영화속에서 벌어지는 1920년대는 이 빌리 미첼의 주장은 그냥 망상에 빠진 헛소리라고 다들 생각합니다. 즉 씨알도 안 먹히는 이야기였다는 것이지요. 심지어 그는 진주만이 항공폭격의 위험이 있는 곳이라는 지적과 함께 일본의 진주만 폭격을 예언할 정도입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1941년 12월 7일 이었으니, 무려 16년전에 예언한 셈입니다. 지금 보면 이 빌리 미첼 장군은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이율곡 급이거나 거북선을 미리 만들어 왜구의 침략에 대비한 이순신급 능력을 가진 항공 전문가입니다.
제목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빌리 미첼이 군사재판을 받는 내용입니다. 그는 항공 폭격으로 해군 함정을 격파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고, 2천 파운드의 폭탄을 싣고 저공비행 폭격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폭격기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저로서는 그 주장이 어느 정도 팩트인지는 당연히 알 수 없고, 더구나 1920년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상황을 이입시키기 어렵습니다. 어쨌거나 육군 당국에서는 그런 빌리 미첼의 말을 무시하지만 빌리 미첼은 고집을 꺾지 않습니다.
그가 군사재판을 받게 되는 사건은 일종의 상부에 대한 비난 때문입니다. 그와 무척 친했던 잭 랜스다운(잭 로드)이라는 장교가 무리하게 비행선을 조종하라는 지시를 받고 차마 거부하지 못하고 복종했다가 유래없는 대형 사고로 잭을 비롯하여 많은 조종사들이 목숨을 잃고, 이어 멕시코로 가던 항공기가 추락하는 대형 사고도 벌어집니다. 이게 분개한 빌리 미첼은 기자들을 불러서 성명을 발표했는데 그게 육군 수뇌부의 무관심과 무능을 비판한 내용이었습니다.
자, 군대라는 조직의 특성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즉 항명이나 불복종은 군대에서 엄청난 반역죄입니다. 빌리 미첼의 이런 행동은 당연히 큰 문제가 되고 그는 즉각 체포되어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됩니다. 영화의 절반이 채 지나기 전에 빌리 미첼이 군사재판을 받는 내용이 벌어지며 영화의 끝까지 팽팽하고 긴장감이 흐르는 재판의 내용이 속개됩니다.
많은 법정 영화들이 과연 재판에서 누가 승리할 것인가를 다루는 흥미로움이 있지만 이 영화는 사뭇 다릅니다. 19살때부터 평생 군인으로 살아온 준장계급(별 이죠)까지 오른 빌리 미첼이 군대의 특성을 모를리가 없겠지요. 그는 그걸 모르고 그런 파격적 항명을 한게 아니라 단지 스스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온 국민에게 전달하기 위함이 목적이었습니다.
뻔한 재판, 증인채책은 거부되고 빌리 미첼의 발언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가 아닌, 그가 항명적인 행동을 했느냐 안했느냐만을 따지는 방식으로 재판은 일방적으로 진행되고 더구나 재판장은 항공부대를 우습게 아는 전형적인 육군의 장군 지미 거드리(찰스 빅포드)가 맡았으니 결과는 뻔할 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빌리 미첼의 주 변호인으로 참여한 하원의원 프랭크(랄프 벨라미)의 능력에 의해서 극적으로 재판의 분위기를 뒤엎게 되고, 명령에 따르다 애꿎은 죽음을 당한 잭의 미망인이 법정에 서게 되면서 반전된 분위기가 이어집니다. 심지어 이게 빌리 미첼의 군사재판이 아니라 육군 수뇌부에 대한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이 아닐가 싶을 정도까지 몰리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미국 최고의 법률전문가 라는 알랜 길리온(로드 스타이거)이 검사측의 구원투수로 등장하여 다시 상황을 역전시킵니다.
게리 쿠퍼 라는 헐리웃 최고의 인기 배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고, 개성파 조연배우 찰스 빅포드가 군사재판의 재판관으로 비중있게 등장하고 있지만 실상 영화의 흥미로움은 두 주역 보다는 변호인인 하원의원 프랭크를 연기한 랄프 벨라미와 후반부에 뒤늦게 등장하여 얄미운 구원투수 연기를 맛갈스럽게 해낸 로드 스타이거의 연기가 돋보입니다. 노련한 하원의원으로서 완전히 게임도 안되는 재판을 반전시키는 능력을 보여준 프랭크, 끝에가서 갑작스레 등장하여 냉철한 법률가로서의 너무 얄미운 태도를 잃지 않으며 재판을 마무리하는 길리온, 로드 스타이거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도 받았지만 조연배우로 더 이미지가 강한데, 이 영화에서는 작은 출연비중에 비해서 굉장한 악역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물론 연기폭이 좁은 배우의 전형인 게리 쿠퍼가 마지막 발언을 통해서 비장하게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감정이 북받치는 장면은 나름 게리 쿠퍼 로서는 보기 드문 열연이었습니다. 조금 그 장면이 어색하긴 했지만, 게리 쿠퍼로서 그 정도 연기까지 감수하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5-0 수사대'로 알려진 잭 로드와 '제 5 전선(미션 임파서블 TV 외화)'의 피터 그레이브즈 라는 두 TV스타가 젊은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비중은 작은 편입니다. 게리 쿠퍼 원톱 주연에 여러 개성있는 조연 배우들이 등장하는 '군인 드라마'이며 거의 남자배우 일색인 영화에 미망인으로서 재판에 참여하여 앙칼진 증언을 하는 엘리자베스 몽고메리의 모습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빌리 미첼은 확실히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습니다. 육군과 해군 위주로 군대가 운영되던 그 시절 항공부대는 일종의 아웃사이더 같은 찬밥이었는데, 1925년 이 재판이 벌어졌고, 빌리 미첼은 군복을 벗을 각오를 하면서도 공군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는데 이자의 예언처럼 실제로 진주만 공급이 벌어졌고, 2차 대전에서 공중전의 비중은 상상을 초월하게 높아졌습니다. 비행기로 지구를 돌 수 있고 음속을 넘는 속도로 날아가는 비행기도 발명되었고. 모든 것은 빌리 미첼의 예언처럼 진행되었습니다. 빌리 미첼은 1936년에 죽었는데 그의 사후 5년후에 진주만 공습이 이루어진 셈이며 1947년에야 정식 에어 포스, 즉 미국 공군이 독립적으로 창설되었습니다. 빌리 미첼은 자기의 예언이 하나하나 적중하는 것을 못 보고 눈을 감은 셈입니다. 그는 미국 항공계의 개척자이자 공군을 독립시키는 역할을 한 선구자인 셈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미국적인 배우 게리 쿠퍼의 캐스팅은 나이로 봐도 배우로서의 그의 위상으로 봐도 매우 적절했습니다.
'제 17 포로수용소' '영광의 탈출' 등 인상적인 전쟁영화로 기억되는 오토 프레밍거의 탄탄한 연출로 만들어진 수작이며, 50년대 게리 쿠퍼의 영화중 '하이눈' '우정있는 설복'과 함께 손꼽힐 수작입니다. 딱딱한 군대영화이고, 상부에 항명한 군인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영화라서 그런지 우리나라에서는 개봉이 안되었습니다. 1930년대부터 50년대에 가장 많이 우리나라에 영화가 개봉된 배우가 게리 쿠퍼, 클라크 게이블, 존 웨인 이지만 그런 게리 쿠퍼의 영화중에서 개봉이 안된 숨겨진 수작입니다. 낙하산도 없이 비행기를 몰고 이륙하는, 지금 공군입장에서 보면 원시적으로 운영되던 항공부대 시절, 먼 앞을 내다본 개척자 빌리 미첼의 이야기를 재판 과정을 통해서 흥미롭게 다룬 영화입니다. 후반부 게리 쿠퍼가 최후 발언하는 장면은 확실히 감동적입니다. 공군들에게 틀어주었다면 그 장면에서 기립 박수라도 쳤을 것 같습니다. 21세기가 된 지금 공군의 중요성이야 뭐 말할 것도 없지요. 항공산업이 이렇게 발달할 거라는 것은 1920년대 미국 군부대의 꼰대 수뇌부들은 절대로 몰랐던 것입니다.
ps1 : 1955년 영화인데 게리 쿠퍼는 4년뒤에도 선박의 난파관련 사건으로 재판을 받는 영화 '메리디어호의 난파'에 출연합니다. 공교롭게도 두 편 모두 게리 쿠퍼라는 스타배우의 출연작임에도 국내에 개봉되지 않았으니 게리 쿠퍼의 법정영화는 우리나라에서 외면당한 셈이네요.
ps2 : 로드 스타이거의 연기가 어찌나 냉정하고 얄미운지 가서 때려주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등장시간이 많다고 비중이 있는 건 아니지요.
ps3 : 일종의 공군에게 바치는 영화가 된 셈입니다. 이 영화 개봉시에는 공군이 독립적으로 창시가 된지 8년이 지난 후 였습니다.
[출처] 빌리 미첼의 군사재판(The Court-Martial of Billy Mitchell 55년)|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