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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글은 이재언 저 "한국의 섬" 진도군 편의 '외병도'(남겨진 기록 덕분에 유달리 따스한 섬) 에 실린 글입니다.
=훌륭한 섬마을 선생님=
세월을 거슬러 1962년도에 이곳에 발령을 받아 6년간 주민들과 함께 살았던 한 선생님의 소중한 기록이 있다.
가난하고 외로운 섬마을 외병도 분교장에서 젊은 교사가 6년간 근무하는 동안 정들었던 제자와 주민 그리고 섬마을 아이들을
친형제처럼 위로하고 격려해주었던 따뜻한 사연들이다.
이 기록은 50여 년이 지난 지금 외병도 섬 사람들의 문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섬마을에 밝은 내일이 *
조춘기 (진도군 조도면 상도국민학교 외병분교 교사)
1. 지금도 파도 소리가 들리는 듯
외딴 섬 진도군 조도면 외병도. 진도에서 북서쪽으로 30여km 떨어진, 정기 여객선도 다니지 않는 절해고도. 바닷가 언덕바지에 조개껍질처럼 들어붙은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 25호에 130여명의 가난한 주민들이 쓸쓸하게 살아가는 외로운 섬마을이었다.
나는 그 바닷가 마을 학교에서 가난하고 외로운 섬사람들과 꼬박 6년을 함께 살았다. 내 나이 스물넷에 들어가 스물아홉 가을에 나왔으니 내 이십대를 고스란히 그곳 섬마을에서 보낸 셈이다.
혼자서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여섯 학년을 복식으로 수업했다. 야간에는 ‘청파학원’을 세워 고아와 문맹자들에게 읽기와 쓰기를, 초등학교 졸업생들에게는 중학 과정을 지도했으며, 초등학생의 일기 집을 간행하여 그 인세로 가난한 아이를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게도 했다. 또한 청년들을 중심으로 ‘청파독서회’를 조직하여 마을 청소년들을 선도하고 일요일엔 구불구불한 마을 골목길을 청소하고 조상 대대로 내려온 음주와 도박의 폐습을 추방하여 마을 기풍을 쇄신시키기도 했다.
처음 그곳에 들어갈 땐, 딱 2년간만 살다 떠나오리라 작정했었다. 그런데 그만 가난한 주민들과 아이들이 측은해지고 정마저 들어서 선뜻 떠나지 못했다. 1년만 더, 1년만 더 하다가 머문 세월이 6년이나 된 것이다. 기쁨보다는 가슴 아리고 서러운 사연들이 더 많았다. 하지만 내 작은 힘으로 어둡고 그늘진 환경 속에서 외롭게 자라온 아이들에게 꿈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대대로 가난하게만 살아온 섬 주민들에게 자기들도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 준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뿌듯한 보람을 느낀다. 섬마을을 떠나온 지가 50여년이 되어 가는데도 지금도 그 바닷가의 파도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2. 부임하던 날
1961년 9월 8일자로 진도군 임회면 용등초등학교로 제대복직 발령을 받았다.
고향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그렇게 생소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사범학교 2학년 겨울방학 중에 임회면 죽림리가 고향인 동급생 친구와 함께 비누 장사통을 메고 겨울 내내 진도관내 마을들을 누비고 다녔던 경험이 있던 탓이다.
또 미군부대 보초병으로 근무하다가 제대 무렵에는 휴전선 최전방 순찰병 생활을 하다가 막 제대한 처지라서
그 어떤 어려움도 두렵지 않았다.
4학년을 담임했다. 나이 지긋한 선생님들이 대부분인 학교에 갓 제대한 젊은 교사가 부임하니 우선 교장, 교감 선생님이 좋아하시고, 특히 학생들이 무척이나 반겼다. 학부형들이나 지역 주민들도 모처럼 젊은 선생이 왔다고 환영했다. 우선, 학교 옆 마을에 허술한 방을 하나 얻어 같은 날짜로 장성에서 전입 발령받은 40대 중반 선배 선생님과 자취를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기혼자로 학교 근처 마을에서 살림을 하고 있었는데, 총각 선생이라고 자주 저녁 초대를 해주는 등 따뜻하게 대해 주어서 생활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군에 입대하기 전부터 준비하던 공부(고시 준비)할 시간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근무 시간에는 교장선생님 이하 여러 선배교사들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과중한 업무를 맡아 짬이 나지 않았고, 60여명의 내 반 아이들 수업이 끝나면, 오르간을 치지 못해 음악지도를 제대로 못하는 선배 선생님의 부탁으로 6학년 2개반 음악지도를 하는 등 너무 바쁜 나날이었다. 차분하게 내 공부할 시간을 전혀 확보할 수가 없었다.
이런 내 사정을 눈치 챈 선배 한 분이, 마음대로 공부하려면 교사 혼자 근무하는 낙도 분교장으로 들어가라고 귀띔을 해주었다. 가끔 그렇게 분교에서 고시 합격한 분들이 있었다면서. 하지만 선뜻 정기여객선도 다니지 않는다는 낙도 분교에서 근무할 자신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몇 개월 동안 망설이다가 이듬해 3월 1일자로 분교 근무 희망서를 제출했다. 나로서는 대단한 모험이고 용단이었다. 그 시절만 해도 대부분 분교 근무를 기피해서 희망만 하면 거의 발령이 나는 때였다. 내 결심을 말하자 선배 선생님들이 서운해 하고, 특히 교장 선생님께서 많이 걱정하시면서도 반드시 뜻을 이루라고 격려해 주셨다. 내 손을 꼭 잡고 격려해 주시던 그 교장 선생님,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그 자상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분교장으로 발령이 날 것으로 기대하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막상 3월 1일자 인사 발령에서 제외되었다. 주위에서 모두들 의외라고 했다. 나도 실망과 허탈한 심정이었다. 담당 장학사에게 어떻게 돼서 발령이 안 난 거냐고 항의성 편지를 보냈더니 바로 다음 날 전화가 왔다. 미혼 교사들을 분교장에 발령하면 혼자 근무하면서 불미스러운 사고를 자주 내서 가급적 발령을 내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마치 나를 분교로 발령내면 사고라도 낼 사람으로 예단하는 것 같아 불쾌하다고 항변했더니 다음 기회에 고려해보겠다고 했다.
분교장 근무를 단념하고 새 학기가 되어 도보로 30여분 거리의 남선 마을에 하숙을 정하고 5학년을 담임하여 바쁘게 근무하고 있는데, 3월 20일, 그토록 열망하던 분교장 근무 발령 통지가 왔다. 중간에 갑자기 인사 요인이 발생해서 발령했다는 것이다. 진도군 조도면 상도초등학교 외병분교. 진도읍에서 여객선으로 두 시간쯤 가서 다시 돛단배로 네다섯 시간 정도 더 들어가야 한다는 그야말로 절해 고도였다.
나는 당초 지역사회 개발이나 가난한 섬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헌신하려고 분교장 근무를 희망한 건 아니었다. 다만, 아무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이 혼자서 자유스럽게 근무하는 분교장에 가서 전부터 시작한 고시 준비만을 열심히 하자는 뻔뻔스런 생각에서였다. 외딴 섬 생활이 얼마나 고되고 어려운 것인가도 미쳐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내 꿈을 이뤄야겠다는 일념만으로 무모하게 결단을 내렸던 것인데, 막상 발령통지를 받고 보니 조금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3월 21일 오후, 학생들에게 이임인사를 하고 교문을 나서는데, 전교생들이 교문 밖 한길 양쪽에 늘어서서 손을 흔들면서 배웅해 주었다. 훌쩍훌쩍 우는 아이들, 선생님 가지마라고 울부짖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조도행 선착장이 있는 평목을 향해 출발했다. 짐은 조그만 이불보퉁이와 손가방 하나뿐. 내 반 아이 두 세 명이 서로 자진하여 메고 들고 따랐다. 전송하던 아이들 중 100여 명이 그대로 내 뒤를 계속 따르기 시작했다. 들어가라고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 안 했다. 3월 하순인데도 그날따라 눈보라가 치며 지독하게 추웠지만 한사코 따라오는 아이들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6㎞ 정도나 되는 평목에 도착하니 중간에 하나둘 떨어져 나가고 60여명이 선착장까지 따라왔다. 목포에서 출발하여 조도로 들어가는 여객선을 기다려야 했다.
지금은 세월호 참사로 가슴 아픈 눈물의 통곡항인 팽목항이 되었지만, 그때는 부두 시설이 전혀 없이 바닷가 바위에 가까스로 잠깐 접안하여 승선하고 내리는 형편이었다. 눈보라가 계속 휘몰아치는 추위 속에서 대합실도 없어 아이들과 바위 뒤나 언덕바지에 웅크리고 앉아 떨면서 기다렸다. 더없이 순진하고 정이 넘치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니 한없이 고맙고 가슴이 뭉클해왔다.
그 추위 속에서 한 시간 정도 덜덜 떨며 기다리고 있는데, 폭풍주의보 때문에 여객선이 목포에서 아예 출발하지 안했단다. 아쉬워하는 아이들을 되돌려 보내고 하숙하던 집으로 되돌아왔다. 섬에서는 길 떠나는 나그네가 세 번 인사해야 아주 떠나게 된다는 말이 있지만, 떠난다고 인사하고 나섰다가 다시 들어가게 되니 조금은 멋쩍고 미안했다.
다음날 오후에 다시 부임길에 올랐다. 오후 일곱시 경에 정기 여객선이 다니는 상조도 본교에 도착했다. 다음날 외병도로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마침 불어 닥친 폭풍 때문에 일주일이나 지루하게 기다리다가 다섯 시간 남짓의 지루한 항해 끝에 겨우 외병도에 도착했다. 배가 접안하는 바닷가 모래밭에 몇몇 주민들과 아이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비스듬한 언덕바지에 조개껍질처럼 들러붙어 있는 초가집들이 퍽 쓸쓸하게 보였다. 마을 이장의 안내로 바로 바닷가 언덕에 있는 학교로 갔다. 전임 교사는 벌써 여러 날 전에 떠나버려서 정돈되지 않은 조그만 학교 건물이 초라하게 서 있었다. 열 평 남직 되는 낡은 건물의 한 쪽은 교사 숙소인 방 한 칸과 부엌이고 다른 한 쪽이 교실이었다. 여러 날 동안 불을 넣지 않은 방에 불을 지폈다. 마침내 외롭고 고달픈 긴긴 나의 섬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3. 어려운 결단
다음 날, 첫 수업에 들어갔다. 겨우 여섯 평 정도 되는 좁은 교실에 43명의 학생들이 다 낡은 2인용 의자에 3명씩 엉덩이를 붙이고 꽉 차게 앉아 있다. 게다가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여섯 학년의 복식 수업인데, 교실이 좁아 학년별 좌석도, 구분도 없이 마구 붙어 앉아 있으니 어떻게 지도를 해야 할지 그저 답답하고 막연했다. 그래도 고학년들은 학습문제를 제시해 주면 어느 정도는 풀어가는 것 같았지만, 이제 입학한지 2주일 정도밖에 안 되는 1학년들은 언제 어떻게 지도해야 할 것인가? 한 학년을 직접 지도하다보면 다른 학년들도 자기네들 공부는 않고 모두들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다. 교사가 한 사람뿐인 단급 분교장에서 어떻게 6개 학년 복식 수업이 가능할 것인가?
4학년 아동은 단 1명뿐인데 그 1명을 직접 지도하기 위해 다른 42명의 학생들을 자율학습 시키는 건 비능률적이고 불합리한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바람직한 교육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복식수업에 대한 극히 상식적인 이야길 조금 들은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건 두세 개 학년의 복식수업 정도이지 이렇게 6개 학년 복식 수업 방법에 대해선 전혀 문외한이라서 더욱 답답했다. 교실이라도 좀 넓었으면 학년별로 분단 편성해서 앉혀 놓으면 지도하기도 훨씬 편리하고 아이들의 주의도 덜 산만할 것 같은데, 좁은 교실에 꽉 차게 앉아 있으니 그 사이를 비집고 돌아다니기도 여간 불편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겨우 하루 수업을 마쳤다. 몸은 솜처럼 피곤하고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었다. 아무래도 잘못 들어온 것 같다는 후회가 앞섰다. 새 선생님이 들어왔다고 큰 기대를 가지고 선생님만을 쳐다보고 있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어떻게 제대로 가르쳐야 할 것인가? 교육하는 일일랑은 아예 제쳐 놓고 오직 자신만을 위한 준비에 몰두하리라던 내 욕심이 너무 무모하고 황당한 생각이었을까? 티 없이 까만 눈동자들 앞에서 죄책감이 들며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외면해 버리면 저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차라리 내 자신을 위한 계획을 좀 늦추더라도 당분간은 오직 아이들 교육만을 위해 봉사해볼까? 아니야 누가 뭐래도 내 처음 계획대로 밀고 나가는 거야.’
앞으로의 내 진로에 대한 갈등으로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몇 날 동안 고민했다.
저녁에는 내 계획대로 밀고 나가겠다고 단단히 벼르다가도 다음날 아침 아이들 앞에 서면 내 의지가 흔들리곤 했다. 이렇게 갈등의 날을 10여일 보낸 후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앞으로 딱 1년만 이곳에 근무하면서 내 개인적인 계획을 미루고, 오직 가난한 주민들과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다른 학교로 떠나리라 다짐했다.
막상 결론을 내리자 차라리 마음이 가벼워졌다, 후련하기까지 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선택’이나 ‘결단’이라는 행위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다.
4. 학습카드로 자율학습 훈련
교수.학습방법 개선을 위하여 아동 및 지역 사회 실태 조사에 나섰다.
먼저 2학년부터 차례로 국어 읽기와 쓰기 능력을 검사했다.
학년 단계에 맞게 제대로 읽고 쓰는 아이들은 전 학년을 통틀어 몇 명뿐이고,
떠듬떠듬 겨우 읽고 쓰거나,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더욱이 고학년들까지 아직껏 문자를 제대로 해득하지 못했다는 건 참으로 한심한 일이었다.
하기야 이런 여건 속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도대체 국민학교를 졸업하고도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더욱이 이곳 학생들은 가난한 가정형편 때문에 대부분 상급 학교에 전학하지 못하고 국민학교만 졸업한 뒤 곧바로 생활전선에 나서게 된다. 따라서 그들에겐 초등 교육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특히 이곳에서는 학교 교육이 여느 도시 학교처럼 상급학교 진학 준비를 위한 과정이 아니라, 학교 졸업 후 바로 실생활에 필요한 생활교육이어야 한다.
그래서 읽고 쓰고 셈하는 기초 기본적인 교육내용을 철저하게 지도해야 한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바로 그들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교육이어야 한다.
이곳 외병도는 한 마디로 비참하리만큼 가난했다.
0.99km2 밖에 안 되는 조그만 섬에 논이라곤 단 한 평도 없고, 산비탈에 일군 좁은 자갈밭에 고구마와 보리를 심고, 해초를 뜯어서 겨우 연명해 갔다.
남자들은 3월경부터 초겨울까지 남의 배에 고기잡이를 나가고, 그동안은 마을에 부녀자와 아이들만 남는다.
그래서 농사철과 해초 뜯는 시기에는 일손이 달려 학생들도 거의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
남자들은 몇 달 만에 바다에서 돌아와도 대부분 가정 일은 돌보지 않고 도박이나 술타령으로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 작은 마을에 술집이 네 곳이나 있었다.
이렇게 조상 대대로 음주와 도박 등에 허송하면서 가난의 악순환이 거듭된 것이다.
그렇게 어렵게 살아가면서도 자기들의 가난한 삶에 대한 비관이나 잘 살아 보겠다는 의욕도 부족했다.
그저 모든 것을 체념한 채 무기력하고 나태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들에겐 무엇보다도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희망과 용기를 갖도록 북돋아 주는 일이 시급하고 중요할 것 같았다.
실태를 파악한 다음 아이들에겐 먼저 읽고 쓰는 능력부터 길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복식학급의 학습지도방법과 교재를 충실히 연구하여, 학습 결손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일이 시급할 것 같았다.
다음 날의 수업 준비를 위해 밤을 새워가며 6개 학년 교재를 분석해 학년별, 차시별로 학습문제를 추출하여 학습카드를 만들었다. 학습카드는 다음 해에도 사용할 수 있도록 두꺼운 켄트지를 사용했다.
수업시간에 먼저 학습카드를 학년별로 나누어 주고, 그 카드에 제시된 학습 문제에 의하여 각자 개인학습을 한 뒤, 학년별로 공동학습을 하도록 했다. 교사는 1학년부터 차례로 직접 지도를 해 나갔다. 그러다보니 40분 단위로는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하여 1시간 수업을 60분 단위로 늘렸다. 또 학년별로 상호 토의하는 시간을 많이 갖도록 했다. 몇 개월이 지나니, 고학년들은 제법 자율학습 태도가 길러져 갔다.
하지만 저학년들은 여전히 교사의 눈이 미치지 않을 땐 주의가 산만해지고 소란해져서 전체 학습 분위기까지 어수선하게 만들기가 일쑤였다. 체육과는 전체 학년을 같은 시간에 지도하면서도 학년별 능력차를 고려하였다. 저, 중, 고학년의 세 그룹으로 나누어 주운동의 내용과 요구 수준을 달리 했더니 무난하였다. 음악과와 미술과는 1,2,3저학년과 4,5,6고학년 두 그룹으로 나누어 시간표를 짰다. 한 그룹이 밖에 나가 그리기나 만들기를 할 때, 다른 그룹은 작접 음악 지도를 하였다. 오후 정과 수업이 끝난 다음에는 전 아동을 대상으로 한 시간씩 읽기와 쓰기의 특별 지도를 실시했다. 한글 해득을 한 몇몇 학생들에게는 다른 학생들의 개별 지도를 맡도록 했더니 아주 효과적이었다. 이렇게 몇 개월 동안 아이들과 씨름하다보니 1학기 말쯤 해서는 1학년 두세 명을 제외하곤 모두가 더듬거리며 읽을 수 있게 되었다.
▲ 외병분교 어린이들과 담임교사 조춘기
5. 바다를 막아 운동장을 만들고
바다가 하늘을 닮아 파래지는 5월이 되었다.
암담하기만 하던 복식 수업에 조금은 익숙해졌고, 학생들의 학습 태도도 차츰 잡혀져 갔다.
3년 전에 부락 자체 부담으로 세운 학교 건물은 낡은 가정집을 뜯어다 지은 거라서
창문이 뒤틀려 여닫이가 잘 안 되고, 유리창은 깨진 것이 더 많았다.
책걸상은 당초 높이를 생각하지 않고 똑같은 걸로 구입해서 저학년에게는 책상이 너무 높아 턱이 책상에 닿았고, 덩치가 큰 고학년들에게는 체격에 맞지 않아 불편해 했다.
또 교실을 나서면 바로 바닷가 모래밭이어서 운동장이 없고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에는 모래들이 교실까지 날아들어 문을 닫고 수업을 해야 했다. 톱, 망치, 대패를 사다가 창문을 고치고, 책걸상의 다리를 얼마씩 잘라 내거나 덧붙여 학년에 알맞은 높이로 조절하는데 2주일이나 걸렸다.
페인트를 사다가 교실 내외를 도장했더니 한결 밝고 말끔하게 보였다.
운동장을 조성하기 위해 학교 앞 바닷가에 축대를 쌓고 뒷산을 헐어서 흙을 채우기로 했다.
학부형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더니 적극 협조해 주었다.
남자들은 바다에 나가고 부인들뿐이라서 축대는 고학년 남학생 대여섯 명을 데리고 내가 직접 쌓기로 했다.
남들이 할 땐 그리 어렵잖게 보였는데, 막상 내가 해보니 몹시도 어렵고 고된 작업이었다.
기껏 하루 하고나니 허리가 아프고 손끝이 닳아서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허지만 우리 애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저희들 몸무게보다도 더 무거운 돌들을 낑낑대며 들어 올려가면서 열심히 쌓아갔다.
이따금 이마의 땀을 훔치며 나를 힐끗 보곤 씩 웃는 모습들이 대견하고 기특해 보였다.
저 천진한 아이들을 두고 어떻게 이곳을 훌쩍 떠날 수 있겠는가?
5월 한 달 동안, 돌을 쌓고 흙을 나르고 하는 힘겨운 작업 끝에 배구장만한 조그만 운동장이 만들어졌다.
비록 좁지만 연약한 부녀자들과 우리 학생들의 힘으로 바다를 막아 운동장을 만든 것이다.
고마움과 대견스러움으로 가슴이 뿌듯해졌다.
이듬해 봄에 그 운동장 가에 쭉 돌아가면서 해바라기와 코스모스를 심었다.
새로 매립한 척박한 땅이라서 화장실(재래식)에서 분뇨를 퍼다가 구덩이마다 듬뿍듬뿍 부었더니
가을에는 학교가 온통 키 큰 탐스런 해바라기와 코스모스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6. 어린이 일기집 발간
1학기가 지나고 9월이 되었다.
이제 겨우 한글 해득을 한 아이들의 읽기와 쓰기 능력을 발달시키고 글쓰기 능력을 기르기 위해 독서, 일기쓰기, 편지쓰기 등을 중점 지도하기로 했다. 책이라곤 교과서 밖에 없고, 매일 보고 듣는 것이 한정된 조그만 섬 안에서만 생활하기에 아이들의 감정은 몹시 단순하고 메말라 있었다. 어린이다운 꿈들이 부족했다. 그들에게 아름다운 동화나 동시, 그리고 위인전 등을 많이 읽혀서 푸른 꿈을 심어 주기로 했다. 우선 본교에서 몇 권의 동화책을 빌려오고 내 봉급에서 약간을 내어 30여권의 책을 준비했다. 그런데 여전히 읽기에 서투른 아이들이라서 대부분 열심히 읽어 보려고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뒤적이며 삽화나 보는 정도였다. 그래서 매일 방과 후에 10분씩 시간을 내어 동화를 읽어 주기 시작했다. 흥미진진한 동화를 10여 분씩만 읽어 주는 것으로는 못내 아쉬워하는 표정들이더니 차츰 직접 책을 읽는 아이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한편 아이들의 글쓰기 능력을 더욱 발전시키고 훈훈한 인정의 샘물을 맛보게 하기 위하여 편지쓰기 지도를 시작했다. 마침 그 무렵 교육 평론에 게재된 내 졸고 "바닷가 일기"를 보고 편지를 보내온 전북 이리 여고 학생 등 여러 펜 친구들과 우리 아이들을 일대일로 자매결연을 맺어주고 서로 편지를 교환하도록 했다. 2학년부터는 모두 편지 노트를 준비케 하여 보낼 편지를 먼저 노트에 써오게 한 다음 일일이 내용, 맞춤법 등을 교정해 주고, 다시 정서해서 발송하도록 했다. 처음엔 쓰기를 제대로 못하는 아이들이라서 편지 내용이 단순하고 부실했다. 하나하나 고쳐 주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조금은 번거롭기도 했지만 꾸준히 지도해 나갔다.
한 달에 한두 번씩 편지를 받고 답장을 보내게 되니 아이들의 글씨쓰기와 글쓰기 능력이 나날이 나아졌다. 자매결연 누나나 언니들은 아동도서, 의약품, 학용품 등 값진 선물들을 많이 보내주어 아이들을 더욱 기쁘게 했다. 그러나 그런 물질적인 선물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이나 주민들은 지금까지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은 소외된 지역에서 이웃에 대한 고마움이나 따뜻한 정을 느끼지 못하며 살아온 터에 그들의 메마른 가슴 속에 이웃에 대한 관심과 애틋한 정들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 해부터는 2학년 이상 전 학생에게 일기 노트를 한 권씩 사다 주고 일기를 쓰게 했다. 좁은 섬 안에서 지나가는 비행기는 보았어도 기차도, 자동차도, 오토바이도 구경 못한 단조로운 생활을 그대로 일기장에 옮기려니 자연히 날마다 비슷한 내용의 일기가 계속 되었다. 따라서 아이들은 싫증을 느껴 쓰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방과 후 일기쓰기 시간을 특설해서 기어이 간단하게 몇 줄이라도 써놓고 하교하도록 했다. 밤늦도록 그들의 일기를 일일이 읽고 자세하게 조언과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단순한 하루 생활 내용만을 쓰는 것 보다는 책을 읽고 느낀 점이라든가, 산, 바다, 하늘, 바람 등 자연의 변화에 대한 감정이나 자신들이 아직 가보지 못한 육지에 대한 동경, 상상 등을 주로 쓰도록 이끌어 갔다. 그들의 생각의 세계가 차츰 넓어지고 그래서 재미있고 풍성한 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꼬박꼬박 써온 애들의 일기는 모두가 그대로 버리기 아까운 내용들이 되어갔다. 일간 신문에 투고하기도 하고, 발췌하여 결연한 언니와 누나들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그러던 중 조선일보 김정호 기자의 주선으로, 6학년 김예자 어린이의 일기집 “차라리 이 섬이 없었더라면”을 출간하게 되었다. 가난한 섬사람들의 애달픈 생활상을 읽고 삽시간에 전국 각지로부터 격려 편지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대대로 가난의 굴레 속에서 체념하며 살아온 이 외딴섬 사람들에게 “하면 된다, 우리도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산 증거를 보여 준 셈이다. 예자는 그 후 일기집 발간에서 얻은 인세 수입으로 이 섬에서는 처음으로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고 여상고를 졸업하고 중학교 서무과에 근무하다가 지금은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목회자의 삶을 살고 있다.
7. 청파학원 설립 운영
이 마을에서는 오래 전부터 소먹일 아이들이 없는 집에선 목포 등지에서 떠돌아다니던 고아들을 데려다 부리고 있었다. 그 아이들 중 성품이 좋지 않은 경우도 있어서 매일 함께 어울려 지내야 하는 우리 학생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래서 63년 3월부터 야간으로 그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음 해 4월엔 그들 고아 6명과 문맹자인 동네 아주머니들을 합해 초등반으로 편성해서 문자 해득 지도를 하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은 중등반이라 하여 중학 과정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항시 푸른 바다처럼 넓고 큰 희망을 갖고 살아가자는 뜻에서 ‘청파학원’이라 명명했다. 이른바 무인가 학원을 개설한 것이다. 교재는 초등반은 초등학교 교과서를, 중등반은 서울통신중학 강의록을 준비해 사용했다. 6개 학년의 복식 수업과 학교의 모든 일을 혼자서 하는 것만도 벅찼는데, 밤늦게까지 학원생들을 지도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보살펴 주지 않는 천애의 고아들이 한 자 한 자 글을 읽어가고, 중학교를 가지 못해 애달파하는 졸업생들이 영어, 수학 등 중학교 과정 공부를 한다는 자부심으로 밤 늦게까지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뿌듯한 희열과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65년 2월 1회 수료생 15명을 비롯해서 67년까지 모두 47명을 수료시켰다. 그 중 남달리 영리하여 초등학교 졸업 시 분교 학생으로는 처음으로 교육감상을 받았던 김한종 군은 광주 시청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졸업생들이 각기 직장에서 충실히 근무하거나 마을의 지도자가 되어 떳떳하게 활동하며 살아가고 있다.
8. 청파독서회 조직 활동
차츰 학교 환경이 개선되어 가자, 마을 주민들의 학교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교사를 신뢰하고 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온 음주와 도박의 악습만은 여전했다. 겨울철 한두 달 동안 집에 와 있는 남자들은 자고 나면 도박을 하고,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려서, 그들이 마을에 있는 동안은 조용한 날이 거의 없었다. 아이들을 보다 바람직하게 교육시키고 가난한 마을을 잘 살게 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술과 도박을 근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누적된 폐습을 교사 혼자만의 힘으로 개선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조직적인 힘이 필요했다. 마을의 건실한 청년 몇 명을 중심으로 64년 6월에 ‘청파독서회’를 조직했다. 여기저기서 헌 책들을 모으고, 회비를 거출하고, 목포에 거주하는 동향인 유지들로부터 희사를 받아 백여 권의 책을 준비했다. 또 ‘마을문고 중앙회’에 연락하여 문고함을 준비해서, 누구나 허물없이 드나들 수 있도록 마을의 중심이 되는 회장집 방 한 한 칸을 치워 마을문고를 설치했다. 누구든지 틈이 나는 대로 와서 책을 보게 하고, 매주 토요일 저녁에는 회원 전원이 모여 그간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을 발표하거나 좋은 내용의 책을 소개하기도 했다.
또 월간 잡지 "마을문고" 등에 회원들의 글을 자주 투고하게 하였더니 전국적으로 펜팔 친구들이 생기게 되었다. 서로 독서에 대한 정보를 교환해 가면서 독서열은 차츰 왕성해지기 시작했고, 아울러 이들은 학교 일이나 지역 발전을 위한 일에 앞장서 주었다. 그렇게 마을에 차츰 활기가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청파독서회의 활동이 활발해져 가자 회원들을 중심으로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주민들의 계몽과 봉사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먼저 매주 일요일 아침엔 초등학생들과 함께 마을 청소를 하고 골목길을 고쳐나갔다. 또 회원들이 날마다 윤번제로 산림 감시원을 정해서 함부로 나무를 베어다 때는 도벌 행위를 막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나라에서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기 전에 이곳 외병도에서 새마을 운동이 비롯된 셈이다.
65년 겨울엔 마을 주민총회를 소집하여 지금까지 조그만 마을에 네 군데나 있던 술집을 아예 없애자는 의견을 제기하도록 했다. 처음엔 완강히 반대하던 어른들도 청년들의 끈질긴 설득에, “요즘은 젊은 사람들 의견이 제일이여, 우리 늙은 사람들이사 젊은 사람들 하자는 대로 따라 가세.”하고 손을 들고 말았다. 내가 이곳에 부임해 온 이래 술집을 없애려고 벼른지 3년 만의 일이었다. 조상 대대로 누적되어 온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어떤 비약이나 기적을 바라지 않고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올리는 그런 인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주민들 모두가 자기들도 노력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도록 안내해 갔다. 무지와 가난의 설움 속에서 외롭게 살아오던 외병도 주민들은 참으로 오랫동안의 긴 동면에서 깨어나 서서히, 그러면서도 힘차게 보다 밝은 내일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 40여년의 교직 생활에서, 아니 지금까지의 내 삶에서 뼈아픈 회한도 많고 뿌듯한 보람을 느낀 적도 더러 있지만, 내 20대 그 푸른 6년 동안 외딴 섬마을에서 외로운 이들과 함께 웃고 울며 살았던 그 시간들을, 그 정들었던 얼굴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책으로 편찬된 섬 어린이의 일기
다음은 조춘기 교사의 제자인 외병도 소녀 김예자 양의 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1960~1970년대 당시 그들이 받은 일기교육은 교육 중의 백미였을 것이다.
외병도 소녀 김예자가 쓴 일기 <차라리 이 섬이 없었더라면>(1968)이라는 책의 감동을 자녀들에게 읽히고 싶고 널리 알리고자 일부를 지면에 할애해 본다
〈1965년 10월 4일 (월요일) 흐림〉
제법 쌀쌀한 날씨지만, 오늘부터 우리집에서는 집을 새로 짓기 위하여 벽을 뜯는 공사를 벌였다. 비만 오면 사방에서 비가 새고 거의 쓰러져가는 집이라, 동네사람들은 우리 집에 오면 방에 잘 들어오지를 않으려고 한다. 몇 해 전 비가 많이 오던 날, 부엌 있는 쪽이 허물어져버렸는데, 그때 우리들은 한참 자고 있었다. 어머니가 다급한 소리로 깨웠다. 일어나보니 방에는 마구 비가 새고 부엌은 무너져 있었다. 모두들 앉아서 오돌오돌 떨며 그날 밤을 새던 일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이렇게 볼품없는 집인데도 막상 뜯어버린다니까 좀 서운한 생각이 든다.
〈1965년 11월 10일(수요일) 흐림〉
아침부터 소로 고구마를 캤다. 어떻게나 바람이 차고 세던지 너무 추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학교에도 못 가고 춥고 허리와 다리까지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럴 때는 죽어버렸으면 차라리 좋을 것만 같다. 벌써부터 결석을 이렇게 많이 해버리면 공부는 어떻게 할까? 내일도 또 결석을 해야 한다.
<11월 11일(목요일) 맑음〉
온 종일 ‘지겁’밭에 있는 것만 남겨두고 가까운 밭의 곡식은 모두 거두어들이고 보리까지 다 갈았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그래도 보리를 다 갈 때까지 참고 견뎠다.
이제 내일은 학교에 가겠다고 했더니 아버지는 화를 벌컥 내시며 “내일은 지겁에 거름도 내고 보리도 간다. 어서 졸업이나 마치면 쓰겄다”고 하시며 학교에 못 다니게 하셨다.
도회지 아이들은 중학교, 고등학교에도 다니는데 나는 국민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으니 정말 슬픈 일이다.
〈11월 23일(화요일) 흐림〉
아침 일찍 산 너머로 물을 길으러 갔다. 바람이 쌀쌀하게 불어댔다. 손이 시리고 코와 귀가 떨어져 나간 듯이 차다. 내복이라도 걸쳤으면 이렇게 춥지는 않을 게다.
앞으로 눈이 오고 더 추운 겨울이 되면 어떻게 지낼까? 남들은 벌써부터 내복을 사왔다는데 나는 옷을 사달라고 조를 수도 없다. 내복은 못 입더라도 겉에 입는 옷이라도 좀 성했으면 좋겠다.
겨울아, 겨울아 어서 가렴.
〈12월 13일(월요일) 맑음〉
갑자기 겨울방학을 하게 되었다.
선생님이 강습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선생님과 영희가 떠나는 걸 보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께 방학을 했다는 말을 하고는 웬지 슬퍼졌다. 꼭 선생님이 이번에 다른 곳으로 전근가실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이 다른 곳으로 전근을 가실 때는 얼마나 슬플까 하는 생각이 나서 마쿠데미 잔등에 올라가 선생님과 영희가 타고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는 나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조그마한 돛단배가 바다 저쪽으로 가물가물 사라질 때까지 물끄러미 바로보고 서 있었다.
〈1966년 3월 12일(월요일) 맑음〉
넷째 시간에 급장선거를 했다. 나는 쪽지에 ‘김정희’라고 썼다. 개표 결과, 정희가 급장이 되고 양식이가 부급장이 되었다. 나는 학술부, 영희는 도서부, 숙이는 재배부, 양식이는 사육부, 영단이는 미화부, 정희는 생활부가 되었다. 세월은 참 빠르기도 하다. 벌써 오 년이라는 세월이 하루처럼 흘러 일 년만 있으면 졸업을 해야 한다. 앞으로 남은 일년간이라도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
아버지가 ‘가사도’고모님이 나를 좀 와달라고 한다고 하시며, 졸업하면 고모네로 가라고 하셨다. 나는 “졸업하면 식모살이 가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웃으시며 “식모살이는 새벽부터 밤 열두 시까지 일해야 한다”고 하셨다. 나도 중학교에 가고 싶다. 그래서 마음껏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 졸업만 하면 타향에 가서 고된 일을 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졸업하기가 싫다.
〈
1966년 6월 10일(금요일) 맑음〉
아침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셔서 “오는 십삼 일에 육학년들은 진도경찰서 경비선을 타고 진도에 가서 여러 곳을 구경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나는 꿈과 같은 선생님의 말씀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기뻤다. 지금까지 한 번도 구경해보지 못한 육지를 구경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어찌 신나지 않겠는가? 책에서만 보아온 자동차나 기와집, 자전거들도 직접 볼 수 있을 테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진도에 가면 자동차도 한번 타보았으면 좋겠다.
〈7월 10일(화요일) 흐림〉
오늘 선생님이 ‘하조도’에 내려가신다고 한다. 선아 언니한테 진작 써놓고도 아직 못 부친 편지를 선생님께 갖다드렸다. 돈 7원이 없어서 지금까지 못 부치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그냥 가져오라고 하신 것이다. 생각하면 선생님께 너무 미안하다. 광주 언니와 이리 언니 그리고 선아, 선영 언니들에게 보내는 편지들의 우표 값을 선생님이 거의 다 내주시기 때문이다.
나 혼자만 그러면 또 모른다. 우리 학생들 모두의 편지들을 다 부쳐주시니 돈이 얼마나 많이 드실까? 우리 학교 아이들은 모두 언니나 누나가 정해져서 유달리 편지를 많이 한다.
생각할수록 우리 선생님은 고맙고 훌륭한 분이시다. 점심때쯤 돼서 선생님이 탄 배가 저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나도 ‘하조도’를 한번 가보고 싶다. 우리 조도면의 면사무소가 있는 곳인데도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난 본디부터 욕심이 많아서 그런지 무엇이든지 갖고 싶고 어디든지 가보고 싶어진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 너무 욕심이 많은 것도 죄가 된다고 하신다. 그런데도 한 번 하고 싶다고 생각한 일은 그렇게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아마 내가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부터 지닌 게 모두 욕심뿐이었던 모양이다.
<7월 13일 수요일 맑음>
아침에 선생님께서 호남교육신문을 읽어주셨다. 거기에 예순이,인숙이,길수,나 이렇게 네 사람의 편지가 실려있었다.내 글이 신문에까지 실리다니기쁘고 자랑스런 생각이 든다. 선생님 다 읽고나서 "우리들은 비록 이렇게 조그마한섬에서 살고 있지만 앞으로 더욱 글을 많이 써서 우리들의 고운 마음이 담긴 글을 육지 동무들도 많이 읽도록 하자" 고 말씀하셨다.
〈8월 31일(수요일) 맑음〉
저녁을 먹고 예순이와 학교로 놀러 갔다. 영단이네 집으로 자러 가고 싶었으나 자자는 말도 없고 해서 안 가기로 하고 학교로 간 것이다.
학교에는 청파학원생들이 회의를 하려고 모여들고 있었다. 청파학원은 조 선생님께서 몇 년 전에 세우신 학원이다. 국민학교 졸업한 학생들은 중등반에 들어가 중학교 책을 공부하고, 글을 모르는 아이들이나 어머니들은 초등반에 들어가 국어와 산수를 배우는 곳이다.
조 선생님께서는 낮에는 우리들을 가르치시고, 밤에는 또 늦게까지 학원생들을 가르치시느라고 고생을 참 많이 하신다.
〈1967.1월 4일(수요일) 흐림〉
그리운 조 선생님께
선생님, 이 추위에 편히 계십니까?
우리 ‘외병도’사람들은 모두 아무 탈 없이 잘 있답니다. 선생님, 지금도 밖에는 솜 같은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어 우리 ‘외병도’전체가 하얀 눈으로 덮여 있습니다. 꼭 쌀가루 같은 저 눈으로 하얀 꽃을 만들어봤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처마 끝에는 고드름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습니다.
우리 ‘외병도’는 요즘 아주 춥답니다. 선생님이 계신 그 곳도 여간 춥겠지요? 선생님, 하얀 눈 위에 서 있으면 내 얼굴도 백설같이 하얘지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계시는 곳도 지금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습니까? 선생님이 가신 지 며칠이 안 되었는데 벌써 선생님이 그리워지는군요. 선생님, 며칠 전 밤에 선생님의 꿈을 꾸었어요. 웃으실까봐 꿈 이야기는 않겠어요. 저의 꿈은 개꿈이니까요.
선생님, 앞바다는 며칠 전에 비해 아주 잔잔한 편이어요. 겨울에도 언제나 오늘처럼 파도가 잔잔했으면 좋겠어요. 선생님, 요즘 우리들은 날마다 산으로 나무하러 다니고 있습니다. 방학 동안에 나무 많이많이 해야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선 요즘 무슨 일을 하고 계시나요? 아마 공부하고 계시겠지요? 선생님, 너무 버릇없는 말 같지만 우리 ‘외병도’보다 더 좋은 곳에 한 달 동안 계시고 나면 이 작고 교통이 불편한 ‘외병도’에는 오시기가 싫으시지 않아요? 그렇지만 불쌍한 저희들을 위하여 꼭 오시기 바랍니다.
선생님 하루 빨리 보고 싶습니다. 오늘은 이만 줄이겠어요. 안녕히 계십시오.
〈1967년 2월 15일(수요일) 흐림〉
오늘은 우리 6학년들의 서글픈 졸업날이다. 실은 어제가 졸업식 날인데 졸업식 준비하러 3일 전에 ‘상도’본교에 가신 선생님이 바람 때문에 여태 못 오시다가 어제 저녁에야 오신 것이다. 졸업식 날이 가까워오면 올수록 마음이 슬퍼지고 서운했는데 기어이 그날이 오고 만 것이다.
졸업식장으로 우리 조그마한 교실을 예쁘게 꾸몄다. 본교에서 빌려온 하얀 포장을 교실 둘레에 치고 만국기를 달고 해서 제법 아담한 식장이 되었다. 졸업생은 남자 한 명과 여자 네 명 해서 모두 5명뿐이다. 거기에다 청파학원 중등반 9명과 초등반 6명이 오늘 우리들과 함께 졸업을 하게 되었다.
우리들이 맨 앞에 앉고 그 다음에 청파학원생들이 앉고 재학생들은 뒤에 서 있게 되었다. 동네어른들도 다 오셨는데 교실이 좁아서 다 못 들어오시고 문밖에 서서 구경하셨다.
졸업식 날 절대로 울지 말자고 우리 여학생들끼리 단단히 약속했는데도 춘식이가 송사를 읽어갈 때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늘 졸업을 하더라도 며칠 후부터는 청파학원 중등반으로 다시 학교에 다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자꾸 슬퍼지려는 마음을 달래었다.
졸업식이 끝난 다음에 동네어른들은 교실에서 술을 마시며 노시고 우리들은 선생님이 과자를 나누어주셔서 먹으면서 놀았다. 저녁에는 오늘 졸업한 학원생들과 함께 학교에서 늦도록 재미있게 놀았다. ‘눌옥도’의 강 선생님도 오셨다.
참 생각할수록 서운하고 허전한 마음이다. 내가 벌써 졸업을 해버리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로 졸업한 것 같지가 않다. 이제 나는 뭘 할까?
〈10월 3일(화요일) 맑음〉
선생님, 부디 안녕히 가셔요. 우리 ‘외병도’가 생긴 이래 오늘같이 슬픈 날은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 외병도에 오셔서 6년 동안이나 고생하신 선생님이 떠나셨다. 오빠처럼 정들었던 조춘기 선생님이 ‘광주’로 전근을 가시고 말았다. 전근을 가신다는 말이 떠돌기는 했었지만 이렇게 빨리 가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 다정하시던 선생님!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아쉬워했다. 선생님도 마냥 우셨다.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부디 안녕히 가십시오!
〈10월 4일(수요일) 맑음〉
온 종일 어제 떠나신 선생님 생각에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선생님께서도 어제는 정말 섭섭하셨을 것이다. 6년 동안 정이 든 고향과 같은 이 섬을 떠나신 선생님! 지금은 무엇을 하고 계실까? 선생님께서도 아마 우리 외병도를 생각하고 계시겠지.
*지금까지 1816년 9월 9일 개화기 시대에 영국 함대 3척이 남긴 외병도에 대한 기록을 보았고,
1962년부터 6년 동안 근무하신 조춘기 선생님의 눈으로 본 그 당시의 외병도를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당시의 초등학생이었던 김예자 어린이의 꾸밈없는 일기를 살펴보았다.
이렇게 외진 섬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어서 섬을 연구하는 필자는 대단한 보람을 느낀다.
그건 씨앗이었다. 희망의 씨앗이었다.
성경에 나온 겨자씨 같이 작은 희망이 아직까지 주민들의 머리를 채우고 가슴을 덥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가르침을 진실하게 하신 선생님으로 인해 작은 섬에 희망의 바람이 불고 꿈을 갖게 된 것이다.
교권이 무너져간다고 아우성인 요즘, 학교와 마을을 아우르며 모범을 보이며 실천했던
진정한 선생님을 만난 것 같아 훈훈한 마음에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한국의 섬' 저자 이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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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마음을 정하게 하고 그길을 평생 걸어가게 인도하는 섭리도 본인의 흔들림 없는 의지가 따르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인생행로라 생긱되어집니다. 20대후반 6년의 선생의 삶 우남 이승만 박사의 한성감옥 6년의 삶 연상해 봅니다.
감동입니다
평생을 올곧게 사신 조춘기 선생님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