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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강과 상식 』 스크랩 민중의술 名醫열전 ③ 박경숙 ! 펌]
백년지기 추천 0 조회 48 09.05.12 18: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민중의술 명의(名醫)열전 ③ 박경숙

… 활법과 뜸과 침으로 사람을 살리는 사람

- 민중의술은 법률의 핍박을 받고 있다. 의사·한의사들이 눈을 부라리고 감방에 집어넣으려고 한다. 민중의술의 명의(名醫)를 이렇게 지상에 공개하는 것은 그러므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과감히 공개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이런 문제를 감추고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과거 50년처럼 민중의술이 고발을 피하여 음지에서 전전하는 것은 국민과 국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 이것을 양지에 당당히 내어 놓고 국민의 심판을 구해야 한다. 민중의술이 법의 탄압을 받으면 결국 피해를 입는 사람은 국민이다. 그러므로 의사·한의사의 앞잽이인 의료악법이 심판할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심판해야 한다. 이 빛나는 치료능력을 가진 민족의술을 계속 처벌해서 매장시켜야 할 것인가? 아니면 떳떳하게 할 수 있도록 해서 국민의 생명을 구할 것인가? 질병이 창궐하고 제도의료가 속수무책이 될 상황에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숨을 수 없다. 숨지 않을 것이다. 당당히 드러내고 싸울 것이다. 창생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의료면허가 환자에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제도의료와 민중의술 중 과연 어느 쪽이 병을 더 잘 고치는지 밝혀보자. 시합을 해보자. 국가는 의술의 본연이 어떻게 형성되고 자연적 명의가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지 제대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국민들은 더 이상 엉터리 제도의료에 속지 말고 누가 내 생명을 더 잘 지켜줄 것인지 눈을 부릅뜨고 심판하기 바란다.-

용두활수 그 곳에서 사람을 살리다

동해바다를 옆에 끼고 동해남부선과 나란히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온 낙동정맥의 기세가 동해남부 해안에 이르러 그 맥을 가라앉히기 전 기운차게 다시 솟구치는 달음산 아래 동해바다를 발아래 내려다 볼 수 있는 곳. 기장군 일광면 이천리. 이천천이 굽이쳐 흐르는 광경이 장엄하다는 용두활수(龍頭活水). 그 곳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여장부가 한곳에서 무려 40여년을 살고 있었다. 김수영 감독의 영화'갯마을(1965년. 원작 오영수)'의 무대가 된 일광의 이천리. 일제 때 매립으로 지금은 없어져 버린 용두머리(야산)를 휘감고 도는 이천천변의 박경숙 여사가 과연 어떤 사람인가. 호기심이 발동한 필자는 집을 나설 때 일부러 전화도 하지 않고 인근 주민들에게 물어가면서 찾았는데 과연 인근 동리 사람들은 남녀노소 너나없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사단법인 한국활법일광운동원 박경숙(朴敬淑)원장. 당년 70세.
그는 서슬퍼런 의료악법의 칼날아래서도 오로지 고통에 찬 민중들에게 의술을 펼치면서 많은 사람들을 구하였다. 치료를 하면서 공부도 하면서 생선을 머리에 이고 기장시장까지 걸어 다니면서도 잠시도 구료의 손길을 늦추지 않았던 의로운 여장부 민중의술살리기 부울경 연합 박경숙 고문님은 사람의 체위와 틀어진 골격을 무시하고 자침하는 침술에는 한계를 느껴서 활법을 시작했다는 여사님은 약 20년을 미치다시피 공부에 파묻혔단다. 필자가 취재를 하는 장시간에도 식을 줄 모르는 뜨거운 열정을 미루어보아 능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여사님에게 체험사례를 들려 달라니까 웃으시면서 수 없이 많았던 지나버린 사례들을 일일이 기록을 해놓은 것도 아닌데 하시며 난감해 하신다. 그러자 침대에 누워있던 환자들이 일어나서 같이 거드는데 침이면 침 뜸이면 뜸 그리고 활법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여사님의 다양한 체험사례들을 보고 들은 대로 여기에 옮겨 적어본다.

체험 사례

고향은 경북 의성이고 현재 충북 제천에서 철도청에 근무하는 이름은 최현주 당시 고1 여학생인 이 아가씨는 얼마나 아팠으면 자신이 겨우 앉는데도 15분 일어서는 데도 15분이나 걸리는 중증으로 하체는 거의 못 쓰는 상태였다. 그 당시 그는 내 제자에게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도 차도를 보이지 않자, 그 어머니의 원망 섞인 소리를 듣고 내가 치료를 대신 맡았다. 환자를 살펴보니 골반이 기이하게 틀어진 것을 확인하고서 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그 학생은 병을 고치기 위해 온천장에 있는 고모 집에서 먹고 자고 통원치료를 하였는데, 쉬고 않고 열심히 성실하게 치료를 받은 탓인지 서서히 완쾌가 되었다. 거의 2년을 돌본 결과 이제는 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많이 좋아져서 집으로 돌려보냈는데 그 후 졸업도 하고 철도청 취직 시험까지 합격을 했다고 좋아하며 인사를 하러 내려왔다. 그녀는 감사한 마음으로 큰 절을 올릴 때 의자로서 치료한 보람을 느낀단다.

같은 동네에 사는 장대철 나이 70세 경부고속도로 건설 사업으로 대통령표창까지 받은 한국도로공사 임원으로 근무하는 분이었다. 지금은 감리를 보는 기술자로서 약 6년 전 심장병으로 경주 동국대학에서 너무 늦었으니 집에 가시라고 하더란다. 가셔서 재산정리를 하시고 병원에서는 침대에서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휠체어를 타고 다니도록 했다. 위험하니 걸어 다니는 것조차 못 다니게 하더란다.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과 병원의 검진 결과 내리는 처방이 주사쇼크 일어난다고 약도 못쓰고 집으로 가시라는데 결국 나흘 만에 퇴원을 하게 되었다. 알약 한 알 주고 퇴원을 하라는데 며칠이라도 입원하면 안 되겠느냐고 통사정을 하니까 집에 있으나 여기 있으나 별반 나을 것이 없는 상황이니 한 달에 한번 씩 약만 타러 오시란다. 절망적인 상태에서 같은 동네에 계시는 박경숙 여사님에게 왔다. 여사님께서는 여태까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심장에 불을 한번 떠보자며 이 분에게 최초로 시도를 했단다. 오래 동안 치료를 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아르바이트 여학생을 일당 3,000원을 주고 붙여서 매일처럼 뜸을 뜨게 했단다. 그렇게 하기를 몇 달 후 갈수록 증세는 몰라보게 나아져갔고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걸어 다니며 일상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몇 년을 그렇게 치료를 한 결과 지금은 완전히 나았다.

기장에 사는 윤기우 (50) 5년 전 처음 왔을 때 그는 치료를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치료를 받고자 하는 환자가 자기는 대학을 나왔는데 자형이 정형외과 의사이고 누구도 그렇고 하면서 아무도 이 병을 못 고치는데 여기서 고칠 수 있겠냐며 의심을 하더란다. 의사들이 득실대는 좋은 집안에서 무엇 때문에 굳이 이런 누추한 곳에 몸을 맡기냐며 나는 현재 회원들 수가 너무 많아 곤란하다며 돌려보냈어요. 보냈는데 돌아가더니 그 이튿날 다시 왔어요. 왜 왔느냐고 물으니 기장조기축구회에 운동을 하러 가서 일어난 일을 말하니 회원들이 듣고는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 원장님 심기를 건드렸다며 그 분은 돈을 바라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러니 가서 빌어라 하더랍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왔는데 와서 하는 말이 “어쨋거나 내만 좀 낫게 해주소” 카는 기라. 내가 웃으면서 “그러면 당신만 낫게 하고 다른 사람은 우짜능교?” 그날도 역시 치료를 안 하고 그냥 갔습니다. 삼일 째 되는 날 또 왔길래 참 보기가 민망하데요. 오죽 답답하면 저럴까 싶고 저 사람도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낀데 내가 안되겠다 싶데요. 그래서 그 사람도 이제 마음의 준비가 되었겠다 싶어 치료를 하기 시작했는데 한 달쯤 하니까 팔의 통증이 없어지고 몰라보게 좋아집디다. 그래도 밤에 자고나면 아픈 증상은 있어서 두 달을 계속 했지요. 두 달이 넘어설 때 내가 그만해도 된다고 하니까 자기는 불안해서 한 달은 더해야겠다면서 석 달을 치료하고 통증으로부터 해방이 되었습니다.

기장에 사는 혜민이란 학생인데 지금은 대학생이 되었다. 중 3때 목욕탕에서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갔는데 머리 검사를 하니까 뇌혈관 기형이라 수술을 받았다. 그리하여 이곳에 오게 되었는데 오면서 부터 자꾸 경기를 했다. 천안에 있는 특수학교에 다니는 그 아이를 정성으로 돌보았다. 2년이 넘도록 치료를 하였는데 가끔 천안에서 내가 보고 싶다며 방학 때마다 오곤 했는데, 그러다가 어느 날 아이가 실신상태가 되었다. 우선 한의원에 가서 침도 맞고 약도 먹고 하다가 이리로 왔다. 엄마가 울어서 난리가 났고 구경꾼들도 많았는데 내가 치료를 하자 아이가 완전히 깨어났다. 정신이 든 아이가 나를 보더니 아이고 할머니 하면서 나에게 안기자 구경꾼들이 박수를 치고 난리가 났더랬습니다.

기장에 사는 김선희 할머니(82) 심장병을 뜸으로 치료를 하는데 좀 특이한 방법이다. 심장의 모혈 거궐은 안 뜨고 단중을 직구로 뜬다. 세 번을 뜨는데 목에 실을 감아서 단중까지 길이를 재어 그 실을 길이대로 입에 물고 독맥으로 넘기면 흉추6~7번에 맞닿는데 그 지점에다 뜸을 뜨면 아무리 가쁜 숨도 당장 돌아온다. 이 할머니는 밤낮없이 뜸을 뜨고 완쾌가 되었다.

의술 공부

친정아버님이 (朴天東) 공무원으로 독학으로 의술을 하셨는데 침술과 한약조제는 뛰어난 분이셨다. 그런 아버님을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까닭으로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시집을 와서 보니 남편의 수입은 빠듯한데다 눈 어두운 노모에다 주렁주렁 달린 6남매나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이어갈 생계가 너무나 막연했다. 아버님이 몇 번인가 오시더니 신랑은 나이가 많고 재산은 없고 무엇을 해서 먹고 살려는가 하고 물으셨다. 그러다가 하시는 말씀이 침술 공부를 하라고 하셨다. 침술 공부를 하면서 가족들의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생선을 시장에 내다팔고 시장에서 파전도 구워 팔고 산에 가서 나무도 해서 팔고 그러면서도 아버님 말씀대로 틈틈이 공부를 하면서 침손님을 받았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연륜과 경험이 쌓이니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마흔 살 때쯤 그때는 침 값이 1,500원 2,000원 할 때 화폐 가치가 그런대로 있었죠. 다행히 자나 깨나 공부를 열심히 한 탓인지 환자들이 침을 맞으면 거의가 낳았습니다. 당시 한 달 중 보름은 밤잠을 못 잘 정도로 경기 환자가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참으로 많은 환자들을 구원하였습니다. 환자들이 잘 낳으니 자연스레 소문이 나고 줄을 이었습니다. 열흘 침 값으로 돈을 모으면 식구들 양식 마련해놓고 나머지 여유 돈을 쥐고 공부 하러 다녔습니다. 그 때는 정말 미쳐있었습니다.

중국을 드나들며 공부를 하다

중국에서 침술 공부를 하면서 시혐을 쳤다. 세 사람씩 들어가서 편마비 환자에게 각각 침을 놓는 시험이었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편마비와 반신불수를 구분 못하고 엉뚱하게 좌병우침 운운하며 자침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미 아버지로부터 배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험을 본다고 생각하니 신경이 쓰여 시험관 앞에서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조금 있다가 시험관이 나를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에게는 침을 뽑으라고 합디다. 틀렸으니까 유침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요. 당시 침으로 뇌수술을 하신 유명한 중국의 정의동 선생님이 시험관이셨는데 나보고 침술을 누구에게서 배웠냐고 물으시며 아버지에게 배웠다니까 침술에 대한 열정과 의욕을 칭찬하셨다. 중국에 중의 연구원 정야월 서기관한테 침술을 배워서 국제침구사 자격증을 취득 하였는데 침을 놓으면 잘 낫긴 해도 활법과 병행하면 금상첨화란다. 열심히 배운다고 배우는데도 그래도 모르는 것도 많고 해서 중국 중의학 책을 가져와서 번역해서 책을 많이 만들었다. 중국에는 침구 배우러 두 번가고 기공 때문에 두 번 갔다 오고 많이도 드나들었습니다. 기공에 대한 공부도 한 20년 넘게 했습니다. 활법 시작하고부터 기공을 배웠습니다. 자기 몸의 기 흐름을 알아야 활법도 할 수 있고 기공하는 사람이 경락을 모르면 기공도 못하고 인체해부학을 모르면 곤란합니다. 활법공부는 협회에서 배웠습니다. 서울을 오르내리면서 근 10년을 미쳐서 했습니다. 서울의 박금실 회장님이 우리나라 활법창시자입니다 ‘활법이란 무엇인가’ 책도 내고 활법을 체계적으로 틀을 세우신 분입니다. 그 분도 지금 민중의술살리기를 열정적으로 해 나가고 있습니다.

척추 측만 판별법

건강한 사람은 체형이 바르고 몸매가 유연하다. 그러나 병이 있는 사람은 신체의 유연성이 떨어지고 관절이나 근육이 변형되어 있다. 그리하여 환자의 측만을 판별하는 방법은 여간 어렵지 않다. 측만증이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를 알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 합니다. 선천적인 것은 치료가 어렵습니다. 먼저 거울 앞에 환자를 세워봅니다. 그리고는 환자에게 자신의 체위에 대해서 일러주고 나서 웃옷을 벗기고 엎드리게 합니다. 그리고 다리를 벌려서 자기 어깨 너비만큼 11자 모양으로 어깨와 평형을 이루어 엄지발가락 끝이 견정 혈을 보고 올라오게 합니다. 발끝을 들어 올리면서 두 손을 발끝을 향해서 (이 자세를 취하는 박여사는 기가 올라온다면서 움찔한다) 그대로 자연스럽게 숨을 내쉬면서 엎드립니다. 그러면 이손이 닿는 만큼 뒤에서 척추를 관찰하면 후천적인 사람은 척추가 바르게 나타나고 선천적인 사람은 누워도 비뚤어지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환자에게 골격과 체위에 대해서 머릿속에 뚜렷이 각인을 시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바르지 못한 몸이나 체위에 대해서 의아해 하다가 이내 수긍을 하는데 그로부터 환자는 자기 몸의 체형에 관심을 가지고 올바른 자세를 가지려 노력을 기울입니다. 바로 그러한 생각과 실천이 염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쪽 어깨가 내려갔는지 항상 염두에 두고 올바른 자세를 취하면서 내가 어쩌다가 왜 이렇게 틀어졌을까 생각을 하고 생활 한다면 병은 수월하게 치료가 됩니다.

활법의 요령과 원리

활법은 약물이거나 기구에 의존하지 않고 맨손으로 번잡스러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우리 몸의 부자연스러움과 불편한 상태를 조정, 회복시키는 자연치유 기법입니다.
습성의 잘못이나 무리를 가하여 꼬인 근육은 풀어주고 신경과 혈관을 제자리에 돌려놓습니다. 환자를 돌려 눕게 하고 골격을 바로잡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 이 경추가 틀어져있습니다. 나의 왼발로 올라간 왼쪽어깨를 밀어주고 오른발은 내려간 우측어깨를 잡아주고 목뒤에 놓인 수건을 듭니다. 앞의 흉골을 자세히 보세요. 같아지지요. 목도 이렇게 돌려주고 잘 돌아가는 목부터 당겨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내발로 환자의 어깨를 지지했기 때문에 많은 힘을 쓰지 않더라도 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대퇴로만 자연스럽게 닫고 벌리고 합니다. 끙끙거리며 힘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아주 편하게 경추와 흉추 1~2번 다 빠집니다. 목을 당길 때는 입을 벌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동적으로 숨을 쉬게 됩니다. 나중에 하는 사람들이 더 수월한 것은 내가 호흡조정을 하기 때문이지요. 내 몸에 갈수록 기가 축적이 되게 때문에 갈수록 더 힘이 납니다.

위암이라는 사형선고를 받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힘겹게 살아가면서 끼니를 놓치다보니 위장병이 도졌다. 병원에서 위암이라는 소리를 듣자 친정아버지가 쇼크를 받고 쓰러지셨어요. 부산의 거제리 친정에서 자고 있는데 새벽 4시경 아버지가 들어오셔서 진맥을 하시더니 너는 결코 위암이 아니니 다시 재검사를 하자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루 있다가 재검을 하였는데 이틀 만에 결과가 다시 나왔는데 담당의사가 우리 남편을 붙들고 오진을 했다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나는 항상 아버지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오진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너무나 못 먹고 끼니를 자주 놓치는 까닭에 위가 말라 비틀어져서 위벽이 논바닥 갈라지듯이 갈라져 염증이 심하여 구분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았습니다. 병원에서 위장치료제 암포젤과 약을 주는데 아버지가 못 먹게 하시며 대신 한약을 5첩을 지어 주시면서 이 것 먹고 부지런히 뜸을 뜨라고 하셨습니다. 콩 알만한 뜸을 3년을 하루같이 일회 3번씩 뜨고 결명자를 새벽마다 냉면그릇에 숨도 안 쉬고 마시기를 3년을 하고나니 그 덕인지 저 덕인지 병이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보시다시피 나이 70에 이렇게 건강하잖아요? 그로부터 몸무게가 80kg 까지 나갔을 정도로 건강해졌습니다.

세상의 소금과 같은 사람

세상에 널리 이로운 소금은 어떻게 만들어지며 빛 또한 어떤 역할을 하는가. 유리는 유리로써 자를 수는 없다. 지구상에 현존하는 그 어떤 금속보다 단단한 최고의 돌이자 보석인 금강석이라야 유리를 잘라낸다. 보통사람의 그릇으로 보통사람을 담을 수는 없다. 하늘은 이러한 일꾼들을 만들기 위해 먼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과 시련을 주어서 그 사람이 어떻게 헤쳐 가는지를 지켜본 후에 비로소 사람을 살리는 의자(醫者)로서의 길을 걷게 하신다. 자신의 아픈 상처가 아물고 여물어서 마침내 영롱한 진주가 되는 것처럼 그리하여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어 캄캄한 어둠을 비추고 절망에 빠져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건져내듯이 여기에 그러한 오늘이 있기까지 파란만장한 드라마의 주인공 박경숙 고문님은 지금도 민중의술 살리기 재정을 걱정하시며 안타깝게 생각하신다. 자신의 도움이 미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며 모임에 열성으로 참여하는 일만이라도 실천한다며 황종국 판사님께는 늘 미안하고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 글. 신종룡
출처 :의료자유쟁취비상국민총회 원문보기 글쓴이 : 갈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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