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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식 불교'를 믿는 분들에 참고가 되시길... (임제록 중 | |
글 쓴 이 | 圓修 (kijks2000@yahoo.co.kr) |
날 짜 | 2006년 09월 19일 14시 05분 41초 |
본 문 | 무비스님의 ‘카페 염화실’에서 임제록 강의를 읽고 많은 의문점이 해결 되었습니다. 성법스님처럼, 무비스님도 바른 불교를 위해 많은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성법스님처럼 이판사판을 두루 챙기시지 않아도 되는, 어쩌면 짐이 가벼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분량이 좀 많아 줄이려고 했는데도 설득력이 약해질 것 같은 욕심에서 올리오니 관리자님께서 며칠만 게재하시고 지워도 무방하겠습니다. 아니면 처음부터 삭제해도 상관없겠습니다. ------------------- ○. 평상심이 도다 道流야 諸方說有道可修하며 有法可證하나니 儞說證何法修何道오 儞今用處欠少什麽物이며 修補何處오 後生小阿師不會하야 便卽信這般野狐精魅하야 許他說事하야 繫縛他人言道호대 理行相應하고 護惜三業하야사 始得成佛이라하니 如此說者는 如春細雨로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제방의 선지식들이 말하기를 도를 닦을 것이 있고 법을 깨칠 것이 있다고 하는데, 그대들은 무슨 법을 깨치며 무슨 도를 닦는다고 말하는가? 그대들이 지금 쓰고 있는 것에서 무슨 모자람이 있으며, 어떤 점을 닦고 보완한다는 것인가? 못난 후학들이 잘 모르고 이들 여우와 도깨비들을 믿어서 그들의 말과 행동을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까지 얽어매어 말하기를 ‘이치와 행이 서로 부합하고 삼업(三業)을 잘 보호하고 지켜야만 비로소 성불할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자들은 봄날의 가랑비처럼 많다.” 강의 ; 천번만번 말하지만 제방의 선지식들은 모두들 닦을 것이 있고 증득할 것이 있다고 한다. 요즘 불교를 말하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세상이 이처럼 발달하고 불교도 이제 알 수 있을 만치 알건만 그래도 한결 같이 닦을 것이 있고 증득할 것이 있다고들 한다. 그래서 곳곳에서 닦는 다고들 야단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닦아서 얻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나오지 않는다. 본래로 완전한 것을 다시 닦은들 무엇이 달라질 것이 있겠는가. 부처가 무슨 조각 작품도 아니고 한 점 한 점 그려가는 그림도 아니다. 과거의 수많은 부처님과 조사들을 살펴보라 무엇이 달라진 것이 있는가. 본래 그 사람이다. 처음부터 완전무결한 존재다. 그것은 그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 사람들이 본래로 갖춘 것이고 개개인이 완전무결하게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이 쓰고 있는, 잘 보고 잘 듣고 잘 느끼고 잘 아는 이것 외에 또 무엇이 있는가. 모자라는 것이 무엇인가. 신통묘용이고 무량대복인 것을. 방거사도 말하지 않았던가. 신통묘용이 물을 길어오고 땔 나무를 해오는 일이라고. 이치와 행이 잘 부합하고 삼업을 잘 보호하여야 성불할 수 있다는 주장들이 저 봄날의 가랑비처럼 많다. 이치와 행이 잘 부합하고 삼업을 잘 보호하여 불에 타지 않던가. 물에 빠지지 않던가. 그것을 부처라고 하는가. 천번만번 외쳐도 더 외쳐야할 말이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끊임없이 외치고 있다. 이금용처 흠소십마(儞今用處 欠少什麽). 너무 좋은 말이다. 길어서 어려우면 ‘흠소십마’만 외우라. 古人云, 路逢達道人이어든 第一莫向道하라하니라 所以言, 若人修道道不行이니 萬般邪境競頭生이라 智劍出來無一物하야 明頭未顯暗頭明이로다 所以로 古人云, 平常心是道라하니라 “옛 사람이 이르기를, ‘길에서 도를 아는 사람을 만나거든, 무엇보다 도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만약 누구라도 도를 닦으면 도는 행하여지지 않고 도리어 수만 가지의 삿된 경계들이 다투어 생겨난다. 지혜의 칼을 뽑아들면 아무 것도 없다. 밝은 것이 나타나기 전에 어두운 것이 밝아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또 옛사람이 말하기를, ‘평상의 마음이 바로 도(道)다’라고 한 것이다.” 강의 ; 이 단락에는 아주 중요한 옛 사람의 말을 셋을 인용하고 있다. 먼저 도를 아는 사람을 만나거든 도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 도란 본래 언급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임제스님은 상당 첫 법문에서 “산승이 오늘 어쩔 수 없이 인정에 따라서 겨우 이 자리에 올랐으나 만일 조사들이 면면히 이어온 전통에 입각하여 큰일을 드날려 본다면 곧 바로 입을 열수가 없다. 또 그대들이 발붙일 곳도 없다.”라고 하였다. 입을 열기 전에 이미 틀려버린다. 그러니 부디 세상이 돌아가는 얘기나 할지언정 도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 또 이런 말도 인용하였다. 도를 닦는다면 도는 행해지지 않고 온갖 삿된 경계가 다투어 일어난다. 천 번 만 번 강조 하지만 도는 닦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혜로 비춰보면 부처도 없고 조사도 없고 중생도 범부도 아무 것도 없다. 번뇌무명이 곧 불성이고 허망한 이 육신이 곧 여래 법신이기 때문이다. 달리 어두운 것을 보내고 나서 밝은 것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이 둘이 아니다. 하나다. 한번 시험해보라. 어두운 방에 문을 꼭꼭 닫고 전기 스위치를 올려서 불을 밝혀보라. 어두운 것이 그대로 밝은 것이다. 어두운 것이 어디로 빠져나가지도 않는다. 나갈 틈도 시간도 없다. 그런데 곧 바로 밝아진다. 전혀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니다. 어두운 그대로가 밝은 것이다. 그래서 또 인용하시기를 굳이 도를 말한다면, 평상의 마음이 그대로 도다. 천고의 명언이다. 달리 무엇을 논할 것인가. 무엇을 닦고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여기에서 치구심(馳求心)을 쉬어야 한다. 부처는 불상을 조각하듯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평상의 그 마음 그대로 도다. 즉심시불(卽心是佛). 현재 이 마음 이대로 부처다. 불교는 알고 보면 매우 간단하고 쉽다. 복잡하게 설명하는 것은 이미 불교가 아니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만고의 명언이다. 이 한마디만 알면 불교공부 끝이다. 서툰 글씨라도 하나 써서 걸어두자. ○. 그 마음 그대로 살아있는 할아버지다 大德아 覓什麽物고 現今目前聽法無依道人이 歷歷地分明하야 未曾欠少하니 儞若欲得與祖佛不別인댄 但如是見이요 不用疑誤니라 儞心心不異를 名之活祖니 心若有異하면 則性相別이요 心不異故로 卽性與相不別이니라 “대덕아! 무엇을 찾느냐? 지금 바로 눈앞에 법문을 듣는 그 사람,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은 무의도인(無依道人)은 너무도 분명하고 결코 부족한 것이 없다. 그대들이 만약 할아버지 부처님[祖佛]과 다르지 않기를 바란다면 다만 이와 같이 보면 된다. 의심하여 그르치지 말라. 그대들의 순간순간의 마음이 다르지 않음을 이름하여 살아있는 할아버지[活祖]라 한다. 마음이 만약 다르면 성품과 형상이 다르게 되지만 마음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성품과 형상이 다르지 않다” 강의 ; 완벽한 자신을 두고 더 이상 무엇을 찾아 헤매는가. 지금 눈앞에서 법문하는 것을 듣는, 아무 것에도 의지함이 없는 그 사람은 너무도 분명하다. 이렇게 말을 하고 글을 쓴다. 참으로 명명백백하다. 이것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것은 없다. 조금도 모자라는 것이 없다. 여러분들이 만약 부처나 조사가 되고 싶다면 이 사람을 부처나 조사로 알아라. 언제나 한결 같은 그 마음이 곧 살아있는 할아버지, 즉 조사다. 달라지지 아니하고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이란 마음의 공적한 자리다. 하루 종일 써도 쓴 흔적이 없는 그 자리다. 화도 내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하고,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지만, 그 나온 자리는 언제나 텅 비어있다. 희노애락(喜怒哀樂)과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모두 그 자리다. 성공도 실패도, 영광도 오욕도 모두 그 자리다. 마치 물이 흐르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고, 얼기도 하고 수증기가 되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고 맑기도 하지만, 젖는 습성(濕性)은 변함이 없는 것과 같다. 알고 보면 본래 다르지 않다. 신심명(信心銘)에도 “마음이 만약 달라지지 않으면 만법이 한결같다.”고 하였지만 알고 보면 본래로 다르지 않다. 성품과 형상을 달리보지만 실은 같은 것이다. 체가 곧 용이고 용이 곧 체다. 몸이 몸짓을 하기 때문에 몸과 몸짓은 둘이 아니다. 몸은 체고 몸짓은 작용이다. 편의상 몸과 몸짓을 나누어 말하고, 물과 물결을 나누어 말하고, 체와 용을 나누어 말하고, 성과 상을 나누어 말할 뿐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공부는 심심불이 명지활조(心心不異 名之活祖)다. ○. 구하는 것이 있으면 괴롭다 問, 如何是心心不異處오 師云, 儞擬問早異了也니 性相各分이로다 道流야 莫錯하라 世出世諸法이 皆無自性하며 亦無生性하고 但有空名하야 名字亦空이어늘 儞祇麽認他閑名爲實하니 大錯了也로다 設有皆是依變之境이라 有箇菩提依와 涅槃依와 解脫依와 三身依와 境智依와 菩薩依와 佛依니라 “무엇이 순간순간의 마음이 다르지 않는 경계입니까?” “그대들이 물으려 하는 순간 벌써 달라져 버린 것이니 성품과 형상이 각각으로 나누어졌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착각하지 말아라. 세간이나 출세간의 모든 법은 다 자성이 없으며, 또한 생멸의 성품도 없다. 그저 허망한 이름뿐이며 그 이름을 쓴 글자도 또한 텅 빈 것이다. 그대들은 이처럼 그 부질없는 이름을 진실한 것으로 알고 있으니 매우 잘못 된 것이다. 설사 그러한 것들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의지해서 변화한 경계들이다. 이른바 보리의 의지와 열반의 의지와 해탈의 의지와 세 가지 불신의 의지와 경계와 지혜의 의지와 보살의 의지와 부처의 의지 등이다.” 강의 ; 앞의 단락에서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아니한 것을 살아있는 할아버지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은 것인가? 이렇게 묻고자 할 때 이미 달라져 버렸다. 성품과 형상도 이미 나누어 졌다.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소식이다. 한 생각 일어나면 벌써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이 일어나고 삼라만상이 벌어진 것이다. 잘 살펴야 한다. 착각하기 쉬운 대목이다. 세간이나 출세간의 법이 다 허망하다. 실로 제행이 무상하다. 모든 것이 생기고는 없어지고 없어지고는 다시 생기는 인연에 의한 연기의 작용이다. 연기는 공이다. 공이기 때문에 또한 연기한다. 모든 존재는 이 원리대로 존재한다. 우주만유가 이 원칙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헛된 이름뿐이다. 이름이라는 글자조차 텅 비어 없다. 부질없는 이름을 진실한 것으로 아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것이다. 부처나 중생이나, 성인이나 범부나, 생로병사나 상락아정(常樂我淨)이나, 세간법과 출세간법이 모두 공이요 연기다. 독립된 자성으로서의 실체가 없다. 그래서 이 존재의 원리인 “오온이 모두 공한 줄 알면 일체 문제가 다 해결이다.” 라고 밤낮 외우고 있다. 고통으로 인하여 숨이 끊어지고 끊어졌다가는 다시 이어지고, 이어졌다가는 다시 끊어지고 하는 이와 같은 아픔도 모두가 공이다. 공이기 때문에 행복도 불행도 아니다. 설사 경전에서 말한 이런 저런 것들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들은 다 이 한 생각에 의지하여 변화된 가상의 경계들이다. 보리니 열반이니 해탈이니, 법신 보신 화신이니, 경계니 지혜니, 보살이니 부처니 하는 이름들이 얼마나 훌륭하고 아름답고 성스럽고 위대한가. 그 훌륭하고 성스럽고 위대한 이름들은 모두 이 한 생각에 의지하여 변화한 헛된 가상의 경계요 이름뿐이다. 보리·열반·해탈·법신·보신·화신·경계·지혜·보살·부처 등등의 주옥같은 이름들,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이름들, 이런 것들을 가상이요, 허상이요, 이름뿐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소중하다. 그동안 믿고 의지하고 살아왔는데 실은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아픔이다. 믿고 싶지가 않다. 그동안 공을 들인 것이 너무도 아깝다[前功可惜]. 그렇다고 삼을 짊어지고 금을 버릴 수[擔麻棄金]도 없는 노릇이다. 이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어쩌랴 이 가르침이 진짜 불교며 우리 한국불교의 전통인 것을. 이 가르침이 정통 불교인 것을. 역대 조사들이 이런 가르침에 매혹되어 임제스님을 꿈에도 못 잊는다. 모두가 임제스님의 법을 계승했노라고 자랑들이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나라의 큰스님들은 임제스님의 흉내를 내느라고 남의 상가 집에 가서도 “할”을 하지 않는가. 죽어서도 다시 임제스님의 문중에서 그 가풍을 따르리라고 축원하지 않는가. 儞向依變國土中하야 覓什麽物고 乃至三乘十二分敎는 皆是拭不淨故紙며 佛是幻化身이요 祖是老比丘니 儞還是娘生已否아 儞若求佛하면 卽被佛魔攝이요 儞若求祖하면 卽被祖魔縛이니 儞若有求皆苦라 不如無事로다 “그대들은 의지하여 변한 국토에서 무엇을 찾고 있느냐? 삼승 십이분교마저도 모두가 똥을 닦아낸 휴지다. 부처란 허깨비로 나타난 몸이며, 조사란 늙은 비구인데 그대들은 어머니가 낳아 주신 진짜의 몸이 있지 않는가. 그대들이 만약 부처를 구하면 부처라는 마군(魔群)에게 붙잡히고, 조사를 구하면 조사라는 마군에게 묶이게 된다. 그대들은 만약 구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가 고통이니 아무런 일 없느니만 못하니라.” 강의 ; 임제스님의 말씀은 점입가경을 넘어서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는 곳까지 왔다. 막보자는 막말이다. 정말 마지막 말이다. 어찌 이렇게 까지 표현 할 수 있는가. 그대들은 진짜가 아닌 가짜로 만들어진 세상에서 무엇을 찾으려는가. 보리·열반·해탈·법신·보신·화신·경계·지혜·보살·부처 등등은 말할 것도 없고 부처님의 살림살이라고 할 수 있는 일생의 가르침인 삼승 십이분교는 모두 똥을 닦는 휴지다. 임제록도 예외는 아니다. 부처님은 허깨비고 조사란 늙은 비구다. 그런데 그대들에게는 어머니가 낳아준 진짜가 있지 않은가. 그것을 두고 다시 무엇을 찾는가. 여기서 할 말은 다 했다. 이 몸 당체가 곧 살아있는 부처요 조사다. 아무리 찾아봐야 그 이상은 없다. 여러분들이 허망하다고 말하는 이 육신, 즉 환화공신(幻化空身)이 곧 여래법신이다. 만약 그대들이 그것을 두고 부처를 찾으면 부처라는 마군에게 붙잡히고 조사를 구하면 조사라는 마군에게 묶이게 된다. 구하는 것이 있으면 다 괴롭다. 아무런 일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유구개고 불여무사(有求皆苦 不如無事)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하근기 소인들은 임제록에서 이 한 마디만 건져도 훌륭하다. 평생의 양식은 된다. 공연히 창업한다고 퇴직금 날리고 전세금까지 날리지 말라. 집에서 청소하면서 마음 청소도 하고 빨래하면서 마음 빨래만 해도 크게 버는 일이다. 즐거움이란 구하지 않는 즐거움보다 더한 즐거움은 없다. 본래 더 구할 것이 없다 다 갖추어져 있다. 억만 장자다. 세세생생 써도 다 못쓴다. 더 이상 무엇을 구하는가. ○. 형상 없는 것이 참 형상이다 有一般禿比丘하야 向學人道호대 佛是究竟이니 於三大阿僧祇劫에 修行果滿하야 方始成道라하니 道流야 儞若道佛是究竟인댄 緣什麽하야 八十年後에 向拘尸羅城雙林樹間하야 側臥而死去며 佛今何在오 明知 與我生死不別이니라 儞言, 三十二相八十種好是佛이라하니 轉輪聖王도 應是如來라 明知是幻化로다 “어떤 머리 깎은 비구가 있어서 학인들을 향해 말하기를, ‘부처님은 최고 궁극적인 경지이니 삼대 아승지겁 동안 수행하여 그 결과가 다 채워져서 비로소 도를 이룬 것이다.’라고 한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이 만약 부처를 최고 궁극적인 경지라 한다면 어찌하여 부처님께서 80년 후에 쿠시나가라 성의 사라쌍수 사이에서 옆으로 누워 돌아가셨는가? 그리고 부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우리들의 생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리라. 그대들은 32상과 80종호가 부처님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전륜성왕도 마땅히 여래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환영이고 허깨비임을 분명히 알리라.” 강의 ; 머리 깍은 중들만 부처님을 최고 궁극의 경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불자들은 다 그렇게 생각한다. 스스로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말한다. 오랜 세월 동안 수행을 한 뒤 불과(佛果)가 원만하고 나서 비로소 성도(成道)를 하였다고 여긴다. 이야기가 더해지고 또 더해지고 해서 별의별 방편의 말이 다 생겨났다. 실제로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같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그 사람이 있을 뿐이다. 참으로 혼자만 최고 궁극의 경지에 있다면 왜 우리들과 같이 80세에 돌아가셨는가.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지수화풍 네 가지 요소가 뿔뿔이 다 흩어지지 않았는가. 평소에 잘 생긴 모습을 가지고 부처님이라고 한다면 그런 모습은 다른 사람도 그와 같이 잘 생긴 모습을 한 사람이 있었다. 이런 이치는 이미 금강경에서 부처님 스스로도 밝힌바 있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여러 분들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그 부처님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 그냥 사람일뿐이다. 보고 듣고 하는 사람일뿐이다. 이 세상에 최고고 제일이고 가장 위대한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일뿐이다. 사람이 부처님이다. 어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부처님이다. 사람이 최고 궁극의 경지에 있다. 그래서 필자는 평생 인불사상(人佛思想)을 펼치고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겨야 한다.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면 그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하다.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다.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며 사는 길 외엔 다른 길은 없다. 古人云, 如來擧身相은 爲順世間情이라 恐人生斷見하야 權且立虛名이로다 假言三十二하고 八十也空聲이니 有身非覺體요 無相乃眞形이로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여래가 갖추신 몸의 모습은 세상의 인정을 따른 것이다. 사람들이 아무 것도 없다는 단견을 갖게 될까봐 염려하시어 방편으로 세운 헛된 이름이다. 32상은 거짓 이름이고 80종호도 헛소리다. 몸이란 깨달음의 본체가 아니며, 형상 없음이 진실한 형상이다’라 하였다.” 강의 ; 임제스님은 앞에서는 금강경을 인용하였고, 여기서는 다시 고인(古人)의 말씀을 인용하여 당신의 주장을 보완하고 있다. 부대사(傅大士)가 금강경을 해설하면서 하신 말씀이다. 여래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의 뜻을 따른 것이다. 실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을 세상 사람들은 잠간 있으면 영원히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없으면 영원히 없는 것으로 착각한다. 있고 없는 양변에 잘 떨어지고 잘 집착하는 것이 중생들의 속성이다. 여래가 있고 없음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선과 악에도 잘 집착한다. 자신만의 기준과 틀을 만들어 놓고 일체를 그 기준에 맞춰본다. 그런 편견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기고 순종하는 것을 살핀다. 자신도 어기거나 순종한다. 그래서 평생을 미워하고 애착하여 취하고 버리는 일로 인생을 삼는다. 병이다. 모두가 환자다. 중환자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부처님을 바로 알 수 있겠는가. 몸은 깨달음의 본체가 아니다. 형상이 없는 것이 진실한 형상이다. 모든 형상에서 형상이 없음을 보아야 여래를 본다. 엑스레이 적 안목을 가져라. 세상만사 보기를 마치 홀로그램 보듯이 하라. 홀로그램에 나타난 영상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차를 마시기 위해서 들고 있는 유리잔이 이미 깨어진 것이라고 보며 사용하라. ○. 그대는 무엇이 부족한가? 山僧은 無一法與人이요 祇是治病解縛이니 儞諸方道流는 試不依物出來하라 我要共儞商量이라 十年五歲토록 並無一人하고 皆是依艸附葉竹木精靈과 野狐精魅니 向一切糞塊上亂咬로다 “산승은 남에게 줄 법이 하나도 없다. 다만 병에 따라 치료를 해주고 묶여있는 것을 풀어줄 뿐이다. 그대들 제방의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시험 삼아 사물에 전혀 의존하지 말고 나와 보아라. 나는 그대들과 법에 대해서 문답을 하고 싶구나. 15년이 지나도록 누구 한 사람 없었다. 모두가 풀이나 나무 잎사귀나 대나무나 나무에 붙어사는 귀신들이다. 또 여우나 도깨비 같은 것들이다. 모두 똥 덩어리에 달라붙어 어지럽게 씹어 먹는 것들이다.” 강의 ; 이 법은 본래로 남에게 줄 수 있는 법이 아니다. 만약 줄 수 있는 법이라면 세존은 벌써 라후라에게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야수다라에게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디에도 라후라에게나 야수다라에게 법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왜냐? 줄 수 있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대도 법을 전해 준다느니, 법을 전해 받았다느니 하는 말은 단순한 인정에 불과하다. 그가 깨달은 것이 확실한가를 알아보고 확실하면 인정을 해 주는 일이다. 그와 같은 인정하는 일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오늘날 까지 그 관례를 그대로 쓴다. 불교는 병에 따라 약을 쓰고 속박된 것을 풀어 주는 일이다. 8만 4천 법문이란 중생들의 8만 4천 가지의 병에 따라 약을 처방한 것에 불과하다. 또 병이란 다른 말로 하면 속박이요, 구속이다. 있음과 없음에 구속되고, 생과 사에 구속되고, 성인과 범부에 구속되고, 중생과 부처에 구속되고, 선과 악에 구속되고, 일체 차별과 편견과 양변과 변견과 비교하는데 구속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들로부터의 해탈을 희망한다. 간혹 선문답을 하는데서 들을 수 있는 말로서 ‘부처님의 말씀이나 조사들의 말씀을 떠나서 한 마디 일러보라.’ 또는 ‘말과 행동을 쓰지 않고 한 마디 일러보라.’ 라고 주문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모두가 무엇엔가 의지해서 법을 말한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도 모두가 불조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표현한다. 과거의 선배들이 남겨둔 것을 대단한 보물로 생각하여 모든 삶을 거기에 걸고 있다. 그 기준과 그 사례에 어긋나면 크게 잘 못된 것으로 생각한다. 이점에 대해서 임제스님은 입에 담을 수 없을 만치 혹독하고 심한 표현을 쓴다. “제발 누구 하나 아무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독창적인 법을 들고 나와서 같이 말 좀 해보자. 15년 동안 한 사람도 경계나 언구나 지금까지 표현한 것이 아닌 것으로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제 갈 길을 못가고 구천을 떠돌다가 풀섶이나 나무나 바위 등에 붙어있는 귀신 도깨비 같은 존재들이다. 모두가 남들이 싸 논 똥 덩어리를 씹어 먹고 있는 꼴이다.”라고 하였다. 참으로 전무후무한 극언이다. 누가 감히 그 흉내를 내겠는가. 그 용맹은 천 명의 조자룡이요 만 명의 관운장이다. 누구의 표현처럼 임제는 활화산이고, 천기누설이고, 지뢰밭이고, 산사태고, 태풍이고, 해일이고, 홍수고, 날벼락이고, 대지진이고, 전쟁이고, 폭발이고, 분출하는 용암이다.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일이다. 똥 덩어리란 산처럼 쌓여있는 교학들이 그것이다. 온갖 망상으로 펼쳐 둔 주의 주장들과 사상들이 그것이다. 닦아야 되느니 증득해야 되느니 3아승지겁 동안 6바라밀, 10바라밀을 실천해야만 된다고 하는 등등의 가르침들을 지적해서 하는 말이다. 천하의 선지식이라는 이들이 모두 거기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임제스님이 보기에는 갑갑하고 안타깝고 숨 막히고 몸살이 나서 죽을 맛이다. 활화산과 천기누설과 지뢰밭과 산사태와 태풍과 해일과 홍수와 날벼락과 대지진과 전쟁과 폭발과 분출하는 용암을 한꺼번에 쏟아 부어 다 쓸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임제의 적손(嫡孫) 조계종도들이여, 그리고 세계의 불교를 선도할 임제의 적손 조계종도들이여. 이 힘과 이 용기와 이 기백과 이 용맹으로 명실상부한 선의 종주국의 깃발을 온 세계에 힘차게 드날리자. 瞎漢이여 枉消他十方信施하고 道我是出家兒라하야 作如是見解로다 向儞道하노니 無佛無法하며 無修證하나니 祇與麽傍家에 擬求什麽物고 瞎漢아 頭上安頭라 是儞欠少什麽오 “야 이 눈 먼 놈들아, 저 시방의 신도들이 신심으로 시주한 물건을 마구 쓰면서 ‘나는 출가한 사람이다’라고 하여 이와 같은 견해를 짓고 있구나. 나는 그대들에게 분명히 말하고자 한다. 부처도 없고 법도 없고 닦을 것도 없고 깨칠 것도 없는데, 어쩌면 그렇게들 옆집으로만 다니면서 무슨 물건을 구하는가? 야 이 눈멀고 어리석은 놈들아! 머리 위에 또 머리를 얹는구나. 너희들에게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가?” 강의 ; 출가입산(出家入山)하여 수행 정진한다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온갖 호설난도(胡說亂道)로 펼쳐놓은 주의주장들을 의지해서 그것이 불교인양 하고 사는 사람들의 견해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불교는 그런 것이 아닌데 헛되이 신도들의 시주 밥만 축내고 출가인 이라고 하다니. 불교를 사뭇 틀리게 말하는 사람, 그것마저 하지 않는 사람들은 차한에 부재다. 논할 대상이 아니다. 이미 우리들 자신이 완전무결한데, 그래서 부처도 법도 수행도 깨달음도 없다. 공연히 자기의 집을 버리고 남의 집으로 찾아 헤매고 있다. 자신의 집에 이미 무한한 보물이 있는데 남의 집에 가서 무엇을 구하자는 것인가. 야, 이 눈멀고 어리석은 놈아 그렇게 해서 찾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머리 위에 머리를 하나 더 올려놓는 격[頭上安頭]이다. 긁어서 부스럼 내는 일이다. 멀쩡한 사람을 병신으로 만드는 일이다. 머리 위에 머리를 올려놓고 어쩌자는 것인가? 무엇이 부족하여 그런 짓을 하는가? 지금 이 순간 글을 읽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춥고 더운 것을 느끼고 하지 않는가? 거기서 다시 무엇이 더 필요한가? 진정한 신통묘용이요 무량대복인 것을. 참으로 천고의 명언이다. 촌철살인이다.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는 최후 최고의 가르침이다. 수미산 꼭대기다. http://www.sejon.or.kr 열린마당 이판사판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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